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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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단어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뛰고 손이 절로 가는 아름다운 그 이름,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며 떠올리기 힘들어지는 그 단어. 정은정 농축산인의 『대한민국 치킨전』은 치킨이란 단어와 엮여있는 연관관계를 산산이 조각내버리는 책이다.


난 이 책을 읽기 전에 XSFM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출연분을 먼저 들었다. 그리고 그 분량이 정말 이 책을 사고 싶게 만든다. 조금은 아쉽게도, 방송에 자신의 경험담 몇 가지를 더 추가한 것 이외에, 방송과 책 사이에 별 차이는 없다. 심지어 방송에서 그렇게 재미있게 말했던 에피소드 대부분은 책에 수록되었다. 만담과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라면 책을 읽기보단 팟캐스트를 듣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팟캐스트를 들은 뒤에 이 책을 읽으니 독특한 효과가 생겼다. 거의 오디오북을 읽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책을 읽는 속도 자체는 약간 느려지지만, 그만큼 상상하는 맛이 있어 책읽기가 지루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약간은 덜 정제된 상태의, 술술 읽히는 구어체로 쓰인 책이다. 물론 말하는 것을 거의 그대로 옮긴 양식이니 만큼 비문이 제법 있지만, 이것은 일장일단이 있는 스타일의 문제라서 굳이 문제삼을만한 부분은 아니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대한민국 치킨전』은 치킨백서라고 할 만큼 치킨에 관한 모든 것을 써놓은 책이다. 후라이드 치킨의 수입의 역사, 종류와 그에 따른 제작법, 주요한 배달음식이 된 이유, 치킨 자체를 둘러싼 산업구조, 완제품 치킨을 넘어서서 치킨을 만드는 원료의 산업과 그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까지. 이 책 속에는 어디선가 지나친 풍경, 마주했던 사람들, 내가 지불한 돈이 담겨있다. 가히, 책 속에서 튀김기름의 내음이 난다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치킨에 관해 즐거운 이야기만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서술에 가깝다. 즉, 실체 없이 지배하는 이른바 “자본”이 우리 삶을 어느 정도까지 잠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소재로서의 치킨에 가깝다. 닭은 하림이, 기름은 해표가, 밀가루는 제일제당이, 가게의 인테리어와 주방은 BBQ가, 배달은 배달의민족이 지배하는 시대다. 물론 이들의 규모와 성격을 자세히 따지자면 각자의 특징이 있겠으나, 우리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것들이 우리 삶의 가장 밑바닥마저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성격을 지닌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넓은 의미에서의 우리 생활세계의 “수직계열화”다. 


“수직계열화”의 문제는 우리 삶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그렇게 닭을 많이 먹게 되니,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정말 닭을 싸게 먹게 된 것일까? 꼭 그렇지도 않다. 업계의 주요 브랜드의 치킨값은 2만원대를 오르내린다. 이렇게 비싸진만큼 치킨집 사장들은 행복해졌을까? 치킨값이 올라서 닭을 덜 먹게 되었으니, 그만큼 덜 죽어도 되는 중병아리들은 행복할까? 그렇다고 치킨값이 싸지면,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주 오래 전에 진중권이 썼던 표현을 다시 언급하자면, 수직계열화는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해를 사회화한다.” 늘어나는 행복은 누군가에게 이전되고, 줄어드는 행복은 어딘가로 전가된다. 


책에선 마무리 부분에만 살짝 언급되지만, 글쓴이 정은정 농축산인은 <그것은 알기 싫다>의 마지막 회에서 거듭 강조했다. 치킨의 수직계열화는 다가와서는 안되지만 이미 지나간 우리의 미래라고. 수직계열화에 성공한 산업 분야는 치킨 뿐만이 아니다. 동시에, 아직 수직계열화되지 않은 다른 수많은 품목이 그 대열에 들어서길 기다리고 있다. 특히 먹거리 산업의 변화는 단순히 가격과 품질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생명을 저당잡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책의 재미와 별개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재미있는 책이다. 농축산인의 말에 따르면, 다음 타깃은 삼겹살이다.


