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자를 위한 관상학 빛깔있는책들 - 즐거운 생활 114
신기원 / 대원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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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의 얼굴에는 여행이 묻어난다(?)는 의미. 흔히 어른들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어느 정도 판단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삶을 그냥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닌, 삶을 살면서 겪는 회한 등이 통찰력을 심어주지 않았라는 어설픈 생각을 하지만... 전적으로 옳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저는 몇 가지 믿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첫인상입니다. 처음으로 대학이라는 곳에 가서,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떤이는 한 어깨하는 듯하고, 어떤이는 너무 새침해 보이고, 어떤이는... 등등 속으로 나름대로 사람들을 열심히 분석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속으로 나름대로 분류한 지표는 순전히 엉터리로 남아 버렸습니다. 내가 "첫인상이 참 드럽다^^;"라는 느낌을 받은 혹은 "차갑다"는 느낌을 받은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십년지기가 되어 아직도 곁에 있습니다. 이렇게 첫인상에 대한 내 시선이 워낙 나빠서 전 아예 마음을 다잡고, 첫인상을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내가 남을 첫인상으로 평가하지 않으니, 저 또한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나를 처음보고 판단하여, 깊이를 헤아리는 것을 말리지는 않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하고도 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갈때에 상대방이 나를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어떨까라는 점이 있지만... 내가 사장이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죠. 하하~~

 

서론이 길었으니, 어느 정도 짐작을 하셨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관상학!이라. 역시 제가 믿지 않는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손금이며, 관상을 보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가게 되니, 어느 한 부분 이쁘게 보이는 부분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겠죠.

 

조금 쓴 소리를 해 보겠습니다.

 

관상학 역시, 동양적 세계관에 태생을 둔 듯합니다.

 

음양과 오행, 중용!!

 

이 세 가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니고 있다면, 모든 실마리는 풀렸다고 생각이 됩니다. 음양이라 하면 黑白이며, 오행이라 하면 木火土, 그리고 조화를 이루는 中庸.

 

"양은 더운 것이요 밝은 것이며, 음은 찬 것이요 어둡다. 태양은 양이요 달은 음이다. 그래서 낮은 양이요 밤은 음이다.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다. 강한 것은 양이요 유한 것은 음이다. 단단한 것은 양이요 물렁한 것은 음이다.(10쪽)"

 

이는 단분히 성차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좋은 것은 남자요, 나쁜 것은 여자라는... 그리고 노자의 사상이 흐러지가 않으니-물의 유순함이 강함을 이기는 것을 보지못함-강하고 단단한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음양이라는 이분법 구조이다 보니, 극단으로 치닫는 현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오행, 목화토금수. 제가 보는 오행은 태양의 일주기를 상징한다는 점입니다. 아침에 햇살은 생명을 살리는(木) 빛이며, 점심에는 뜨거운 햇살(火)로 내리쬡니다. 해가 기우는 형상은 결실을 나타내며(金), 어둠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또다른 창조주입니다.(水)

 이러한 순환 주기는 봄(東), 여름(南), 가을(西), 겨울(北)이라는 계절과 방위를 따라 갑니다. 그리고 그 중앙(中)은, 근본 흙(土)인 것입니다. 즉 오행의 출발은 해가 뜨서 지는 형상을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지, 어떠한 신비에 휩쌓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남는 문제는 중용입니다. 중용은 자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사람의 성찰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물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형상. 자연과 하나됨을 삶의 가치관으로 삼은 이들에게 중용은 절대선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음양에서 출발하여, 오행의 이론을 가져오고, 마지막으로 중용을 이루는 형상이 가장 복된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관상학에 심취한 이들에게 저의 논리가 아주 어설프 보일지 몰라도, 제가 본 음양오행이론에 대해, 크게 엇나갔다고는 아직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한의학을 조금 공부한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에게 위의 이야기를 말하니 옳다고 합니다.(아마 그도 저와 같은 지식이나 식안밖에 가지지 못하였나 봅니다.) 하짐나 놀라운 것은 이런 음양오행의 이론이 한의학에서는 치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아직 저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입니다.

