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우리 모습, 그 속에 내일이 있었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을, "너는 아느냐?"라고 물어올 때에 안다고 하지만 이는, 생체적 경험이 아닌 책이나 언론을 통한 간접경험이다. 옛날에 왜 여행을 갈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티비로 보여지는 장면장면은 내가 가 볼 수 없고, 쉬이 볼 수 없는 멋진 광경을 한 가득 담아 주었기에, 나는 새우깡을 옆에 두고 베개를 베고 누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여행을 다녀 보고 느낀 감동이란, 보는 것이 아닌 발땀의 무게와 비례한다는 것을 알았다. 추억도 이런 것이 아닐까?
병설 유치원 1년, 초등학교 6년. 7년을 반십리 되는 길을 걸었다. 비가 오난 눈이 오나 한결같이. 지금 어른이 되어 걷는 길은 20분 정도면 되지만 처음 걷는 길은 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여름날 토요일이면, 강가에 발가벗고 논다고 반나절을 그냥 보내곤 했다. 겨울에는 살갗을 애는 추위에 하우스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곤 했다. 지나가는 자동차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얻어 타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돌아보면 참으로 아련한 시절의 기억들. 그리움이 저 만치에서 나를 돌아보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자동차가 고장이 나거나, 아주 우연찮게 걷게 될 일이 있어 15년 전, 밤길을 걸었던 그 길을 걷는다. 혼불의 작가는 큰어머님집 찾아가는 밤길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걷는 밤길은 밤하늘 별 만큼 수많은 꿈을 메다는 길이다. 논 한 가운데로 난 길을 걷기에, 혼자 걸어도 크게 무섭지는 않다. 어린시절에 들었던, 갈가지(?)라는 정체불명의 동물도 호랑이 새끼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갈가지-어린 시절에 내 밤길을 장악했던. 이 동물은 지나가는 이에게 돌을 던지곤 한다. 그래서 돌아보면 없고, 다시 걷다보면 누군가 돌을 던지는 듯 하여 돌아보면 없다. 이렇게 공포감을 조성한 다음 어느 순간 자기 앞에 나타나 심장을 빼먹고는 저 숲 속으로 사라진다는 동물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아주 우연히 밤길을 걷게 되는 날이 되면, 나는 15년 전의 나로 돌아가 다시 밤에게 이야기를 건내고, 별나라에 매달아둔 내 꿈을 꺼내어 본다.
자연에서 산다는 거. " 저건 더덕이구요. 이건 당귀에요. 여기 요건 취구요, 저쪽은 몽땅 엉겅퀴 밭이에요. 아, 여기 고사리 있다. 근데, 이건 아직 먹으면 안 돼요. 이 고사리는요, 아직 좀 더 커야 먹을 수 있어요. 저기 개미나리도 있다."
"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이렇게 다양한 약초가 자라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미림이가 줄줄 읊어대는 약초 이름들을 듣고 있노라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할머니 따라 밭일 거들며, 나물하러 다니며 자연히 알게 된 것이겠지.(18쪽)"
자연에 묻혀 산다는 것은, 같이 숨쉬는 것이다. 수많은 풀들은 이름 모를 꽃이 아니고, 동생 손톱을 물들이는 물감이고, 피를 멎게 하는 약초이고, 목걸이와 손목시계를 만들고, 개구리를 잡는 먹이가 되곤 한다. 그리고 풀 속에서 나 보다 더 작은 곤충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낮은 세계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골목길은 날쌔게 나는 재미는 강아지보다 따르게 공중비행을 선보이곤 한다. 수많은 이들이 내 곁에서 숨을 쉬고, 이야기를 엮어가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걷거나 약초를 보고 자랑하는 대신에, 영어를 배우며 커 간다. 아스팔트 위,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는 삭막한 공간에 사는 것이 행복일까? 매미가 너무 많아 소독약으로 죽이기(?)를 바라는 아파트, 과연 그 속에서 살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까? 풀이 자리지 않아도,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고 죽여 버리는 잔인한 정도로 무서운 곳, 어른이 되어서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을까?