이 책의 이런 의미와는 별개로, 책 후반부로 갈수록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이 많아진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물론 배치되는 맥락과 표현방식이 약간씩 달라지긴 하지만, 책이 짧은데다 한 번에 후루룩 읽을 수 있는 탓에 했던 이야기를 또 언급하면 금방 떠오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책의 큰 그림은 4장인 「치킨 약전」에 챕터 제목 그대로 집약되어 있다. 다른 디테일 없이 치킨에 관한 뼈대만 추리고 싶다면 이 장만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치킨전을 읽으며 치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글의 앞머리에 쓴 것처럼, 이제 치킨은 더 이상 행복의 동의어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먹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은 다음날 나는 핫크리스피를 먹으러 KFC에 갔고, 그 뒤엔 친구들과 월드컵 예선 멕시코전을 보면서 버켓을 뜯었다. 하지만 아마도, 치킨에 대해 걱정하는 내 마음과 크리스피의 튀김옷을 향해 손을 뻗는 내 손의 불일치를 평생 고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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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피엔스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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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열풍이 불었던 책을 이제야 읽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잘 읽힐만한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좋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은 뒤에야 이 책을 읽게 되어서, 약간은 싱겁고 실망한 부분도 있다.)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연대기다. 이 말을 강조해둘 필요가 있는데, 인간의 역사 이상의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기록과 함께 시작된다. 기록에는 문자가 동원된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 기록되지 않았지만 인간이 살았던 것은 분명한 시대를 선사시대/신화의 시대라고 부르곤 한다. 그러나 사피엔스의 연대기는 신화로도 기록되지 않은, 정말로 까마득한 옛날로부터 시작한다. 인간, 그러니까 호모 ‘속’이 다른 종들로부터 분리되었던 그 시기 말이다. 연대로 따진다면 대충 백만 년 단위다. 호모 속은 자연계에서 결코 강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호모 속이 여러 종으로 분화해 에렉투스, 하빌리스, 네안데르탈, 사피엔스가 된 뒤 한참 동안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호모 속이, 그 중에서도 물리적으로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사피엔스 종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기까지, 다섯 번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렇다. 상상력의 생물학적 토대를 갖춘 인지혁명,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농업혁명,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가능케 한 원칙으로 작동한 제국(주의)체제, 사물의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교환의 생활 생태계를 만든 화폐(와 상업 혁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꿔놓은 과학 혁명.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른 모든 사건들이 그렇지만, 하라리의 관점에서 이 사건들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인류가, 아니 호모 사피엔스 종의 개별 구성원들이 이 역사의 과정을 뒤집어 과거의 생활방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상상력이라는 능력을 얻게 된 이상, 모든 인류는 로빈슨 크루소가 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개인의 관점에서는 노동량은 늘어나고 소득은 줄어들고 생활의 반경은 줄어들었지만, 농사를 지은 뒤에 수렵채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 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제국 체제의 성립 이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제국 체제의 수장이 되고 싶어했지 체제를 해체하는 아나키적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진 않았다. 화폐의 이점은 단순한 물물교환체제의 장점을 압도했다. 그 어떤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장벽도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사피엔스는 뒤돌아볼 새도 없이(또는 뒤돌아볼 수도 없이) 지금의 위치까지 달려왔다.


