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전쟁은 가능한가? -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
<응용윤리학과 도덕적 딜레마 보고서, 트랙백해놓은 글을 수정, 보충한 것입니다.>
① 평화주의에 대한 내용을 빼고 정의로운 전쟁 이론만 집중적으로 논의
② 기독교 전통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내용을 삭제
③ 비상사태윤리에 대한 내용을 추가
1. 들어가는 말 - 전쟁 비판으로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얼마전 일어난 리비아 내전은 국제 사회에 어려운 숙제를 하나 더 내주었다. 독재자 카다피에 대항한 민중들이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내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대개 시민군 측에 손을 들어주었고, 민주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내전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내전이 장기화될수록 개입의 강도는 약해지고 있으며, 국제질서를 선도하는 국가들은 개입 과정에서 입어야 할 손해를 다른 국가들에 떠넘기기에 바빠졌다. 카다피는 이 개입을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체제가 혁명을 통한 아주 정상적인 정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설령 자신의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내부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며, 개입은 국가의 주권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 벌어지는 관제 시위나 친-카다피 세력의 소요를 볼 때 리비아 내부에도 이런 주장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상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리비아 내전에 대한 개입의 사례는, 사실 아주 최근의 단편적인 사례일 뿐이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쟁은 국제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때로는 개화와 문명의 이름으로, 다른 때에는 자본과 경제적 이득의 이름으로, 또는 도덕의 이름으로 자행될 때도 있었다. 전쟁이라는 과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으며, 따라서 전쟁은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의 주변에 있다. 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그것이 역사에 기록될만한 규모의 사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일은, 만약 일어난다면, 여기에 얽힌 인간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한다. 전쟁은 결코 <람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일 수 없다. 전쟁에 직면한 개인은 불안하고 일관되지 못한 일상을 경험한다. 홉스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상태에서는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위 문단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전쟁이 인간의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사태임이 틀림없다.
전쟁이 철학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시에는 법률이 침묵해야 한다’는 홉스주의나 마키아벨리주의 식의 무비판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해법은 사실상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만드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자기보존을 위해 힘을 길러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를 일상적인 전쟁상태로 돌입시킨다. 이런 자각에서부터, 전쟁을 규범적으로 정의하고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모두 나쁜 것인가? 만약 좋은 전쟁과 나쁜 전쟁이 있다면, 이 둘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전쟁에 대해 규범적으로 고려하는 사회이론가와 사회철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러한 고민에서부터 탄생한 결과물이다.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가릴 조건을 내세우고, 그것에 따라 현실에서 일어나는(또한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전쟁은 정당했거나 또는 정당하기 때문에 감행해도 되고(또는 감행해야 하고), 반대로 어떤 전쟁은 부당했거나 또는 부당하다.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환상적 평화주의와 무규범적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제시한다고 평가된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우리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점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상 일어났던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가름할 수 없다. 물론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이, 전쟁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입장이나 전쟁은 무조건 안된다는 무조건적 비폭력주의(반전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자는 반드시 사람들의 삶의 파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후자는 정당한 인도주의적 개입에 아무런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점은 바로 해석이다. 무엇이 정당한 전쟁인지, 혹은 부당한 전쟁인지는 관점에 따라 상당히 열려있다. 물론 이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기 위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는 하지만, 그 판단의 기준을 전인류적 도덕의식이라는 보편주의적 관점에 의지하고 있다. 도덕적 보편주의 자체가 많은 논의가 필요한 논쟁적 입장이라는 점에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논증 구조는 상당히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제시되었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인 구조와, 가장 최근에 이 이론을 정교하게 전개했다고 평가받는 Michael Walzer의 이론을 살펴보고 이와 같은 점들을 짚어볼 것이다.
