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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입가에 맴도는 아련함.
사람이 받는 감동은 다 제각각이면서도 한결 같을 수가 있다. 즉 언제 어떠한 마음으로 머무른가에 따라서 같은 자리 같은 느낌을 받을 수가 있으면서, 다른 감정에 취할 수가 있다.
이번 가을에, 홀로 스무날을 여행한 적이 있다. 내것, 우리 것에 대한 공부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떠난 여행이니-알게 되면 사랑하나니, 사랑하면 다르게 보인다는 선인의 말과는 다르게 수박 겉?기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스물스물 땅거미처럼 나를 사로 잡았다.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난 여행이 아니기에, 몸가짐은 홀가분하나, 보일 듯 보일 듯 하면서 당췌 보이지 않는 미(美)는 나를 애타게 했다. 가던 길을 몇 번이고 멈춰서서 뒤돌아 보고,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서는 멍하니 두 팔을 벌리고 선체 그냥 서 있곤 했다.
처음에 느낀 알 듯 알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련은, 여행의 짐이 되기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속리산 문장에 올랐던 것처럼 내 몸이 좋으면 무념무상, 물아일체로 호흡한다. 거기에서 나는 돌이 되고, 바위가 되고, 산새가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되고, 저 너머 산등성이 줄기가 된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내 아닌 것이 내 주위에는 없다. 바람은 힘차게 달려와서 내 가슴에 와락 안긴다. 나는 바람에 무등타고 이 산 저 산, 산새처럼 아침을 깨우러 내달린다.
스무여날을 여행하고 돌아오니, 다시 갑갑증이 생겼다. 욕심이 생겼다. 이번에는 내것, 우리 것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
내가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 존경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불국사도, 63빌딩도, 광안대교도 아닌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삼국시대의 장인은 이렇게 가냘프면서도 깊은 고뇌에 빠진, 그러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있는 부처님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 아마 지금 이와 같은 것을 만든다면, ‘동양 최대’, ‘세계 최대’, 혹은 ‘건국이래 최대’라는 수식어로 그 모든 분위기를 잠재우지 않을까? 나는 장인정신을 느끼러 가는 것이 아닌 돈으로 치장된 ‘최대의 건물’을 보며, 그 속에 품겨진 정신은 일체 망각한 체 무게에 눌릴 것이다. 이렇게 우습게 본말이 전도되는 행위가, 이미지의 폭력 앞에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엇을 보아야 하지?
세계에 나가면 볼거리가 많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덩치 앞에 눌릴 수 있는 거물이 많음을 의미한다. 자연과 동화된 물아일체 아니라 자연을 억압하고 짓밟고 하여 ‘내가 왕이다’라는 오만이 낳은 건축물 앞에 감탄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미륵보살의 사유와 미소’에는 큰 화답을 하지 않는 듯 하다. 이미지즘이 낳은 폭력은 생각의 무념무상이다.
어쩌면 내 것을 볼 줄 모르는 눈을 가진 이가 하는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냥 보여지는 것에 대한 감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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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단순한 지식의 메모를 하지말고, 가슴을 열고, 눈을 크게 뜨고, 배흘림의 기둥에 잠시 기대어 서 보는게 더 낳지 않겠냐 혹은 가을 바람에도 살짝 흔들리는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임이... |
여행을 가기에 앞서 ‘왜 산에 오를까’라며 궁금증을 키웠다. 누구의 말처럼 ‘거기 산이 있으니깐?’ 몸소 느끼지 않고 책이나 사진으로 본 풍경을 몸에 담으려 했지. 그곳에서 서서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우리 것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왜 우리 것이 아름다운가에 대한 의문없이 단순히 ‘작아서 볼게 없다. ‘, ‘꽤재재 하다’하는 식으로 선입관부터 씌웠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느낀 우리 것에 대한 동경, 입안에 맴도는데 그 미묘한 맛을 표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책장 속에서 먼지를 털어 내고, 살짝 펼쳐본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으로서 깊고 맑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인체 사실(寫實)의 친숙한 조각 솜씨와 오묘한 해학(해학?)를 이루어 주는데 있다.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는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주는 것이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52쪽)"
