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철학하다 가슴으로 읽는 철학 1
사미르 초프라 지음, 조민호 옮김 / 안타레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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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관한 책을 읽고 그 책에 관해 글을 써서 뭔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마음만 졸이다가 웹서핑에 몇 분, 쇼핑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는 데 몇 분, 괜히 허기진 탓에 집에 있던 과자를 주섬주섬 주워 먹으며 몇십 분, 그러다 보니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내일엔 내일의 삶을 살아야 하니, 나는 그 두 시간만큼 잠을 덜 자야만 한다. 내일 일하다가 졸지 않을까, 잠을 덜 자는 것만큼 불안을 안겨주는 일이 또 있을까. 고민할 시간에 얼른 한 글자라도 쳐넣으라고 화면 위 커서가 나를 재촉하는 것만 같다, 는 표현을 어렸을 적 친구가 알려준 기억이 있다. 불안과 불안에 관한 책에 관해 작업을 하는 이 순간에도 나는 불안하다.


불안에는 정체가 없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마음이 옮겨가도, 이 행동을 하다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저 행동을 하려고 해도, 불안은 순식간에 모습을 바꿔 모든 생각과 행동에 들러붙는다. 우리에게서 쫓아낼 수 없는 것, 떨어뜨릴 수 없는 것, 없앨 수 없는 것. 물론 지금 내 상황에서 불안은 아무래도 내 게으름이 일으킨 걱정이 그 원인인 것 같긴 하지만, 과연 그런 걱정을 내 삶에서 완전히 지울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 걱정을 없앨 수만 있다면, 내가 그렇게 실천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불안을 철학하다』에서 다루는 학자들, 이른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사소한 걱정에서 불안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걱정은 생각에서 온다. 생각은 미래를 향한다. 미래는 인간이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 목적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 미래는 결국 현재로 다가와 알 수 있는 것이 된다. 동시에 또 다른 불투명한 미래가 그 현재를 대체한다. 인간은 파악할 수 없는 대상에게 모종의 두려움을 느낀다. 그림자만 보이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전해지는, 무시무시한 것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두려움과 비슷하다. 불안이란 바로 그런 두려움이다.


이런 이유로,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인간은 생각하는 한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생각하지 않기,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려는’ 노력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핀다. 사회 문화 도덕적 압박에 순응하며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니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창조적 가능성을 부정하거나(키르케고르), 죽음이라는 확실한 미래를 직시하지 않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회피하거나(틸리히) 아니면 모두 집어치우고 세속적 문제에 파묻혀 일상인이 되거나(하이데거). 하지만 불안에는 정체가 없기 때문에, 이 모든 노력에도 불안은 우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불안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대상이며, 없앨 수 없다면 함께 가야 한다. 몇몇 실존주의자들의 용어를 빌자면 ‘비본래적인’ 것에서는 벗어나서 본질적 불안만 고이 남겨두어야 인간으로서의 삶을 회복할 수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은 사실 본질적인 불안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요소들이 만든 비본래적 불안에 시달리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뿌리가 아닌 잔가지만 쳐내는 헛수고다. 반대로 인간적 불안에 비하면 비본래적 불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불안을 통해 삶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려는’ 노력에서 벗어나, ‘맨몸으로서의 나’ 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인간 자체로서의 나로부터 우리의 행동 양식과 가치 체계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힘든 일이다. 이 책에 따르면, 비본래적 불안을 야기하는 기제가 우리 마음속에도 있고 우리의 몸 밖에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자아의 활동이 충족하지 못하도록 내면화된 도덕인 초자아가 억누르면서 비본래적 불안이 생겨난다고 봤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 구조가 인간을 세계로부터 소외하게 만들어 비본래적 불안을 강제한다. 우리의 노동력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만들었지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데서 오는 좌절, 그럼에도 그 무언가를 사지 않고서는 물질적 삶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노동력을 집어넣는 행위와 임금을 맞바꾸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체제, 그렇게 내 것이 아닌 물건으로 가득한 세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는 상황. 그저 비본래적이라고만 치부하고 건너뛰기에는 너무나도 큰 짐이 삶을 압박하고 우리를 이리로 저리로 끌고 간다.