이 다섯 번의 혁명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역사 이전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행된 과정이었다. 나머지 세 가지는 이른바 “고전”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또는 문화인류학/고고학 연구를 통해서 해독할 수 있는 문자기록을 살펴보며 읽어낼 수 있는 과정이다. 내 눈에 더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었던 부분은 앞의 두 가지 혁명, 선사시대 이야기였다. 최근 몇 십년 동안 이 시기에 대한 연구성과는 말그대로 “풍부하게” 쌓였다. 이전의 인류학자들이 범했던 인종주의적 편견도 어느 정도 극복된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기에 사피엔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 수 없기 때문에(말 그대로 자료가 없으므로!) 상상이 더 많이 개입할 수도 있다. 압도적으로 많이 인용된 각주 속에서, 독자는 놀라운 연구성과와 그에 경합하는 상상력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추측컨대, 상당수의 한국어 독자에게 이 책의 초반부 이야기는 기존에 알던 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농업혁명으로 인간은 더욱 불행한 상태에 빠졌다는 것, 수렵채집 생활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고되지 않았다는 것, 그 시기에도 이미 인간은 꽤 대규모의 사회를 구성할 만큼 충분히 인지적으로 발달해 있었다는 것, 그 덕분에 만년 전에도 인간은 그 때부터 생태계의 파괴자였다는 것. 그간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바뀐 “고대 사피엔스의 상”을 압축적으로 전해준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사피엔스의 삶이 우리의 삶의 모습과 결코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서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전반부는 매우 훌륭하다.


이 책의 후반부의 강점은 전반부의 풍부함과는 사뭇 다르다. 주석이 양이 대폭 줄어들고, 대신 하라리가 나름대로 정리한 인류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쉴틈없이 펼쳐진다. 인용표시가 없는 이유는 개별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정확하게(선사시대에 대한 서술처럼 “과학적으로”) 하려면 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기존에 알고 있던 엄청난 사건이든,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그가 보기에 아주 의미가 있는 사건이든, 그의 서술 앞에서는 대체로 공평하게 똑같은 정도로 “후려쳐진” 상태로 책 속에서 펼쳐진다.


이런 축약은 “사피엔스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저자의 목적에 잘 물려들어간다. 그 생물학적 토대는 이미 선사 시대에 모두 갖추었지만, 어쨌든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세 가지 혁명, 즉 제국(주의)체제와 화폐(와 상업) 혁명 그리고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설명이 그렇다. 이 세 가지는 처음에는 각자의 이유와 목적을 갖고 시작되었지만, 과학혁명의 발생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피엔스의 종적 변화라는 한 차원 더 높은 목적을 위해 기능을 수행한다.