 

분명한 것은 음양오행이로는 이분법적 시선과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누군가가 상대방과 싸움을 할 때에는 눈싸움부터 한다고 합니다. 상대방과의 눈싸움에서 상대방을 제압하면, 반은 이기고 싸우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옛날의 점쟁이는 "問"을 놓고 어떤 이에게는 門에 口가 있으니 항상 빌어먹는다하고 다른이에게는 넙쭉 절을 하며, 임금님이라 했습니다.(問을 파자하면 君자가 됩니다. 양옆으로 君자가 새겨지니 필시 크게 될 인물이라는 것이죠. 옛날에는 이렇게 파자를 하여 점을 쳣나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점쟁이는 상대방의 얼굴 등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가오는 기품을 보고 판단을 하였다고 합니다.

 

너무 외모에 집착하여, 내모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외모 지상주의는 또다른 폭력이자 억압의 구조라 하면 억측일까요?(-이 부분에 궁금하시면 멜 주세요^^)

 

관상학에 대한 믿음이 없는 선에서 출발을 하였기에, 너무 한쪽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이든 첫인상을 보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기억력은 3초가 지나면 사라지기에... 이름도 몇 번을 듣어야 기억하는 나, 첫인상은 3초가 지나면 다 까먹어 버립니다. 만약에 첫인상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면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몇 번이고 속으로 판단을 내릴 것입니다. 하하~~

 

"疑人勿使 使人勿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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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2009-07-0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관상학의 본질을 모르시는 분인 것 같군요
관상학은 단순히 예쁘고 호감가는 생김새를 좋은상으로 보는 학문이 아닙니다
첫인상과는 더더욱 관계없는 학문이고요.
신기원씨 책을 읽어보셨다면 그정도는 아실텐데요?
어줍잖은 지식과 그럴듯한 말주변으로 식견을 자랑해보자는 마음에 서평을 달아놓으신듯한데,
자신의 얄팍한 수준만 드러내는 꼴입니다.
또 음양사상이 남녀차별적이라니??
음과 양은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쪽도 존재할 수 없는 대등한 관계이지요.
그리고 유가 강을 이기지 못한다? 혹시 태극권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말...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 스마일 인 더 마인드 - 그래픽 디자인의 재치 있는 발상
베릴 매칼론 외 지음, 김의경 외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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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힘드신가요? 씩^___^ 웃으실 일은 없으신가요?
제가 그렇다면 썰렁한 농담하나할까요?

옛날에 뽕나무하고, 대나무하고 참나무가 살았더랬습니다. 이들은 숲에서도 소문난
친구랍니다. 서로 위하기가 하루살이가 학을 걱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살지를 못하기에, 내 죽고 나면 저 학은 어떻게 하노라며... 차마 죽지를 못하였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암튼 어느날, 뽕나무가 뽕하니깐, 대나무가 댓지롱~ 하고 火를 내니, 참나무가 참아라 했답니다. 
하하 썰렁썰렁~~

옛말에도 웃으면 복이 온다(笑門萬福來)라 하니, 웃으세요~~ 



 
 
 
 
 
 
 
 
 
 
 
 
 
 
 
 
 
 
 
블랑카 ☜유명하죠^^ 베스트 모음(3편)입니다.

저도 사람을 웃기는 것에 관심이 많아 유심히 관찰을 해 보았습니다. 요코짱이나 아즈망가 대왕, 블랑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는 익히 알고 있는 습관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요코짱은 일본,
블랑카는 스리랑카에서 왔습니다. 우리문화는 전혀 낯선 곳에서 온 그들에게, 익숙한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즈망가 대왕에서는 초등학생이 월반하여 올라와 전혀 새로운 모습을 봅니다. 예전에 천재 소년
두기가 보여준 삶에 대한 무거운 고민(?)보다는 여고생들과 어울리면서 느끼는 일상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아울러 
여선생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군자가 아닌 같이 웃고 우는 어쩌면 친구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은 극적반전을
지니면서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굳은 사고를 유쾌하게 뭉게버립니다. 하지만 웃음 뒤에 무엇이 찾아 오냐에
따라서 그 내용은 깊이를 더할 것입니다. 요코짱과 블랑카의 애기에서 씁씁한 우리의 일상을, 아즈망가 대왕에서는
기분 좋은 웃음을... 이러한 웃음은 마력이 있어서인지 다시 끌리게 됩니다. 어쩌면 웃음은 전염병성(性)을 지니고 
있기에...

