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철학하다 가슴으로 읽는 철학 1
사미르 초프라 지음, 조민호 옮김 / 안타레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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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관한 책을 읽고 그 책에 관해 글을 써서 뭔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마음만 졸이다가 웹서핑에 몇 분, 쇼핑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는 데 몇 분, 괜히 허기진 탓에 집에 있던 과자를 주섬주섬 주워 먹으며 몇십 분, 그러다 보니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내일엔 내일의 삶을 살아야 하니, 나는 그 두 시간만큼 잠을 덜 자야만 한다. 내일 일하다가 졸지 않을까, 잠을 덜 자는 것만큼 불안을 안겨주는 일이 또 있을까. 고민할 시간에 얼른 한 글자라도 쳐넣으라고 화면 위 커서가 나를 재촉하는 것만 같다, 는 표현을 어렸을 적 친구가 알려준 기억이 있다. 불안과 불안에 관한 책에 관해 작업을 하는 이 순간에도 나는 불안하다.


불안에는 정체가 없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마음이 옮겨가도, 이 행동을 하다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저 행동을 하려고 해도, 불안은 순식간에 모습을 바꿔 모든 생각과 행동에 들러붙는다. 우리에게서 쫓아낼 수 없는 것, 떨어뜨릴 수 없는 것, 없앨 수 없는 것. 물론 지금 내 상황에서 불안은 아무래도 내 게으름이 일으킨 걱정이 그 원인인 것 같긴 하지만, 과연 그런 걱정을 내 삶에서 완전히 지울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 걱정을 없앨 수만 있다면, 내가 그렇게 실천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불안을 철학하다』에서 다루는 학자들, 이른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사소한 걱정에서 불안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걱정은 생각에서 온다. 생각은 미래를 향한다. 미래는 인간이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 목적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 미래는 결국 현재로 다가와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동시에 또 다른 불투명한 미래가 그 현재를 대체한다. 인간은 파악할 수 없는 대상에게 모종의 두려움을 느낀다. 그림자만 보이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것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두려움과 비슷하다. 불안이란 바로 그런 두려움이다.


이런 이유로,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인간은 생각하는 한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생각하지 않기,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핀다. 사회 문화 도덕적 압박에 순응하며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니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창조적 가능성을 부정하거나(키르케고르), 죽음이라는 확실한 미래를 직시하지 않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회피하거나(틸리히) 아니면 모두 집어치우고 세속적 문제에 파묻혀 일상인이 되거나(하이데거). 하지만 불안에는 정체가 없기 때문에, 이 모든 노력에도 불안은 우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불안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대상이며, 없앨 수 없다면 함께 가야 한다. 몇몇 실존주의자들의 용어를 빌자면 ‘비본래적인’ 것에서는 벗어나서 본질적 불안만 고이 남겨두어야 인간으로서의 삶을 회복할 수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은 사실 본질적인 불안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요소들이 만든 비본래적 불안에 시달리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뿌리가 아닌 잔가지만 쳐내는 헛수고다. 반대로 인간적 불안에 비하면 비본래적 불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불안을 통해 삶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려는’ 노력에서 벗어나, ‘맨몸으로서의 나’ 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인간 자체로서의 나로부터 우리의 행동 양식과 가치 체계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힘든 일이다. 이 책에 따르면, 비본래적 불안을 야기하는 기제가 우리 마음속에도 있고 우리의 몸 밖에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자아의 활동이 충족하지 못하도록 내면화된 도덕인 초자아가 억누르면서 비본래적 불안이 생겨난다고 봤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 구조가 인간을 세계로부터 소외하게 만들어 비본래적 불안을 강제한다. 우리의 노동력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만들었지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데서 오는 좌절, 그럼에도 그 무언가를 사지 않고서는 물질적 삶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노동력을 집어넣는 행위와 임금을 맞바꾸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체제, 그렇게 내 것이 아닌 물건으로 가득한 세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는 상황. 그저 비본래적이라고만 치부하고 건너뛰기에는 너무나도 큰 짐이 삶을 압박하고 우리를 이리로 저리로 끌고 간다.


책을 읽다 보니, 이런 비본래적 불안을 ‘불안정’이라는 다른 단어로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문화 사회 정치, 그 밖에 나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들에 신경 쓰고 거기에 나를 맞추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바로 그 특성 때문에 그런 기준을 충족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 당장 생각하기로는 ‘적당한’, ‘평범한’ 같은 단어의 활용법에 이런 뜻이 숨어있는 것 같다. 내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남들만큼’이라는 비교급을 내포하는, 하지만 그 ‘남들’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흐릿한 그런 말. 이런 불일치에 마음을 쏟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불안정이다.