광범위한 단일통치체제만을 의미했던 제국 체제는 정복 사업을 통해 과학적 지식의 확장에 이바지한다. 과학적 지식의 확장은 기술 수준의 향상을 불러오고, 재화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려 자본을 증식시킨다. 자본 증식에 의한 상업의 발전은 다시 제국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하라리가 지적하기에, 이런 상호 피드백이 바로 전근대적이고 고립된 제국체제와 근대적 제국의 차이다. 역사 속에서, 특히 근대 이후 일어났던 모든 커다란 사건은 이 근대적 피드백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피드백을 설명함으로써, 예전에는 개별적인 것처럼 보였던 각 사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렇게 흩어진 구슬을 하나의 서사에 꿰어놓은 하라리의 필력에 감탄하는 동안에도, 그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는 독자의 몫이다. 인문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의 후반부에 언급되는 여러 사건과 그 함축에 관한 논의가 그렇게 몹시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상업이 인류 사회에 주는 충격, 제국의 의미와 그 합법성, 과학혁명의 실제 진행과정. 이 모두는 지금 이 시대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이 고민하고 있는 커다란 주제들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후려쳐진 하라리의 설명의 일부 또는 전체에 반대할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중에 특히 제국주의에 다소간 유보적인 그의 시선이 못내 아쉽고 불편했다. 우선 단일통치체제와 탄력적 국경 그리고 다문화주의 조합으로 구성된다는 제국 체제에 대한 다소 느슨한 규정은(내가 아는 한 이것이 “제국” 개념에 대한 최근의 트렌드다), 제국 체제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해주기도 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유형의 제국 체제에 대해서는 눈이 어두워진다. 이 통찰과 맹점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그 “또 다른 제국체제”인) 일제의 피해자의 후손이라는 우리의 위치 때문이다. 하라리와 비슷한 수준의 거시적 관점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아마 서유럽과 영국/미국의 유형과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인의 경험이 우리와 같을 수 없고 그래서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 간디와 김구의 차이가 벌어지듯, 영국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완전히 같다고도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부분은 현재 연구자들이 열심히 파고 있으니, 나같은 한량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것 같긴 하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서 단번에 떠오르는 게임이 있을 것이다. 농업, 명상, 종교, 화폐, 신학, 관료제, 시장경제, 자연과학, 차차 테크트리를 밟아서 미래 기술까지. 바로 시드마이어의 문명이다. 물론 그 게임이 다루는 시대는 이 책이 다루는 시대에 비해 훨씬 좁긴 하다. 기원전 4천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 책이 주는 역사에 대한 희열과 몰입감만큼은, 세계 3대 폐인게임 중 하나라고 불리는 그 게임에 못지 않다는 말만은 남겨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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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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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이 글은 주로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건축물이라는 대상에서 파생되는 여러 미학적 단상들을 모아놓은 글이다. 그래서 건축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삶도 다루고,난해한 미술작품도 다루고, 몇몇 학자와 비평가의 이름도 나온다. 말하자면, 건축을 소재로 삼아서 꾸려놓은 미학 선물세트인 셈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물이 가치에 관해 당신에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연습하면 충분히 사물들의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통에게 사물이 말을 한다는 문장은 수사적 의미를 뛰어넘는다. 사물은 자신의 물성(물적 특성)을 통해서 진짜로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 매끈하게 잘 빠지고 군더더기가 없는 대상은 절제와 검소를, 반대로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대상은 아름다움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의미란 결국 인간의 활동의 결과물이다. 그 활동을 우리는 흔히 접근 또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대상의 물성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물성에 의해서 고정되어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해석에 대해서 열려있다. 해석의 차원에서 절제와 검소는 투박과 무미건조와 유의어(또는 동의어)다. 그 모든 전달사항은 동일한 물성 속에 갇혀있으며, 인간의 이해와 조우하는 현상을 통해 해방되길 기다린다. 물성의 잠재성과 해석의 능동성이 만나는 그 순간 우리는 대상에서 가치, 특히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이것이 “사물이 말한다”는 주장에 대한 보통의 설명이다.


사실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말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장인 “사물이 말한다”는 소리는, 현대미학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특정한 전통이 “해석으로서의 존재”라는 구호를 내세워 채택하고 있는 기본 입장이다(라고 나는 이해했는데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해는 의미 이상의 무언가, 더 나아가서는 어떤 사물의 존재 여부와 그 양상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이다. 이 과정에서 그 어떤 이해도 임의(무작위)적이지 않으려면, 거의 시에 다다른 사실인 “사물이 말한다”는 견해를 채택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처한다. 말하는 사물들이 나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해석(이해)을 자신과 세계 모두의 존재양식이 되는 인간의 근본 조건. 대충 요약하면,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견해가 이렇다.


그렇기에 보통의 견해는 그렇게 낯설은 주장은 아니다. 보통의 장점은 그 견해를 이야기해주는 과정에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에 하이데거의 책을 읽고 자신있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금 처지가 낫긴 하지만, 가다머는 또 어떤가? “말하는 사물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서 예술적 활동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한 두 사람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책을 읽으면 “으읭?”과 아무말 대잔치의 연속이라는 느낌 뿐이다. 반면 보통은 인간의 삶과 건축과 예술에 대해 쓰기 위해 성실히 수집한 자료를 천천히 내보이며, 어떤 사물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렇게 그는 사물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가 되며, 동시에 미학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가 된다. 생활에 짓눌린 우리가 놓치는 비현실적 부분을 알려주는, 작두 탄 무당인 셈이다.


