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내게서 도깨비는 곳감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할머니의 품에 안기지 못한 나는 호랑이와 곳감을 듣지 못했고 놀랍고도 신기한 도깨비 방망이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도깨비는 그저 티비에서 잠시 보여지는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습니다. 할머니의 품 속에서 온갖 형상을 통해 무서움과 두려움, 그리고 때로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게끔 기를 세우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않은체, 티비에서 멀어지는 순간, 나이를 하나둘씩 먹을 때부터 그는 내게서 멀어져 갔습니다.


근래에 느끼는 것이 내 머리를 지배하는 어설픈 지식이나 사상이 서양것이라고 경계를 했을뿐인데... 이미 우리 것에 대한 것을 너무 많이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배트맨이나 울트라맨, 스파이더맨 혹은 슈퍼맨은 알지만 도깨비는 지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쉬움이 강박관념을 만들어, 그리고 책이 얇아서 한국의 도깨비를 읽었습니다.


혹 때러 갔다가 혹 달고 왔다는 이야기, 도깨비는 김서방 밖에 모른다는 이야기 혹은 씨름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희석되지 않은체 흔적을 남기고 있어서 읽어가는데는 큰 낯설음은 없습니다.


도깨비에 의하면 모방(模倣)과 인공적(人工的 )인 연기는 죄악이다. 오직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감정만이 위기를 면하고 풍성한 보상을 받는다. 이것이 도깨비의 윤리관(倫理觀)이며, 또한 이것은 그런 도깨비를 낳은 한국인의 지혜이다.(70쪽)


모방과 인공적인 것을 싫어하고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쫓는 도깨비는 순수함의 또다른 초상이 아닐런지...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피하거나 숨길려고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맞서길 바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도깨비가 사라졌다는 것은 하나의 문화, 정신이 사라짐을 의미한다고 말하면 너무 일반화를 시키는 것일까요? 하지만 몇 백 년을 이어온 도깨비가 사라져가고 있는데 아무도 슬프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너무 슬픈 일임에는 틀림이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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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01-04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리의 도깨비가 원래 우리 민족을 닮아서 천성이 착하고 솔직하고 즐길 줄 아는 밝고 명랑한 품성...인거 맞지요? ^^;; (언젠가 일본도깨비 이미지가 우리나라 도깨비 이미지를 깨버렸고 미디어매체에서 왜곡시켜버렸단 얘길 들은 것 같습니다)

열린사회의적 2005-01-0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鬼'를 일본에서는 '오니'라고 읽고 잇다. '오니'는 머리에 뿔이 돋고 얼굴은 험상스럽고, 송곳니가 밖으로 길게 나와 있고, 가시 돋친 쇠몽둥이를 들고, 강력하여 잔인스런 행동을 거침엇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54쪽)

저도 어디에선가 들었습니다. 티비 등에 보여지는 도깨비는 일본의 '오니'라고. 우리나라도깨비는 본 사람은 많아도 그 형체는 알 수가 없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쥬신제국사』등을 보면 자오지천황(치우천황)에서 유래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자오지 천황에서 나온말이 '우두머리'라는 말도 있죠.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 안개를 뿜으며 머리에 뿔이 다린 사람이 철기로 만든 방망이를 휘두르면 그 누구도 상대할 자가 없어 신격화(?)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믿는 것도 자오지천황의 형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천성이 착하고 솔직하고 즐길줄 아는...^^; 조금은 순진하다는 편이 맞겠죠. 항상 사람들과 씨름을 하자하면서도 한가지 방법밖에 모르니..
 
침묵의 뿌리
조세희 지음 / 열화당 / 1985년 9월
평점 :
품절




[침묵의 뿌리^^*]

조세희...
조세희에 대한 환상은 아마도 철없을 때, 교과서처럼 읽은 『난쏘공』에서 비켜서 있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난장이들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70년대의 공업화가 그들에게 무엇인지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난 조세희라는 이름하나에 커다란 이미지를 부여하고, 그가 하는 말이나 사진은 나와는 다를꺼라는 금(線)을 긋어 놓고 있습니다.?

이른 내게 책을 펼치는 순간, "지난 70년대에 나는 어떤이의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책 한권을 써낸다"다고 말 문을 연 다음에,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을서 그 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라고 무거운 말을 꺼낸다. '우리가 지어온 죄, 나도 죄를 지었단 말인가...? 길거리에 휴지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남의 물건을 이야기 없이 가져오지는 않는데...'