책을 읽다 보니, 이런 비본래적 불안을 ‘불안정’이라는 다른 단어로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문화 사회 정치, 그 밖에 나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들에 신경 쓰고 거기에 나를 맞추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바로 그 특성 때문에 그런 기준을 충족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 당장 생각하기로는 ‘적당한’, ‘평범한’ 같은 단어의 활용법에 이런 뜻이 숨어있는 것 같다. 내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남들만큼’이라는 비교급을 내포하는, 하지만 그 ‘남들’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흐릿한 그런 말. 이런 불일치에 마음을 쏟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불안정이다.


불안정한 사람은 불안을 바라보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적 불안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불안정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을 제대로 성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학업, 취업, 결혼, 노후준비 같은 문제를 포함해 우리의 일상 자체가 불안정을 만들어내는 것투성이이기 때문이다. 때로 불안정이 불안의 원인으로 오해돼 마치 불안정을 해결하면 불안도 없어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불안정을 없애려는 노력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앞에서 적은 것처럼 이미 그 모두가 내 것이 아닌, 내가 일치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가능하리라고 상상하긴 어렵지만, 이 책은 설령 불안정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불안은 남는다고 말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노력을 멈추는 그 순간 인간으로서의 생각, 인간이 되기 위한 생각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상이나 외부를 향한 생각이 아닌 나를 향한 생각, 실체가 없는 것에 관한 생각, 가능성에 관한 생각. 이런 생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의 단독자(키르케고르)가 되거나, 세계 속에 던져지지 않고 스스로 집어던지는 나로 바뀌거나(하이데거), 내면의 생생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초인(니체)이 되거나, 존재할 용기를 갖는다(틸리히). 이런 불안은 내겐 이명 같다. 모든 소리가 잦아든 뒤에야 우리에게 들리고,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해 신경 쓰이지만 그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면서 공존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그런 대상 말이다. 조용한 방에서 이 글을 적고 있는 동안에도 이명은 내 귀를 떠나지 않는다.


이 책은 불안과 공존하라고 말한다. 내가 이해한 방식은 조바심을 내는 스스로에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되묻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제도, 그저께도, 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실패했던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다. 그런 쿨시크함은 최소한 나에겐 잘 어울리지 않는 태도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묻지 못한 채 걸어온 길이 만든 나를 인정하고, 심지어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길 포기하지 않는 것이 불안과 공존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지식이라기보다는 위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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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
아브람 알퍼트 지음, 조민호 옮김 / 안타레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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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충분하다’의 어감은 다양하다. “그걸로 충분해”라는 한 문장이, 맥락에 따라 ‘모자라는 것 없이 만족해’와 ‘모자라는 구석이 많지만 이 정도에서 그쳐야겠어’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어서다. 이 두 의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충분함’이 있다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충분하다’는 말이 지닌 이런 의미의 범위 때문에, 어쩌면 이 말은 우리 삶 전체를 꿰뚫어 규정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충분하다’는 말이 실제로 그런 역할을 맡기에 적합한지 검토하는 것은 아마도 철학적 과제가 될 텐데, 이 책이 바로 그 작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글쓴이인 아브람 알퍼트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충분함’의 의미를 밝혀낸다. 그러면서 그 의미를 삶의 태도로 받아들일 때 나와 타인, 내가 속한 사회와 인류 전체가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 말을 적용하는 대상이 바뀌면서 의미가 약간씩 달라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알퍼트가 말하는 ‘충분함’이란 인간의 삶 속에 있는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발생하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 충분함의 반대편에는 ‘위대함’, 즉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상태를 어떻게든 결점이 없는 상태로 바꾸기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태도가 있다. 알퍼트는 ‘위대함’이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불행, 사회 문제, 나아가 전지구적 과제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위대함’을 추구하는 개인과 사회가, 무의식적이든 의도적이든 극복해야 할 불완전함과 결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알퍼트는 이런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담론을 분석한다. 개인의 ‘위대함’을 떠받드는 윤리학적 논의,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부추기는 사회 정치 사상, 우리가 ‘위대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벌인 일들의 결과로 만들어진 지금 우리 세상의 모습이 이 담론에 포함된다. 조금 더 학술적이고 딱딱하지만 구체적인 단어로 바꿔 말하자면 정치적 자유주의와 그 반대자들이 능력주의를 두고 논의하는 내용, 경제적 자유주의 또는 자본주의, 기업가정신을 퍼뜨리며 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유명한 경영자(콕 집어 말하자면 빌 게이츠)와 투자가들이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우리 시대 ‘위대함’ 태도의 개인적 기반은 단언컨대 능력주의다. 하지만 많은 비판가들이 지적하듯 능력주의는 실제로 능력 있는 사람을 대우하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있(었)으니 그 지위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강변하는 사후정당화의 논리로 동원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 책에도 자주 인용되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마이클 샌델을 비롯해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는 점이다.


