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의 이야기는 운명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그는 운명에 관한 예언을 듣고 그 예언이 한 단계 성취된 것을 알고, 그 다음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 던컨을 죽인다. 그리고는 운명이 자신에게 부여한 도덕적 부담에 괴로워하며,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운명에 저항하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운명은 끝내 그를 죽였고, 예언은 성취되었다.


맥베스의 일탈은 권력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대사에서 드러나는 그의 마음은 권력을 얻고 싶으면서도 정당했으면 하고, 권력을 얻었으면서도 그것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경로는 최고권력자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좌에 오른 전형적인 케이스이기도 해서, 그가 속마음을 말하는 장면들은 오히려 위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권력이란 무엇이었을까?


맥베스의 주변 상황을 생각해보면, 끊임없는 의문만 떠오른다. 우선은 (온전히 내 독해의 책임일) 누가 누구인 것인지 잘 모르겠는 것.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기 위해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맬컴은 과연 이후에도 그곳을 잘 통치할 수 있을지,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했길래 그는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도덕적 열등함을 그리도 길게 말해야 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에서 사람 됨됨이와 권력의 자격은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지. 맥베스가 악행을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것은 왜 굳이(꼭!) 맥베스의 부인이어야 하는지, (사극이 맞긴 하지만) 서로가 주고받는 말은 또 왜 그렇게 사극 톤마냥 과장되어 있는지. 마지막으로, 이른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는데 별 감흥이 없는 것은 내 모자란 감수성 때문인지. 영어를 알고, 영어를 잘 하고, 영어로 읽으면 무언가 달라질까?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 뒤에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는, 해설을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희곡을 읽어보는 게 고3 뒤로 처음이라, 마음으로 되새긴 문장은 “아, 내가 정말로 희곡을 읽는 법을 잃어버렸구나”, 그리고 “내 책읽기가 너무 편향되어 있구나” 이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영화 또는 (기회가 닿는 한) 연극 맥베스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이 짧은 대사들 속에서, 아무 구체적인 설명도 포함되지 않은 편린의 왕복 속에서 연출자들은 무엇을 상상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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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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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엇일까.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도 그토록 담담한 이유는.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그토록 그의 곁에서 벌어지는 이유는.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스의 직업은 귀족 달링턴 집안의 집사다. “집사”라는 단어와 그의 역할이 아마도 앞에 제기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것 같다. 적어도 스티븐스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그는 집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 집사의 역할을 벗어난 행위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래서 충격적인 사건을 담담하게 대했으며, 그가 봉사했던 귀족이 각종 사건에 연루되었기에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에 봉사”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 책에서 직접 쓴 단어를 빌려 말하자면, 두 가지 화두가 그의 삶을 지배한 것 처럼 보인다. 첫째는 품위다. 스티븐스는 품위있는 집사란 무엇인지 고민했고, 품위있는 집사인(혹은 그렇다고 그가 생각한) 아버지의 길을 밟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아마 본인은 그 근처쯤 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여성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하고, 여행이 끝나면서 끝난다. 그 여성은 십수 년 전 달링턴의 저택에서 같이 일하다가 그만둔 사람이다. 이 여행은 여행인 동시에 회상이기도 한데, 여행과 회상은 모두 품위라는 개념에 대한 그의 고민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앞에서 품위있는 “집사”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것이 스티븐스의 고민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품위있는 “집사”란, 자연스러운 듯 어색하다. 이 부분을 다른 명사로 바꿔보면 더욱 그렇다. 품위있는 “사람”, 품위있는 “삶” 같은 것들. 그리고 스티븐스는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한사코 거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수긍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종류의 품위에 관한 질문을 아예 던지지 않는 쪽에 가깝다. 이런 태도가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서도 일을 하던 품위, 반유대주의와 파시스트적 생각에 물들어 유대인 하녀들을 내쫓은 달링턴에게 저항하지 않은 품위, 달링턴의 결정적인 비행이 폭로되었음에도 그가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그의 품위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품위 개념에 대해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여정을 통해 흔들리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떤 일이 펼쳐질 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정말 흔들린 것인지, 어떤 다른 생각을 했던 것인지 짐작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집사”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놓쳐버린 것들은 분명하다. 아마도 “사람”으로서의 품위로 요약될 수 있을 것들이겠지. 자유라든가, 감정이라든가, 선택이나 저항같은 것들. 하지만 그의 여행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이런 “삶”의 품위를 세련되게 설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이야기가 끝나도록 선선하고 건조한 입장을 유지한다(그리고 이 “선선하고 건조하다”는 형용사는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문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형용사일 것 같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좇는 것을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입장에 서있다. 직업의식, 이른바 프로페셔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의 대립은 품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 소설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다.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말은 어떤 행위의 묶음을 가리키는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세 단어는 모두 너무나도 추상적이어서, 실제로는 이 각각의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각자 이 말의 뜻을 해석하고 실천한다. 스티븐스에게 이것은 집사로서 집안을 잘 관리하고 행사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꼼꼼하게 하인들을 통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했다. 달링턴의 유대인 하녀 해고 지시가 부당하며 거부해야 한다는 켄턴의 말을 단칼에 물리치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이것이 프로페셔널리즘인가? 우리는 비슷한 프로페셔널리즘이지만 약간은 다른 역할을 배트맨의 알프레드에서 찾을 수 있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특히 다크나이트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그는 주인의 (정치적) 행보가 위험하며 조커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체험이 되었든 깨달음이 되었든 브루스 웨인은 그의 말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집사이면서 동시에 “현명한” 노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집사”의 롤모델이라고 부를만하다. 스티븐스의 눈에 알프레드는 어떻게 비쳤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의도인지, 어쨌든 이 소설에서 아마추어리즘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목소리로 튀어나온다. 켄턴의 행동에서, 여정에서 만난 정치활동가에게서.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불완전하고 위태로워 보이며,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도망간 것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스티븐스가 섬기던 달링턴, 그가 세계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준 매개체인 그 달링턴은 미국 외교관 루이스로부터 외교에서의 아마추어라고 비판받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공개석상이나 경제적 계산이 아닌 흑막과 비밀회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아마추어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스티븐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휴가 다운 휴가를 얻어 여행을 가게 된 계기도, 그를 집사가 아닌 고용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인 패러데이에 의해서 가능했다. 이쯤되면 그가 강조한 프로페셔널리즘, 그가 반대한 아마추어리즘의 경계가 대체 어디였는지 흐릿해진다. “집사”라는 직분은,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말을 붙일 만한 직업이긴 했던 것일까? 아마추어는 누구이며, 무엇일까.


