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입가에 맴도는 아련함.
사람이 받는 감동은 다 제각각이면서도 한결 같을 수가 있다. 즉 언제 어떠한 마음으로 머무른가에 따라서 같은 자리 같은 느낌을 받을 수가 있으면서, 다른 감정에 취할 수가 있다.

이번 가을에, 홀로 스무날을 여행한 적이 있다. 내것, 우리 것에 대한 공부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떠난 여행이니-알게 되면 사랑하나니, 사랑하면 다르게 보인다는 선인의 말과는 다르게 수박 겉?기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스물스물 땅거미처럼 나를 사로 잡았다.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난 여행이 아니기에, 몸가짐은 홀가분하나, 보일 듯 보일 듯 하면서 당췌 보이지 않는 미(美)는 나를 애타게 했다. 가던 길을 몇 번이고 멈춰서서 뒤돌아 보고,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서는 멍하니 두 팔을 벌리고 선체 그냥 서 있곤 했다.

처음에 느낀 알 듯 알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련은, 여행의 짐이 되기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속리산 문장에 올랐던 것처럼 내 몸이 좋으면 무념무상, 물아일체로 호흡한다. 거기에서 나는 돌이 되고, 바위가 되고, 산새가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되고, 저 너머 산등성이 줄기가 된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다. 내 아닌 것이 내 주위에는 없다. 바람은 힘차게 달려와서 내 가슴에 와락 안긴다. 나는 바람에 무등타고 이 산 저 산, 산새처럼 아침을 깨우러 내달린다.

스무여날을 여행하고 돌아오니, 다시 갑갑증이 생겼다. 욕심이 생겼다. 이번에는 내것, 우리 것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

내가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 존경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불국사도, 63빌딩도, 광안대교도 아닌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삼국시대의 장인은 이렇게 가냘프면서도 깊은 고뇌에 빠진, 그러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있는 부처님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 아마 지금 이와 같은 것을 만든다면, ‘동양 최대’, ‘세계 최대’, 혹은 ‘건국이래 최대’라는 수식어로 그 모든 분위기를 잠재우지 않을까? 나는 장인정신을 느끼러 가는 것이 아닌 돈으로 치장된 ‘최대의 건물’을 보며, 그 속에 품겨진 정신은 일체 망각한 체 무게에 눌릴 것이다. 이렇게 우습게 본말이 전도되는 행위가, 이미지의 폭력 앞에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엇을 보아야 하지?
세계에 나가면 볼거리가 많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덩치 앞에 눌릴 수 있는 거물이 많음을 의미한다. 자연과 동화된 물아일체 아니라 자연을 억압하고 짓밟고 하여 ‘내가 왕이다’라는 오만이 낳은 건축물 앞에 감탄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미륵보살의 사유와 미소’에는 큰 화답을 하지 않는 듯 하다. 이미지즘이 낳은 폭력은 생각의 무념무상이다.

어쩌면 내 것을 볼 줄 모르는 눈을 가진 이가 하는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냥 보여지는 것에 대한 감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아이야, 단순한 지식의 메모를 하지말고,
가슴을 열고, 눈을 크게 뜨고,
배흘림의 기둥에 잠시 기대어 서 보는게 더 낳지 않겠냐
혹은 가을 바람에도 살짝 흔들리는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임이...

여행을 가기에 앞서 ‘왜 산에 오를까’라며 궁금증을 키웠다. 누구의 말처럼 ‘거기 산이 있으니깐?’ 몸소 느끼지 않고 책이나 사진으로 본 풍경을 몸에 담으려 했지. 그곳에서 서서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우리 것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왜 우리 것이 아름다운가에 대한 의문없이 단순히 ‘작아서 볼게 없다. ‘, ‘꽤재재 하다’하는 식으로 선입관부터 씌웠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느낀 우리 것에 대한 동경, 입안에 맴도는데 그 미묘한 맛을 표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책장 속에서 먼지를 털어 내고, 살짝 펼쳐본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으로서 깊고 맑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인체 사실(寫實)의 친숙한 조각 솜씨와 오묘한 해학(해학?)를 이루어 주는데 있다.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는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주는 것이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52쪽)"

