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계몽과 근대사상 숙제>
서론 : 라이프니츠의 과제와 연구의 토대
라이프니츠가 살았던 시기가 역사적으로 근대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성장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던 두 철학, 즉 데카르트가 정립한 본유관념을 토대로 한 이성중심주의 철학과, 로크로 대표되고 영국을 중심으로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고 있던 경험중심주의 철학은 그가 극복해야 하는 가장 큰 벽이었다. 또한 데카르트 특유의 이원론으로부터 탄생하는 여러 가지 논리적 난점을 극복하려 시도한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그가 맞서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것, 그리고 이들을 극복하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과제라고 한다면, 그가 확립하고자 했던 것은 각 철학의 단점과 논리적 모순점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철학의 체계였다. 다시 말해, 그는 데카르트가 설정한 영혼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실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야 했으며, 또한 경험의 잡다함으로부터 자연의 법칙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구출해야 했다. 또한 이를 뛰어넘는 것으로 제시된 스피노자의 철학이 보여주는 개별자의 침잠, 즉 그가 제시하는 신 개념에 모두 종속되는 개별자들의 지위 또한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야했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츠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복권시켜 형이상학적인 체계의 정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당시에 발달하고 있던 자연과학이 내세우고 있던 자연기계론적인 형이상학과는 배치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보통이었고, 그 기계론은 스콜라 철학에 대항해서 복권된 플라톤주의의 기하학주의에 의해 체계를 정립하고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자연기계론을 내세우는 당대의 많은 지성들과의 서간논쟁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목적론적 성격을 끌어들여 자연기계론적인 철학을 설명하려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두 가지 뿌리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스콜라 철학과 그 토대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이다. 모든 실체는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목적성을 자기 안에 내재하고 있다. 그것을 발현함으로써 이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현존하고, 이들 모두가 쌓인 세계가 바로 지금 우리가 느끼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체계를 대폭 수용하였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근대적인 모습에 알맞게 발전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런 면모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체계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때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발상은 당시에 매우 독특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대 철학자들의 세계관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토대를 놓은 전통적인 논리학은 거부하였다. 그것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귀납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논리학을 거부했던 것에 비해, 라이프니츠는 자신만의 새로운 논리학의 기초를 닦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하였다. 이 새로운 논리학은 사고를 기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착상에서 출발한다. 마치 다른 철학자들이 자연을 기계적으로 분석하듯이, 사고의 과정을 기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형이상학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어서 논리학적으로 주어와 술어를 나누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에 따라 현존하는 존재의 실체는 주어 부분이며, 그 실체를 이루는 속성은 술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분석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개념과 공리이며, 이 둘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연역적인 체계(세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형이상학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모나드에 대한 입장으로 정리된다. 모나드는 단순하다는 뜻이며, 곧 라이프니츠에게 실체이다. 또한 단순하다는 정의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없다는 속성을 띈다. 모나드는 정신적인 실체라는 점, 인식의 주체라는 점, 합목적성을 띈다는 점, 세계 내의 구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모나드는 정신적인 실체이다. 만약 실체가 물질적이라면, 그 실체는 연장이라는 속성을 띌 것이다. 연장은 무한히 분할이 가능하고, 그렇다면 이 실체는 무한히 작은 물질이 된다. 이 과정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무한히 작은 물질은 무한히 많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비연장적이고, 비물질적이어야 한다.
정신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정의함으로써 유한해진 개체에 무한한 가능성을 담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수많은 모나드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인식론적으로 그 관계들을 자기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이미 담지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의해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로서 거듭난다.
모나드는 인식의 주체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인식이란, 한 모나드가 자기 안에 담지한 다른 모나드들과의 관계를 표상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단순하기 때문에, 내부가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나드의 외부에 머무르는 존재나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모나드의 내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인식은 외부의 무엇이 들어오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표상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질적으로 같은 모나드들만이 있을 경우 우리가 표상하는 다양한 인식대상의 차이를 말 할 수 없어진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각자가 질적으로 모두 다르다. 이것은 단순히 모나드들간의 존재론적 차이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에서 수반되는 관점의 차이 또한 발생시킨다. 모든 모나드는 각자 자신의 세계를 표상한다.