불안정한 사람은 불안을 바라보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적 불안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불안정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을 제대로 성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학업, 취업, 결혼, 노후준비 같은 문제를 포함해 우리의 일상 자체가 불안정을 만들어내는 것투성이이기 때문이다. 때로 불안정이 불안의 원인으로 오해돼 마치 불안정을 해결하면 불안도 없어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불안정을 없애려는 노력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앞에서 적은 것처럼 이미 그 모두가 내 것이 아닌, 내가 일치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가능하리라고 상상하긴 어렵지만, 이 책은 설령 불안정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불안은 남는다고 말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노력을 멈추는 그 순간 인간으로서의 생각, 인간이 되기 위한 생각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상이나 외부를 향한 생각이 아닌 나를 향한 생각, 실체가 없는 것에 관한 생각, 가능성에 관한 생각. 이런 생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의 단독자(키르케고르)가 되거나, 세계 속에 던져지지 않고 스스로 집어던지는 나로 바뀌거나(하이데거), 내면의 생생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초인(니체)이 되거나, 존재할 용기를 갖는다(틸리히). 이런 불안은 내겐 이명 같다. 모든 소리가 잦아든 뒤에야 우리에게 들리고,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해 신경 쓰이지만 그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면서 공존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그런 대상 말이다. 조용한 방에서 이 글을 적고 있는 동안에도 이명은 내 귀를 떠나지 않는다.


이 책은 불안과 공존하라고 말한다. 내가 이해한 방식은 조바심을 내는 스스로에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되묻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제도, 그저께도, 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실패했던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다. 그런 쿨시크함은 최소한 나에겐 잘 어울리지 않는 태도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묻지 못한 채 걸어온 길이 만든 나를 인정하고, 심지어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길 포기하지 않는 것이 불안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지식이라기보다는 위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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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
아브람 알퍼트 지음, 조민호 옮김 / 안타레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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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충분하다’의 어감은 다양하다. “그걸로 충분해”라는 한 문장이, 맥락에 따라 ‘모자라는 것 없이 만족해’와 ‘모자라는 구석이 많지만 이 정도에서 그쳐야겠어’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어서다. 이 두 의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충분함’이 있다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충분하다’는 말이 지닌 이런 의미의 범위 때문에, 어쩌면 이 말은 우리 삶 전체를 꿰뚫어 규정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충분하다’는 말이 실제로 그런 역할을 맡기에 적합한지 검토하는 것은 아마도 철학적 과제가 될 텐데, 이 책이 바로 그 작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글쓴이인 아브람 알퍼트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충분함’의 의미를 밝혀낸다. 그러면서 그 의미를 삶의 태도로 받아들일 때 나와 타인, 내가 속한 사회와 인류 전체가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 말을 적용하는 대상이 바뀌면서 의미가 약간씩 달라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알퍼트가 말하는 ‘충분함’이란 인간의 삶 속에 있는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발생하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 충분함의 반대편에는 ‘위대함’, 즉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상태를 어떻게든 결점이 없는 상태로 바꾸기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태도가 있다. 알퍼트는 ‘위대함’이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불행, 사회 문제, 나아가 전지구적 과제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위대함’을 추구하는 개인과 사회가, 무의식적이든 의도적이든 극복해야 할 불완전함과 결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알퍼트는 이런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담론을 분석한다. 개인의 ‘위대함’을 떠받드는 윤리학적 논의,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부추기는 사회 정치 사상, 우리가 ‘위대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벌인 일들의 결과로 만들어진 지금 우리 세상의 모습이 이 담론에 포함된다. 조금 더 학술적이고 딱딱하지만 구체적인 단어로 바꿔 말하자면 정치적 자유주의와 그 반대자들이 능력주의를 두고 논의하는 내용, 경제적 자유주의 또는 자본주의, 기업가정신을 퍼뜨리며 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유명한 경영자(콕 집어 말하자면 빌 게이츠)와 투자가들이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우리 시대 ‘위대함’ 태도의 개인적 기반은 단언컨대 능력주의다. 하지만 많은 비판가들이 지적하듯 능력주의는 실제로 능력 있는 사람을 대우하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있(었)으니 그 지위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강변하는 사후정당화의 논리로 동원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 책에도 자주 인용되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마이클 샌델을 비롯해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는 점이다.


하지만 알퍼트는 이런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그 이론적 근본에서까지 ‘위대함’을 떨쳐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능력주의는 개인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그에 따라 비판자들은 능력주의 비판에서 자유주의 비판으로 옮겨 가며 반자유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자유주의는 대체로 고전적인 귀족주의나 엘리트주의로 이행하기가 매우 쉽다.


