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된 정의에 숟가락 얹기 - 『정의란 무엇인가』멋대로 읽기
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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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를 두 번째 읽는다. 학교를 다니며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불만에 가득 찬 리뷰를 교지에 투고했다.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막 나왔을 때 쯤이었으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새로 번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판형과 종이가 바뀐 정도 이외에 큰 차이는 못느끼겠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초판을 읽은지 오래 되기도 했고. 다시 번역이 되고도 30쇄나 더 찍을 만큼 많이 읽힌 책이고, 그에 대한 정보도 웹 상에 차고 넘쳐나니, 샌델을 둘러싼 여러 가지 정보들보다는 내 감상과 평가로 곧장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우선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리해보아야겠다. 처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때 나는 샌델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가 이 책에 제시한 윤리학적 입장들은 영국-미국 전통의 정치철학에서는 표준적인 분류법이긴 하고, 그 정보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그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개진되는 후반부였다. 내가 당시에 옹호하던 여러 종류의 진보적 가치들을 그는 의문에 부치거나 부정했다. 물론 샌델의 논의에 기반해서도 그런 가치들을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샌델의 표현에 따르면) “국가의 정치적 중립성” 이론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그 가치들을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아주 강한 롤즈식 평등주의와 (당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마르크스주의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물론 (이른바)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고 칸트-롤즈 전통의 자유주의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샌델의 입장,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에도 우리의 도덕적 삶을 관통하는 어떤 통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유념해야 할 부분은, 역시나 모든 인간들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고 그 공동체가 정체성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가 상당 기간 동안 유지해 온 여러 가지 종류의 가치들을 ‘우연’이라는 이유로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 가치들은 인간이 세계에 투영하는 도덕적 세계관과 도덕적 사실의 일부를 실제로 반영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가치들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설령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유지해온 편견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예전의 나는, 논리적 일관성만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윤리학이란, 그리고 윤리학의 이론이란, 이런 가치들 중 일부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재구성하거나 또는 이런 가치들에 순서를 매기는 메타 이론을 만드는 작업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 윤리학이라는 작업 자체가 우리에게 딜레마를 던져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관성은 없지만 일상을 지지하는 가치들의 탄탄한 그물로 나를 지탱할 것인지, 아니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면서 엄밀하고 엄격하게 구성된 이론에 따른 삶을 만들어나갈 것인지. 앞쪽 입장을 지지한다면 샌델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고, 뒤쪽 입장을 지지한다면 아마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의 서열을 매기는 독특한 입장을 개발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샌델이 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사례, 그리고 우리가 신문과 SNS로 접하는 여러 가지 사건에 자기 입장을 적용해보는 연습을 통해서 관점을 정교하게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잘 짜여진 한 편의 각본 같이 구성되어 있다. 현대(19~20세기) 영국-미국 윤리학/정치철학의 발전사를 간략하게 짚어나가며, 이론으로 처리하기 힘든 복잡한 현실의 판례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판례들은 다음 챕터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 구실을 한다. 이전에 등장한 이론과 이번 이론의 차이와 쟁점도 역시 사례를 통해서 잘 단순화된다. 이런 전략은 아마도 그가 뒤에 매킨타이어를 인용하면서 제시할 “서사적 자아”라는 개념을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공부를 더 했더라도 내 입장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만큼, 나는 여전히 샌델에 대해 비판적이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들여 목적론의 의의를 강조하면서 공공선이 민주적 토론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혹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적어도 내 생각엔 양립할 수 없다. 목적론적 세계관 속에서 좋은 것에 관한 사실이 이미 있거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면, 민주적 토론 같은 것은 무의미하거나 형식적 겉치레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선(좋은 것)이 객관적 사실로서 확립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들의 민주적 합의와 무관하게 공공선(공동선)이 무엇인지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공공선을 실현시키거나 그것이 증대되게끔 봉사하면 그만이다. 민주적 토론이란, 최소한 공공선의 내용과 그 객관성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 이용할만한 발견술 정도로 그 의미가 한정된다. 하지만 또 다시 애석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보수적으로 해석하자면, 시민은 이성을 통한 목적의 파악을 통해 공공선(또는 객관적 선)을 알 수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공동체의 과업에 참여한다는 것과 샌델이 말하는 민주적 토론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악의적 왜곡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자유주의 정치사상이 샌델 본인이 아주 공격하기 쉬운 형태로 재단되어 소개된다는 문제점도 있다. 특히 연대책임과 연대의식을 논하는 8장에서 이런 태도가 두드러진다. 자유주의자들은 공동체적 연대책임을 지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의사양반! 물론 샌델의 말처럼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사과가 ‘진짜로’ 할아버지들의 잘못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라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책임을 지는 행위양식이 될 수 없다는 샌델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과는 미안함과 뉘우침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그런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선언으로서의 사과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도 충분히 설명가능하다. 즉, 반인륜적 범죄는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어선 안되는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며, 나는 앞으로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그런 반인륜적 범죄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것은 내 할아버지가 A급 전범이었거나 학살자였거나 단순가담자였거나 저항운동가였다는 사실과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무관하다.