내가 부처님을 만난 건 고등학교 시험에서 일 것이다. 너무나 긴 이름, 한 번 만에 외워지지 않는 이름 때문에 몇 번이고 되내이고, 다시 『소설 토정비결』을 펼쳤을 때 그는 부처로서의 전설을 품고 있었다. 나는 이 전설에 매료되어 그에게 빠지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그를 자주 보게 되니, 좀 더 자세히, 앞서서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옷을 입은 부처가 생각에 잡혀 있었다. 나는 그의 손과 입, 눈 그리고 호리호리한 가슴을 훔친다. 오른 손을 가냘프게 얼굴에 살짝 점 찍은 듯한 놀림은 그의 고뇌를 짐작케 하고, 입가에 미소인 듯 잡힌 모양새는 사람에 대한 한 없는 애정의 표현이며, 눈가 모습은 무념무상이다. 그는 부처가 아닌 바람이며, 자연이다. 그렇게 천년을 앉아서 사색에 잠겨 있다. 누군가 어깨를 톡하고 치며, ‘미륵아’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지 않을까? 가냘픈 허리와 손, 그는 가냘픈 몸으로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하게 하는 것일까? 때로는 그의 몸이 안쓰러워 보인다. 나는 그를 보면 볼수록, 그의 고뇌에 함몰되어 가는 듯 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숨이 멎는 듯 했다. 우와~~ 입이 벌어진 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단원의 그림은 익숙함이 먼저 나를 사로잡는다면, 겸재의 그림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시험치기 위해 펼친적 말고는 낯설은 만남이다. 처음처럼 만난 그의 그림에는 깊이를 모를 비밀스러움, 끝이 없는 넓음과 시원스런 물줄기, 아늑한 포근함 등이 베여있다.

처음 느낀 감정은 금강산을 품었다는, 나는 금강산 속 두 사람을 정자 속 사람인 냥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너머너머 œK은 봉우리를 따라 저 멀리 바라본다. 봉우리 너머에는 우뚝 산이 쏟아 있지 않은가. 아무리 봉우리가 제 잘난 척 하며 우쭐되어도 근엄하게 자리를 틀고 있는 뒷산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는 듯 하다. 봉우리와 산의 형세가 아우와 형의 모양새다. 아우들은 서로가 잘낫는 냥 어깨를 높이지만 형은 이 모두를 감싸고 있다. 다시 그림 속 사람으로 돌아오면 그는 깊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을 가르킨다. 그림 속 선비는 옆 선비에게 말을 건내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나에게 말을 건낸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선비가 가르키는 곳으로 눈이 따라가고 있지 않은가. 그곳에는 깊은 산속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폭포가 되어 나를 ?고 지나간다. 물 따라 쭉 흘러가면 깊은 웅덩이를 만나게 된다. 나는 어지러운 눈을 이 웅덩이에 잠시 담가 씻는다. 잠시 탁족을 즐긴 다음, 선비에게로 다시 돌아선다. 그네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고 엿듣기 위해서이다.

이 그림 속에 선비와 동자가 있고 없고는 그림을 살리느냐 없애느냐 만큼의 의미를 지니리라. 겸재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것이며, 어떻게 나에게 들려 줄 것인가 숱하게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선비와 동자를 담지 않았을까? 선비가 없다면 내 눈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어지럽게 이리저리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겸재의 그림은 정말 말문을 막아 버린다. 나는 몇 번이고 보지만 내 눈은, 마지막에 선비의 손가락에 다시 와 머무르고 있다.