"' 재잘재잘' 수족관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저렇게 만져대면 온전하게 올챙이가 될 수 있을까하고 걱정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도시 아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풍성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시 아이들은 그런단다. '올챙이가 사는 곳은?'이란 문제를 내면 '문방구'라고. 올챙이를 준비해 오라고 하면, 학교 앞 문구점 아저씨에게 돈을 주고 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41쪽)"
우리는 더 이상 약초를 외울 필요가 없다. 풀벌레나 곤충은 우리와 더불어 자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몸이 아프면 약국에서 약을 사 듯이, 우리의 문화 대신에 필요한 모든 것은 돈으로 지불하면 된다. 내 공간을 방해하면 물리적 힘으로 추방해버리면 된다. 편리함이 우리 앞에 왔을 때, 우리는 세상이 뒤바뀐 마냥 좋아라 했지만 과연 물질문명의 경쟁논리 속에 던져진 우리, 과연 다시 한번 행복한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시골 운동회 " 해마다 4월이면 신나는 잔치가 벌어진다. 어른들도 농사일을 잠시 접고 아이들과 모처럼 한복을 꺼내 입고서 학교 운동장에 모이는데 이날이 화성리의 잔칫날이다. 마을 대항 윷놀이, 제가차기, 그네뛰기 같은 전래 놀이가 벌어지면 말을 업고 가야 한다. 빨리 가서 저놈을 잡아야 한다며 윷놀이 말을 쓰느라 언성이 높아지고, 훼방을 놓아 제기를 많이 못 찼다고 다시 차겠다며 실랑이를 벌인다. 아이들은 모처럼 입은 한복에 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다가 어느새 흙투성이가 된 줄도 모르고 잔디를 구르며 논다.(57쪽)"
" 운동회의 주인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볍게 몸을 풀 수 있는 게이트볼 경기 '인생은 육십부터', 고리를 가볍게 빠져나와 달리는 어머니 경기 '다이어트 합시다', 아버지들의 축구솜씨를 뽐내는 '2002년 월드컵', 어머니들의 정정당당한 달리기 '치맛바람 났네', 누가 이름 붙였는지 경기 제목도 재밌게 잘 지었다. 카메라를 메고 취재를 간 손님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가족 경기에 손잡고 나가야 하는데, 엄마가 동생과 한조가 되는 바람에 홀로 남은 준영이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119쪽)"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내 유년시절을 보낸 초등학교의 운동회를 보는 듯 하다. 봄.가을 운동회는 동네 잔치마당이다. 아이가 있는 집이나 없는 집이나 모두 학교로 모인다. 김밥이며 조금 더 낳은 반찬, 계란을 삶아서 하나둘씩 학교로 모여서, 동내별 대항전이 벌어진다. 우승기는 하나! 3년 연속 우승을 하지 않으면 연구 보존할 수가 없는 특별 깃발. 우승기가 동내 회관으로 들어오면, 다시 한번 동내는 잔치가 벌어지고 어른들은 자기가 운동장을 뛰었냥 마냥 좋아라 한다. 또한 우리 엄마아빠를 보여주기 위해서 운동회 준비를 얼마나 많이 했던가? 어쩌면 시골의 운동회는 우리엄마아빠의 친구분들을 한자리에 모아주는 행사가 되는 것이다. 작아서 더 정답고, 작아서 더 즐겁고, 작아서 더 아쉬운 순간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행복인지, 얼마나 지친 농사일에 활력소가 되는지를 아스팔트 위에서 펜대를 굴리기만 하는 사람은 감히 알지 못한다.
물질경쟁 논리. " 언제 폐교될지 모르니 예산 지원도 잘 안 해 줘서 형광등을 달지 못하고 백열 전구를 밝힐 수밖에 없단다. 비 오는 날, 불을 켜고 수업할라치면 아이들이 그런단다. " 선생님, 어두와요." 그러면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두 분 선생님.(72쪽)"
나이 많은 선생 1명을 자르면, 2명의 젊은 선생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경제논리. 작은 학교를 지워버리고 큰 학교로 아이들을 모으면 돈이 절약된다는 단순 논리. 돈의 경제논리 앞에서 힘없는 아이들과 농어촌 어른들은 잊혀져 간다. 작은 학교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돈 일,이백원 더 버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한 사람이 지닌 가능성을 무한대로 두었을 때 과연 이러한 정책이 나올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나는 학교가 지향해야 할 것이 [큰 건물]이 아니라 [작은 학교]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많으면 정을 주는 것보다 힘에 의한 통제로 나아갈 것이며, 공동체 의식보다 경쟁 논리로서 아이들을 줄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에서 선생(先生) 밑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내 옆의 친구가 제로섬 게임의 희생자가 아닌 같이 살아가야 할 영원한 친구이며 이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보의 편리성처럼 인간도 통제의 편리함과 경제 논리로 구속시켜버렸다.
나는 간혹 착각을 한다. 우리 사회는 가진자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없는 자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 마을잔치는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학교가 있고 아이들이 모이니 흥이 나고 즐거웠는데 차를 타고 먼 학교에 다니게 된 뒤로 학교에서 뭘 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쉽사리 가보지 못한다고. 숲속 작은학교에도 봄은 왔고 새들도 지저귀겠지만 아이들 웃음 소리는 들리지 않겠다.(60쪽)"
작은 학교가 없어짐으로 인해, 작은 학교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은 점점 파편화 되어간다. 그리고 어른들은 운동회라는 핑계로 인해 피로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막걸리 나누는 정겨운 일들도 잊혀져 버렸다. 아이들은 순수함에서 경쟁 논리 속의 제로섬 게임으로 빠져들며, 행복과 추억을 더 이상 키울 수가 없다.
작은 학교, 그곳에 우리의 내일이 있었네. 다른 곳에 사는 아이들이지만, 한결 같이 말한다. 도시보다는 이곳이 좋다고. 과연 그네들은 무엇이 그토록 좋았을까? 사람은 어쩌면 단기간에 적응을 잘 하는 동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그 아이들도 도시로 나가고 하면, 그곳에서 적응을 하며 살겠지 그리고 지난 시절의 추억은 빛바래져 갈 것이며, 나이를 먹으면 사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고 남에게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헤게모니 속으로 침잠되어 가겠지. 나이를 먹어 뒤돌아보았을 때,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여 간혹 망향을 꿈꾸거나 술로서 회한을 달래겠지.
나는 도시 속에 태어나, 자연이 주는 혜택을 입지 않고 그 아련함을 모르는 사람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이들이 더 불쌍하다. 그들이 사는 곳이 도시일망정 마음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농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너무 급격하게 사라져 가는 것이 우리의 반성마저 불러오기 전에 잊혀질까 걱정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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