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가진, 그러나 어려운...

궁리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정보의 양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텍스트의 내용도 
심심풀이 땅콩이 아닌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춘 컨첸츠입니다.

하지만 UI가 불펴하다는 점이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메인화면을 보시다시피 많은 양의 정보를 가지다 보니, 최대한 많은 양을 보여주려는 고마움은(?),
어떻게 접근해야하는가에 대한 막연함을 안겨줍니다.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고...
이런 면에서 선택과 집중에서는 실패한 경우라는 느낌을 가져봅니다. 네티즌들의 입장에서 좀 더
쉽게 다가가는 구성을 하였으면... 하지만 

궁리의 바다에 빠지면, 헤어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험프리 공작의 도서실.1675년 데이빗 로건의 Oxonia Illustrata에 수록.(옥스포드 보들리언 도서관 소장)
저와   궁리의 바다   에 빠져 보시지 않으실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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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서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ㅎ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沙丘에 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요즘들어 느끼는 삶의 무게가 시적 화자와 내가 동일인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하지만 그와 내가 다른 점은 난, 잠을 깨고 나면 항상 내 방이지만 그는 사막 한가운데 있다는 점입니다. 휴가철이라 모두들, 바다로 뫼로 떠날 궁리를 합니다. 내 친구들도 나에게 전화를 해서 놀러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난 아직도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는데... 바다로 가야 하는가? 차라리 사막을 횡단하자고 하였으면 얼릉 개나리 봇짐을 싸지 않았을까?라는 합리화를 합니다. 어제 뉴스에서 속초와 밀양이 올들어 가장 더웠다고 합니다. 난 더위와 맞써 싸울려고 하지 않고, 문명의 이기 밑에서 더위를 조소합니다. 어제와 다름이 없는 오늘.. 피곤에 지쳐 깨어나는 내 삶. 밀양을 벗어나 아라비아 사막으로 갈까? 혹은 문명의 이기를 벗어나 알몸으로 더위와 맞써 싸울까? 난 아직도 어쭙잖은 회의에서 빠져나올 궁리만 찾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의 깊이가 다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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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그림그리기 살아있는 교육 이호철 선생의 교실혁명 7
이호철 지음 / 보리 / 199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스런 눈을...."]




"열이 올라가는 모양을 다 같이 보고 똑같은 분위기에서 같은 시간에 함께 그렸는데도 같은 모양의 그림이 하나도 없다(95쪽)"

"생활 그림 그리기가 바로 자기 표현, 삶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실한 삶 자체가 아름다움이르모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릴 때는 멈추어 있는 자연을 (사실은 멈추어 있지 않지만) 그릴 때 보다 아이들의 개성이 휠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132쪽)"

나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 엿볼 때가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도 좋아하는 일이며,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나서 글을 적고 차곡히 모아서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펼쳐 보여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단순히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린다, 산수나 체육 시간보다 좀 더 즐겁다는 의미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지난 아쉬움을 달래며 다가올 시간에는 나도 따라해야지라는욕심을 키웁니다.

나는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 이야기인 듯 한 그림과 글을 보며 미소 짓습니다. 남들은 이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만 아무렇지도 않으며, 마냥 행복에 빠져 듭니다. 침착하게 생기지 않은 듯한 데, 그의 눈에는 침착하게 생겼으며... (44쪽 ~48쪽) 철이 아닌 모든 것은 찝을 수 있어 편리하다(52쪽; 호츠키스)는 솔직한 표현, 어쩌면 내가 잊고 지낸 내 동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바다에 가면 항상 파도가 밀려옵니다. 이 책을 펼칠 때면 항상 내 동심과 꿈이 밀려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덧붙임" 지은이는 생활 그림 그리기는 자기 표현이라 합니다. 또한 우리보다 몇 백 년 앞서 살은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냥 도시로 떠난 자리에는 늙으신 노부부와 세상 물정 모르는 누렁이가 파리를 날리고 있는 곳에는, 여름날 온동네 떠나갈 듯 뛰어노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고층 빌딩과 아스팔트 위,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그 삭막한 곳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모습을 가슴에 닿아, 어떻게 표현할까 걱정입니다. 잠시 도심을 벗어나 자연으로 스케치북과 4B 연필 한 자루 들고 마냥 떠나봄은 어떨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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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박 라 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
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
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
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
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 더욱

위의 작품은 내가 군시절에 처음 접했습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군대 동기인, 
윤경호라는 이가 사 준 신춘문예 책에 씌여져 있었습니다.