2.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 구조
전쟁을 전쟁 선포, 전투, 그리고 전후 처리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전쟁에 대한 도덕적 평가 역시 단계마다 각각 적용될 것이다. 즉, 전쟁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에 대한 평가, 전투 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평가, 그리고 종전 이후 수습조치에 대한 평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이 세 측면에서 모두 정당한 경우에만 어떤 전쟁은 정당하다. 이들 가운데 한 부분에서도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전쟁은 부당한 것이 된다. 전쟁 전체의 정당성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거나 해서는 안될 전쟁으로 평가받으며, 전투 과정에서 정당성을 얻지 못하는 경우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수단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수단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시작된 이러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좋은 사례는 1983년 미국 천주교 사제회의에서 제시한 항목들이다.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한 여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고려하여 설정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나열해보면 ① 정당한 원인, ② 실재적 권위, ③ 상대적인 정의관, ④ 올바른 의도, ⑤ 최후의 수단, ⑥ 성공의 개연성, ⑦ 전쟁의 상응성, ⑧ 전투의 상응성, ⑨ 분별성이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할 경우 그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다.
2.1. 왜 전쟁을 하는가? - 전쟁 개시의 정의(jus ad bellum)
이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는 ‘어떤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다.’ 라고 선포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서,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① 전쟁은 분명하고 진정한 위험에 대처하는 행위일 경우에만 가능한데, 이 행위는 민간인 보호나 적절한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② 전쟁은 공동체 단위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③ 전쟁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이 무제한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여야 한다. ④ ①에서 언급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②에서 언급한 권위에 의해 기획, 전개될 수 있다. ⑤ 전쟁을 제외한 다른 수단을 생각할 수 없을만큼 충분히 다른 수단을 강구한 뒤여야 한다. ⑥ 전쟁을 먼저 선포하는 쪽에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게 예상되는 경우, 비이성적으로 무력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⑦ 전쟁을 일으켰을 때 생기는 비용이 전쟁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혜택(이익)보다 적거나 적어도 같아야한다.
전통적으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만 확보할 수 있는 이 부분에 대단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은 전문적인 전투원들이 수행하는 작업이며 이들은 전쟁 속에서 전투수단(무기)의 지위로 전락하기에, 전체적인 정당성만 얻을 수 있다면 개별적인 전투에서 벌어지는 비도덕적 행위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전투원들의 희생을 자발적으로 이끌어내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같은 명분이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Walzer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전쟁에 대해 처음 고민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신학자였던 그는 완전한 비폭력을 주장하는 당시의 다른 신학적 경향에 맞서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피력하려 했다. 그 방법으로서, 전쟁이 때로는 정당할 수도 있음을 옹호하기 위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개진했던 것이다. 또한 독실한 신자들이 교세 확장에 이바지하는 여러 전쟁에 참여할 것을 유도하기 위한 이론이기도 하였다.
2.2.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 전쟁 수행의 정의(jus in bello)
그러나 무기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가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각종 화학물질과 강력한 폭발력 등으로 더 이상 전투원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 대량살상무기(WMD)가 등장하였다. 또한 근대국가는 국민개병제를 핵심으로 삼으며, 국민 모두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데 동원되는 군산복합체적 면모를 점점 더 강하게 띄어갔다. 이른바 총력전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공동체 내에서 더 이상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쟁을 빨리 끝낸다거나 혹은 상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 또는 여러 이데올로기적인 명분 아래 비전투원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격, 그리고 이후 일어난 수많은 전쟁을 통해 드러난 양민학살, 인종청소 등의 사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위와 같은 변화에 발맞추어 전투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요청되었다.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표, 혹은 전쟁의 유일한 목적인 승리를 위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정당화된다는 믿음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병폐는 전쟁 전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전투 상황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야만 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⑧ 전투와 구체적인 작전을 실행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이 그에 따르는 손해보다 많거나 적어도 같아야 하고, ⑨ 무고한 사람 즉 비전투원이거나 명백하게 상대방의 전투 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부가되며, 심각하게 고려되는 사항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고려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여지는 충분하다. 첫째, 만약 이 항목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전쟁에서 전투 내의 정당성은 거의 확보되지 못한다. 국민개병제가 기본인 근대적 공동체에서 누가 전투원이고 누가 비전투원인지 명확하게 나누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어제까지 민간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살아있고 국적을 가진 이상 언제든지 전투원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투원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이 정당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사실은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게 만드는 근거이다. 모든 전투원들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존중받는 개인이다. 전쟁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전쟁은 이러한 억지스러운 구분을 스스로 생산해내며 인간의 존엄성을 침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사실상 비전투원(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생명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둘째, 설령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투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작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전쟁에 참여하는 각 집단의 구성원의 문제에기도 하지만, 그들이 모두 사용하는 여러 시설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역적인 타격을 가한다든가 혹은 특정인물이나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상으로 작전을 펼칠 경우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한다. 피해를 최소화해야한다는 원칙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미리 계산한 피해는 언제나 실제 일어나는 피해의 정도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작전이 수행되고 난 뒤 발생한 피해는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지 더 이상 논의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셋째, 전투 수행 중에 발생하는 부정의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에 대항하는 집단의 전투원들이 속해있는 상황과 그들이 의도적으로 자행하는 비도덕적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도덕적 행위의 책임을 누가 질 수 있는가(또는 짊어져야 하는가)의 문제는 그 의도성과는 다르게 매우 불투명하다.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도덕적인 고려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하며, 도덕적 규범들을 위반하는 일도 그만큼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전쟁 중에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새로운 규범을 만든다면, 보편적인 도덕원칙에 입각하여 전쟁을 재단하려는 시도가 전쟁 중의 도덕과 비전쟁 상태의 도덕을 다르게 설정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2.3. 전후 처리 - 전쟁 이후의 정의(jus post bellum)