내 좋은 친구여~
책이라는 것은 항상 그렇다. 책은 내 긴 삶에 말없는 동행자이다. 그는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 내 이야기를 듣어 주고,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기에 누가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책을 펼친다는 것은 그와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는 나에게, 내가 몰랐던 우리미(美)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떤 부분은 정말 아름답다, 나는 왜 이렇게 보지 못했을까라며 머리를 구박하게 했으며, 어떤 부분은 얼렁뚱땅 너머 능구렁이 담 넘듯 너머가버리는 장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가 관심만 가지면 수많은 아름다움에 취할 수가 있었는데 이를 모르고 지나친 내 자신에게 말을 건내준 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그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눈이 뜨지는 것을 느낄 때 쯤, 살짝 책을 덮는다. 그의 이야기는 내게 우리 것에 대한 놀라만한 아름다움을 전해준 것 만으로 족하다. 이제 부터는 그가 말한 아름다움을 내가 찾아가서, 천만번의 입맞춤을 하면 되는 것이다. 조금은 어설프고 조금은 과장되었고, 조금은 자기우월적이라는 이야기를 살짝 흘려 들으며 책을 덮는다.

네가 내게 건내준 것은 우리것은 무조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살짝 눈을 돌리고 몇 번의 눈맞춤을 하면 우리가 몰랐던 아름다움이 도처에 늘려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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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나무 2006-01-23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오래 된 책인데 책을 누가 빌려가서는 영 감감무소식입니다. 그래서 다시 샀지요. 가끔씩 떠들어 보며 한장 한장 천천히 다시 읽는답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도요.
 
한국사진과 리얼리즘 - 1950-60년대의 사진가들
김한용 외 지음 / 눈빛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책, 순간 쉽게 넘길 수가 있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글자는 읽으면 된다. 그리고 머리속으로 이해를 하면 되지만 내 앞에 마주친 이 한장 한장의 사진은 멈춰서 있다. 아무말 없이. 그들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는 것일까? 나는 곰곰히 살피다 책장을 쉬이 넘기지 못하고 덮어 버린다. 이러기를 몇 번하고 다시 그와 마주 서 있다.

『한국 사진과 리얼리즘』 사진 속에 리얼리즘이라. 사진과 리얼리즘이 융화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어떻게 담아야 사진 속에 리얼리즘을 분출할 수가 있을까? 리얼리즘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이 책 장을 넘기는 것은 분명 부담스럽다.

리얼리즘...

책을 넘기면서 몇 가지 의문이 머리속에 맴돈다. 무엇보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단순히 사진이 사진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굳이 맑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벌의 건축미(美)보다 인간의 공예가 아름다운건 그 속에 본능이 아닌 생각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작가들은 사회를 어떻게, 무엇을 담아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 것일까?

지난시절에 대한 회고, '그땐 그랬지'라는 자조적인 동감은 리얼리즘보다 사실주의, 표현주의에 더 가까울 것이다.

지난 시절에 대한 파편화된 순간 포착.

긴 아쉬움, 짧은 쓸쓸함, 그 너머에는 산이 있다. 기록으로서의 사진. 없는 자에 대한 희망으로서 사진이 아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애기 하는 것이 아닌, 있는 것만 담은 이야기. 사진의 순간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어쩌면 '극' 보다 더 극적이고 강렬하다. 내 몸에서 소름이 돋는 듯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허허 그땐 누구나 다 힘들었어'라며 막걸리를 기울이며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면 분명, 이는 리얼리즘이라 할 수가 없다. 이두호씨의 『덩더꿍』에서 보여진 마지막 장면이나 안회남의 『불』등을 굳이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오세영씨의 』부자의 그림일기』에 담긴 장면과 같은 삶에 대한 충실한 모습을 담아야 한다. 없어서 부족할 뿐이지 죄가 아니라는 것과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 내일에 대한 희망을 담지 못한다면 허울 좋은 리얼리즘일뿐이다. 나는 다시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본다. 하지만 향수는 담고 있어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찾기에는 쉽지가 않다.

책 제목에 너무 얽매이다 보니, 사진을 보는 눈이 시시비비를 가지는 것을 흘러, 과연 옳게 보았는지 의문이다. 사진은 그냥 사진이다. 차라리 리얼리즘이라는 거창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쉽게 사진을 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내 좁은 시선이 리얼리즘에 얽매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추신: 궁핍한 모습을 담았다고 리얼리즘이라 말하지 말자. 리얼리즘은 현실과 싸워서 이기고, 오늘과 내일에 대한 희망과 꿈을 던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단순한 기록은 역사적 기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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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땅에 역사가 없다하랴.