하지만 알퍼트는 이런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그 이론적 근본에서까지 ‘위대함’을 떨쳐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능력주의는 개인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그에 따라 비판자들은 능력주의 비판에서 자유주의 비판으로 옮겨 가며 반자유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자유주의는 대체로 고전적인 귀족주의나 엘리트주의로 이행하기가 매우 쉽다.


바꿔 말하면,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시장 속 무한 경쟁은 영역과 규모를 가리지 않는 승자 독식을 허용한다. 일테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미래에도 돈을 더 많이 벌고(금융 상품 투자에서 발생하는 격차) 잘생겨지고(성형수술) 인기도 많으며(플렉스로 인플루언서 되기) 착한 데다가(쪼들릴 일이 없음) 건강하게 오래 살기까지(각종 건강관리 서비스 구매) 한다. 그래서 반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영역을 명확하게 구별해, 각 분야에서 노력하는 것은 존중해 주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쉽게 넘어갈 수 없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퍼트가 보기에 이런 발상은 각 영역에서의 ‘위대함’을 여전히 부추기고 그 영역 안에서 격차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어그러진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할, 사회가 정한 암묵적 기준에 따르는 상대평가의 늪에 집단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저 사람은 나보다 어떤 점에서 위대한가’ 또는 ‘어떤 점에서 위대하지 않은가’를 일단 평가한다. 이후 더 위대한 사람은 우러르거나 시기 질투하고, 덜 위대한 사람은 불쌍하게 여기거나 깔본다. 어느 쪽도 우리를 흡족하게 할 만한 진실된 인간관계는 아니다.


이런 종류의 관계는 동시에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만드는데, 보통은 ‘나는 왜 위대하지 못할까’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두 관계 중 어느 쪽이든 내 부족함이 드러나고,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주의와 상대평가에 맞서는 ‘충분함’의 무기는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가치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어떻게 발견되고 인정받게 됐는지, 능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는 어떻게 얻었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 등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러면 그 능력을 지닌 사람의 노(오)력에만 공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대하다’고 믿게 만드는 이런저런 잣대들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고, 아주 빠르게 바뀌기도 한다. 그런 덧없는 것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도 짧다. (덧붙이자면, 알퍼트는 이 주장을 하기 위해 고사성어 새옹지마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는데, 아마도 동아시아 문화에 익숙지 않은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서 그런 것 같다.)


개인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이어서, 알퍼트는 정치 경제 사회 체제에 관한 논의로 넘어간다. ‘위대함’ 체제의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 적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가져가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능력주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그에 더해 부의 재분배 문제가 다뤄진다. 한 사람(예를 들어 빌 게이츠)이 어지간한 국가의 국내총생산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 그 사람이 그럴 만한 능력과 그에 따른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가 능력이나 자격과 관계없이 부의 집중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집중은 다른 사람이 ‘충분한’ 삶을 누리는 데, 즉 불완전함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원을 쓰는 것을 방해하고, 그 문제를 그 사람의 삶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런 결과가 나오도록 방치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삶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가. ‘충분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되묻는 지점이다.


