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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범죄소설의 변화 과정은 마치 거울처럼 부르조아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적 관계,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그 자체의 변화 과정까지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240쪽)"
이 책을 덮는 순간 지은이가 내린 결론입니다. 나는 지은이의 결론에서 다시 읽기를 시작합니다. "범죄소설의 변화 과정은 마치 거울처럼 부르조아 이데올로기, 부르조아 사회의 사회적 관계,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그 자체의 변화 과정"을 담고 있었다니... 난 그저 처음 접한 소설에서 마냥 탐정이 신기하여, 재미가 있어서 읽은 것 뿐인데, 지은이는 이런 순진한 나에게 이데올로기적 주입을 했단 말인가!!
내가 처음 추리소설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를 지나 시내로 학교를 다니면서 부터입니다. 그 이전까지 시내, 아니 읍에 간다는 의미는 목욕재개하고 꽃보다 이쁜 옷을 입은 다음, 폴짝 뛰어 오르면 하늘에 닿을 듯한 운동화를 신고 30분을 걸어 간 다음에, 다시 버스를 타고 나가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버스를 놓쳐 버리면 걸어온 시간만큼을 다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 날마다 읍에 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읍내에 있는 서점에 들러 처음으로 추리소설을 접했습니다 곰 한마리를 키우는 어느출판사의 책은 철부지인 내게 다 읽고야 말겠다는 목표를 설정해주기도 하였지만 다른 것을 맛 본 다음에는 추리소설의 맛을 읽어버린지가 오랩니다. 그때 읽은 오리엔트 특급살이나 쥐덫, 홈즈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일화-인디언 인형이 나오는 단편과 불 나는 장면이 있는 듯한데, 15년이 지난 지금에는 까마득하게 아련할 뿐입니다. 시간이 나면 다시 탐정이 되어보아야겠습니다.
『즐거운 살인』은, 출판사의 후광 하나만 보고 산 책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출판사에 대한 선입관이 조금씩 굳어지니, 설악의 흔들바위처럼 쉬이 움직이지는 않네요. 어떻든 제 손에 들어왔고, 어제에 다 읽었습니다.
지은이는 통속추리 소설에서 근현대의 스파이 소설까지 읽어내려갑니다.
"통속적인 추리소설은 광범위한 중간 계급청의 형성과 노동자 계급 내 식자층의 형성에 힘 입어 , 협소한 독자층을 가졌던 부르주아 소설이 일찍이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 질서를 공격하기보다는 이를 옹호해야 한다는 부르주아지의 요구가 급증하면서, 고귀한 악당이 사악한 범죄자로 변형된다.(29쪽)"
"추리소설과 범죄를 다루는 비 非-통속문학을 구별해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맥베스』와 『외디푸스 왕』은 말할 것도 없고, 리카르다 휴의 『데루가의 몰락』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같은 작품들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범죄 행위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아니라(누가 했는가?), 인간 행동의 동기와 운명 사이의 비극적 모호함인 것이다. 테리 이글턴이 거듭 강조하는 트로츠키의 공식을 반복하자면, 진정한 문학은 진정한 미술과 마찬가지로, '깨진 유리'에 비친 저자의 주관성을 통해 사회를 반영한다.(55쪽)"
추리소설은 '신'중간 계급의 아편이 되었다. 즉, 참기 힘든 일상의 고여게서 기분을 전환시켜줄 수 있는 심리적 마약. 소설을 읽는 동안에 당신은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눈길을 빼앗긴다(128쪽)
이런 책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196쪽-사회범죄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지은이는 고전적 추리소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반면에 현대의 소설들은 폭력의 대리 만족을 시켜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지은이의 가치관은 추리소설가들의 세계관적 사고와 물질문명에 갇힌 슬픈 초상으로 봅니다.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은 지은이의 또다른 자아(92쪽~98쪽)이며, “성공한 범죄소설 작가들은 의기양양한 다국적 기업과 이 기업의 우두머리 정도는 아닐지라도, 결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구성원”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읽은 추리소설은 현대의 모순들을 파헤친다고 하지만 파편화 되어있으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감추며 외면하게 하는 충실한 도구로 쓰인다고 합니다.