나는 아직도 중립적 국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고, 그 기능을 우리가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한 국가 운영이 사람들을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다.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지금 현실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노예제 옹호 파시스트이다. 매킨타이어와 샌델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이 점을 완화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객관적으로 밝혀진 선(좋은 것)과 현대 다원주의 사회 사이의 긴장은 여전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네가 좋아하는 것이 상호 모순을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며, 그 둘이 정말로 모순이라면 결국 둘 중 하나만이 관철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샌델은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보단 공화주의적인 훈련이 된 시민들 사이의 토론에 맡겨야한다며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현실 속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의 편견이 반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편견에서 양산되는 소수자는 그만큼 불행해질 것이다. 샌델은 이 지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그래서 선을 앞세우는 태도는 민주적 태도와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이야기하듯, 바로 선이 무엇인지 합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런 현실 때문에 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목적은 선택의 권리를 통해 알아서 결정하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협상을 통한 요구의 관철이라는 측면에서는, 특정한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행위가 법적으로는 수행가능하다는 사실이 패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임신중절에 관한 논증에서 볼 수 있듯,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현실의 여성들을 위해 중절을 허용해서 아이를 다 죽여버리자!!!”가 아니라 “숙고 끝에 내리는 결정에 대해 국가가 도덕적 가치를 들먹이며 그 길을 원천봉쇄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다 사람이니 일점일획도 타협할 수 없다는 쪽과, 중절의 조건에 관해 엄격함의 정도를 설정할 수 있는 쪽 중 어느 편이 더 유연하다고 봐야할까?


어쨌든, 나는 샌델과 근본입장이 다르기에 그의 서술에 대해 부정적 언급을 더 많이 하긴 했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는 분명 볼만한 책이다. 언젠가 구입했고 또 그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꽤 쏠쏠한 구절과 아이템을 건져올릴 수 있다.다른 책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 책만으로도 영국-미국 전통에서의 논의를 음미해볼 수 있는 책이다. 그저 그런 것보다는 나은 윤리학/정치철학 입문서. 긴 기간을 뛰어넘어 한 번 더 들여다본 내가 느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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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현의 별 헤는 밤
이명현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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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들고 몇 페이지 읽어내려갔을 무렵, 가장 처음 들었던 느낌은 아쉬움이다. 표지에 있던 “감성이 흐르는 우주산책”이라는 홍보용 문구를 보고 예상했어야 했던 것일까? 이 책은 정보를 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았다. 별 이야기보다는 별과 관련된 작가 자신의 이야기 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작가와 비슷하게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의 이야기에 딱히 공감이 가지 않았다. 별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중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하늘에도, 오로지 달 뿐이었다.


『이명현의 별 헤는 밤』의 첫인상은 그래서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작가에게 주어졌을 커뮤니케이터로서의 고민과 책을 대하는 내 태도 사이의 불협화음이 가장 큰 요인이겠지만, 어쨌든 더 자세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 계속 눈에 밟혔다. 오히려 별 이야기가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기 위한 은유로서 등장하는 느낌? 또는 그 반대? 하지만 내 바람대로 책이 쓰였다면, 아마 이것은 감성 에세이도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선사할 천문학 책이 되었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뜻밖에도, 심드렁함이 사그러들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대충 80페이지 언저리, 오리온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다가, 노래가 생각났다. 밴드 W의 [Stargazer]라는 노래였다. 많이 좋아했던 노래여서 가사와 멜로디가 모두 떠올라 책에 눈을 붙이고 있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잠깐 쉬는 겸 노래를 들어보기로 했다. “붉은 전갈 안타레스 끈적이는 입맞춤 너는 떨며 눈을 감았지.” 그러고보니 이 밴드는 우주 비슷한 것에 관한 이야기로 가사를 종종 쓴다. 다음 곡은 “수많은 마음과 마음이 부딪혀 흐르”는 “빛나는 은빛 별들의 바다”를 달린다는 [은하철도의 밤]이었고, 그 다음 곡은 “별보다 더 빛나는” 너를 바라본다는 [Stardust]였다. 어라?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별에 관한 말 중에 내 가슴에 가장 깊게 남아있는 말은, 넥스트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가사다. “저 하늘의 별들은 너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란다. 세상을 알게 된 두려움에 흘린 저 눈물이 이 다음에 올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지.” 같은 앨범에 [별의 시]라는 노래도 있다. “희망은 몹시 수줍은 별 구름 뒤에만 떠서 간절한 소원을 가진 이조차 눈을 감아야만 보이네.” “혜성을 보면 내 사랑을 알거야 그대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비춰”준다는 윤하의 [혜성]도 정말 좋아하는 노래다.