다른 한 가지 결과는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는 상황이다. 어떤 사회든 상대적으로 많은 자원을 얻는 방법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으며,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얻는 길은 훨씬 더 좁다. 이를테면, 이과 수능을 잘 봐서 의대에 간다든가, 멋진 외모와 춤솜씨로 톱티어 아이돌이 된다든가 하는 것. 자원을 위해 경쟁하는 사회에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그 좁은 길로 사람들이 몰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실제 자기가 지닌 잠재적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도 그에 걸맞은 적절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 책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능력은 언제나 기회보다 많다.” 알퍼트는 이런 비극이 각 개인들에게 손해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손해라고 주장한다. 그 능력이 기회를 얻어 우리 삶을 개선하는 데 쓰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충분한’ 상태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대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개인과 사회뿐 아니라 자연까지 망가뜨린다. ‘위대함’을 추구하며 자원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자연을 이용하는 일을 수반하기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의 소유는 자연을 착취하면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라고 쓰고, 한국을 포함한 제1세계 자본주의 선진국 시민이라고 읽는다)가 누리는 삶을 지속하기에 지구는 ‘충분하지’ 않다. 그 증거는 차고 넘치며, 기후 위기라는 현실로 우리 눈앞에 와 있다.


이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줄 혁신적인 기술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없다. 연구 중이라는 몇몇 프로젝트도 나름의 한계를 갖고 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자연을 덜 착취하도록 이끌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에 관한 알퍼트의 논의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특정 상품 단위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천연 자원 사용량은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품 사용량의 증가가 그 감소분을 언제나 상쇄해 왔다. 그뿐 아니라 그 상품을 만들기 위한 여건이 되는 다른 설비나 기술은 상품 사용량의 증가에 따라 훨씬 더 많은 천연자원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기후 위기 해결을 과학 기술 발전에 기대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봤을 때, 아주 좋게 표현해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충분한’ 수준으로 우리 삶의 질을 약간 떨어뜨리면서 자연을 덜 착취해야 한다. 동시에 자연을 덜 착취하는 방식으로 ‘충분한’ 수준의 삶의 질을 다른 나라의 시민들에게 보장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쩌면 인류는 머지않은 미래에 더는 지구에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알퍼트의 결론이다.


이렇듯 ‘충분함’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구적 맥락에서 약간씩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 삶 전체를 규정하는 단어로 기능할 수 있다고 알퍼트는 주장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어떤 가치가 얼마만큼, 어느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인가. 독자로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지만, 그 답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이 철학책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 일테면 경제학이나 공학의 영역일 테니까.


다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충분함’을 더 분석해 본다면, 두 가지 의미를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철학적인 의미까지 포함한) ‘충분한’ 다원주의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내가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그걸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앞세우고, 그 가치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문제는 해결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이 되든 안 되든, 그게 내 행동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불확실성이다. 이 불확실성 앞에서는, 한 가지 가치에만 따르며 내 행동을 결정하면 해결이나 성공보다는 실패 가능성이 더욱더 커진다. 그러니 ‘충분한’ 삶을 살고자 결심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위해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담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천의 감각이다.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도덕적 선택 상황에 대답은 법전이나 제품 사용 설명서에 써 있는 것처럼 단일하지 않다. 하지만 비슷한 유형의 상황을 여러 번 접해 보면 그리고 여러 번 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들어보면, 멀쩡한 인간으로서 적절한 선택은 대개 몇 가지(때로는 한 가지)로 수렴한다. 알퍼트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 수렴하는 선택지는 ‘적절하다(중용).’ ‘적절함’이라는 말은 ‘충분함’만큼이나 모호하지만, 핵심은 나를 포함해 사회 전체가 그 적절함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으며, 또 그 적절함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충분한’ 삶을 향한 열망이 사람들에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충분한’ 삶을 ‘충분히’ 많은 사람이 누리기 위해서 이 책에서 제안하는 여러 제도가(당장 기억나는 것으로는 대학 입학자나 국회의원 선거에 추첨제 적용이라든가,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널리 알려진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것들), 최소한 학술적인 영역에서는 이런 책에서 인용될 만큼 한번쯤 진지하게 다룬 적이 있다는 것도 덧붙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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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심리학 - 사소한 우연도 놓치지 않는 기회 감지력
바버라 블래츨리 지음, 권춘오 옮김 / 안타레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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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노력하면, 운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 문장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펼쳐 보이는 정도의 빌드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겉보기에 모순이기 때문이다. 운이 좋은 사람이란 아마도 운 좋은 사건 즉 행운을 많이 겪은 사람을 가리킬 텐데, 행운이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다. 의지에 따른 노력으로 행운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신이거나 악마임에 틀림없다. 책을 읽기 전까지 저 문장에 대한 내 해석은 이랬다.