모나드는 합목적성을 띈다. 그 까닭은, 모나드는 최종근거인 신의 운동으로부터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생성되는 과정에서 신의 완전성이라는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나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적인 무한성, 즉 완전성을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신으로부터 근거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즉, 자기충족적이긴 하지만 자신을 원인으로 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모나드는 세계 내의 구체적 존재이다. 모나드는 그 자체로서 영혼이나 정신, 의식을 구성한다. 정신적인 실체이고, 인식주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모나드들은 인식주체로서의 역할이 미미하기도 한데, 이런 모나드들은 영혼이나 정신으로 화한 모나드들의 통제를 받아 육체로서 그 기능을 한다. 이는 단순한 구성요소나 존재근거로서의 실체가 아닌, 그 자체가 역사무대 위에 있는 존재자라는 특징이 있다.
위와 같은 특징을 살펴볼 때, 모나드는 논리학적인 입장에서 개념, 즉 어떤 서술어의 주어에 해당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일반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개념은 인간의 사고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가능성으로서 무한한 술어를 자기 안에 내포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은 모두 세계 내의 어떤 구체적 존재에 대한 지칭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또한 위와 같은 실체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에 통합시켜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려고 한 것 역시 이전의 철학자, 특히 데카르트에 비해서 발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나드는 각각이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실체라는 점,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개념적으로는 하나의 실체에 통합되어 있지만 이 통합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난점에 부딪힌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조화설이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은 실천철학 부분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한다.
자연철학
하지만 실체를 정신적인 면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물질로서 바라보는 세계를 어떻게 정당화하느냐라는 과제가 남게 된다. 특히나 모나드는 각각 모나드 사이에 분절적인 구분이 없이 연속적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한 계열에 통합되는데, 이것은 마치 스피노자의 세계처럼 세계 내의 각 존재 간에 구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근거로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이를 뛰어넘기 위해 라이프니츠가 제시하는 기준은 ‘지각의 명료성’이다. 그리고 이 지각의 명료성은 존재론적인 측면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모두 작용한다. 인식론적인 측면은 뒤에서 논의할 것이므로, 자연을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각각의 모나드는 지각의 명료성의 정도에 의해서 서로의 차이를 드러낸다. 지각의 명료성이 높을수록 정신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반대로 낮을수록 물질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각각의 모나드들은 다른 모나드들을 자기 내부에 표상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에는 다양한 모나드들의 지각의 명료성의 차이에 의해 물질과 정신이 공존할 수 있는 세계로서 나타난다.
인간과 각각의 동물들 사이의 존재론적 위상은 지각의 명료성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즉, 모나드가 표상하는 세계 속에서 지각의 명료성이 높을수록 고등동물로서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낮을수록 하등동물 내지는 물질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존재도 완전히 물질적이지는 않고, 인간이 포착할 수는 없지만 미약하게나마 정신으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완전히 정신적인 존재는 반드시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를 통해 목적론적인 자연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각 모나드는 내적인 원리에 따라 운동하고, 그 내적인 원리의 방향은 신으로부터 탄생과 함께 부여받은 완전성을 향해있다. 이것은 운동이 무작위적이고 기계적인 현상이 아닌, 일관된 규범을 따라 벌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목적은 기계적으로 결코 파악할 수가 없다. 기계적인 분석을 통해서는 단지 운동의 과정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라이프니츠는 그러한 분석이 가능할 수 있게끔 하는 운동의 근거로서 ‘힘’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물질적 실체의 속성으로서 연장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고대철학에서조차 그 가능성의 의문시되는 속성이었다. 제논이 제시한 여러 역설들은 바로 이런 연장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논의를 계승해, 무한히 분할이 가능한 연장이 실체의 속성일 경우에는 연장이 불가능한 것들의 집적이 연장이 되는 역설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연장보다 더 근원적인 속성을 내세워야만 했는데, 이것이 힘이다.
힘은 다시 근원적인 힘과 파생된 힘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근원적인 힘은 실체가 직접 행사하는 힘이다.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고유의 물리적인 영역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것이 세계 속에서 연장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파생된 힘은 이런 근원적인 힘이 행사됨에 따라서 나타나는 효과들이다. 즉, 연장이라는 현상은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물리적인 힘으로서 각 모나드에게 다가간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하는 세계는 모나드 안에서 정신적으로 표상된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도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는 실재가 아니다. 라이프니츠에게 세계는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모나드의 표상 작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표상작용이 없으면 공간도 없어져버린다. 시간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표상의 변화가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 현상이 된다. 이것은 당시에 시간과 공간을 물질세계에 선행하는 논리적인 조건으로서 내세웠던 뉴턴의 자연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논리적인 선행조건으로 상정할 경우, 그것은 결국 공간이 놓일 수 있는 어떤 것을 향한 무한소급으로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논리적인 선행으로서의 공간은 논리적인 선행이기만 할 뿐 그 어떤 운동의 근거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 위의 물질들이 어떻게 운동하고 변화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 또한 뉴턴에 대한 중요한 비판의 지점이었다.