이런 의미에서인지 지은이는 "아주 약간의 위트만 가미해도 작품에 활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17쪽)" 
위트의 어원은 '지성'과 '이해'라고 합니다. 이러한 위트는 분명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염벙을 동반한...

"이 위트는 먹혀든다. 어떤 아이디어가 한 쪽으로 좋은 결과를 맺으면 다른 쪽에서도 좋은 결과를 맺기 마련이다. 위트
있는 홍보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마치 뜬소문이나 놀라운 뉴스처럼 '퍼뜨린다'는 것이다. 멋진 아이디어를
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관객이 작 역할을 바꾸어 내용ㅇ르 전달하는 사람, 즉 재미를 제공해 주거나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이 된다. 여기엔느 두 가지 측면의 만족이 들어 있다. 첫째는 달느 사람의 주의를 끌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되둘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텔레비전의 멋진 장면이나 영화 <카사블랑카>거나 간에, 되돌려 보는 재미,
그것을 알고 있다.(94쪽)"

저 또한 분명 먹혀 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은 옷이나 멋진 음식점, 혹은 웃기는 일을 보았다면 난 내입이 마르고 닳도록
소문을 낼 것입니다. 자연스레 광고를 하지 않아도 입을 통해서 소문을 낳고 자연스레 기억되게 될 것입니다. 



 
 
 
 
 
 

 
 
 
 
 
  
지은이는 위트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지만 다른 하나도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미(美)입니다. 간혹 사람들이
자기를 알리기 위해 너무 많은 치장을 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치장을 하는 것보다
자기를 대표하는 하나를 알리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즉, 
단순함 속에 위트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아울러 이 책의 장점은, 지은이가 보기에 유명한 디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 혼자서 "난 구제불능인가봐"라고 자책하지 말고, 같이 숨쉬는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이 고비를
넘기는가 혹은 그들은 어떻게 생활의 아이디를 얻고 있나를 살짝 엿봄으로써 벤치마킹을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여기서 좋다 좋다라고 끝을 맺는다면, "열린사회의적"이라는 ID를 버려야겠지요^^; 

옮긴이의 말을 잠시 빌려서,
"웃음이란 특정 맥락에서 유발되는 것이기에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이 책에서 소개되는 위트 있는 작품들을 만끽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햇고, 심한 경우 이해마저 되지 않는 작품도 더러 있었다는 것이다.(239쪽)"

나는 혼자 이해가 되지 않으며, 내 머리가 돌머리인가 생각을 했는데... 나만 그런것이 아니구나라고 했습니다. 휴~~

웃음이라는 것이 "특정 맥락에서 유발"되는 것만 안다는 것만으로도 큰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특정 맥락을 
파악하여 상대방에게 접근하면 충분히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 요코짱이나 블랑카의 웃음도 이러한 연유에 기인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갇히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아즈망가 대왕』의 아나키스트적인 느낌도 놓쳤으면 안되니깐요!! 

우리는 지은이의 말을 새겨 듣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래픽에서 위트를 발견해 내고 싶다면, 
'친숙한 것the familiar'과 유희'the play"를 찾아보도록 하라.(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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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1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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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변화 과정은 마치 거울처럼 부르조아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적 관계,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그 자체의 변화 과정까지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240쪽)"

 

이 책을 덮는 순간 지은이가 내린 결론입니다. 나는 지은이의 결론에서 다시 읽기를 시작합니다. "범죄소설의 변화 과정은 마치 거울처럼 부르조아 이데올로기, 부르조아 사회의 사회적 관계,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그 자체의 변화 과정"을 담고 있었다니... 난 그저 처음 접한 소설에서 마냥 탐정이 신기하여, 재미가 있어서 읽은 것 뿐인데, 지은이는 이런 순진한 나에게 이데올로기적 주입을 했단 말인가!!