바꿔 말하면,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시장 속 무한 경쟁은 영역과 규모를 가리지 않는 승자 독식을 허용한다. 일테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미래에도 돈을 더 많이 벌고(금융 상품 투자에서 발생하는 격차) 잘생겨지고(성형수술) 인기도 많으며(플렉스로 인플루언서 되기) 착한 데다가(쪼들릴 일이 없음) 건강하게 오래 살기까지(각종 건강관리 서비스 구매) 한다. 그래서 반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영역을 명확하게 구별해, 각 분야에서 노력하는 것은 존중해 주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쉽게 넘어갈 수 없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퍼트가 보기에 이런 발상은 각 영역에서의 ‘위대함’을 여전히 부추기고 그 영역 안에서 격차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어그러진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할, 사회가 정한 암묵적 기준에 따르는 상대평가의 늪에 집단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저 사람은 나보다 어떤 점에서 위대한가’ 또는 ‘어떤 점에서 위대하지 않은가’를 일단 평가한다. 이후 더 위대한 사람은 우러르거나 시기 질투하고, 덜 위대한 사람은 불쌍하게 여기거나 깔본다. 어느 쪽도 우리를 흡족하게 할 만한 진실된 인간관계는 아니다.


이런 종류의 관계는 동시에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만드는데, 보통은 ‘나는 왜 위대하지 못할까’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두 관계 중 어느 쪽이든 내 부족함이 드러나고,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주의와 상대평가에 맞서는 ‘충분함’의 무기는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가치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어떻게 발견되고 인정받게 됐는지, 능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는 어떻게 얻었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 등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러면 그 능력을 지닌 사람의 노(오)력에만 공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대하다’고 믿게 만드는 이런저런 잣대들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고, 아주 빠르게 바뀌기도 한다. 그런 덧없는 것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도 짧다. (덧붙이자면, 알퍼트는 이 주장을 하기 위해 고사성어 새옹지마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는데, 아마도 동아시아 문화에 익숙지 않은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서 그런 것 같다.)


개인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이어서, 알퍼트는 정치 경제 사회 체제에 관한 논의로 넘어간다. ‘위대함’ 체제의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 적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가져가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능력주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그에 더해 부의 재분배 문제가 다뤄진다. 한 사람(예를 들어 빌 게이츠)이 어지간한 국가의 국내총생산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 그 사람이 그럴 만한 능력과 그에 따른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가 능력이나 자격과 관계없이 부의 집중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집중은 다른 사람이 ‘충분한’ 삶을 누리는 데, 즉 불완전함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원을 쓰는 것을 방해하고, 그 문제를 그 사람의 삶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런 결과가 나오도록 방치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삶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가. ‘충분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되묻는 지점이다.


다른 한 가지 결과는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는 상황이다. 어떤 사회든 상대적으로 많은 자원을 얻는 방법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으며,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얻는 길은 훨씬 더 좁다. 이를테면, 이과 수능을 잘 봐서 의대에 간다든가, 멋진 외모와 춤솜씨로 톱티어 아이돌이 된다든가 하는 것. 자원을 위해 경쟁하는 사회에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그 좁은 길로 사람들이 몰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실제 자기가 지닌 잠재적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도 그에 걸맞은 적절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 책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능력은 언제나 기회보다 많다.” 알퍼트는 이런 비극이 각 개인들에게 손해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손해라고 주장한다. 그 능력이 기회를 얻어 우리 삶을 개선하는 데 쓰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충분한’ 상태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대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개인과 사회뿐 아니라 자연까지 망가뜨린다. ‘위대함’을 추구하며 자원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자연을 이용하는 일을 수반하기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의 소유는 자연을 착취하면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라고 쓰고, 한국을 포함한 제1세계 자본주의 선진국 시민이라고 읽는다)가 누리는 삶을 지속하기에 지구는 ‘충분하지’ 않다. 그 증거는 차고 넘치며, 기후 위기라는 현실로 우리 눈앞에 와 있다.