책을 덮으며 생각해보니, 품위와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의문을 제기하기에 집사라는 직업은 꽤 적절했던 것 같다. 정치적 주체성은 지워져있지만 기능적 주체성은 극한에 치달아있는, “훌륭한” “집사”라는 직분이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미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집사”라는 직업군에 대한 이미지나 정보가 없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나 같은 독자가 포착하기 힘든 어떤 이미지도 있을 것 같다. 근대 한국의 역사적 풍경을 다루는 소설에서 많이 등장하는 "마름"이라는 지위를 대입시켜보면 약간은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 둘은 완전히 같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끝내 그 두 가지 의문이 명쾌하게 해소되지 않은 채 소설은 마무리된다. 작가는 등장하는 여러 입장 중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선선하고 건조하게 이 모두를 그려내고 있다. 이 방법은,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해결해야만 하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 의도적으로 채택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을 내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으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당신의 품위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서.


PS. 이 독후감을 작성하기 전, 이 책을 주제로 독서모임을 한 번 가졌습니다. 이 글에 들어있는 아이디어의 상당수는 그 모임에서의 토론을 통해 구체화되었거나 모임에 참석한 다른 분들에게서 얻어온 것입니다. 정의당 강동구 당원협의회 내의 독서소모임 [산책]의 11월 정례모임에 참석해주신 모든 당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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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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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런저런 일로 페미니즘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최근 페미니즘 진영의 이슈 가운데 하나는 남자설명충들, 이른바 맨스플레인이었다. 솔닛의 이 책에는 그 단어를 제일 처음 만들어낸 에세이가 포함된, 다시 말해 맨스플레인이라는 기폭제를 통해 남성의 권위를 터뜨리려 했던 최초의 시도가 담겨있다. 남성은 여성의 말을 듣지 않고, 중간에 끊으며, 힘을 무효화시킨다. 물론 그것이 남자들의 의도는 아니겠으나(어쩌면 그 모두가 의도된 것일 수도 있다), 여성으로서의 삶의 경험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는 경험인 것만은 분명 사실이다.