 

내가 처음 추리소설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를 지나 시내로 학교를 다니면서 부터입니다. 그 이전까지 시내, 아니 읍에 간다는 의미는 목욕재개하고 꽃보다 이쁜 옷을 입은 다음, 폴짝 뛰어 오르면 하늘에 닿을 듯한 운동화를 신고 30분을 걸어 간 다음에, 다시 버스를 타고 나가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버스를 놓쳐 버리면 걸어온 시간만큼을 다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 날마다 읍에 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읍내에 있는 서점에 들러 처음으로 추리소설을 접했습니다 곰 한마리를 키우는 어느출판사의 책은 철부지인 내게 다 읽고야 말겠다는 목표를 설정해주기도 하였지만 다른 것을 맛 본 다음에는 추리소설의 맛을 읽어버린지가 오랩니다. 그때 읽은 오리엔트 특급살이나 쥐덫, 홈즈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일화-인디언 인형이 나오는 단편과 불 나는 장면이 있는 듯한데, 15년이 지난 지금에는 까마득하게 아련할 뿐입니다. 시간이 나면 다시 탐정이 되어보아야겠습니다.

 

『즐거운 살인』은, 출판사의 후광 하나만 보고 산 책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출판사에 대한 선입관이 조금씩 굳어지니, 설악의 흔들바위처럼 쉬이 움직이지는 않네요. 어떻든 제 손에 들어왔고, 어제에 다 읽었습니다.

 

지은이는 통속추리 소설에서 근현대의 스파이 소설까지 읽어내려갑니다.

 

"통속적인 추리소설은 광범위한 중간 계급청의 형성과 노동자 계급 내 식자층의 형성에 힘 입어 , 협소한 독자층을 가졌던 부르주아 소설이 일찍이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 질서를 공격하기보다는 이를 옹호해야 한다는 부르주아지의 요구가 급증하면서, 고귀한 악당이 사악한 범죄자로 변형된다.(29쪽)"

 

"추리소설과 범죄를 다루는 비 非-통속문학을 구별해주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맥베스』와 『외디푸스 왕』은 말할 것도 없고, 리카르다 휴의 『데루가의 몰락』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같은 작품들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범죄 행위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아니라(누가 했는가?), 인간 행동의 동기와 운명 사이의 비극적 모호함인 것이다. 테리 이글턴이 거듭 강조하는 트로츠키의 공식을 반복하자면, 진정한 문학은 진정한 미술과 마찬가지로, '깨진 유리'에 비친 저자의 주관성을 통해 사회를 반영한다.(55쪽)"

 

추리소설은 '신'중간 계급의 아편이 되었다. 즉, 참기 힘든 일상의 고여게서 기분을 전환시켜줄 수 있는 심리적 마약. 소설을 읽는 동안에 당신은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눈길을 빼앗긴다(128쪽)

 

이런 책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196쪽-사회범죄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지은이는 고전적 추리소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반면에 현대의 소설들은 폭력의 대리 만족을 시켜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지은이의 가치관은 추리소설가들의 세계관적 사고와 물질문명에 갇힌 슬픈 초상으로 봅니다.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은 지은이의 또다른 자아(92쪽~98쪽)이며, 성공한 범죄소설 작가들은 의기양양한 다국적 기업과 이 기업의 우두머리 정도는 아닐지라도, 결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구성원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읽은 추리소설은 현대의 모순들을 파헤친다고 하지만 파편화 되어있으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감추며 외면하게 하는 충실한 도구로 쓰인다고 합니다.

 

재미나게 읽으셨나요?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나요?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은이와 나는 평행선을 달리는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 지은이는 범죄의 통속성 밑에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기분을 전환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놓여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욕구가 근본적인 불안을 덮어버린다(26쪽)고 합니다.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픈 일상으로 고함을 칠 수가 없기에 추리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는다. 이런 사고를 조금더 확장하여 대중매체가 보여지는 범죄등의 기사를 통해 사회는 안정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지은이는 프로이드에 너무 심취하지 않았나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프로이드는 충동에 따른 공격적 본능을 빌려 쓴 느낌!! 프로이드는 인간 본연에는 공격적 본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공격적 본능이 억제되지 못하거나 발현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불안에 휩쌓인다고 보았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충동을 자연스레 혹은 사회에 악하지 않게 표출해야 합니다. 밤마다 자위(自慰)를 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조절하며, 성범죄를 줄이는 도덕적 행위까지 포함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공격적 본능이 없거나 충동을 에고(ego)가 조절 가능하다면 범죄소설이나 대중매체의 불안한 기사의 내용이 본능적인 충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닌, 모방범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은 궁지로 몰리게 되면 하나밖에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어느 영화처럼 창문 너머로 여인을 몰래 훔쳐보는 이의 시선에는, 그와 함께 밤을 보낼 궁리만 할 것입니다. 사회의 불안한 뉴스를 보면서 스스로의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아닌, 억제되며 또다른 불안을 불러 일으키거나 모방을 일삼는 것이기에, 추리소설의 대리만족은 옳지 않다는 것이 생각입니다.