이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줄 혁신적인 기술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없다. 연구 중이라는 몇몇 프로젝트도 나름의 한계를 갖고 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자연을 덜 착취하도록 이끌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에 관한 알퍼트의 논의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특정 상품 단위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천연 자원 사용량은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품 사용량의 증가가 그 감소분을 언제나 상쇄해 왔다. 그뿐 아니라 그 상품을 만들기 위한 여건이 되는 다른 설비나 기술은 상품 사용량의 증가에 따라 훨씬 더 많은 천연자원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기후 위기 해결을 과학 기술 발전에 기대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봤을 때, 아주 좋게 표현해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충분한’ 수준으로 우리 삶의 질을 약간 떨어뜨리면서 자연을 덜 착취해야 한다. 동시에 자연을 덜 착취하는 방식으로 ‘충분한’ 수준의 삶의 질을 다른 나라의 시민들에게 보장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쩌면 인류는 머지않은 미래에 더는 지구에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알퍼트의 결론이다.


이렇듯 ‘충분함’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구적 맥락에서 약간씩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 삶 전체를 규정하는 단어로 기능할 수 있다고 알퍼트는 주장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어떤 가치가 얼마만큼, 어느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인가. 독자로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지만, 그 답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이 철학책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 일테면 경제학이나 공학의 영역일 테니까.


다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충분함’을 더 분석해 본다면, 두 가지 의미를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철학적인 의미까지 포함한) ‘충분한’ 다원주의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내가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그걸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앞세우고, 그 가치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문제는 해결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이 되든 안 되든, 그게 내 행동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불확실성이다. 이 불확실성 앞에서는, 한 가지 가치에만 따르며 내 행동을 결정하면 해결이나 성공보다는 실패 가능성이 더욱더 커진다. 그러니 ‘충분한’ 삶을 살고자 결심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위해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담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천의 감각이다.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도덕적 선택 상황에 대답은 법전이나 제품 사용 설명서에 써 있는 것처럼 단일하지 않다. 하지만 비슷한 유형의 상황을 여러 번 접해 보면 그리고 여러 번 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들어보면, 멀쩡한 인간으로서 적절한 선택은 대개 몇 가지(때로는 한 가지)로 수렴한다. 알퍼트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 수렴하는 선택지는 ‘적절하다(중용).’ ‘적절함’이라는 말은 ‘충분함’만큼이나 모호하지만, 핵심은 나를 포함해 사회 전체가 그 적절함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으며, 또 그 적절함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충분한’ 삶을 향한 열망이 사람들에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충분한’ 삶을 ‘충분히’ 많은 사람이 누리기 위해서 이 책에서 제안하는 여러 제도가(당장 기억나는 것으로는 대학 입학자나 국회의원 선거에 추첨제 적용이라든가,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널리 알려진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것들), 최소한 학술적인 영역에서는 이런 책에서 인용될 만큼 한번쯤 진지하게 다룬 적이 있다는 것도 덧붙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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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심리학 - 사소한 우연도 놓치지 않는 기회 감지력
바버라 블래츨리 지음, 권춘오 옮김 / 안타레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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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노력하면, 운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 문장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펼쳐 보이는 정도의 빌드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겉보기에 모순이기 때문이다. 운이 좋은 사람이란 아마도 운 좋은 사건 즉 행운을 많이 겪은 사람을 가리킬 텐데, 행운이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다. 의지에 따른 노력으로 행운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신이거나 악마임에 틀림없다. 책을 읽기 전까지 저 문장에 대한 내 해석은 이랬다.


이 문장을 의미 있는 말로 만들기 위한 이 책의 첫 번째 단계는 ‘운이 좋다’는 말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책 제목과는 사뭇 다르게 이 책의 앞부분, 범위를 조금 더 넓히면 거의 1/3은 ‘운’에 대한 인문학적 배경 설명이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운이 좋다는 말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그에 대한 현대적이고 수학적인 접근법까지. 이 부분을 잘 따라가면, 운이 좋다는 것은 사건의 특성이 아니라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건은 무작위로 벌어진다. 누군가에게 많이 벌어지거나 적게 벌어지는 것 자체가 사건이 무작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김씨가 두 번 로또 1등이 되는 동안 이씨와 박씨는 2등은커녕 5000원조차 못 받는 것이야말로 진짜 무작위의 결과라는 뜻이다. 이걸 잘 보여 주는 자연 현상이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와이토모의 반딧불이’다. 불을 내는 생명체들이 정말로 무작위로 있었다면, 오히려 간격은 일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김씨의 로또 당첨이 행운인 이유는 행운이 김씨에게 일어나서가 아니다. 이씨와 박씨가, 우리가 김씨를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방향에서 해석의 문제를 다시 보여 주는 실험도 등장한다. 두 종류의 카지노 룰렛 판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하나는 흰색, 검은색, 회색이 3등분돼 있는 판이고, 다른 하나는 18등분된 조각에 차례로 흰색, 검은색, 회색이 배치돼 있는 판이다. 최씨는 3등분 판에서 검은색이 나와 돈을 땄고, 황씨는 18등분 판에서 검은색이 나와 돈을 땄다. 누가 더 운이 좋을까?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의 2/3가 운이 더 좋은 쪽은 황씨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도, 이 부분을 읽을 때 ‘당연히 황씨 아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설명에서 알 수 있듯, 두 룰렛 판에서 검은색이 나올 확률은 똑같이 1/3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나는) 황씨가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어쨌든 그 사람들(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점에서, 해석의 문제다.