책은 "비동시대적 세계"라는 서구의 어느 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문을 연다. 지구 속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같은 세계에 살지 않는다는, 기술이라는 하나의 잣대를 놓고 볼 때에 너무나 깊은 강이 놓여져 있다고 말합니다. 기술과학은 보라빛 미래를 역설하고 앞으로, 앞으로 지칠 줄 모르는 앞으로만 외치고 있는 사이에 작은 목소리는 힘없이 제자리를 맴돕니다. 놀라운 기술이 가져다 준 현실과 앞날에 대한 약속은 지은이에게 무의미하다고 합니다.(-왜 무의미한 비극적 세계관을 잉태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점은 없습니다. 다만 작은 목소리를 들려 주기만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어느 '비동시대적 세계'에 주저앉아 현대의 우리 통신매체가 묵살하는 소식을 구식 수단을 이용해 띄우기로 했다. 나의 구식 통신에 귀기울여 달라.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오래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16쪽)"

친구와 나,
친구와 비정규직에 대한 이야기를 며 칠 전에 나눈 적이 있다. 결론은 친구와 나는 한 현실을 두 개의 눈을 본다는 것이다. 친구는 현실의 좋은 면을 봐 달라라고 나에게 말하고, 난 친구의 말을 빌리면 가장 아래층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사회가 올바르지 못하다고 논리를 편다. 난 친구의 말에 충분히 동의를 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가장 아래층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기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및 정부의 비정규직 근로자보호법" 참 길기다 하다.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숨기려는 의도가 있음에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어려운 말을 써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거나 말을 줄여서 자칭 '비정규직 보호법'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옛날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데모나 하고 이적 단체의 이미지만 안은 '한총련'에 비하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는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어떤 이는 노총이 데모꺼리로 비정규직을 방패 삼아한다더라, 실체가 없는 무성한 소문이다. 노총을 욕하면서도 비정규직에 대한 무관심은 무관심으로 나타낸다. 자칭 386세대는 가슴에 한 명의 사람만 키운다. 그는 노동자를 위해 절규하며 평화시장에서 죽어갔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본다. 어제 비정규직 죽은 김춘봉씨나 지난 2월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싶다"라고 외친 박일수씨는 없다. 평화시장에서 죽은 이와 어제 죽은 이는 뭐가 다른가 나는 가만히 생각을 해 본다. 한때 화염병을 든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 애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영화나 오락만 좋아해서 큰일이다'고. 한 번의 화염병이 오늘의 시대를 사는 면죄부가 되고, 몇 십년 전에 죽은 망령이 오늘을 지배하고, 어제 죽은 비정규직은 차가운 얼음 위에 섞지 않고 고여 있다. 내가 술 한잔 먹고 이 이야기를 하면, 친구는 말 할 것이다. 너는 너무 나쁜 것만 본다고... 그리고 정부에서는 이렇게 말을 한다.

'지금은 부를 분배할 때가 아니라 축적할 때'라고(63쪽)

난 이 말이 고심하고 고심한 윗사람들의 말인 줄 알았는데.. "80년대에 들어와 취미생활을 하고, 자식을 보러 이따금 미국에 가고, 유럽 여행도 하고, 주말에는 '옛 동지'들과 골프장에 간다는 당시의 실력자' 몇 몇이 70년 대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은이는 농가의 가구 부채가 "평균 부채액은 2백 53만원으로"불었는데 안타까워 하고, "국민 한 사람당 외채가 백만 원을 육박한다는 계산도 그렇지만, 기왕에 끌어다 쓴 그 빚에 대한 한 해 이자만 어떤 독립국가의 40년 부채와 맞먹는 45억달러는 사실이 숨을 더 먹는다(69쪽)"고 말합니다. 그는 오늘의 모습에 보고 무엇을 말할까요? 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월급은 올라가는 공기업, 늘 싸우기만 하는 국회, 동남아시아에 해일의 피해로 죽어가는 사람들 곁으로 골프 치러가는 부유층, 하루의 끼니를 잇기 어려워 고통 받는 서민들...

한 명은 펜을 들고 분노한다. 시대가 올바르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는 죽어간 비정규직의 이름과 그가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만 권의 책을 읽는다 한들, 가슴에 사람을 품지 못하는 나는... 오늘 부터 조그마한 움직임을 가져야겠습니다.

사진,







"아저씨, 우리학교는 참 불쌍해요."

"가 보세요. 정말 불쌍한 학교에요."

"나도 가 봤다."

내가 말했다.

그 말을 어린이들은 어느 광업소 사택이었던
작은 건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흰 페인트 칠을 해 그렇게 크게 깨끗해 보일 수
없었던 본교를 해발 1013미터의 고지에
남겨두고 아이들은 내려왔다.

"네가 직접 학교 이야기를 써 봐라."

그날 나는 말했다.
"나는 사북에 사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쓰기를 바란다."


덧붙임 : 글이 조금은 산만(?)하여 나에게 쉬이 다가 오지 않음이 아쉬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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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 동안,

저의 곁에서 큰 관심에서 작은 관심까지...