인식론
라이프니츠는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서 선험적인 근거를 강조하였다. 소박한 경험과 귀납적인 추론은 개연성만을 확보할 수 있을 뿐, 필연성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선험적인 근거를 통해 경험을 배열하고 조직해야만, 경험에서 필연성을 확보할 수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는 경험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선험적 원리를 통해 경험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필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그래서 필연적인 원리를 요청해야만 했다. 필연적 원리는 경험과 상관없이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유관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본유관념을 내재한 인간의 속성이 바로 이성이다.
또한 인간은 다른 모나드들에 비해 지각의 명료성이 높다. 따라서 다른 동물들처럼 개연성만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연의 필연성과 법칙성을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을 다른 모나드들의 인식인 지각과 구별해 통각이라고 명명하였다. 라이프니츠가 정의한 인식의 특징상, 서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 모나드의 행위를 얼마나 잘 예측하는가에 따라 주체의 능동성과 대상의 수동성이 나눠진다. 이 구분 또한 분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라, 여러 모나드들간의 관계에 따라 능동성과 수동성이 결정된다.
인간은 이런 특징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을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 모두 경험과 기억에 기대어 명석한 인식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 인식이 될 수 없다.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한 판명한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학, 특히 자연과학을 하는 일이 가능하다. 판명한 인식이란, 논리적인 활동을 통해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던 근거를 찾아내는 활동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성적 사고에 의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라이프니츠가 ‘이성의 진리’라고 명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모순율에 따라 그 진리값이 결정되는 명제가 해당된다. 즉, 어떤 명제에 논리적으로 반대인 명제가 모순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동어반복을 벗어날 경우 이것은 이성의 진리에 해당되는 지식이다.
하지만 모순율에 의거해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는 무수히 많다. 마치 기하학에 여러 가지 체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각 명제 간에 모순이 없는 세계는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가능할 뿐인 세계이며, 그 많은 가능세계 가운데 세계로 구현된 세계는 단 하나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실제 세계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이 실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사실의 진리’라고 명명한다.
가능한 많은 세계들 가운데 단 하나가 실제 세계로 나타나는 충족이유율에 따라 설명이 된다. 바로 이것이 선험적 원리를 구성하는 나머지 하나의 원리이다. 충족이유율이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사건이 일어나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원리이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는, 단순한 개연성을 넘어서 인과적인 필연성을 얻게 된다. 세계의 모든 사건이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학을 수행할 때 이 두 가지 원리에 따르기 때문에, 과학 역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모순율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순수과학이다. 여기에는 논리학과 수학이 포함된다. 순수과학 안에서는 모순이 없는 모든 세계에 대해 연구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세계에 대해서 그려낼 수 있다. 둘째는 경험과 결부되어있는 경험과학이다. 인간은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단 하나의 실제 세계만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학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능한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즉 순수과학에서 경험과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해야한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원리가 바로 충족이유율이며,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조화로운 것(조화), 가장 알맞은 것(최적), 그리고 가장 단순한 것(단순)을 기준으로 삼아 실제 세계로 이행한다.
하지만 이 충족이유율에 따라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를 실제 세계로 만드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 없는 한, 이 세계에 대한 설명은 불가하다. 라이프니츠는 이 존재를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신은 모나드들 가운데 가장 명료한 지각을 소유한 존재이며, 따라서 충족이유율에 의해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이유들을 통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신이 표상하는 세계가 바로 역사 전체이며, 그것은 신의 관념 속에서 이미 그 속성이 결정되어 있다. 이 속성은 바로 각 모나드들의 술어에 대한 정보들이다.
인간이 과학적인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신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또한 오로지 신적인 관점을 통해서만 과학이 가능하다. 여러 가능 세계에서 단 하나의 사실 세계를 향한 이행, 그리고 그 이행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신적인 관점을 신과 공유하고 있다. 그 능력이 바로 인간의 이성의 속성이자 ‘통각’의 기능이다.
따라서 인간의 과학적인 지식이란, 여러 모나드들 즉 실체에 담긴 술어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아는 것과 같다. 이 실체는 사실 세계의 실체이다. 이들은 가능 세계와는 다르게 모순율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사실상 이런 사실의 진리들도 모순율에 어긋나는 진리들로서, 이성의 진리와 같은 격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신적인 관점에서 볼때는 모든 실체들의 속성에는 그와 같은 속성들이 이미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성들 가운데 하나를 거부했을 때에는 동어반복에서 벗어나므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자연과학이 가능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신도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사실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 세계 가운데 가장 완전한 세계를 표상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체계 안에서는 신 역시 이런 완전성에 종속된 존재이다.