두 번째 단계는,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라는 내면의 문제를 생물학적, 신경생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인 접근이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심리학 실험이나 일화가 등장한다. 머리에 쇠파이프가 관통해 뇌가 망가진 뒤 성격이 바뀐 사람이라든가, 우리가 ‘○○의 저주’라고 부르는 사건들의 실체라든가,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아는 것으로 유명해진 당나귀 등등.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잡식으로 알아 두면 좋을 신기한 실험들도 등장한다. 글자와 색깔을 헷갈리게 배치해서, 예를 들어 파란 글씨로 ‘빨강’이라고 적어 놓고 ‘글자는 무슨 색인가요?’라거나 ‘뭐라고 써 있나요?’라고 물어보면서 인지 능력을 시험해 보는 실험 같은 것은 직접 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결과, 해석의 차이가 신경생리학적 차이로 드러난다. 어떤 사건이 행운이라고 생각할 때 활성화하는 뇌의 부위와, 불운이라고 생각할 때 활성화하는 부위가 다르다. 같은 부위라고 해도 활성화하는 정도가 다르거나, 다른 식으로 반응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를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경생리학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으로 넘어간다. 물론 이 차이를 알아 보기 위해 동원하는 도구인 뇌파나 자기공명영상(MRI) 등이 아직 뇌에 관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책의 지은이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해석이라는 불투명한 과정을 신경생리학적 결과물이라는 그나마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형태로 전환해 관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훌륭한 성과다.


이렇게 신경생리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스스로를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특징은 이렇다. 첫째,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극에 목표 의식, 이 책의 용어를 따르자면 기대를 갖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둘째, 무작위로 일어난 사건을 감지하면 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유형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셋째, 자신이 구성한 유형에 근거해 그 사건을 자신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통제가 아니라면 최소한 이해하기는 했다고 믿는다. 넷째, 자신의 통제 방법이나 이해가 실제 세계와 잘 들어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그 틀을 버리고 다시 유형 모색을 시작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운이 좋은 사람의 특징이다. 스스로를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와 정반대다. 자극에 둔감하고, 유형을 찾아내지 않고 그냥 일어난 사건이라 치부하며, 세계는 근본적으로 통제불가능한 것이라고 믿으며 불안해한다. 이런 면모 각각이 신경생리학적으로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다.


세 번째 단계는, 운이 좋은 사람의 신경생리학적 특성에 가깝도록 우리 스스로를 바꾸면, ‘운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주장이다. 뇌의 구성은 해석의 경향과 연결돼 있으니, 해석의 경향을 바꾸려는 노력으로 뇌의 구성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우리(내) 뇌의 구성 자체가 내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기에 단숨에 이를 재조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래서 운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지금까지 쌓아 온 많은 해석에 대항할 새로운 해석을 쌓아 나가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뇌의 가소성(유연함)이라는 흥미로운 성질 때문에 이런 일은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 있다.


신경생리학적 근거를 동원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려는 책의 상당수가 가소성을 마지막 열쇠로 내세우고 있기에, 이 책의 결론에 다소 맥 빠지는 면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운이라는 가장 비과학적인 단어를 해석하는 이 책의 접근법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첫 번째 덤이고, 운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이런 실험 설계까지 했구나 하는 다채로운 실험 이야기는 두 번째 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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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 사람과 동물의 윤리적 공존을 위하여
셸리 케이건 지음, 김후 옮김 / 안타레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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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을 먼저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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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전 메일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책인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만든 편집자께서 보내주신 글이었다. 알라딘에 올려놓은 리뷰(https://blog.aladin.co.kr/russell85/9832471)를 보았으며, 셸리 케이건의 새 번역서를 출간했다는 소식도 적혀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면, 신간을 배송하겠다는 제안도 함께 들어있었다.


공짜로 생기는 물건을 좋아하는 나는 탈모인이다. 돌이켜 생각하지 않고 그 제안을 덥석 물었다. 아마 내 머리카락이 또 몇 개는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리뷰를 쓰느라 머리가 더 많이 빠졌을 것이다. 두달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셸리 케이건은 윤리학자다. 책 제목은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How to Count Animals, more or less)>다. 이 둘의 조합에서 알 수 있듯 동물윤리에 관한 책이다.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다룬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렵다 싶지만, 무려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육과정에도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이 분야는 시민의 교양이기도 하다.