보잘 것 없는 저에게 관심을 가져 주신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아마도, 당신이 곁에 있었기에 제가

한 해를 무사히 마무리 하고, 새로운 

한 해를 열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보면서,

바람이 많이 불어서 춥다, 파도가 높다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것은,

가슴에 새로운 희망과 설레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과 설레임은 모두,

당신으로 인해 배웠습니다.

항상 받기를 바라는 내게,
내리사랑을 주신 당신은...

또다른 어머니가 아닌가 합니다.

항상 곁에 있어 주고, 관심을 가져주셔셔 고맙습니다.


내 작은 바람이 하나 있다면,

-난 철없는 어린이 마냥 욕심을 부립니다.

"항상 곁에 있어 주세요"

...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난 당신이 진정 행복해지길 빌었습니다.

지난 날의 아쉬움은 바다가에 놓아두고

새로운 희망과 설레임, 행복을

가슴 하나 가득 채워왔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듬뿍 받으세요~~ 행복하세요..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항상 곁에 있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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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망태구와 위 만화책이 제목은 "내일" 알려드리겠습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어디선가 본 듯한...?
  ...

 기억이 나신다구요?
 티비에서 보았다구요...?
 우리나라에 이 지은이가 그린 작품은 3편이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초기작인 아닌가라는 느낌.
 그림이 조금..ㅋㅋ

『피아노의 숲』에서 보여지는 노련미는 조금 부족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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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의 사법풍자화 - 열화당미술문고 204
구스타프 라드브루흐 / 열화당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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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에 도미에를 아시나요^^*]

1808년에 유리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낸 도미에는, 평생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전사로서 일관했다.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최대의 석판화가이며 풍자화가인 도미에. 대중은 도미에의 석판화를 그 밑에 쓰여진 설명문의 삽화 정도로만 생각하고 웃음짓기만 했을 뿐, 그 그림이 기품있는 형태와 웅장한 구상 그리고 효과적인 명암에 의해 구성된 한 천재의 작품이었다고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책 뒤편)

그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 한명 더 있습니다. 난 그의 몇 몇 작품을 보았지만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의 목소리, 낯설다는 느낌 밖에는 들리지가 않습니다.

달변가이며 제스처가 풍부한 마르세유 사람들 속에서 태어난 끝없는 빈곤 속에서 허득이며, 루브르 박물관을 학습도장으로 쓴 한 불행한 천재 풍자화가!! 이 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다. 그는 마르세유의 사람들이 지닌 원형을 무의식에 품고 있으며, 빈곤이라는 비극적 세계관을 잉태합니다. 그리고 끝임없는 지식에 대한 갈망은 루브르 박물관을 학습도장으로 익혀 아(我)와 비아(非我)의 끝임없는 투쟁을 하면서 자아를 성숙시켜 나갑니다. 이렇게 끈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한 그는 평생에 사천여점이라는 그림을 그려내는 왕성한 작가이면서 빈곤한 자에 선 혁명 혹은 급진주의자이며 우리의 이웃에 대한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은 실로 대단할 뿐입니다.

그가 평생 동안 그린 사천여 점의 석판화는 그 자체가 그의 예술정신의 완벽한 표현이였던 것이다.(26쪽)
그가 풍자화를 창작하면서 이룩한 고상한 구성의 풍부한 변화는 결코 시간에 쫓기는 단순한 환쟁이로서의 임기응변적이고 의도적인 기교가 아니라, 현실 가운데 내면의 저장고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임에 틀림없다.(27쪽)
도미에는 풍자화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가였다. 풍자화가이며서도 회화를 그릴 수 있었다.(39쪽)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지은이의 "오노에 도미에"에 관한 광적인 집착이 보입니다. 몇 몇의 작품을 놓고 비평 내지 감상글은 칭찬일색이며 그가 왜 유명한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접근은 없습니다. 단순히 유명하기에 유명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지은이는 거리두기에서 너무 가까이 가지를 않았나 생각을 해 봅니다.

오노에 도미에가 법조계를 경계했다고 단지 경계한다는 이유만으로 존경의 가치를 받을 수가 있을런지... 미술사, 혹은 풍자화로서 사회에 대한 경계자로서 어느 점에 가치를 두어야 하나라는 여운이 남습니다. 오노에 도미에가 그림으로서 법조계를 경계했다면 지은이는 그의 책으로 오노에 도미에를 경계해야 할 터인데...

내가 읽은 『도미에의 사법풍자화』는 너무 빠져버린 어느 지은이의 짝사랑으로 읽혀집니다. 그의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그림에 대한 자리를 알 수가 없으니 난 목과 팔다리가 없는 토로소를 보는 듯한 착각에 바집니다. 목과 팔다리가 없는 그림을 이해하기에는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고 지은이의 애착이 너무 지나치다는생각을 가집니다.



덧붙임: 표지가 삭제되었습니다. 조만간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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