오늘이 하늘이 열린날이라 하여, 일명 노는날이다. 하늘이 열림에 대해, 우리 민족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단지 밖으로 단풍 구경을 가는 것이 좋은 일일까? 어릴 때, 과연 누구를 존경해야할까 고민한 적이 있다. 내가 아는 조선 가운데는 존경할 위인이 없는데 반해 나라밖에는 수없이 많더이다. 나는, 우린 민족에 사람이 없음에...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책을 접하고, 이야기를 듣고나서 조금씩 알았다. 우리 조선 중에도 훌륭하신 분들이 많다고. 우리 조선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나는 점점 조선을 만날 수록 의문이 생겼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남을 불신하고, 제로섬 게임에 빠져들까라고... 그건, 하나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똑바로 보는 공부를 하면서 부터 나는 우리 조선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알게되었다. 김산호씨는 그의 책에서 우리 조선, 동이족을 중국 사람이 이렇게 불렀다고 했다. (맨 아래 참조)
들어가는 말
여기에 몇 권 상고사에 대한 책을 올려봅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대쥬신제국사

1960?년대 라이파이로 이름을 알린 만화가, 김산호씨가 만년에 동이족에 대한 열정으로 그린 서사극화체이다. 지은이는 한단고기와 규원사화를 많이 참고한 듯 하며, 그에 대한 따라가기를 충실히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값진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해 쉽게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서사극화체를 통해서, 국사 교사보다 더 쉽게, 재미나게 우리 상고사를 접근해 갈 수가 있으며, 민족적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높은 책값과 형편없는 국가의 도서관 정책으로 인해 이 책은 10년이 되기 전에 품절이거나 절판이 되어버린 상태. 아울러 높은 가격을 가계의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책값을 깍든지, 도서관에 꽂아두던지
한단고기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누구보다 우리 상고사와 친일파에 대해 높은 열정을 보이신분. 얼마전에 뉴스를 듣고 놀란건, 그의 부친이 친일파였지만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학계는 이병도와 정인보의 갈래로 나누어진 듯 한데. 그렇다면 지은이는 아마 정인보의 계열(단순 이분법적인 도식의 한계는 있음) 그는 무엇보다 우리 상고사에 대한 열정을 토해냈으며, 그로 인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고 전해드립니다.
아직도 나는 이 책이 좋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참,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제목?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패러디를 달고 있지만 내용은 무지 충실한 책, 일제가 얼마나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책, 일제 시대 이전에 우리 집집마다 역사책이 한권씩은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하니, 과연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단결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짐작이 갈 듯. 하지만 일제의 역사책 수거.불살라 버리고 나서 이어진 민족 말살 정책, 한국 전쟁, 잘 살아보세라는 헤게모니는 민족적 정체성을 땅에 묻는 어이없는 일을 만들어 버렸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에는 이병도의 자리가 나오고, 규원사가가 수록되어 있어 좋다. 「규원사화」는 다소 도교적인 냄새가 나지만 건국신화도 담겨 있어 새겨 볼만!!
보물같은 책. 정말 지은이 자료수집이 대단하다
단재 신채호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본 역사학자, 철저한 독립운동가 등으로 알려진 단재 신채호. 아직 상고사는 읽지 못했음. 다음에~~~...
그의 소설, 『꿈하늘』만 읽어보았음. 지리산 삼성궁에 가서, 잘난체하다 혼난기억. 아~~
비류백제와 일본의 기원

방송에서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를 반영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장보고가 활동한 무대가 남쪽 바다 청해진이 아닌 중국의 신라방이라는 곳으로 밝힌다. 그는 백제의 땅이 전라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적 증거를 통해 학게를 뒤집어 놓았지만, 학계에서는 우리편이 아니다라고 나몰라라 함. 그의 전공은 농업. 『비류백제와 일본의 기원』을 통해 백제의 위치와 일본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음.
읽어야 하는데, 생각만 하고 있음....ㅜㅜ
실크로드학