동물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길에 나가면 “애완”견을 흔히 볼 수 있고, 고양이를 섬기는 집사도 많다. 반면 돼지와 소와 닭은 거의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오고, 쥐는 징그러우니 "구제"하고, 앵앵거리는 모기는 서슴없이 때려잡는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이런 실제 삶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대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한다. 이렇게 대우하는 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이론을 동원해 대상에 서로 다른 도덕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는 이런 태도를 "계층주의"라고 부른다.


그가 생각하기에 실제 삶을 무시하는 윤리 이론은 반드시 실패한다. 행위를 지시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를 명령하는 "실천적 모순"을 낳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을 낳는 의견의 한 전형은 인간과 동물에게 같은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단일주의"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대우만큼 동물도 대우받아야 하고,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그런 대우가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면 그 제도가 동물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단일주의"라는 단어로 우리가 흔히 아는 동물권 옹호론자들을 가리키려 한다. "고통은 다 같은 고통"이니 동물의 고통도 인간만큼 고려돼야 한다는 피터 싱어나, 권리를 부여하는 근거를 인간의 시선에서 생각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톰 레건 같은 사람들 말이다. 케이건은 이들의 단일주의가 각자의 윤리 이론(공리주의, 의무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순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전형은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모두 도덕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인데, 사실은 도덕적 지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전세계 수천만의 애견인과 애묘인과 그 밖에 수많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무지막지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단계는 아니다. 지금은 17세기가 아니니까.


계층주의를 정당화하는 전략은 도덕적 입장과 도덕적 지위를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개체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개나 돼지처럼 도덕적으로 대우받아야 하거나, 돌이나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도덕적으로 대우받지 않아도 된다. 전자는 도덕적 입장을 갖고, 후자는 도덕적 입장을 갖지 않는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돌이나 플라스틱 장난감도 도덕적 입장을 갖는다고 간주하지만, 케이건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런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도덕적 지위는 개체가 “어떤 방식으로” 대우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그 개체를 대우하는 행위방식에 따라 구성된다. 그러나 케이건은 이런 단순한 상대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도덕적 지위에 내재적 특성이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반적 조건” 아래서 “도덕적 삶”을 더 정교하고 풍성하게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이런 내재적 특성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른바 “정신적”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 부분 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이 정신적 능력을 구성하는 여타의 특성 또한 내재적 특성에 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케이건은 도덕적 입장과 도덕적 지위를 분리하지 못하는 데서 단일주의와 인간중심주의의 오류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에게 도덕적 입장은 on/off지만 도덕적 지위는 스펙트럼이다. 하지만 이 둘을 동일시하면 “모든 개체에게 동등한 도덕적 지위가 부여된다”(단일주의)거나 “인간 이외의 존재에겐 도덕적 입장이 없다”(인간중심주의)고 생각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계층주의를 정당화하는 두번째 전략은 개체를 도덕적 지위의 계층을 구별하는 단위로 삼는 것이다. 이른 동물의 복지나 권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물권 옹호론자들의 “종차별주의”라는 공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은 대체로 비슷한 특성을 지녀 비슷한 “도덕적” 능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종 자체를 도덕적 대우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동물보다 못한 인간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문제를 낳는다.


이 두 가지 전략 위에서 케이건은 동물에 대한 대우를 결정하는 다른 이론(전략)보다 자기 아이디어가 우월하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 입증 방식은 주로 동물윤리 분야에서 이미 등장한 여러 입장이 특정한 상황(대체로 우리가 발생할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는 있는 정도의 상황)에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논의 뒤에는 자신의 “계층주의” 아이디어의 경우엔 받아들일만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자기 아이디어가 더 포괄적이면서도 동시에 정합적일 수 있다는 걸 드러내려 한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겐 이 부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다.)


이 전략이 성공적인지는 읽는 사람이 각자 판단할 부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케이건이 비판하는 “단일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를 비판자의 시선에서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긴 했다. 그럼에도 단일주의자의 시각에서 몇 가지 의아한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첫째는, 계층주의는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이론이긴 해도 무엇을 하라고 이야기해주진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단일주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단일주의의 이론적 구조와 논의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결론으로서의 메시지는 매우 명쾌하다.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지 않아야 한다면, 동물도 괴롭히고 죽이지 말아라.” 하지만 계층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개는 죽여선 안 된다? 새우는 잡아죽여서 먹어도 된다? 돌고래를 유흥거리로 이용해선 안 된다면 햄스터도 안 되는 건가?