위의 두 가지 밖에도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서 반드시 고려되는 고전적인 요소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상황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침탈당한 자기 영토에 대해 회복을 주장하며 침략국에 대해 반격을 가했을 때, 침략국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은 침탈당한 자기 영토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비용에 대한 보상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국가가 침략국을 상대로 그 이상의 영토와 보상을 요구하며 역으로 침략할 경우, 그 전쟁은 부당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위와 같은 고전적인 개념은 위기를 맞는데,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이전의 상황에 대해 명백한 변화를 의도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경우, 전쟁을 선포한 국가는 패전국에 계속 주둔하며 다시는 이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승전국에게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가? 만약 그러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승전국은 이에 따라 특수한 형태의 정부, 대개는 민주주의적 정부를 패전국에 강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절차를 의도적으로 마련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을 군사적으로 억압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일종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 승전국의 도덕적 의무와 패전국의 국가주권이 상충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정당한지 명쾌한 답을 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무가 없다면, 애초에 그런 인도주의적 개입은 어떠한 명분도 지닐 수 없다. 개입은 좋은 상황을 만들겠다는 뜻의 개입이지, 단순히 나쁜 상황을 만들어내는 요소들만 제거하겠다는 의미의 개입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정도의 나쁜 상황들은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온 역사와 문화, 또는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입이 중단될 경우 상황이 개입 이전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는, 개입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모두 교정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훨씬 의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문제는, 그런 의무가 없을 경우 과연 아무런 소득 없는 개입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의무가 없다면, 승전국은 개입에 드는 비용을 상쇄할 만큼 이익을 회수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패전국의 혼란과 무질서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인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혼란과 무질서를 교정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패전국의 민주적 절차와 권위, 주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국제사회의 충분한 동의 또한 얻어야 한다.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제사회의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전후처리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인도주의적 개입을 통해서 이전에 발생한 비인간적, 비민주적 사례를 제거하는 것은 쉽게 성공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체제에 대한 책임의 문제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 내에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3. Michael Walzer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문제적인 이론이었다. 물론 그 이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조장, 방조하거나 또는 전쟁을 환상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찬양하며 여기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들어가는 말에서 기술했듯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오히려 무분별한 전쟁을 제한하기 위해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이 그들이 의도한 전쟁에 대한 제한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나아갔거나 혹은 적어도 전쟁을 부당하다고 평가하고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론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의도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기독교의 신학적인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 Walzer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는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재조명하였다. 또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있었던 전쟁을 스스로 세운 기준을 통해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뜨거운 현안에 직접 접근하는 대담함이 돋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사이에서 중도를 지켜나가는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지켜본 전쟁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에 대한 경험을 기술하는 일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비판적 작업의 토대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현실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전쟁 사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구체적인 전쟁들을 그 자체가 아닌 도덕적 시선에서 재해석하여 제시한다. 전쟁의 시작에서 종결까지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은 계속해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우선 전쟁의 선포부터가 도덕적인 결단이며, 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은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또한 전투는 행위의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결코 도덕적인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모두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일반적 잣대를 들이밀어 그 참모습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쟁에서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결국 전쟁에 연관된 민간인,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에 대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다분하다. 반면 평화주의는 모든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명백한 악에 대해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무기력은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셋째, 그가 제시하는 ‘전쟁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도덕의 최소한’은 인간의 기본권, 즉 생명과 자유에 대한 수호이다. 전쟁을 타산의 문제나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전쟁을 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이것만은 지켜야하고, 또 이것을 지키는 방향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며, 또 종결시켜야한다.