여기까지 헤아렸을 때, 별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하늘을 이고 살지는 않았어도 나 또한 별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내가 별에 대해 가진 기억을 책의 내용과 하나씩 맞춰보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막 접했을 무렵, 나는 애국가를 얼마나 빨리 치는지 경쟁하던 대세에서 비껴서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으로 키보드를 익혔다. 곧 열릴 올림픽을 핑계로 가리왕산이 개발되기 전 그곳으로 겨울 트레킹을 갔을 때 바라봤던 하늘이 떠올랐다. 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인 [라라랜드]의 그곳이 바로 그리피스 천문대였다. 얼마전 어떤 모임에서 천정에 별자리를 프리젠테이션해주는 전등을 보았을 때, 나 또한 나도 모르게 우와! 하고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별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기억 하나 쯤은 있다. 하물며 천문학을 공부하며 매일 별을 보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훨씬 많은 장면이 머리에 새겨져있을 것이고 인상적인 장면의 숫자도 다른 사람들에 비할 바 못될 것이다. 이 책을 나보다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여러 에피소드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재미를 느꼈을 것이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주산책에 감성이 흐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최초의 불만은 다소 누그러졌고, 뒤쪽으로 갈수록 정보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자주 나왔다. 그리고 『이명현의 별 헤는 밤』에 담겨있는 여러 에세이를 읽고서, 나도 이렇게 나의 「별 헤는 밤」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서울에 계속 머무르는 한 내일 밤도 모레도 별을 보기는 힘들겠지만, 이제 달은 조금 더 밝게 보일 것만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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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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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떠올리는 사건들은, (케이건이 서문에서 썼던 표현을 빌리면) 죽음을 둘러싼 제도들, 죽음을 마주한 사람들의 심리적 변화, 또는 초월적 세계에 대한 장광설 등이다. 철학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존엄사(안락사)에 관한 응용윤리학적 논쟁을 떠올릴 법도 하다. 이런 주제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또 사람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자못 눈길을 끄는 제목과는 달리,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죽음에 관해 관심있는 주제들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형이상학적 선입견(편견? 통속적 입장?)을 정식화하고 그 논리적 귀결이나 숨겨진 전제 같은 것들을 언급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영혼, 근대적인 의미에서는 정신과 관련된 이원론자들이 부딪히는 난점이 가장 먼저 논란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 뒤에는 육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인격복합체의 문제가 다뤄진다. 서양근대철학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가운데 하나인 인격동일성의 문제도 죽음과 연관되는데, ‘내’가 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설명하는 데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가 한참이나 이어진 이후에야 사람들이 “실제로” 궁금해할 (것 같은) 문제인, ‘죽음은 나쁜 것인가?’, ‘나쁘다면 왜 나쁜가?’, ‘자살은 정당화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다룬다.