물론 케이건 스스로 이런 점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계층을 어떻게 나눌 것이며 그에 따른 대우의 수준이 어때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가로서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마냥 유보하고 있기엔, 동물에게 벌어지는 일은 인간에 대한 대우라는 관점에서 봤을 땐 극단적으로 나쁜 일이라는 게 문제다. 죽여서 먹고(축산), 온갖 실험의 대상으로 삼고(동물실험), 자유를 박탈한다(동물원 등). 과연 도덕적 지위를 계층적으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나누면, 어느 단계의 동물에겐 이런 부분을 허용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둘째는 케이건 스스로도 인정하는 “정상적 편차”의 문제다. 이것은 도덕적 지위의 계층의 단위가 개체로 설정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다. 도덕적 삶을 풍성하고 정교하게 구성하는 능력은 종 뿐만 아니라 개체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다. 때로 이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하기도 하다. 당장 아이와 어른 사이의 차이가 있고, 현재에 급급한 성향을 가진 어른도 있지만 미래를 알차게 설계하고 그 계획을 실천하는 어른도 있다.


케이건의 “계층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대우가 달라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책의 끝부분에서 “너무 복잡하게” 계층을 나누지 않는 “제한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궁색해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이론이 “직관적”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지만 이처럼 핵심적인 뼈대가 21세기의 관점에서 반직관적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런 개체주의의 관점을 채택한 여러 종류의 차별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우리가, 이런 관점을 다시 불러들어야 할지는 꽤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노예, 장애인, 인종에 대한 차별은 그들이 종으로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인간이긴 하지만, “인간”으로서 대우받아야 하는 어떤 집단이 가진 특성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개체주의와 계층주의의 결합의 결과였다는 말이다.


최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서 노예의 투표권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남부의 백인 정치가는 남부 지역의 투표인단의 규모를 키워 정치적으로 북부를 찍어누르기 위해 “노예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반면 북부의 백인 정치가들은 이런 남부 정치가들을 향해 “사람 취급도 안해주면서 투표할 때만 투표권을 주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하며,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면 북부의 투표인단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어지기 때문에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 두 집단이 박터지게 부딪힌 결과, 노예 1인에게는 3/5표의 투표권을 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정교하고 새로운 논의의 지평과 관점을 열어준 것과는 별개로, 케이건의 계층주의는 내게 이런 종류의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타협처럼 보인다는 점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재미있는 독서였으되, 다소 혼란스럽고 맥빠지는 결론이라는 점이 못내 아쉽다. 물론 이것은 내가 단일주의자여서 그런 것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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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이 위험에 민감한 시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세계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매일 병에 걸리고, 죽어가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내게 병을 옮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요.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체로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에 이런 도덕적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을 자신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처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시기는, 제가 기억하는 가까운 과거에는 없었던 것도 같아요.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운명을 건 도박을 제안합니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면, 네 운명을 판돈삼아 계산해보라고요. 신이 있다에 걸거나, 없다에 걸거나. 있다에 걸었는데 신이 실제로 있다면, 내 영혼은 종말의 그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반대로 없다에 걸었다면, 불경죄로 영원히 타오르는 지옥불에서 고통받겠죠. 신이 있다에 걸었는데 실제로는 신이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지니긴 하겠지만 구원도 없고 지옥불도 없고 천벌도 받지 않을테니 사는데 그닥 불편한 것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없다에 걸었다면, 나는 참된 믿음을 갖겠지만 신이 없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곤 <팡세>를 읽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어느 쪽에 네 운명을 걸 것이냐?“신 존재 증명에 관한 도박사 논증”이라고 부르는, 파스칼 식의 신 존재 옹호론입니다.


사상의 역사의 맥락에서 이 주장은, 선택과 기댓값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현대적인 확률 이론의 선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라는 잠재적 위협과 불신의 공개적 표현이라는 현실이 뜨겁게 타오르는 지옥불처럼 도래한 이런 때엔, 수학이라기보단 심리학처럼 읽힙니다. 사람들이 위협을 대면하고 대처하는 방안을 평가하는 방식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도면으로서도 아주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파스칼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축복을 내리는 대신 협박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한때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지 않아서 지금처럼 이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중국인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했으니 중국인들이 바이러스를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죠.