3.1.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과 해석의 문제
Walzer는 전통적으로 논의된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했던 천주교 사제회의의 항목들 가운데 정당한 원인에 집중해서 자신의 논증을 전개한다. 정당한 원인(cause), 즉 대의(Cause)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 비교적 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명분과 원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전쟁은 침략에 대한 저항인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침략이란 다름 아닌 자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사태를 말한다. 이런 사태는 인간 모두가 지켜야하는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임과 동시에 생명과 자유를 수호할 의무를 지니는 한 국가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국가 내 개인 간의 관계와 국제사회 내 국가 간의 관계를 유비하여 바람직한 국제사회의 모델을 제시한다. 즉, ① 각 개인들은 ② 시민으로서 생명과 자유(특히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를 ③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④ 자기 생명과 자유를 수호하고 그걸 다른 개인이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⑥ 기본권을 침해한 개인에게 국가가 심리적, 물리적 제약을 가하듯이, 국제관계에서도 ① 각 주권국가들이 ② 영토와 통치권리를 ③ 국제법을 통해 보장받으며 ④ 주권과 영토를 수호하고 그것을 다른 국가가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다른 전쟁이 정당화되지 않고 ⑥ 침략을 저지른 국가는 전범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제사회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델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일어나는 전쟁은 정당한데,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여기에 부합한다. ④ 의 원리에 따르면 인도주의적 개입도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전투 중의 도덕에 있어서 그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전쟁의 특성상 의도하지 않은 비전투원의 피해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부수적인 것이며, 그것을 직접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직접 의도하지 않았을 때에만, 그리고 그 의도가 매우 좋을 때에만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전후의 책임 있는 현지 복구를 통해 전쟁을 끝마쳐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Walzer의 위와 같은 입장은 꽤 엄밀해보이고 정식화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석의 문제는 그의 이론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전쟁 이론 일반이 갖는 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론들이 만들어주는 장치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 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가? 과연 어떤 것을 침략이라고 하고 어떤 수준이어야 그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일본은 다케시마를 일본의 영토로 해석하고 한국의 실질적 점유를 침탈로 간주한다. 반면에 한국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해석하고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무엇이 침략이고 무엇이 적정한 수준의 보상이 될 수 있을까? 그나마 이 부분은, 엄밀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직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당방위의 결과에 대해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타국에 무력을 통해 간섭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정당하며 또 어떤 경우에 부당할까? 어떤 국가가 부정의를 시정하지 못한다는 판정은 누가 해줄 수 있는가? 이 경계는 어느 전쟁에서나 상당히 모호하고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이 ‘해석의 문제’는 Walzer 스스로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정당화함으로써 자초한 면이 크다. Walzer는 9-11 테러에 비추어보았을 때 미국은 테러 주체인 알-카에다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점, 첨단무기기술을 통해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전쟁의 대상이 알-카에다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 되었던 것일까? 아프가니스탄이 알-카에다에 호의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알-카에다가 미국에 테러를 가할 수 있을 만큼의 금전적,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또한 그는 알-카에다와의 연계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부당한 전쟁이라고 말함으로써, 해석의 주관성이 얼마나 자신의 이론에 깊게 개입할 수 있는지 스스로 보여주었다.