이 책의 구성이 독자들에게 그닥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 그런 불만족을 셸리 케이건이 의도한 것 같다. 즉, 그는 이 책의 독자들에게 죽음에 관한 “신비적인” 관점을 걷어내고, 자신의 온건한 물리주의적 관점을 수용할 것을 종용한다. 아무리 온건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원자의 특정한 조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조합이 “인격이라는 기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특정한 것은 맞지만, 다른 동물과 형이상학적 차이를 만들어줄 만큼 심층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로, 기능의 정지라는 측면에서 삶을 “박탈”당하는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으나, 때로는 합리적/도덕적으로 정당화가 가능할만큼 인간에게 허용되는 선택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에 의미를 더는 만큼 삶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저자 본인의 의도와는 별개로, 죽음에 대한 셸리 케이건의 (이른바) 분석적 접근방식은 나의 소망을 채워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만큼이나 철학에 대해서도 “신비주의적” 시선으로 접근하곤 한다. 철학자들의 말에 알 수 없는 힘이 담겨있어서, 내 삶을 한 순간에 바꿔버릴 마법같은 순간을 선사해주길 바라는 모습을 지켜보곤 한다. (10년 전에는 점 칠 줄 아냐고 물어보는 태도가 대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아졌다고 할 수도 있을까?...) 이런 “신비주의적” 시각은 철학의 목적과 가장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의 입장에 모두 동조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케이건이 선보이는 여러 내용은 철학이 ‘진짜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족: 물론, 철학에 대한 이런 선입견은 철학자들 스스로 자초했다. 멋있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오만함, 혹은 그 멋있는 말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게으른 태도 같은 것들이 이런 선입견을 일으킨 철학자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삶의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도덕철학이나 윤리학, 철학적 인간학이 이해하기 어려운 어휘와 납득할 수 없는 담론으로 점철된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나는 그래서,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더욱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대중적인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덜한 철학적 주제에 대한 분석적 접근의 전통이 더욱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한다. (판매량을 봐선 이미 많이 팔린 것도 같지만…) 분석적 전통에서 다루는 주요한 주제들이 그 자체로는 그야말로 현실과는 한 666차원쯤 떨어져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책에 대한 인터넷 서점의 리뷰를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논의들 각각에 관해 차분히 생각해봤을 때 현실 세계에 대한 함의가 분명히 있다는 것,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철학”이라는 것에 분석적 접근이 훨씬 더 부합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분석적 접근의 논의들 속에서 우리가 곱씹어볼 구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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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양장) - 사유의 보폭을 넓히는 새로운 장자 읽기 이학문선 8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 지음, 김경희 옮김 / 이학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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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장을 섞어 말하면) 장자를 가장한 중국철학사 책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장자 책 자체가 단일한 저자에 의해 일관된 관점에 따라 쓰인 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저자들이 남긴 단편을 이어붙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장자 본인의 생각과 더불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등장했던 장자주의자들의 생각, 장자의 사상에 일부만 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 모두가 담겨있다. 둘째, 이 책의 저자 그레이엄이 장자를 완전히 해체한 뒤,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을 분류한 뒤에 재조립했기 때문이다. 이 분류는 장자 본인과 그의 동시대, 그리고 후대의 반응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각 장의 처음, 그리고 중간중간마다 그는 그 구절들을 이 곳에 배치한 문헌학적-철학적 이유와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물론 처음 출간된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기에 현재의 연구성과와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상당부분 수긍이 간다. 그렇게 그레이엄의 장자는, 장자를 중심으로 기술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사다.


이 책은 그래서 기존의 중국 고전들에 대한 번역이나 연구서와, 특히 도가 계열의 책과 결이 약간은 다르다. 고전의 맛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풍스럽지도 않고, 메타포를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독자를 도사가 되는 길로 인도하는 실수를 않는다. 즉, 현대어로 이해 가능한 최소한의 합리성은 갖추었다. 물론 가장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는 도가 사상 자체의 특성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그레이엄의 설명과 함께 읽는 장자는 ‘천천히 따져보며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안쪽으로는 들어오는 것 같다.


이렇게 편역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더라도, 장자의 생각은 여전히 철학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정복하기 힘든 높은 산 중에 하나다. 두께의 압박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그는 어떤 세계에서 살았으며, 어떤 세계를 넘어서려고 했을까? 장자 자신은 어떤 비전을 보았기에, 언어와 사고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무기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잠정성’이라는 속성을 부여했던 것일까. 또 (그레이엄이 ‘원시주의자’로 묶어서 설명하는 사람들처럼) 세계 자체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했던 퇴행적 사고에 빠지지 않고 초월을 논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문명적 사고방식도 반문명적 본능도 아닌 비문명적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 그레이엄의 장자 해석을 보고있자면,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른다.


