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 개정 증보판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1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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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플라톤의 글은 언제나 난해하다. 나는 이 난해함이 그가 선택한 글쓰기 전략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국가』 전반에 걸쳐서 비유를 자주 사용한다. 사람의 몸과 국가를 비유하고, 그 비유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멀리서 본 작은 글씨와 가까이서 본 큰 글씨를 떠올려보라고 주문한다. 그 밖에도 온갖 종류의 유비논증이 등장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비유는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아직도 머리를 맴돈다. 


둘째, 우리는 왜 플라톤은 싫어하면서 행정전문가들에 의한 통제는 받아들이는가? 부끄럽게도 『국가』의 완독은 처음이다. 허구헌날 파시즘이니 왕정체제니 독재니 하면서 비판받는 플라톤의 철인정치체제는, 자세히 뜯어본 결과 행정전문가 시스템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역시 비유 또는 신화적 설명이긴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논하고,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재의 양성은 공동체가 전적으로 담당한다. 그리고 그런 최고의 인재들이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건 여러 결정을 한다. 최소한 행정분야에 있어서 우리는 전문가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가? 또한 아무리 민주정이라고 해도, 대의제를 표방하는 순간 우리는 입법부에도 전문가를 들여보내지 않는가? 물론 이 논의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국가통제 방식 즉 민주주의(또는 투표를 통한 입법부의 직접통제) 같은 것은 빠져있고, 이것은 중요한 차이이다. 그럼에도 플라톤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다른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게 된다. 


셋째, 플라톤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형상과 그 실재성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어찌보면, 이것은 그저 플라톤의 의견일 뿐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닌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것이 과연 유효한 의견인가? 그리고 여기에 기반해서 그가 구상해낸 이상국가는 유효한 모델일까? 플라톤 본인도 철학자들이 세속사회에서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놓이는지를 푸념했지만, 그것은 이 시대에 훨씬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만 같다. 플라톤이 객관주의-도덕적 확신-지행의 일치 라는 고대 그리스적 묶음에 천착한다면, 나(우리)는 회의주의-도덕적 다양성-의지박약의 문제 라는 근대적 묶음에 포위당해 있는 셈이다. 


넷째, 플라톤의 모든 논의는 인간의 도덕성과 그 함양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줘서는 안된다는 견해에 쉽게 동의한다. 플라톤이 공략하려는 약점도 이 부분이다. 또한 우리는 예술에 관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아동성추행범인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우리는 계속 봐야하는가? 김기덕은 어떠한가? 플라톤의 해결책은 일견 깔끔해보인다. 즉, 모든 것에 대한 도덕적 통제라는 당연한(혹은 무시무시한) 발상을 내놓은 것이다.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진리와 도덕성과 아름다움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특정한 철학적 견해가 깔려있다. 나는 이것을 거부할 수 있는가? 오히려 이 셋을 분리하려 애쓰는 쪽이 인류의 역사에서 더 희귀하지 않았던가? 