이 문장을 의미 있는 말로 만들기 위한 이 책의 첫 번째 단계는 ‘운이 좋다’는 말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책 제목과는 사뭇 다르게 이 책의 앞부분, 범위를 조금 더 넓히면 거의 1/3은 ‘운’에 대한 인문학적 배경 설명이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운이 좋다는 말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그에 대한 현대적이고 수학적인 접근법까지. 이 부분을 잘 따라가면, 운이 좋다는 것은 사건의 특성이 아니라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건은 무작위로 벌어진다. 누군가에게 많이 벌어지거나 적게 벌어지는 것 자체가 사건이 무작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김씨가 두 번 로또 1등이 되는 동안 이씨와 박씨는 2등은커녕 5000원조차 못 받는 것이야말로 진짜 무작위의 결과라는 뜻이다. 이걸 잘 보여 주는 자연 현상이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와이토모의 반딧불이’다. 불을 내는 생명체들이 정말로 무작위로 있었다면, 오히려 간격은 일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김씨의 로또 당첨이 행운인 이유는 행운이 김씨에게 일어나서가 아니다. 이씨와 박씨가, 우리가 김씨를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방향에서 해석의 문제를 다시 보여 주는 실험도 등장한다. 두 종류의 카지노 룰렛 판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하나는 흰색, 검은색, 회색이 3등분돼 있는 판이고, 다른 하나는 18등분된 조각에 차례로 흰색, 검은색, 회색이 배치돼 있는 판이다. 최씨는 3등분 판에서 검은색이 나와 돈을 땄고, 황씨는 18등분 판에서 검은색이 나와 돈을 땄다. 누가 더 운이 좋을까?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의 2/3가 운이 더 좋은 쪽은 황씨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도, 이 부분을 읽을 때 ‘당연히 황씨 아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설명에서 알 수 있듯, 두 룰렛 판에서 검은색이 나올 확률은 똑같이 1/3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나는) 황씨가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어쨌든 그 사람들(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점에서, 해석의 문제다.


두 번째 단계는,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라는 내면의 문제를 생물학적, 신경생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인 접근이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심리학 실험이나 일화가 등장한다. 머리에 쇠파이프가 관통해 뇌가 망가진 뒤 성격이 바뀐 사람이라든가, 우리가 ‘○○의 저주’라고 부르는 사건들의 실체라든가,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아는 것으로 유명해진 당나귀 등등.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잡식으로 알아 두면 좋을 신기한 실험들도 등장한다. 글자와 색깔을 헷갈리게 배치해서, 예를 들어 파란 글씨로 ‘빨강’이라고 적어 놓고 ‘글자는 무슨 색인가요?’라거나 ‘뭐라고 써 있나요?’라고 물어보면서 인지 능력을 시험해 보는 실험 같은 것은 직접 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결과, 해석의 차이가 신경생리학적 차이로 드러난다. 어떤 사건이 행운이라고 생각할 때 활성화하는 뇌의 부위와, 불운이라고 생각할 때 활성화하는 부위가 다르다. 같은 부위라고 해도 활성화하는 정도가 다르거나, 다른 식으로 반응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를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경생리학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으로 넘어간다. 물론 이 차이를 알아 보기 위해 동원하는 도구인 뇌파나 자기공명영상(MRI) 등이 아직 뇌에 관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책의 지은이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해석이라는 불투명한 과정을 신경생리학적 결과물이라는 그나마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형태로 전환해 관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훌륭한 성과다.