그의 책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를 통해 처음 만났음. 실크로드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아랍어 등을 구사하는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인물. 당대에, 우리 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표해야 함. 그는 실크로드의 선이 중국에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우리나라까지라 금 긋기를 한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처음 배웠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반해, 그는 홀로 힘겨운 싸움을 통해 민족의 우수성과 수천년 전의 비단길을 복원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읽기에는 상당히 힘겨움. 학문서로 취급해야 할 듯. 그렇지만 서재에는 꼭 꽂아두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책.
학문서로써 접근. 내가 읽기에는 벅차다. 휴~~
동이족

설문(設文)에 보면, 대개 땅에 있는 사람들이 자못 순리의 성품이 있다 하나, 오직 동이는 큰 것을 다르니 대인이다. 이(夷)의 풍속이 인자하니, 인자한 자는 오래 살므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이다. 그 곳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니, 크다(大)는 것도 사람의 형상을 본 뜻 것이다.
『대쥬신제국사』 1권 참고
옛날에 못생긴 오리가 살고 있었다. 그는 같은 오리 속에서 구박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너는 나중에 크면 하얀 새(白鳥)가 될꺼야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오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크게 날개짓을 했다.

그 누구도 우리 민족에 대해, '너희 나라는 깊은 역사와 인자함과 도덕성을 겸비한 나라이다.'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에 대한 탐구와 공부, 자부심을 가지지 않고서는 오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일제는 반세기 전에 분명 우리나라에서 물러갔다. 미국은 저 너머에 있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를 떠나, 그들은 아직도 우리의 정신을 흔드는 것이 아닌지 고민을 해 볼 지어다.

일제가 거둔 약 20만권의 서책, 미국이 무차별적으로 뿌리는 이미지와 상품성은 우리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잃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단풍이 곱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렸다고 우리 역사를 한번 돌아보는 계기로 만드는 것도 좋으리라.


추신 : 개천절에 어디 나갈때 없으니, 온갖 생각이 다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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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 감상문"]

오늘 장하준 교수와 진중권 교수 등이 나온 [티비 책을 말하다]를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오랫만에 좋은 프로그램을 보았다는 느낌입니다. 책을 보면서, 아니 티비를 보면서 느낀 점을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 경제를 보기 위해서는 박정희를 넘어서야 한다. 즉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한국 경제의 지향점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장하준 교수와 진중권 교수가 보는 시선은 같은 부분도 있지만 조금 엇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장하준 교수는 박정희의 경제 정책을 이해득실을 절실히 따지는 편이라면, 진중권 교수는 경제적인 파급효과에 대한 연구보다 인권 부분에 집착을 하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주도권은 장하준 교수가 이끌고 가는 듯합니다.( [티비, 책을 말하다]의 선정 도서가 『쾌도난마 한국경제』이기 때문! )

장하준-
한국의 민중이나 좌파, 혹은 우파 모두 국가의 기업 개입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를 등에 업고 김영상 정부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대한 집착 내지 동경은 한국 경제를 파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외국의 헤지펀드는 한국 시장을 막무가내로 휘젖는다. 하지만 머리는 깊이 잠들어 있다.

진중권-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 보다, 그가 행한 인권을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한국 경제이다.
박정희를 옳고 그르다는 흑백논리로 자르는 것이 아닌, 득실을 정확하게 따져서 오늘의 경제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장하준 교수는 (박정희)국가의 강인한 경제 정책이, 어느 정도의 경제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영상 정부 등으로 이어지면서 신자유주의가 밀려들고, 그로인해 소버린이 SK로 인해 벌어들인 1조원이라는 놀라운 금액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즉 장하준 교수의 의문은, 내부적인 기업 부패에 대해서는 목을 높이지만 외국의 기업적 횡포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냥 아무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내부적 경계만 하고, 외부적 경계를 하지 않는가? 이는 세계관 내지 비판적 문제가 없거나 지식인의 직무유기다. 미국 등 외국에서 수 없이 공부한 박사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공부하고 왔다고 할 수가 있을까? 신자유주의 정책에 야합을 하였거나 미국 등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정치꾼은 자기의 이익에 목소리를 높이고, 국민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만 높이고!!