물론 해석이라는 활동이 놓인 근본적인 주관성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보통이 우리에게 건네는 대화도 보통의 개인적 생각 이상으로 나아가기엔 걸리는 부분이 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 내 성향 때문에 이렇게 삐딱하게 이 책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야기꾼으로서, 해석 상에서 흥미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러로서 보통의 재능은 높게 살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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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튀프론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20
플라톤 지음, 강성훈 옮김 / 이제이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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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에우튀프론』에서 에우튀프론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경건함은 무엇입니까?” 그 집요함과 경건함이라는 주제, 둘 다 중요하다. 이 두 가지 모두, 좁은 의미에서는 철학의 영역에서, 넓은 의미에서는 학문 전체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이자 소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들은 정의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그건 그래서 그렇고. 이런 정의는 그 한계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는 한, 모든 무엇은 모든 저것이라는 식으로 쉽게 전체를 가리키게 마련이다. 이런 정의는 보편이라는 형식을 띠지만 실제로는 그런 정의를 만들어낸 사람의 편견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보편성을 획득하기란 정말 어렵다.


에우튀프론은 이런 난관에 부딪힌 사람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항변도 해보았다가, 말도 돌려보았다가, 급기야는 “에라, 모르겠다”며 도망을 가버린다. 심지어 자신의 의견이 사회 다수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렇다.


반면에 사람들은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꺼려한다.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귀기울여 듣고, 자신이 이해할만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 반응을 얻어낼 수 있는 말을 건네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삐끗하면, 엉뚱한 답변이 돌아오거나 상대방의 분노를 사게 마련이다.


소크라테스는 성공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일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에 대한 내 평가는 다소 박한 편이다. 집요함 하나만큼은 높이 살 만 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대화상대가 이런저런 말을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이나, 소크라테스 또한 상대방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알면서도 이상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에우튀프론 본인도 긴가민가 하는 부분에선 트릭을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의 핵심으로 꼽히는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받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가?' 에 대한 논의 부분이 그렇다. 상대를 논쟁에서 넉다운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기술을 걸어본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전면적으로 다루는 주제인 ‘경건함’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은 한 번쯤 음미해볼만하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말하듯, 이것은 “신들조차도 합의할 수 없을지 모르는” 유형의 문제다. 호오, 취향, 미추 등, 아마 뭉뚱그리면 가치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대체로 상황에 맞춰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마련이고, 실제로 이것은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반성하지 않는 삶에,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논리적/실천적) 일관성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설사 그것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다가 에우튀프론 마냥 다이달로스의 순환논증에 빠져 허우적댈지라도 이런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현실에서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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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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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생겨 요 몇 달 동안 과학책을 손에 쥘 기회가 많았다. 과학에 관심’만’ 많은 하드코어 문돌이인 내겐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 중엔 유명하지만 읽다가 포기한 책도 있었고(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유명한 저자의 좋은 책도 있었다. 그 중에서 누군가에게 선물해야 할 책을 고른다면 나는 단연 이 책, 『인류의 기원』을 고를 것이다.


가장 첫 손에 꼽아야 할 이유는 글이 정말 편하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한 몫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문장이 짧다’ 정도로 요약될 좋은 글의 형식적 기준 같은 것을 아득하게 넘어서있다. 분명히 한 줄 한 줄이 정보로 가득한 글임에도, (DNA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는 부분을 설명하는 딱 그 부분만 제외하면) 내가 무언가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거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이런 문장이라면, 저자와 편집자가 전하고 싶은 내용은 다 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로 편안하게 글을 쓰려면, 저자/편집자/에디터 셋 중에 하나는 자신의 혼을 갈아넣어야 할 것만 같다. 교정/교열로 돈을 벌고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역시나 공식적인 기관(출판사나 잡지사 등)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들의 실력은 이 정도구나 하면서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다.