항상 십이월이 다가오면 손이 떨리는 증상이 있는데... 아마 이 모습이 학구파로
비추어졋나 봅니다. 하지만 몇 년 째 잠시 손만 떨라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두번째 하지만, 위의 시는 내가 일상으로 
올때에 따라와서는 
내 그리움을 적시는 시입니다. 

나는 시가 좋아서인지 친구가 좋아서인지 모른체,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를 읽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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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진 시노다 볼린 지음, 조주현 옮김 / 또하나의문화 / 1992년 12월
평점 :
절판


절대는 버리고 상대는 취하다.

어떤날. 하늘이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꼭 비가 오지 않아도 좋다. 나뭇잎으로 베개를 삼고, 매미 소리를 자장가로 듣으며 따사로운 햇살을 피해 머나먼 바다를 생각하며 나무 그늘에 누웠을 때도 괜찮다. 어떤 날이든 상관이 없다. 책이 나를 미치게 하지 못하는 날이면...

오늘도 그런 날 중에 하나입니다. 책은 읽고 싶지만 쉬이 나아가지가 않네요. 내가 잠을 안잘려고 두 눈을 부럽뜨도 눈꺼풀은 금방 잠기는데... 내가 책을 읽을려고 억지로 책장을 넘겨도 책이 넘어가지 않고 풀밭에 넘어지듯 넘어지니... 글 읽기를 포기하고 여기에 내 서투른 변명을 올려볼까 합니다. 하지만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무조건, 책 읽기를 포기하고 서투른 글쓰기를 하는 습관이 걸려들지 않을까라는. 혹시라도 내가, 내 자만심에 취해서 서투른 글쓰기로 당신을 유혹하려고 하면 나를 잡아 주세요.

오늘, 어둠 속을 뚫고 내 귀밑머리로 달려오는 것은 비소리입니다. 비가 온다고 창문을 꼭 닫 듯이, 내 서투른 글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의 문을 닫지 마시고 끝까지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 난 그의 책을 읽지 않으면서 당신에게 내 글을 읽어 달라고 하니, 모순입니다. 하지만 내가 내 스스로 결정 했듯이, 당신도 당신 스스로 결정을 하시면 됩니다. 물론 그 어떠한 선택이든 당신이 후회가 없으시다면 옳은 것입니다. 그럼 서투른 글쓰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혹은 서양 사람들 속에 사는!  

지은이는 융의 학설을 상당히 지지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융의 심리학을 받아들이는 정신과 의사로서(9쪽)" 그를 드러낸다. 융의 알다시피 프로이드의 제자이이기도 하지만 리비도와 관련된 관점에서 의해서는 상당한 견해차를 보이면서 자기만의 학설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융의 시각은 여성들이 강력한 내부의 힘들 혹은 원형 archetypes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는 것인데, 이 원형들은 나는 그리스의 여신들로 의인화시켜 보았다. 반면에 여성주의 시각은 외부의 힘들, 즉 사회가 여성에게 제시하는 표준 여성상 stereotypes들에 의해 여성들이 좌우된다고 보는 것인데, 나는 이 외부의 힘들이 어떤 여신 유형은 억압하고 어떤 유형은 밀어준다고 보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여성은 이 두 힘(안으로는 여신 원형에 의해 움직이고 밖으로는 표준 여성상의 요구에 의해 움직이는) 사이에 끼여 있다고 볼 수가 있다.(20쪽)"
융에 좀 더...   알고 싶다면