국가지향의 시장개입
신자유주의에서 한국 경제가 제대로 지속 가능한 발전전략은 무엇인가? 이는 국가의 시장개입이다. 하지만 이미 박정희가 보여준 독재 정권에 대해 악몽을 품고 있는 국민들은 쉬이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딜레마다! 국가가 지속 가능한 발전전략을 구축해야 하지만 과거의 악몽과 현실에서의 대안부재와 개인 이기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간혹 보여지는 도덕성의 문제 등은 첨가제다.

우리가, 우리 경제를 살리고 세계에서 당당한 목소리를 내기 위함은 정부와 국민의 비판적 의식이 필요하다. 정부는 강인한 발전전략을 구축하고, 지식인들은 비판적 시선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세분석을 해야할 것이며, 국민들은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공존의 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 세 바퀴가 엇박자를 내는 순간에 한국의 경제가 어디로 가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덧붙임 : 장하준 교수의 새로운 시각은 우리안에 갇힌 사고의 틀을 깨우는 말이 많다. 좀더 열린 사고 지향성을 절실히 느낀다.

참고 도서 : 장하준 『사다리 걷어차기』,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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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 작은학교
김은주 외 지음 / 소나무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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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우리 모습, 그 속에 내일이 있었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을, "너는 아느냐?"라고 물어올 때에 안다고 하지만 이는, 생체적 경험이 아닌 책이나 언론을 통한 간접경험이다. 옛날에 왜 여행을 갈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티비로 보여지는 장면장면은 내가 가 볼 수 없고, 쉬이 볼 수 없는 멋진 광경을 한 가득 담아 주었기에, 나는 새우깡을 옆에 두고 베개를 베고 누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여행을 다녀 보고 느낀 감동이란, 보는 것이 아닌 발땀의 무게와 비례한다는 것을 알았다. 추억도 이런 것이 아닐까?

병설 유치원 1년, 초등학교 6년. 7년을 반십리 되는 길을 걸었다. 비가 오난 눈이 오나 한결같이. 지금 어른이 되어 걷는 길은 20분 정도면 되지만 처음 걷는 길은 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여름날 토요일이면, 강가에 발가벗고 논다고 반나절을 그냥 보내곤 했다. 겨울에는 살갗을 애는 추위에 하우스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곤 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얻어 타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돌아보면 참으로 아련한 시절의 기억들. 그리움이 저 만치에서 나를 돌아보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자동차가 고장이 나거나, 아주 우연찮게 걷게 될 일이 있어 15년 전, 밤길을 걸었던 그 길을 걷는다. 혼불의 작가는 큰어머님집 찾아가는 밤길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걷는 밤길은 밤하늘 별 만큼 수많은 꿈을 메다는 길이다. 논 한 가운데로 난 길을 걷기에, 혼자 걸어도 크게 무섭지는 않다. 어린시절에 들었던, 갈가지(?)라는 정체불명의 동물도 호랑이 새끼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갈가지-어린 시절에 내 밤길을 장악했던. 이 동물은 지나가는 이에게 돌을 던지곤 한다. 그래서 돌아보면 없고, 다시 걷다보면 누군가 돌을 던지는 듯 하여 돌아보면 없다. 이렇게 공포감을 조성한 다음 어느 순간 자기 앞에 나타나 심장을 빼먹고는 저 숲 속으로 사라진다는 동물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아주 우연히 밤길을 걷게 되는 날이 되면, 나는 15년 전의 나로 돌아가 다시 밤에게 이야기를 건내고, 별나라에 매달아둔 내 꿈을 꺼내어 본다.

자연에서 산다는 거.
" 저건 더덕이구요. 이건 당귀에요. 여기 요건 취구요, 저쪽은 몽땅 엉겅퀴 밭이에요. 아, 여기 고사리 있다. 근데, 이건 아직 먹으면 안 돼요. 이 고사리는요, 아직 좀 더 커야 먹을 수 있어요. 저기 개미나리도 있다."