중국인을 막았는데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다면, 그건 중국인을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중국인을 막았어도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그건 중국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바이러스를 퍼뜨렸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밖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사건이었겠죠. 반대로 중국인을 막지 않았는데도 바이러스가 퍼졌다면, 그건 중국인을 막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중국인을 막지 않았어도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다면, 그저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일 뿐인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하곤, 입국 금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쪽에 네 목숨을 걸 것이냐? 파스칼 이후에 훨씬 더 발전된 확률과 통계 이론에 기반을 둔 연구들에서 “입국금지보다는 검역강화가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확률이 xx% 더 높다”고 말해도, 그들은 항상 불투명한 백분율보단 확실한 도박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점을 칠 줄 알지만 점쟁이를 무척 싫어합니다. 불투명한 위험을 말하며 자신들의 안정을 보장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잘 된다고 말했는데 잘 되면 그건 점쟁이의 신통력이 아니라 내가 잘 해서 그런 것인데, 잘 안되면 신통함이 없는 가짜의 말로 남겨지겠죠. 반대로 위험을 경고한다면 상황이 반대로 펼쳐집니다.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점쟁이의 조언 덕분에 위험을 피한 것이고,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험한 점쟁이가 되고요.


점쟁이는 파스칼처럼 우리의 지적 능력만 마비시키지 않습니다. 액땜을, 부적을, 굿판을 제시하며 우리의 지갑을 노립니다. 나에게 돈을 내면 화를 피할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을 따른 덕분에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점쟁이의 능력이고,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으로 둔갑합니다. 그 말을 거역해서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 되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젠가 예언되었던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파스칼적 상황 때문에 언제나 점쟁이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패배한 대한민국의 모든 번화가 위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는데 돈을 받고 있는 역술인의 단칸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가장 오래된 점술책인 <주역>은, 고대 사회에서 제사장이자 왕인 사람들이 점을 치고 해석하는 방법, 점술의 결과와 그에 따른 사건의 발생 추이를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주역> 또한 점술책이기에 조심해라, 삼가라,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등등 무언가를 금지하는 메시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심스러움은 파스칼 식의 내기와는 맥락이 다릅니다. <주역>이 만들어진 시기, 왕은 형식적으로는 개인의 운명을 내다보려 점을 치지만, 제정일치 군주제 사회에서 왕의 운명이란 곧 그 공동체 전체의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위대한 선조들은 왕 개인의 사적인 목표보다 왕으로 대표되는 공동체 전체의 안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역>의 조심스러움은 그 결과물입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 뭔가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의 왕 만큼이나 운명을 건 도박을 생각보다 많이 하고, 그때마다 위험의 심리학의 손짓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는 아들에게 백신을 놓아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여정을 보여주는 에세이입니다.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는 불확실한 병을 예방하기 위해 확실히 아픈 주사를 내 아들에게 꽂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꽂았다가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의학적 확률은 100만분의 1이라고 하지만 그 1에 내 아들이 속하면 그 확률에서 “100만분의”는 지워지는데, 인체가 갖고 있는 면역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면 백신 없이도 병을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에세이스트는 주변에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충실히 활용해 심리에서 과학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의 그리고 우리의 주변엔 여전히 까다로운 임상을 통과한 약은 비싸다고 말하면서 “면역력”을 늘려준다는 건강기능식품은 꼬박꼬박 사서 챙겨먹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 치료할 수 없다고 알려진 병에 대한 절망을 담보로 소용없는 약과 근거없는 자연의 힘을 강요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습니다. 결국 진단명 미상이 되어버린 이름모를 병에 걸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병상 머리맡에 놓인 것은, 약 복용 지도서도 입원환자 주의사항도 아닌 온갖 스님들과 무당들의 전화번호였습니다.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은 오래된 격언입니다. 이번 사태 초기에 울려퍼졌던 “방역 영역에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더 늘렸을 뿐만 아니라 허용되는 행동의 폭을 비과학적인 영역까지 포괄하게끔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입에다 소금물을 뿌리는 파국을 불러오는 것을 보았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어버린 비밀 사교단체에 대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응보에 걸맞다는 생각은 들지만) 끊임없는 비난도 이어졌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요.


물론 우리는 노력과 행운으로 상황을 잘 넘긴 편에 속하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들이 공포에 전염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바이러스의 특성 때문에, 여전히 우리나라에 병이 또 들어와 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짧은 몇 달 간의 경험으로 위험의 정도를 알게 되었으며, 과하다 싶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인 조치만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능력이 허용하는만큼 이 병과 바이러스를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에도 마스크를 써야 해서 숨 쉴 때마다 땀이 차는 입술과 볼에 약간 짜증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위험에 대한 공포가 아닌 과학과 지식이 알려주는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여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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