또한, 다른 많은 과학책이 그렇지만,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읽는 사람은 스케일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다. 이른바 인간의 근본문제를 다룬다는 어떤 학문이 있다고는 하지만(굳이 철학이라고 덧붙이진 않겠다),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숫자의 단위에 압도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고인류학은 그 모든 학문들 중에서 가장 소규모인 편에 속하지만(우주력으로 따지면 12월 31일에서도 저녁 쯤이나 되어야 시작되는 일이니까), 역설적으로 이게 정말 과학적 관점에서의 ‘인간’의 일(더 정확히는 호모속(!)의 일)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책에 비해서도 더욱 놀라운 부분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표준적으로 인정되는 철학의 역사의 딱 1000배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듯, 이 책은 현재 성인인 사람들(30대 이상)이 교과서에서는 본 적이 없었을 이야기가 꽤 많다. 데니소바 인 연구결과라든가(이건 정말 이 책에서 처음 봤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밝혀진 호모속(! 특히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인류 사이의 관계, 저자의 지도교수가 지지하는 학설인 인류 기원 다지역 연계설 같은 것이 그렇다. 외모차별이 기본 옵션인 한국사회에서 누군가는 꽤 많이 들어봤을(이른바 ‘개그’ 프로그램에서 많이 나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선가 단어로만 들어본 것 같은 성과를 조금이나마 더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내겐 큰 도움이 되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같은 문돌이들에게 인류학이란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이라는 인상이 강한데, 이 책을 통해 고인류학이라는 분야를 접하면서 그 선입견을 깰 수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한 수많은 빽빽한 정보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챕터 하나를 꼽아보라면, 나는 12장을 꼽을 것이다. 정말로 인상적이었고, 정말로 새로운 정보였으며,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협력과 이타적 태도는 인류를 둘러싼(특히 내가 주로 공부하는 윤리학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그래서 관련된 책도 많이 찾아보았고 정보도 많이 축적해놓았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게임이론에 기반한 수학적 모델링도 알고 있었고, 최후통첩 게임 같은 심리학 실험은 관련 책에서 너무 자주 인용돼서 약간은 지겨울 지경이고, 유전자 수준에서 협력하는 다른 동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간의 협력을 증명하는 생물학자들의 논증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증명과정은 정말 듣도보도 못한 방식이었다. 고인류의 두개골의 어금니 구멍이 뚫려있는지 막혀있는지 여부로 협력의 역사를 증명하다니! 이 정보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수다를 떨 때(혹은 언젠가 수업을 하게 될 때) 써먹으리라 다짐했다.


그럼에도 이 분야가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연구하고 밝혀야 하는 분야라는 것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과학적 태도’를 강조하면서도 사회적 편견의 개입에 계속 노출되었던 이 학문의 역사가 그 문제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외부 사회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고대인들을 식인종으로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첫 챕터, 자신들을 인류의 기원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른바) 강대국들의 다툼, 피부색과 인종에 관한 연구, 고인류 화석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 인류 기원에 관해 서로 대립하는 학설의 지지자가 서로를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하는 학계의 풍경, 인류의 사회화와 아이의 양육의 계기를 둘러싼 아버지 가설과 할머니 가설의 경쟁에 이르기까지. 한 편으로 1과 10만 주어진 상황에서 2,3,4,...,9라는 배열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념을 드러내게 되는 학자들의 처지가 짠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연구 성과를 지켜보고 배우기만 하면 되는 입장에선 사회와 연구가 맺는 이런 관계 자체도 매우 흥미로웠다.


인류의 기원은 정말 좋은 책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아서 좋고, 글이 편해서 좋고, 이 책을 읽은 뒤에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다. 책이 갖춰야 할 삼박자를 다 갖춘 셈이다. 이 책을 같이 읽어보았으면 했던 글쓰기클래스 수강생이 첫 수업만 듣고 개인사정으로 수강을 취소한 바람에 내겐 아픈 기억이 생겼지만(...), 그 분이 이 글을 본다면, 정말 꼭 말씀드리고 싶다. 이 책, 반드시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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