재미나게 읽으셨나요?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나요?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은이와 나는 평행선을 달리는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 지은이는 “범죄의 통속성 밑에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기분을 전환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놓여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욕구가 근본적인 불안을 덮어버린다(26쪽)”고 합니다.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픈… 일상으로 고함을 칠 수가 없기에 추리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는다. 이런 사고를 조금더 확장하여 대중매체가 보여지는 범죄등의 기사를 통해 사회는 안정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지은이는 프로이드에 너무 심취하지 않았나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프로이드는 충동에 따른 공격적 본능을 빌려 쓴 느낌!! 프로이드는 인간 본연에는 공격적 본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공격적 본능이 억제되지 못하거나 발현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불안에 휩쌓인다고 보았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충동을 자연스레 혹은 사회에 악하지 않게 표출해야 합니다. 밤마다 자위(自慰)를 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조절하며, 성범죄를 줄이는 도덕적 행위까지 포함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공격적 본능이 없거나 충동을 에고(ego)가 조절 가능하다면… 범죄소설이나 대중매체의 불안한 기사의 내용이 본능적인 충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닌, 모방범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은 궁지로 몰리게 되면 하나밖에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어느 영화처럼 창문 너머로 여인을 몰래 훔쳐보는 이의 시선에는, 그와 함께 밤을 보낼 궁리만 할 것입니다. 사회의 불안한 뉴스를 보면서 스스로의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아닌, 억제되며 또다른 불안을 불러 일으키거나 모방을 일삼는 것이기에, 추리소설의 대리만족은 옳지 않다는 것이 생각입니다.
"늘 새로운 욕망을 유발시키기 위해 늘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야 말로 자본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금 만드는 메커니즘 중의 하나인 것이다. 또한, 이 문명은 폭력으로 태어나 ‘문명화된 삶’의 주변에 지속적으로 폭력을 확대하는 문명이다. 즉, 식민지인들에 대한 폭력, 가난한 자들에 대한 폭력, 외국인에 대한 폭력, 비순응자에 대한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 그릭 봉기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에 대한 폭력(126쪽)”을 대리 폭력이라는 회기라는 좌절된 형식으로 폭력적인 충동을 승화시킨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추리소설은 그러한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지은이의 세계관이 일률적이지 못하며(지은이는 그렇다고 보지만^^;), 추리소설을 통해 폭력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결론은 성급합니다. 내가 읽은 추리소설은 읽을 풀어가는 재미와 트릭, 반전이지 14살에 충동의 욕구를 대리 발산한다고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지적 유희에 즐거움을 찾았지, 대리 만족은 없었습니다.
“지난날의 고귀한 악당은 다가올 부르주아 혁명을 알려준 쁘띠부르주아적 선구자였다. 오늘날의 고귀한 악당 역시 현재의 부패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는 쁘띠부르주아적 반란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감수성이나 영웅적인 행동으로도 자신들의 계급이 지닌 사회적 지위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이 속한 계급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항하는 사회적인 전망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계급에는 독립적인 미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일정한 이유를 갖추지 못할 수밖에 없는 반란자(238쪽)”라고 말하는 것은 더 두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고를 지니고 글쓰기를 한다는 것 조차 위험합니다. 글이라는 것은 지은이의 주관적 시선으로 파편화 된 삶을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이지만 그곳에 목적의식이 들어가는 옳지 못합니다. 이런 글쓰기는 또다른 교조주의적 글쓰기이며, 책읽는이들에게 금방 외면을 받을 것입니다.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뜻-옛날 추리소설속 주인공들은 어떠한 목적의식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러하지 못하다. 아울러 배부른 지은이들에 의해 주인공들은 더 이상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 하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파편화된 삶만 부분적으로 드러낸다-은 위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은이의 가설- 범죄소설의 변화 과정은 마치 거울처럼 부르조아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적 관계,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그 자체의 변화 과정까지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은 신선하고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깊이 있는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본주의에 대한 낯선 시선은 책을 읽는 내내 한쪽 면만 강조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조금더 어떠한 사람들이 글을 쓰며, 이 글이 누군가에 읽히며 그리고 읽힌 다음에 어떠한 경향을 형성하는가에 대한 추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지은이가 말했듯이 추리소설과 얽히고 섥힌 사회적 관계를 추리하여 총체적으로 글쓰기를 하여야 하지 않을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