"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이렇게 다양한 약초가 자라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미림이가 줄줄 읊어대는 약초 이름들을 듣고 있노라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할머니 따라 밭일 거들며, 나물하러 다니며 자연히 알게 된 것이겠지.(18쪽)"


자연에 묻혀 산다는 것은, 같이 숨쉬는 것이다. 수많은 풀들은 이름 모를 꽃이 아니고, 동생 손톱을 물들이는 물감이고, 피를 멎게 하는 약초이고, 목걸이와 손목시계를 만들고, 개구리를 잡는 먹이가 되곤 한다. 그리고 풀 속에서 나 보다 더 작은 곤충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낮은 세계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골목길은 날쌔게 나는 재미는 강아지보다 따르게 공중비행을 선보이곤 한다. 수많은 이들이 내 곁에서 숨을 쉬고, 이야기를 엮어가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걷거나 약초를 보고 자랑하는 대신에, 영어를 배우며 커 간다. 아스팔트 위,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는 삭막한 공간에 사는 것이 행복일까? 매미가 너무 많아 소독약으로 죽이기(?)를 바라는 아파트, 과연 그 속에서 살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까? 풀이 자리지 않아도,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고 죽여 버리는 잔인한 정도로 무서운 곳, 어른이 되어서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을까?

"' 재잘재잘' 수족관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저렇게 만져대면 온전하게 올챙이가 될 수 있을까하고 걱정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도시 아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풍성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시 아이들은 그런단다. '올챙이가 사는 곳은?'이란 문제를 내면 '문방구'라고. 올챙이를 준비해 오라고 하면, 학교 앞 문구점 아저씨에게 돈을 주고 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41쪽)"

우리는 더 이상 약초를 외울 필요가 없다. 풀벌레나 곤충은 우리와 더불어 자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몸이 아프면 약국에서 약을 사 듯이, 우리의 문화 대신에 필요한 모든 것은 돈으로 지불하면 된다. 내 공간을 방해하면 물리적 힘으로 추방해버리면 된다. 편리함이 우리 앞에 왔을 때, 우리는 세상이 뒤바뀐 마냥 좋아라 했지만 과연 물질문명의 경쟁논리 속에 던져진 우리, 과연 다시 한번 행복한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시골 운동회
" 해마다 4월이면 신나는 잔치가 벌어진다. 어른들도 농사일을 잠시 접고 아이들과 모처럼 한복을 꺼내 입고서 학교 운동장에 모이는데 이날이 화성리의 잔칫날이다. 마을 대항 윷놀이, 제가차기, 그네뛰기 같은 전래 놀이가 벌어지면 말을 업고 가야 한다. 빨리 가서 저놈을 잡아야 한다며 윷놀이 말을 쓰느라 언성이 높아지고, 훼방을 놓아 제기를 많이 못 찼다고 다시 차겠다며 실랑이를 벌인다. 아이들은 모처럼 입은 한복에 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다가 어느새 흙투성이가 된 줄도 모르고 잔디를 구르며 논다.(57쪽)"

" 운동회의 주인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볍게 몸을 풀 수 있는 게이트볼 경기 '인생은 육십부터', 고리를 가볍게 빠져나와 달리는 어머니 경기 '다이어트 합시다', 아버지들의 축구솜씨를 뽐내는 '2002년 월드컵', 어머니들의 정정당당한 달리기 '치맛바람 났네', 누가 이름 붙였는지 경기 제목도 재밌게 잘 지었다. 카메라를 메고 취재를 간 손님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가족 경기에 손잡고 나가야 하는데, 엄마가 동생과 한조가 되는 바람에 홀로 남은 준영이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119쪽)"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내 유년시절을 보낸 초등학교의 운동회를 보는 듯 하다. 봄.가을 운동회는 동네 잔치마당이다. 아이가 있는 집이나 없는 집이나 모두 학교로 모인다. 김밥이며 조금 더 낳은 반찬, 계란을 삶아서 하나둘씩 학교로 모여서, 동내별 대항전이 벌어진다. 우승기는 하나! 3년 연속 우승을 하지 않으면 연구 보존할 수가 없는 특별 깃발. 우승기가 동내 회관으로 들어오면, 다시 한번 동내는 잔치가 벌어지고 어른들은 자기가 운동장을 뛰었냥 마냥 좋아라 한다. 또한 우리 엄마아빠를 보여주기 위해서 운동회 준비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어쩌면 시골의 운동회는 우리엄마아빠의 친구분들을 한자리에 모아주는 행사가 되는 것이다. 작아서 더 정답고, 작아서 더 즐겁고, 작아서 더 아쉬운 순간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행복인지, 얼마나 지친 농사일에 활력소가 되는지를 아스팔트 위에서 펜대를 굴리기만 하는 사람은 감히 알지 못한다.