지은이는 내부와 외부적인 힘들 동시에 말하면서, 서로간의 충돌 내지 조화를 통해 드러나는 모습을 그리스의 여신들로 의인화시켜 몇 가지의 표준안을 내놓습니다. 이러한 지은이의 시도가 지금까지 공고히 구축되어온 세계를 깨고 나온다는 점입니다. 즉 능력 있고 사회에서 무슨 일인가를 지향하는 여성을 프로이드는 '남성성 콤플렉스' masculinity complex를 갖고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폄합니다.(53쪽) 이는 여성들이 남성의 이데올로기나 가부장적인 틀에 의해 구조화됨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더 이상 프로이드가 진단한 것처럼 남성성 콤플렉스라고 생각하여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융이 말한 것첨 태도가 남성적이고 따라서 남성적 요소 animus를 가지고 있다고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54쪽)" 왜냐하면 "아테나나 아르테미스에 더 가까운 여성이 자신의 목표 지향적인 태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표현이든 내가 하면 예술이고 네가 하면 외설이 되어버리는 이중적 구조와 편견이 가득 쌓여져 있는 검은 장막을 지은이가 거두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여성들만의 여성심리를 통해 그들을 이해하는 걸음마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이 책이 지니는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내용이 이 책에 대한 찬가라면... 다음은 악평을 조금 하겠습니다. 지은이도 분명히 알고 있듯이 그의 연구는 최종이 아닌 시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닫힌 사고로써 내 애기가 무조건 옳다는 씩의 표현을 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을 아주 전략적으로(-의도하지 않았든)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안에 있는 여신이 주는 장점과 약점이 있다. 이 약점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우선 나 자신이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후,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내 안에 그런 경향이 있고 나를 통해서 그런 경향을 충족시키려는 여신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그 여신이 지배하는 유형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21쪽)"

지은이는 한 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성이 지는 여신들은 장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맹목적으로 "우선 나 자신이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이런 인정이 없이는 어떠한 유형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런 유형이 어떠한 것인지 모른체, 만가지에 하나일 뿐인 시선을 따라가야 합니다.

패티 허스트 patty Hearst양 유괴 사건을 신문에 읽은 지은이는 지옥의 신이 하데즈에게 유괴당해서 강간당하고 볼모로 잡혀 있던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떠올립니다. 페르세포네의 신화에 포장되어집니다. 하지만 긴가민가하는 우리에게 확실한 논거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실증적 실험과 권위에 의한 후광효과입니다. "학회에서의 반응은 신화를 통한 여성 심리와 해석이 임상학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며, 성격 유형과 정신질환 증세들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라 합니다. "원형은 또한 씨앗에 포함돼 있는 청사진과 가타. 씨앗으로부터의 성장(청사진의 구체화)은 흙과 기후 조건, 영양 상태, 화분의 깊이 등에 다라 달라진다.(38쪽)"고 정의합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사회와 사람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정체성을 획득하는가 대한 진지한 탐구 대신에 구조적 틀에 모든 것을 끼어 넣습니다. 앞선 심리학자들이 남성적 이데올로기로 여성성을 가두었다면 지은이는 몇 개의 시선과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은체 원형이라는 틀에 여성성을 가두어버립니다. 즉 신은 우리가 창조하거나 그려낸 인물이 아닌 우리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서 그리스 로마신들은 변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아울러 그의 전제는 "원형"이라는 의미를 벗어나면 이론적 근거가 없어집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 처녀 여신은, 사냥과 달의 수호신인 아르테미스, 지혜와 공예의 수호신인 아테나, 그리고 신전과 가정의 수호신인 헤스티아다. 이 세 여신들이 대표하는 성격은 여성 심리 중에서 자율적이고 활동적이면서 관계 지향적이지 않는 부분들이다. 이 부분들 중에, 외향적이고 업적 지향적인 원형은 아르테미스와 아테나이고 내부 지향적인 원형이 헤스티아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싶어하고, 이익을 추구하며, 다른 이들과 경쟁하고, 글과 예술의 형식을 이용하여 자신을 표현하며, 정돈된 삶을 살고,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그런 삶을 원하는 원형이 바로 이 세 여신이다.(47쪽)"

내가 읽은 이 작품은 절대적 진리는 아닙니다. 이러한 틀로 사람을 가두게 되면, 그를 볼 수 있는 만가지의 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참고서이지 지난 시절에 우리를 가두고 있던 남성적 이데올로기나 가부장적 폭력에서 여성성의 정체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충분히 둘 수 있습니다. 아울러 더 많은 논의를 통해 더 깊은 이야기를 이끌어냄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시선으로!!

덧붙임: 위의 논의는 지은이의 가치관에 대한 평입니다. 지은이는 위와같은(-제가 본)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글쓰기는 상징적 내지 같다 붙이기라는 비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임상학적 근거가 있으니 쉽게 어설픈 비판만 할 수는 없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읽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어 책 내용을 전부 읽는다면 좀 더 보충하여, 서평을 올리겠습니다. 부족한 점 널리 양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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