이렇게 신경생리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스스로를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특징은 이렇다. 첫째,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극에 목표 의식, 이 책의 용어를 따르자면 기대를 갖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둘째, 무작위로 일어난 사건을 감지하면 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유형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셋째, 자신이 구성한 유형에 근거해 그 사건을 자신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통제가 아니라면 최소한 이해하기는 했다고 믿는다. 넷째, 자신의 통제 방법이나 이해가 실제 세계와 잘 들어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그 틀을 버리고 다시 유형 모색을 시작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운이 좋은 사람의 특징이다. 스스로를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와 정반대다. 자극에 둔감하고, 유형을 찾아내지 않고 그냥 일어난 사건이라 치부하며, 세계는 근본적으로 통제불가능한 것이라고 믿으며 불안해한다. 이런 면모 각각이 신경생리학적으로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다.


세 번째 단계는, 운이 좋은 사람의 신경생리학적 특성에 가깝도록 우리 스스로를 바꾸면, ‘운이 좋은 사람’이 된다는 주장이다. 뇌의 구성은 해석의 경향과 연결돼 있으니, 해석의 경향을 바꾸려는 노력으로 뇌의 구성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우리(내) 뇌의 구성 자체가 내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기에 단숨에 이를 재조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래서 운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지금까지 쌓아 온 많은 해석에 대항할 새로운 해석을 쌓아 나가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뇌의 가소성(유연함)이라는 흥미로운 성질 때문에 이런 일은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 있다.


신경생리학적 근거를 동원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려는 책의 상당수가 가소성을 마지막 열쇠로 내세우고 있기에, 이 책의 결론에 다소 맥 빠지는 면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운이라는 가장 비과학적인 단어를 해석하는 이 책의 접근법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첫 번째 덤이고, 운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이런 실험 설계까지 했구나 하는 다채로운 실험 이야기는 두 번째 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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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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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독서 코너를 제가 맡은 지 딱 100번째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매주 수요일 이 자리에 앉아 좋은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방송을 들어주신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저 곰선생과 함께 해주신 모든 청취자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대학 동기인 민사린과 무구영. 학교에 다닐 때는 그저 그런 사이였고 졸업 후엔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몇 년 뒤 우연히 서점에서 마주치곤 다시 연락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 결혼까지 이어지고, 민사린은 낭만적이고 멋지면서 상대 부모와도 즐겁게 지내는 그런 결혼생활을 꿈꿉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생일, 시부모의 결혼기념일, 제사와 설을 거치면서 민사린은 점점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가사노동을 비롯해 모두 자신에게 지워지는 이른바 집안일 관리의 부담, 자신의 처지가 부당한지 아닌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묘한 답답함을 이해해주지 않는 남편 무구영까지. 결혼 생활이란 이런 것이었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런 결혼 생활을 하면서 사는 걸까, 민사린은 혼란에 빠집니다.


민사린과 무구영의 결혼 생활은 어떻게 될까요? 민사린이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한 답답함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2018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작 <며느라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결혼입니다.


학생인 아이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 청취자 여러분이라면 아마도 결혼을 해보셨거나 지금 결혼생활을 하시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라서 결혼에 관한 경험도 없고, 그러니 결혼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게 오히려 주제넘은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이 만화가 눈에 들어왔고 이 자리에까지 가져온 이유는, 제가 아는 한 결혼이라는 사회적 결합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거리를 두고서 낯설게 보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 이 만화에서 보여주는 결혼의 단면이란 ‘누군가는 힘들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차별’입니다. 힘들어지는 그 누군가는, 이 만화의 제목이 보여주듯 결혼 생활에서 며느리의 위치에 놓이는 사람들이고요. 며느리가 아닌 사람들이 며느리에게 온갖 짐을 지우는 것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며느리인 사람조차도 상황에 따라 자신이 며느리가 아닌 위치가 되면 며느리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짐이 되는 존재로 바뀝니다.