물질경쟁 논리.
" 언제 폐교될지 모르니 예산 지원도 잘 안 해 줘서 형광등을 달지 못하고 백열 전구를 밝힐 수밖에 없단다. 비 오는 날, 불을 켜고 수업할라치면 아이들이 그런단다.
" 선생님, 어두와요."
그러면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두 분 선생님.(72쪽)"


나이 많은 선생 1명을 자르면, 2명의 젊은 선생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경제논리. 작은 학교를 지워버리고 큰 학교로 아이들을 모으면 돈이 절약된다는 단순 논리. 돈의 경제논리 앞에서 힘없는 아이들과 농어촌 어른들은 잊혀져 간다. 작은 학교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돈 일,이백원 더 버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한 사람이 지닌 가능성을 무한대로 두었을 때 과연 이러한 정책이 나올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나는 학교가 지향해야 할 것이 [큰 건물]이 아니라 [작은 학교]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많으면 정을 주는 것보다 힘에 의한 통제로 나아갈 것이며, 공동체 의식보다 경쟁 논리로서 아이들을 줄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에서 선생(先生) 밑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내 옆의 친구가 제로섬 게임의 희생자가 아닌 같이 살아가야 할 영원한 친구이며 이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보의 편리성처럼 인간도 통제의 편리함과 경제 논리로 구속시켜버렸다.

나는 간혹 착각을 한다. 우리 사회는 가진자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없는 자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 마을잔치는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학교가 있고 아이들이 모이니 흥이 나고 즐거웠는데 차를 타고 먼 학교에 다니게 된 뒤로 학교에서 뭘 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쉽사리 가보지 못한다고. 숲속 작은학교에도 봄은 왔고 새들도 지저귀겠지만 아이들 웃음 소리는 들리지 않겠다.(60쪽)"

작은 학교가 없어짐으로 인해, 작은 학교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은 점점 파편화 되어간다. 그리고 어른들은 운동회라는 핑계로 인해 피로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막걸리 나누는 정겨운 일들도 잊혀져 버렸다. 아이들은 순수함에서 경쟁 논리 속의 제로섬 게임으로 빠져들며, 행복과 추억을 더 이상 키울 수가 없다.

작은 학교, 그곳에 우리의 내일이 있었네.
다른 곳에 사는 아이들이지만, 한결 같이 말한다. 도시보다는 이곳이 좋다고. 과연 그네들은 무엇이 그토록 좋았을까? 사람은 어쩌면 단기간에 적응을 잘 하는 동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그 아이들도 도시로 나가고 하면, 그곳에서 적응을 하며 살겠지 그리고 지난 시절의 추억은 빛바래져 갈 것이며, 나이를 먹으면 사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고 남에게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헤게모니 속으로 침잠되어 가겠지. 나이를 먹어 뒤돌아보았을 때,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여 간혹 망향을 꿈꾸거나 술로서 회한을 달래겠지.

나는 도시 속에 태어나, 자연이 주는 혜택을 입지 않고 그 아련함을 모르는 사람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이들이 더 불쌍하다. 그들이 사는 곳이 도시일망정 마음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농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너무 급격하게 사라져 가는 것이 우리의 반성마저 불러오기 전에 잊혀질까 걱정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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