내가 부처님을 만난 건 고등학교 시험에서 일 것이다. 너무나 긴 이름, 한 번 만에 외워지지 않는 이름 때문에 몇 번이고 되내이고, 다시 『소설 토정비결』을 펼쳤을 때 그는 부처로서의 전설을 품고 있었다. 나는 이 전설에 매료되어 그에게 빠지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그를 자주 보게 되니, 좀 더 자세히, 앞서서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옷을 입은 부처가 생각에 잡혀 있었다. 나는 그의 손과 입, 눈 그리고 호리호리한 가슴을 훔친다. 오른 손을 가냘프게 얼굴에 살짝 점 찍은 듯한 놀림은 그의 고뇌를 짐작케 하고, 입가에 미소인 듯 잡힌 모양새는 사람에 대한 한 없는 애정의 표현이며, 눈가 모습은 무념무상이다. 그는 부처가 아닌 바람이며, 자연이다. 그렇게 천년을 앉아서 사색에 잠겨 있다. 누군가 어깨를 톡하고 치며, ‘미륵아’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지 않을까? 가냘픈 허리와 손, 그는 가냘픈 몸으로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하게 하는 것일까? 때로는 그의 몸이 안쓰러워 보인다. 나는 그를 보면 볼수록, 그의 고뇌에 함몰되어 가는 듯 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숨이 멎는 듯 했다. 우와~~ 입이 벌어진 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단원의 그림은 익숙함이 먼저 나를 사로잡는다면, 겸재의 그림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시험치기 위해 펼친적 말고는 낯설은 만남이다. 처음처럼 만난 그의 그림에는 깊이를 모를 비밀스러움, 끝이 없는 넓음과 시원스런 물줄기, 아늑한 포근함 등이 베여있다.
처음 느낀 감정은 금강산을 품었다는, 나는 금강산 속 두 사람을 정자 속 사람인 냥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너머너머 K은 봉우리를 따라 저 멀리 바라본다. 봉우리 너머에는 우뚝 산이 쏟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봉우리가 제 잘난 척 하며 우쭐되어도 근엄하게 자리를 틀고 있는 뒷산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는 듯 하다. 봉우리와 산의 형세가 아우와 형의 모양새다. 아우들은 서로가 잘낫는 냥 어깨를 높이지만 형은 이 모두를 감싸고 있다. 다시 그림 속 사람으로 돌아오면 그는 깊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을 가르킨다. 그림 속 선비는 옆 선비에게 말을 건내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나에게 말을 건낸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선비가 가르키는 곳으로 눈이 따라가고 있지 않은가. 그곳에는 깊은 산속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폭포가 되어 나를 ?고 지나간다. 물 따라 쭉 흘러가면 깊은 웅덩이를 만나게 된다. 나는 어지러운 눈을 이 웅덩이에 잠시 담가 씻는다. 잠시 탁족을 즐긴 다음, 선비에게로 다시 돌아선다. 그네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고 엿듣기 위해서이다.
이 그림 속에 선비와 동자가 있고 없고는 그림을 살리느냐 없애느냐 만큼의 의미를 지니리라. 겸재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것이며, 어떻게 나에게 들려 줄 것인가 숱하게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선비와 동자를 담지 않았을까? 선비가 없다면 내 눈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어지럽게 이리저리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겸재의 그림은 정말 말문을 막아 버린다. 나는 몇 번이고 보지만 내 눈은, 마지막에 선비의 손가락에 다시 와 머무르고 있다.
내 좋은 친구여~책이라는 것은 항상 그렇다. 책은 내 긴 삶에 말없는 동행자이다. 그는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 내 이야기를 듣어 주고,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기에 누가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책을 펼친다는 것은 그와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는 나에게, 내가 몰랐던 우리미(美)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떤 부분은 정말 아름답다, 나는 왜 이렇게 보지 못했을까라며 머리를 구박하게 했으며, 어떤 부분은 얼렁뚱땅 너머 능구렁이 담 넘듯 너머가버리는 장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가 관심만 가지면 수많은 아름다움에 취할 수가 있었는데 이를 모르고 지나친 내 자신에게 말을 건내준 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그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눈이 뜨지는 것을 느낄 때 쯤, 살짝 책을 덮는다. 그의 이야기는 내게 우리 것에 대한 놀라만한 아름다움을 전해준 것 만으로 족하다. 이제 부터는 그가 말한 아름다움을 내가 찾아가서, 천만번의 입맞춤을 하면 되는 것이다. 조금은 어설프고 조금은 과장되었고, 조금은 자기우월적이라는 이야기를 살짝 흘려 들으며 책을 덮는다.
네가 내게 건내준 것은 우리것은 무조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살짝 눈을 돌리고 몇 번의 눈맞춤을 하면 우리가 몰랐던 아름다움이 도처에 늘려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