그럼에도 며느리라는 사회적 위치는 이 상황에 대해 “싫어요” “아니오”라는 답변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가족에겐 잘해줘야 한다는 사회적 규칙 때문에, 더군다나 내 남편의 부모라는 대하기 어려운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 사람에겐 그 규칙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나(또는 너) 하나만 조금 양보하고 참으면 모두가 편안하다”는 공기 때문에, 며느리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의 구조 속에서 그 역할을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차별의 피해자가 됩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며느리가 되는 기간을 이 만화는 며느라기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차별인 이유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같은 상황인 남편에겐 이런 짐이 거의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죠.


이런 차별이 존재하지 않고, 또 이것이 구조적인 게 아니고 결혼한 사람들의 일부에게서만 벌어지는 일이라면, 명절 직후에 이혼율이 높게 나타나는 ‘추세’가 있다는 우리들의 상식 또한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바로 이 만화의 절정 부분이 설날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 만화에 대해 설명드릴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인 것 같고, 더 풍부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지닌 청취자분들이 각자 이 만화를 읽으신 뒤에 느낀 점을 정리해보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한 번 가지고 와 보았습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콘텐츠,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제가 함께 추천드리는 콘텐츠는 드라마 <며느라기>입니다. 이 만화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서 카카오TV에서 오리지널 드라마 콘텐츠로 제작했습니다. 드라마 역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카카오TV라는 OTT를 대표하는 콘텐츠가 됐습니다. 지난주에 시즌2가 마무리됐네요. 배우 박하선씨가 민사린 역을 맡아서, 결혼 과정에서 지니게 되는 미묘한 감정선을 잘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드라마다 보니, 만화에 비해 조금 더 자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결혼에서의 차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만화의 표현법과 드라마의 표현법, 만화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다른 차별들을 드라마를 통해 접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인사

오늘이 여러분과 100번째 만나는 시간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제 개인 사정 때문에 오늘 방송을 마지막으로 수요독서에서 하차합니다.


제가 방송을 막 시작할 무렵 함께 해주셨던 공동진행자 최선생님과 사회자 민우님이 저를 이 자리로 이끌어주셨고, 이렇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청취자 여러분을 찾아뵀습니다. 매주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우리 교육진담 수요독서 코너에서 학부모와 학생 청취자 여러분을 매주 만나면서, 어떤 책을 읽으면 우리 학생들이 교양 있는 성숙한 시민이 될 수 있을까 또 동시에 획일적인 입시 관련 독서록 환경에서 남들 다 읽는 뻔한 고전이나 베스트셀러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돋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책 100권을 선정하고 정리해 왔습니다. 제가 이 방송에서 여러분께 건네드린 정보가 제 이야기를 들은 모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제 소원을 이룬 것이니 정말 기쁠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육진담 수요독서를 저와 100주 동안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훌륭한 시민으로서 바람직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또 온갖 듣지도 보지도 못한 주제의 지문이 턱턱 출제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독서 비문학 영역에 당황하지 않고 대비하기 위해, 즐거운 독서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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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무정한 세계 -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
정인경 지음 / 돌베개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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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분 퀵서비스

여러분의 기억 속으로 책을 배달해드리는 2분 퀵서비스!


일제강점기에 나온 한국 소설을 보면 가끔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사랑 이야기든 항거 이야기든 방황 이야기든, 소설의 줄거리와 연관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과학과 기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장면이나 과학과 기술과 관련해 지나치리만치 상세하게 늘어놓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장면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맥락도 없어 보이고 근본도 없는 것 같은 이런 장면.