 

"늘 새로운 욕망을 유발시키기 위해 늘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야 말로 자본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금 만드는 메커니즘 중의 하나인 것이다. 또한, 이 문명은 폭력으로 태어나 문명화된 삶의 주변에 지속적으로 폭력을 확대하는 문명이다. 즉, 식민지인들에 대한 폭력, 가난한 자들에 대한 폭력, 외국인에 대한 폭력, 비순응자에 대한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 그릭 봉기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에 대한 폭력(126쪽)을 대리 폭력이라는 회기라는 좌절된 형식으로 폭력적인 충동을 승화시킨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추리소설은 그러한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지은이의 세계관이 일률적이지 못하며(지은이는 그렇다고 보지만^^;), 추리소설을 통해 폭력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결론은 성급합니다. 내가 읽은 추리소설은 읽을 풀어가는 재미와 트릭, 반전이지 14살에 충동의 욕구를 대리 발산한다고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지적 유희에 즐거움을 찾았지, 대리 만족은 없었습니다.

 

지난날의 고귀한 악당은 다가올 부르주아 혁명을 알려준 쁘띠부르주아적 선구자였다. 오늘날의 고귀한 악당 역시 현재의 부패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는 쁘띠부르주아적 반란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감수성이나 영웅적인 행동으로도 자신들의 계급이 지닌 사회적 지위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이 속한 계급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항하는 사회적인 전망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계급에는 독립적인 미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일정한 이유를 갖추지 못할 수밖에 없는 반란자(238쪽)라고 말하는 것은 더 두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고를 지니고 글쓰기를 한다는 것 조차 위험합니다. 글이라는 것은 지은이의 주관적 시선으로 파편화 된 삶을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이지만 그곳에 목적의식이 들어가는 옳지 못합니다. 이런 글쓰기는 또다른 교조주의적 글쓰기이며, 책읽는이들에게 금방 외면을 받을 것입니다.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뜻-옛날 추리소설속 주인공들은 어떠한 목적의식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러하지 못하다. 아울러 배부른 지은이들에 의해 주인공들은 더 이상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 하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파편화된 삶만 부분적으로 드러낸다-은 위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은이의 가설- 범죄소설의 변화 과정은 마치 거울처럼 부르조아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적 관계,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그 자체의 변화 과정까지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은 신선하고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깊이 있는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본주의에 대한 낯선 시선은 책을 읽는 내내 한쪽 면만 강조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조금더 어떠한 사람들이 글을 쓰며, 이 글이 누군가에 읽히며 그리고 읽힌 다음에 어떠한 경향을 형성하는가에 대한 추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지은이가 말했듯이 추리소설과 얽히고 섥힌 사회적 관계를 추리하여 총체적으로 글쓰기를 하여야 하지 않을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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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 읽는 방식이 내가 사람을 보는 방식이다.

나는 책을 빠르게 읽지를 못한다.
나는 책을 천천히, 그리고 나름대로 분석적인 틀을 가지고 깊이 있게 읽을려 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질문을 하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려 한다.
나의 이러한 책 읽기가 간혹 일방통행을 흐러지 않을까 고민을 한다.
하지만 내가 읽은 책이 절반, 혹은 1/3을 넘어섰어도 거짓이거나 진실이 부족하다면 
두번 다시 접하지는 않을 듯하다. 분명한 것은 수많은 책 중에서, 
진실이 없는 책을 끝까지 읽을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투른 판단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지만 내 욕심은 끝이 없기에....