실천철학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나드 각각은 내적인 원인에 따라 독립적으로 운동한다. 하지만 세계는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모나드들이 제각기 움직여 만들어진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게,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인다. 라이프니츠는 이 모든 방향과 패턴, 질서가 신이 교묘하게 모나드들을 결합시켜놓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모나드들의 술어가 결정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하면, 모나드들 서로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수행하는 여러 가지 조절활동이 영향을 주는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나드들은 마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움직이고, 이것은 경험적인 인과관계로 표현되는 세계,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정조화설이다.
그렇다면 신에 의해 예정된 세계에서 인간의 도덕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한 도덕률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책임을 동반한 도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기에,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하지만 예정된 세계, 결정된 세계에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자유는 자유로운 존재의 열린 선택의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결정된 세계는 이 선택이 한 가지로 닫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정된 세계와 도덕은 모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설명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예정과 결정은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신은 모나드가 할 일을 규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모나드가 자발적으로 할 일을 알고 있을 뿐이다. 모나드를 창조하고, 거기에 내적으로 완전하다는 속성을 부여한 존재가 바로 신 자신이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속성에 의해서 모나드는 자발적이다. 또한 신에 의해 정의된 존재로서 유한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의 지성으로는 모나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둘째는 도덕법칙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예정과 결정은 같지 않으므로, 모나드에게서 자유를 확보할 수 있기에 자연스럽게 도덕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또한 내적인 완전성을 토대로 자율적으로 도덕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완전성은 신의 속성이고, 모나드 또한 내적으로 완전한 존재이다. 따라서 자기 안에 담고 있는 무한한 가능한 세계 가운데 신이 가장 원하는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그것은 곧 가장 도덕적인 세계이다.
셋째는 신의 도덕적 면모에 대한 변론이다. 악의 근원으로서 불완전한 존재가 생성된 이유, 즉 형이상학적 악에 대해서는, 라이프니츠의 세계관 속에서 구체적 존재인 모나드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정의상 내적으로는 완전한 존재라고 해명한다. 도덕적인 악 때문에 발생하는 죄는, 신은 가능한 도덕적인 세계를 만드는 존재라고 반박한다. 또한 완전히 결정적인 세계에서는 도덕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유를 확보해주는 세계가 더 나은 세계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에 만연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실은 고통이 없는 중립적 상태나 행복에 다다르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신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안이라고 말한다.
결론 : 라이프니츠 철학의 파급과 한계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보이는 가장 큰 전환점은, 우리가 물리적이고 외부대상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정신적 작용의 산물로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특히 정신의 현상으로서 물질세계를 바라보는 라이프니츠의 시각, 물리적 사태를 정신의 현상으로 환원시키는 그의 사상은 칸트의 현상계에 대한 논의를 예비하고 있다. 또한 논리적으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한 시도는 당대의 논리학적인 고정관념을 뛰어넘은 구상으로서, 이후 20세기의 분석철학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멀게는 독단적 존재자로서의 라이프니츠의 인간관은 이후의 관념 중심의 철학에서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며, 비연장적인 속성을 실체의 성격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물리적인 세계를 설명하려 하는 것은 20세기 이후 과학의 논의들에서 등장하는 에너지에 대한 관점을 예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체계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은 그를 바라보는 데 큰 난점으로 작용한다. 말년에 적은 『변신론』이 유일한 철학적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그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내용은 거의 편지를 통한 논쟁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확실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논쟁을 통해 입장이 바뀌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체계를 뚜렷하게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당시의 몇몇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을 자신의 체계에 끌어들임으로써 종교적 공격에 시달리지 않으려 했던 시도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철학 역시 스피노자와 같이 개별자들의 자유를 확보해주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참고문헌
서양근대철학회 엮음, 『서양근대철학』, 서울 ; 창작과비평사, 2001
서양근대철학회 지음,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 서울 ; 창비, 2004
이정우 지음, 『주름, 갈래, 울림 : 라이프니츠와 철학』, 서울 ; 거름, 2001
Fredrick Copleston, 김성호 옮김, 『합리론 :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까지』, 서울 ; 서광사, 1994
김국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형이상학」, 《철학과 현실》 제17호, 1993년 여름, 철학문화연구소
박제철, 「라이프니츠 철학의 결정론적 성격」, 《철학》 제98집, 2009년 봄, 한국철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