하지만 학생 청취자 여러분이든 학부모 청취자 여러분이든 과학과 기술이라는 단어 앞에선 주눅이 들고 잘해야 할 것만 같고 못하면 시대에 뒤처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이런 것을 보면, 100년 전에도 그럴듯한 소설을 쓸 정도의 지식인들도 우리처럼 과학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학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 사회로 흘러들어 왔길래 이토록 우리를 괴롭히는 것일까요? 이광수, 염상섭, 이상, 박태원의 소설에서 이상하리만치 튀는 장면을 뽑아 읽으며, 그 안에서 뉴턴과 다윈과 아인슈타인과 에디슨을 끄집어내는 독특한 책, 정인경의 뉴턴의 무정한 세계를 읽어보겠습니다.



2종 보통 키워드

꼼꼼하게 책을 읽은 당신을 위해 핵심을 짚어드리는 2종 보통 키워드입니다.


제가 꼽은 키워드는 한국의 근대과학기술입니다.


이 책에서 주목해 볼 만한 부분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과학기술, 과학기술적 지식의 상대화입니다. 100년 전 일제강점기 때도, 학부모 청취자들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개발도상국 시절에도, 또 이미 세계적인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지금도 과학과 기술은 언제나 우리가 선망해야 할 대상, 성취해야 할 목표로 간주됐습니다. 이런 태도는 과학기술적 지식과 그 축적 과정은 객관적이며 절대적이고 항상 옳다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과학기술적 지식 또한 그 지식을 둘러싼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이라는 점을 설명하려 애씁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에디슨의 생애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특히 이들이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고, 누구와 경쟁했으며, 극복하고자 하는 장벽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정보가 주를 이룹니다. 이걸 설명하는 부분에선, 다른 과학사 책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보다 조금 더 깊게 이 네 사람의 생애를 접해보실 수 있습니다.


주목해 볼 부분 나머지 하나는, 이 과학기술적 지식이 한국에 어떤 과정을 거쳐 자리 잡았는지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총 네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 장이 앞에서 말씀드린 네 작가의 소설로 시작합니다. 이광수의 무정,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입니다. 교육 방송을 들으시는 청취자 여러분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한국 근대 문학의 고전들이죠. 대체 왜 이 고전들에서, 소설 한 중간에, 뜬금없이 과학 장광설을 읊어대는가? 이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자 동시에 해명해주는 부분입니다.


이런 면은 3장과 4장에서 두드러집니다. 서양의 과학기술계가 전기의 원리와 발전 송배전 활용 등 연구 끝에 축적한 방대한 과학기술적 지식은, 경성의 불야성을 만들어내며 박태원이라는 식민지 지식인에게 경이라는 감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권력이 세운 최초이자 최대 규모 수력발전소의 전기는 오로지 일본계 비료공장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서양에서 현대 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는 동안, 일본은 주요 연구소에 국비 유학생을 보내 이들을 빠르게 따라잡고 1949년에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까지 배출해냅니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과학기술 관련 고등교육기관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조선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서 최고 수준의 천재였던 이상 같은 인물도 건축 실무기술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경성고등공업학교에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죠. 1945년 해방 직전까지 그럴듯한 학술지에 논문을 내고 활동하던 물리학자가 딱 네 명이었다고 하니, 내선일체를 내세운 겉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실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이란 한국 문화에, 1800년대 후반 이후 가해진 여러 폭력의 양상 가운데 하나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항상 옳다고 하기엔, 수용과 확산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 이뤄진 측면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여전히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도 그 과정의 결과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2제 아이랑 투게더

더 재미있게 읽을 당신에게 보내는 콘텐츠, 2제 아이랑 투게더입니다.


제가 꼽은 책은 박태호의 <오답이라는 해답>입니다. 지난해 출간된 아주 따끈따끈한 책인데요, 오늘 우리가 다룬 책과 비슷한 ‘한국의 과학기술’이라는 영역과 주제를 조금 가볍고 넓게 다루는 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과학기술이 한국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수없이 많은 웃픈 일들을 모아놓아서, 상식을 쌓는다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도움이 되는 책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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