나는 사람을 만나면 첫인상을 보고 절대 판단하지 않는다.
(내 친구들을 보면 기생홀애비, 산적, 한 어깨.. 나? 나야 말할 것도 없지머..ㅋㅋ)
나는 사람을 천천히, 그리고 나름대로 분석적인 틀을 가지고 지켜본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오래 지켜보거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려 한다.
나의 이러한 사람과의 만남이 너무나 아집에 갇힌 것이 아닐까 고민을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나거나 겪은 사람이, 내 눈과 이성이 정확하다고 판단은 
하지 않기에 계속적인 판단을 내린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진실한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호하기에 
내 관계는 폭넓지 못하다. 하지만 내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사람 한명만 있으면 나는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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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봉다리 2004-08-18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전히 내것인 몇몇이 두루두루 공유해야하는 많은 무엇들에 비해
훨씬 의미있는 것이리라 생각했었어요 .
익숙한 곳에서만 약속을 정하고 . . .
다니던 길로만 차를 몰고 . . .
너무나 닮아있는 사람들만 만나고 . . . 
그런데 어느날 익숙한 것들에 대한 무거운 회의가 찾아오더군요.
그런날이 왔을때 저처럼 당황하지 않으시려면 언제나 열어두세요.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몇마디 적어봤슴댜.  ^ ^

 

 



 


 

 


 

 


열린사회의적 2004-08-18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가슴속에 새겨두겠습니다. 저도 친구들에 대한 회의가 찾아오는데... 회의가 찾아오니, 더 움츠려들려고 합니다. 외딴 곳에 가서 혼자 살까나... 열개를 주면 절반을 받고 싶어하는, 내리사랑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사랑은... 지금부터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할까나 합니다.
 

오늘 회사는 잘 다녀 오셧나요? 공장에는 별일 없나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없나요? 늘 
같은 자리에서, 혹은 회사에 머무르는 것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강한 욕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감정에 휩쌓이지는 않나요? 아마 10년은 된 듯합니다. 
아마 5월의 따사로운 해쌀이 내리쬐는 어느날, 공부를 하다 바다가 보고 싶어
무작정 바다로 갔습니다. 강의요? 물론 학교를 갔지만 강의를 듣지 못했죠. 교수님이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저는 방파제에서 게를 잡는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으니..
그때의 추억이 가끔 뭉게구름 피어나듯 할 때면 난 그리움에 물듭니다. 

오늘, 날씨도 따사로워, 일찍 퇴근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 경리아가씨한테 
먼저 퇴근한다고 말을 하니,

우리 경리 아가씨 曰: 어디가 아픈데요?
나, 이유? 그냥 날씨가 좋았아요?
경리, 그래도 이유가 있을꺼 아니에요?
나, 그냥 가고 싶어서..
경리(짜증썩인 목소리), 그냥 가고 싶은게 어디 있어요?
나, ...

한동안 실랑이를 주고 받았습니다. 스물아홉 먹은 총각이 스물 하나 든 아가씨에게
경어체 써 가면서 조퇴를 하고 싶다고 하니. 어디가 아프냐고 묻습니다.

꼭 '어디가 아파"야 조퇴가 되는건가요? 그냥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은 안되나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예닐곱장을 넘긴 『설득의 심리학』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예닐곱장이 아닌, 전부를 읽었다면 전략적 언어를 구사하여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가
있었을텐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혼자 잘난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회라는 곳은 사람과의 부딪힘이라면 그와 얼마나 조화롭게 사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합니다. 지금 몇 달 째 뒹굴고 있는 『설득의 심리학』과 『모략』을 읽어 
보아야 겠습니다.

참, 사랑하는데에도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이유는 없다. 
그냥 니가 좋다라고 말하면, 상대방을 설득시키지 못할까요? 이유없는 사랑은 상대방을
설득시키지 못한다(?)... 아, 사랑이 찾아오면 난 어떻게 해야지?

사랑에 경험이 많으신 분 좀 갈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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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4-08-16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알라딘 서재에 드문(?) 총각이시군요~ 저야 유부녀이니 님과 많이 친하지는 못하겠지만-그래도 친한 서재인들 있는데..^^*- 님의서재를 발견한 기념으로 제 서재에 페이퍼를 써보렵니다~ 소개를 위해 글 일부를 조금 복사해 갑니다~ ^^

열린사회의적 2004-08-1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여름이지만 매미가 울지 않고 제비가 날지 않는 서재. 그곳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기쁨...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것과 비교될 수 있을까요^^; 많이 서투르고 엉성한 서재에 관심을 가져 주셔셔 다시한번 고맙습니다. 님의 서재에 저도 놀러 갔는데... 어린이 도서가 많은 듯^^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