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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고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리는 것"]
화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문구로 미리 정하고 이 문구와 발음이 같은 사물을 대하여 그림으로 그리는 방식이었다. 머리말 가운데서...
동양화. 동양화란 무엇인가? 그림은 또한 무엇이며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문득 겨울바람에 찾아온 의문은, 아니... 몇 년 앞에 사 놓은 곰브리치 아저씨의 책 때문이다. 서양의 미술을 이해하려 하면서 동양, 혹은 우리 것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 없다는 점이 부끄러움 이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읽은 '혜원'에 대한 감상도 내가 기대했던 점에 비해서는 턱 없이 모자라, 다시 고르던 중에 이 책을 골랐습니다. 『동양화 읽는 법』이다. 읽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 이 책의 저자는, <읽어주다>라는 말의 뜻을 모르고 있다. 아니, 읽어<주다 >라는 것은 고사하고, <읽다>라는 말의 뜻도 역시 모르고 있다. <읽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읽는다는 행위는 어떠한 대상을 자신의 감각과 의지를 동원하여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읽기'는 흔히 '보기'와 구별된다. 보는 것은 1차적인 행위, 즉 즉물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읽는 것은 자신의 가치판단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글을 보고나서 '재미있다' 또는 '지루하다' 등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글을 '보는' 행위가 된다. 그렇지만 그 글이 왜 재미있었는가, 혹은 왜 지루했는가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 행위는 <읽기>가 된다. 우리가 글 뿐 만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광고, 그림 등등에도 '읽기'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한젬마, 『그림 읽어주는 여자』// 라훌라님의 리뷰 가운데서
즉, 라훌라님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말 이 책은 읽어주는 책입니다.
"동양의 그림은 읽는 그림이었다. /화가도 그 그림에 담겨진 문자적 의미의 전달을 염두에 두고 그렸으며, 감상자도 그 화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로 문자적 의미로 이해해야 했으므로 글자 그대로 독화(讀畵)였다. (33쪽)"
지은이가 선정-여기에서 선정으로 한정하는 이유는, 다양한 동양화를 담지 못하고 지은이의 기준에 의해, 독화되는 그림을 한곳에 모았다는 이미지가 남겨지기 때문입니다-한 그림은 분명 읽기에 충분합니다. 글맛을 이해하거나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느끼게 된다면 그는 현실을 모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에 낯설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이 모란에 대개는 목련(木蓮)꽃과 해당화(海堂花)를 곁들여 그리는데, 이것이 이상한 점이다. 모란은 5월 초순에 피는 꽃이다. 그런데도 4월 초에 피는 목련꽃과 6월에 피는 해당화를 한 화면에 만개한 것으로 그려 놓았다. 꽃피는 시기가 한 달씩이나 차이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일은 실제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옛날 당 태종 때부터 지금까지 그려져 오고 있다.(22쪽)"
전혀 다른 시기의 꽃이 함께 그려지는 이런 모순에 궁금증을 느낀 지은이가 하나하나 살펴보니, 거기에는 어떤 법칙이 존재하였습니다. 그것은 "동양의 화가들이 이렇게 글자의 의미로 마주어 그리는 일은 언어의 문자에 주술적 힘이 있다고 믿는 습성(74쪽)"인 것입니다. 즉 동음이의어를 선택한 다음에, 그로 인해 언어적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표범의 표(杓)가 고할 보(報)와 중국에서는 [Pao⁴]로 발음이 같고, 소나무는 정월, 까치는 기쁨(喜)을 뜻하므로 이것을 한 화면에 그린 그림은 "새해를 맞아 기쁜 소식만 오다"라는 뜻(46쪽)"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모르고 그렸기에, "까치와 호랑이 그림(鵲虎圖)"이 그려졌다고 말합니다. 즉 지은이는 동음이의어의 선택으로, 언어를 생각한 다음에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독음을 살피는 지은이는,
원앙새 -> 자식(금술과는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금술은 비익조(飛翼鳥)) 밤, 대추 -> 많은 자식 모란 -> 부귀(꽃 중의 꽃) 국화 ->은일, 장수(長壽) 바위, 구기자, 나비 ->장수 비파 ->사시지기(四時之氣) 연뿌리만 그리다 ->형제애
이렇게 지은이는, 중국에서의 발음을 유의합니다. 즉 동양화의 기준이 어느 것을 말하는지는 몰라도, 중국에서 발음을 유의하고 거기에 뜻을 더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 가는 내내, 지루할 정도로 지은이는 그림을 읽어 내려갑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혜원을 만날 수가 없고 칠칠이((崔北, 1712년~?)도 없습니다. 잘못 알려진 그림에 대한 바른 성찰은 좋으나 너무 한 부분으로 치우침이 보입니다.
동양화에 나타난 그림을 어떻게 읽을까하는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임: 계속 겹치지는 곰브리치, 한 권이 책이 전해주는 깊이는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문화적 가치이나 소양이라 생각합니다. 오천년 유구한 역사라 하지만 곰브리치 아저씨와 대적할 만한 책이 없다(?)는 점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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