조금은 내 멋대로, 가장 속편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실천적 잠정성에 기반한 태도의 무한한 변화와 그에 따른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나 스스로는 이런 사고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관점이 제시하는 여러가지 사고실험은, 가끔은 심심할 때 공상하는 소재로 쓸 수도 있으며, 더 가끔은 내 머리를 맑게 만들 때 이용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부분을 메타포와 문학적 수사로만 냅다 달리는 장자의 서술방식은, 이렇게 근거없이 납득하는 수작을 약간은 용인해주기도 한다.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것을 한데 모아 정리한 편역자 그레이엄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장자를 일관되게 정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왕 이렇게 된거, 나도 그냥 장자를 조각조각 이해하련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다시 꺼내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장자에 나오는 우화를 인용해보기도 하고(가장 유명한 나비 이야기라든가, 우물 안 개구리,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 홍수 때문에 죽은 미생 등등) 내게 대입시켜 생각해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통독하면서 얻은 최고의 소득은, 내 앞에 놓여진 길을 조금은 풍성하게 만들어줄 몇몇 이야기를 얻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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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독 :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자서전
필 나이트 지음, 안세민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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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독』을 읽으면서 먼저 하게 되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이 책에서 등장하는 신발의 모델명을 계속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는 작업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들, 이미지를 찾아보니 대부분 지금 신발가게에 가면 살 수 있는 모델들이었다(못 본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신발들은 대부분 이른바 “클래식”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팔리고 있었고, 대체 이걸 신고 어떻게 운동을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물론, 따지고 보면 대체 컨버스를 신고 어떻게 농구를 했다는 것인지 지금으로선 상상도 가지 않는 것도 있긴 하지만.) 특히나, 예전에 코르테즈 형태의 와플형 아웃솔이 적용된 운동화를 구입해서 착용하다가 발목이 너무 아프고 내구성도 정말 별로였던 경험이 있어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더 드는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필립 나이트의 행보에는 신기한 점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업을 하면서도(심지어 투잡을 뛰면서도) 종종 꾸준히 달리기를 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달리기를 하면서 경영자로서의 스트레스를 지우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동안에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달리기와 사업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고 달릴 때 본인의 태도를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고, 결승선을 넘어설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하며, 결정적으로 내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자세가 바로 그 태도의 내용이다. 매일 달리기를 하려고 노력하며 대학원을 졸업한 백수 상태인 내게 이런 적극적인 태도는 일종의 롤모델처럼 다가왔다.


달리기에서 사업의 태도를 배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답게, 이 자서전 또한 한 번도 쉼없이 쭉 치고 나가는 형태로 쓰여있다. 매해마다 발생하는 유동성위기, 파트너쉽의 결렬, 계약과정의 어려움 등등 그 어느 해도 조용하게 넘어갈 일이 없다. 다소간 짧게 처리된 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 해에 나이트는 일상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을 것이며 어떻게 하면 본인의 사업을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을지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서전은 한 번 집어들면, 약간의 두께의 압박은 있지만, 쉬지 않고 죽 치고 나가면서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반면 그의 성공에 운이 정말 많이 작용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니케(나이키)라는 이름을 결정한 과정, 스우시 마크를 고안해낸 사람과의 만남, 초창기에 함께한 사업파트너들의 능력 등등. 나이키의 초창기 소유주 중 한 사람인 바우어만은 지금도 구글에 검색하면 나올 정도의 전설적인 육상 코치다. 자서전에도 “문학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묘사되는 프리폰테인은 또 어떤가. 결정적으로 필립 나이트 본인이, 아버지가 지역언론사 사주인 금수저이며 (일종의 지역 거점 명문대학인) 오리건 대학교와 (역시나 명문인) 스탠퍼드의 경영대학원을 나와서 대학 강사를 뛸 정도의 엘리트였다는 것도, 따지고 들자면 무시못할 요소이긴 할 것 같다. 물론 이런 것을 갖춘 모두가 다 그만큼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가 선택한 대단히 불건전한 경영방식은, 과연 지금같은 성공이 아니었다면 감당할 수 있을만한 것이었는지도 약간은 의문이 든다. 우선 “블루 리본”이라는 회사가 있다고 말한 것 자체가 거짓말이었으며, 회사가 설립된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자기자본과 보유현금이 없어 언제나 유동성위기에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오니즈카 타이거를, 그리고 이후의 자금줄이었던 니쇼 이와미 상사를 상대로도 거짓말을 반복한다(물론 오니즈카 건은 상호비방이었으며, 이후 법적 분쟁을 통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면서도 본인에게는 거액의 연봉을 책정하고, 자신의 공격적 경영방식과 성장세에 놓인 회사의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금융기관을 탓하는 대목이 계속 등장한다. 한 편으로는 자신의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 저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머리에 계속 물음표가 돌아다니게 만든다. (이 부분은 경영학이나 회계학 쪽에 밝은 분들의 조언을 듣고 싶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계발서라고 할 수 있을까? 성공담을 그야말로 성공적인 과정으로 포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면,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그야말로 오랜만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단순히 “앞으로는 뭐든 좋은 일만 생길 것이야”라고 주장하는 뻔한 책은 아니다. (물론 그는 일이 잘 풀렸다고는 하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도 있고, 10년의 세월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잘 정리해놓기도 했다. 마치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나는, 그가 이 책에서 쓰지 않은 80년 이후의 나이키에 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갑자기 내 신발장에 있는 270 사이즈의 나이키 탄준, 트레드밀에서 착용하는 275 사이즈의 루나글라이드와 줌보메로가 달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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