이 책의 가장 첫 에세이가 설명하는 것처럼, 글쓴이가 이 단어를 만들어낸 계기는 아주 황당한 사건이었다. 즉, 어떤 남자가 글쓴이가 쓴 책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책의 저자를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정말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을 일인가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기 그지없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벌어질 법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내가 지켜봤던 각종 토크콘서트(출판기념회, 영화GV 등)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로 남자였다. 그것이 정말 감동에 벅찬 말이었는지, 자랑을 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경험에 비춰보면, 자랑 쪽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아닌 게 아니라, 과거를 돌이켜볼 때 내가 바로 그 남자설명충이며, 그래서 이런 책도 보고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글도 쓰고 있으며, 대학에서도 그에 최적화된 전공을 이수했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그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글쓴이는 이렇게 남성들이 여성의 발언권을 뭉개버리는 것이 개인적 차원, 말하기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말하기는 권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에 속한다는 점에서, 말의 무시는 가볍게 볼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여성이 모든 종류의 권리를 제한당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일종의 징후다. 그 징후는 여성의 모든 것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성의 잘못된 권리주장(이른바 성적인 권리주장sexual entitlement)의 단면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 비유가 흥미로웠던 3장에서는, IMF 총재였던 스트로스-칸의 섹스 스캔들과 여성의 권리를 연결시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가능성마저 제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남성들이 여성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로부터 추정된다는 것이 솔닛의 생각인 것 같다. 설령 이 짧은 책에서 체계적인 이론의 꼴을 갖출 수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비논리적인 무의미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가장 추상적이고 난해하지만 그래서 가장 재미있기도 했던, 버지니아 울프와 수전 손택을 거론하는 6장 또한 내 눈길을 끌었다. “어둠은 미래의 최선의 상태”라는 울프의 테제에 대한 문학적/철학적 분석에서 솔닛은 어둠이 가진 다양한 의미를 드러낸다. 불확실성, 비가시성, 불투명성, 그리고 이어서 가능성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자신이 이해하는 울프의 성격과 손택의 성격을 보여주고 이들이 자신의 글쓰기의 자양분이라고 격찬한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제쳐놓더라도, 위에서 나열한 개념과 그에 대한 분석은 페미니즘의 주요한 테마인 것 같기도 하다. 최근 봤던 책 몇 권에서 비슷한 논의를 다룬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6장 또한 페미니즘이라는 책의 전체 주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론의 수준에서 우리 진영의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대체로 흥미로웠지만, 이 책을 시의적절하게 접하지 못했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즉, 이 에세이에서 다뤄진 이슈는 이미 다른 페미니즘 책에서 한 번쯤은 볼법한 이야기들이고, 그래서 솔닛이 다루는 문제들이 딱히 신선하다고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책이 한글로 처음 출간되었을 때, 나아가서 칼럼의 형태로 출판되었을 때 맞춰서 보았다면 그 느낌은 어땠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처럼,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줄기차게 페미니즘을 말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더 이상, 남성이, 자신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발언권을 제한하려 드는 게 아주 무례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그 미래의 언젠가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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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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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클래스 수강생의 교정/교열을 거친 글입니다]


고장난 열차가 달려오고, 나는 내 옆에 있는 뚱뚱한 사람을 밀어야만 열차를 멈출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로에 있는 다섯 사람이 죽는다. 널리 알려진 트롤리 사고실험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뚱뚱한 사람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일수록 실험 참가자들은 뚱뚱한 사람을 밀어내는 것을 주저하거나 더 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이것이 정보의 구체성 탓인지, 아니면 그 뚱뚱한 사람은 어쨌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시민이기에 죽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상식 탓인지, 한 번쯤은 의문을 가져볼 수 있겠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주인공과 사형수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과 사고실험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사형제도에 관한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사형수가 내 친구라면, 적어도 내가 친구라고 느낄만큼 그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사형이 적절한 처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언젠가 집행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정되어 있다면. 아마 반응은 두 가지로 갈라질 것이다. 아무리 내가 많이 “알고” 있어도 그 새끼는 죽어도 싼 놈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의 “진짜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그 어떤 누구도 한 삶의 끝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고 느끼거나.
 
공지영은 이 소설 속에서 너무나도 명백하게,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후자의 편을 들고 있다. 모니카 수녀는 세상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기도했던 역사 속의 모니카와 비슷하게) 아이들에게 헌신하듯 여러 가지 수완으로 사형수를 대한다. 수녀의 조카인 유정은 윤수의 죽음을 직접 대면하면서 조금이나마 염세적인 태도를 벗어나고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윤수의 웃음은 “조소”에서 함박웃음으로 그리고 다시 속죄의 눈물로 변화한다. 사형수가 맞이할 죽음과 우리의 생명의 끝인 죽음을 동치시키며, 이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그 대척점에 있는 사형제는, 복수라는 끔찍한 제도로 표현된다.
 