3.2. 최고 비상사태의 도덕
게다가 그는 이런 기준을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비상사태(supreme emergency)라는 예외를 가정하여 큰 논란을 빚는다. 그는 최고 비상상태를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굳건한 가치들과 우리의 집단적 생존이 절박한 위험에 처했을 때’, 즉 공동체 자체의 존폐의 위기에 빠진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위의 문장이 설명하고 있듯이, 그에게는 곧 공동체를 지탱하고 있는 도덕률의 붕괴가 눈 앞에 와있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이런 사태의 사례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국의 상황을 예로 든다. 역사적으로도 이미 평가가 끝났듯이, 나치즘은 누가 보아도 직관적으로 명백한 악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만한 집단이었다. 과연 그런 집단에 대해서까지 평화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실천적으로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질문이며, 따라서 그의 이러한 예외 주장은 강한 현실적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입장에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이론적인 결점이다. 물론 그 스스로도 이런 사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되며,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즉, 역사에서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도덕적 고려가 매우 적거나 있지 않아도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고 그에 따라 전쟁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입장과 어긋난다. 최고 비상사태에서의 정당화는 결과주의적 도덕 원칙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원칙과는 관련이 없는 상황에 대한 계산에 의해서 그 판단이 이끌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그의 논증은 그의 이론 체계 내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요소이다.
둘째, 최고 비상사태와 공동체의 이익이 상충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최고 비상사태는 일상화되며, 그것은 전쟁의 공포가 언제나 시민들이 곁을 배회하는 상태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가정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사례이기도 하다. 바로 냉전이 그러하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외부의 적대적인 세력으로 가정한 뒤, 내부의 구성원들에게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민주주의 자체를 억누르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Walzer 또한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논의에서 이러한 상황이 ‘공포의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셋째, 누가 공동체의 최고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는지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대의민주주의적인 정치 구조에서 이것은 주권의 대리인에 의해서 선포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둘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권의 대리인의 이익과 최고 비상상황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주권의 대리인은 공동체 전체를 역시 최고 비상사태의 일상화로 몰고갈 수 있다. 이것은 테러리즘을 포함한 모든 전체주의, 공포주의적 정치체제의 일반적 특징이다. 물론 Walzer는 최고 비상사태를 매우 좁게 정의함으로써 이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의 논의 자체가 이론적으로는 매우 애매한 것 또한 사실이다.
4. 맺는 말 - 정의로운 전쟁의 부정의함
역사 속에서 전쟁을 찬양하고 참여를 독려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전쟁은 그 어떤 다른 사건도 그만큼 참혹하고 잔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특별한 고찰이 요구되고, 이것을 억제할만한 이론적, 실천적 수단이 요청된다. 이런 성찰의 여러 결과들 가운데,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끔 도와주면서 동시에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론으로서 주목받았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은 이 이론이 대다수의 전쟁을 부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쟁을 제한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이상에만 갇힌 평화주의와 인간을 동물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은 선포, 수행, 종전 이후라는 세 가지로 구분되며, 각 부분에서 정당성을 획득했을 때 정의로운 전쟁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의 전통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Michael Walzer는 현대에 이 논의를 복각시키고 여러 전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힘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앞으로 수행할 전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줌으로써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해석 앞에 열려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침략에 대한 반응인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내부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채 어떤 전쟁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라는 것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거의 유일하지만 가장 큰 문제인데, 특정한 전쟁을 허용하는 것은 해석의 다양성과 맞물려 다양한 전쟁에 대한 허용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특히 Walzer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적인 일관성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내놓은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논증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으로 포장하여 그것을 최고 비상사태로 ‘해석’할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폭격수가 됐고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중략) 아무 생각 없이 서류철에다가 [다시는 안 돼.] 라고 끄적거리고는 나 스스로도 놀랐다. (중략)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이 있다는 다소 정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의 어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전쟁은 전혀 해결책이 아니라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특히, 평화를 옹호하는 시각은 인도주의적 개입에 이르러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리하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실제로 그 이론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전쟁을 평가하는 데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당화하기에는 그 결과와 유산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또한 Walzer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언어들은 현실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전쟁들을 치장하는 데 동원되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큰 진보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의도하는 것처럼 전쟁 자체를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모두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요원해보인다.
* 참고문헌
철학연구회 엮음, 『정의로운 전쟁은 정당한가』, 서울 ; 철학과현실사, 2006.
Emmett Barcalow, 『현대사회와 윤리 - 이론과 쟁점』(김진경, 이남원, 정미경, 최성희 옮김), 서울 ; 박학사, 2009.
Howard Zinn, 『전쟁에 반대한다』(유강은 옮김), 서울 ; 이후, 2001.
Michael Walzer, 『전쟁과 정의』(유홍림 외 옮김), 고양 ; 인간사랑,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