나는 이것을 ‘구체성의 승리’ 라는 단어로 줄여서 말하고 싶다. 그것이 설령 범죄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무리 흉악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적어도 이 소설 속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사형수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신문이 보여주는 “가짜 이야기”들은 추상적 영역에 머물러있다. 추상적 사고방식은 참과 거짓을 나누고, 착한 사람과 나쁜 놈을 가른다. 하지만 구체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죽음 앞에 서서 선과 악이 한끗 차이로 바뀐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게다가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것이 그 사람들을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한사코 반대하지만,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죽음을 매개로 맺어진 관계라는 점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자살하려던 유정과 그를 돌보는 모니카, 사형수가 된 윤수와 그를 보러 온 모니카와 유정, 살인사건 가해자 윤수와 피해자의 어머니인 삼양동 할머니, 죽음을 염려하는 유정의 엄마와 유정… 이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고 달가워하지 않음에도, 죽음이라는 테마는 소설의 문제의식에도, 등장인물들의 성격에도,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세계 전체에도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죽음으로 내달리는 세계를 드러내며 죽음에 반대하다니. 운명 같은 것인가? 나는 아직 대면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가끔은 내 삶의 경계를 짓는 짙은 커튼을 걷어버리는 상상을 하곤 한다. 생물학적 죽음이 되었든, 사형제가 되었든, 자살이 되었든. 내 커튼을 걷는 일에도, 남의 커튼을 치워버리는 일에도, 우리는 어쨌든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런 정보도 갖지 못한 장소로 다른 사람을 떠밀어버리는 것 만큼 끔찍한 일은 또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게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소설 속의 윤수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복수는 감정의 일시적인 해소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나, 세계를 파괴하는 일에도 봉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체성의 세계로 들어가 더욱 면밀하게 이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공지영의 이 소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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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론주의 개요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지음, 오유석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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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한 내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제일 끝부분에서부터 시작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자신이 이 책에서 전개한 여러 방식의 회의주의적 논증과 다른 학파의 주장에 대한 논박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일어날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미약한 논증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희박한 논증조차도 그에 알맞는 대상이 있다. 바로 강한 도그마다. 사람들이 강하게 믿는 교의일수록 그 교의를 벗어난 생각에 대한 고려 또한 희박할 수 밖에 없다. 섹스투스의 눈에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한 정도의 강박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흔하게 반박될만한 주장에는 흔한 반박으로, 간단하게 반박되지 않을 만한 주장에는 희박한 주장으로 응수한다는 대책이 등장한다. 즉, 그의 철학적 활동은 강박에 대한 치료로서의 회의주의적 태도다.


그래서 섹스투스는 태도로서의 회의주의(아카데미아 학파)와 교의로서의 회의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의심하고, 편한 것은 믿어버리는 일상의 타성 속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의심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 나온 것처럼, 회의주의의 영단어인 스켑티시즘의 어원은 그리스어 "탐구" 즉 스켑테스타이다. 즉, 회의란 부정이 아닌 탐구다. 나의 내면과 세계의 다양한 사물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하고 잠정적 결론을 끊임없이 수정해가며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것에 냉소적이라는 의미의 퀴니코스("시니컬하다cynical"의 어원), 역설적으로 무지를 도그마로 삼아버리며 불가능이라는 단정을 설파한 신아카데미아학파와 피론 회의주의는 다르다. 이 셋의 구별의 지점은 그 온건함과 비교조적 차분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모두 포괄하는 회의주의적 태도가 파괴적인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인간은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인간(또는 개인, 또는 공동체) 너머의 권위를 요청하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도그마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할 정도로. 마치 그것이 없으면 이 세계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열정적으로 달려들고, 자신이 무언가 발견했다고 선언하곤 한다. 이런 사변적 탐구엔 끝이 없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것을 철학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쓸데없을 정도로 자세하고 많이) 배우곤 한다. 그리고 이런 신념의 반대급부에는, 이런 형이상학적 권위가 없다는 게 증명되면 당장에라도 세상을 무너뜨려버리겠다는 욕망이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권위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이런 종말론적 열망을 꺼뜨릴 수 없다는 뜻에서,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무너지는 세계의 미학은 거울쌍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묻는다. 판단을 유보하면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주장하듯 마음의 평화가 올까? 오히려 탐구라는 이름으로 삶 전체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영위하는 인간적 삶은 가능할까? 인간적 삶을 떠받치는 많은 근거없는 믿음들이 "그래보인다"는 표현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릴테니 말이다. 계약서인 것처럼 보일 뿐 계약서가 아니라면 누가 계약을 지킬까. 그리고 그 뒤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우리가 지금까지 영위해온 삶은 규정과 변화와 그에 따른 타자화라는 구덩이가 놓여있는 양식이었다. 그리고 피론주의적 세계라는 다른 한 편엔 무정부주의가 놓여있는 것만 같다. 내 입장에서야, 뭐 그게 꼭 나쁜 것만 같지도 않고.


결론을 지어보자. 이론적인 배경이나 영향을 떠나서 읽으면,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 전체에 대한 기나긴(어쩌면 끝이 없을) 탐구의 과정이라는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견지하기 힘든) 교훈같은 것이 든 책이었다. 그리고 내게 개인적으로는, (내가 집중해서 공부하고 있는) 근대 철학의 각종 문제들을 둘러싼 다양한 (이른바) 회의주의적 논변의 원형을 확인한, 좋은 공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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