다섯째, 『국가』도, 재미가 무지무지 없긴 하지만 결국 한 편의 희곡이다. 그리고 10권에서,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산문의 형식을 통해 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논변하고 그게 납득할만하다면 시를 허용할 수도 있다고 여지를 남긴다. 그럼에도 그는 왜 희곡을, 넓은 의미의 시를 쓴 것일까. 그래서 그의 의도를 상상해보았다. 어쩌면 그는 시의 올바른 쓰임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시는 형식과 내용 모두를 호메로스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호메로스가 보여주는 것은 형식에서 옳았으나 내용에서 틀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결국 시의 형식으로 인정받고자 한 플라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물론, 『국가』는 노잼이므로 플라톤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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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부트 -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
손희정 지음 / 나무연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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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의 주제는 현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정동(감정)인 혐오다. 혐오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추고 있는 어떤 감정의 형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의 발현은 사회가 주조해낸다. 2017년 한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그는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스놉 구별을 차용한다. 스노비즘은, 자연에 대항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상태에 다다랐음에도 이전 시대의 행위 양식을 계속 유지하는 상태를 뜻한다. 손희정의 눈에 한국인의 혐오 감정은 스노비즘의 한 형태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렀음에도 풍요 속 자유주의의 한 형태를 끈질기게 유지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한국식 스노비즘의 구체적 기원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혼동이다. 사람들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으며, 그 가운데에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체성의 정치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조직해나갔다. 이런 경향은 표면적으로는 각자의 차이를 심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소비자 정체성 이외의 모든 것을 삭제하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고정관념을 잔존시킴으로써 지배이념에 복무했다. 이 차이에서 차별이 파생되었고, 차별은 혐오 감정의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와 혐오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이른바 “리부트”된 페미니즘을 선언할 수 있을까? 2장에서 그는 확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을 탐색해본다. 2세대 페미니즘이 천착했던 정체성의 정치학은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에 포섭되어, 정치를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구닥다리인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여성은 ISA에 의해 소비 주체로서만 호명당할 뿐, 정치적 주체로서 자리매김하지는 못한다.


자유로운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척 했던 1990년대 영화 뿐만 아니라, 이른바 여성향인 BL코드를 깔고 있는 흥행 상업영화를 통해, 우리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를 읽을 수 있다. 왕의 남자나 고지전 같은 영화들은, 여성주의적 일탈로 여겨졌던 BL 코드를 영화 전반에 배경으로 깔아둠으로써 관객들에게 “부녀자”가 된 듯한 일탈을 제공한다. 하지만 내용에서는 배경, 형식으로는 영화로서만 소비될 뿐인 그런 코드는 오히려 관객들에게 남성적 연대의 끈끈함만 전시하고 여성관객을 이 연대의 이념에 소비자로서 포섭시킨다.


현대 한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형식은 TV다. 3장은 TV 프로그램에서 대중문화와 페미니즘 사이에 긴장과 협력이 동시에 벌어지는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대중문화-페미니즘의 또 다른 면모를 고찰하려고 시도한다. 대중문화와 SNS의 영역에서 소비자는 자유롭게 욕망을 분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산의 단계에서부터 사회의 지배이념이 반영되기 때문에, 욕망의 분출로서의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다. 그럼에도 소비주체로서의 정체성은 지배이념에 반대하는 저항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표현함으로써 소비자정체성과 운동의 이념을 결합시킨다.


“가모장” 개념을 탄생시킨 김숙은 이 둘의 건강한 긴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사례로서 인용될만하다. 또한 트위터에서 급진적인 언사를 펼치거나 다른 SNS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을법한 사건을 폭로해서 해시태그를 통해 짧은 시간이나마 연대체를 구성해내기도 한다. 에릭남이 무언가 잘나서가 아니라 사람이라서(문명인이라서)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은 야만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대놓고 가리킨다. 반면 김숙과 같은 기획사의 장동민은 십 수 차례나 대놓고 여성혐오 발언을 일삼았는데도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고 있고, 몇몇 얼척없는 영화관계자들은 여성관객들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가감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대중문화와의 관계 만큼이나, “리부트된” 페미니즘을 이끄는 동력도 이전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4장에서는 이 근거를 정동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한다. 정동은 이성에서 이탈해, 새롭게 구성된 기억에 의존한다. 이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 토론에 의해 구성된 공공 영역이라는 미명 아래 정치로서의 여성의 목소리가 체계적으로 배제된 역사 덕분이다. 


정동에 기반한 새로운 양식의 운동은 구체적 사건을 통해 집단의 기억을 재생하고, 기억의 양식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지배이념의 산물인 습관을 해체하고 관념의 새로운 연합을 구성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상징하는 뚜렷한 문구인 “여자라서 죽었다”는 인식의 공유는 새로운 정동의 탄생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트위터는 이런 정치적 정동이 주목경쟁과 결합해 가장 극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래서 트위터는 자본의 자유의 폭력에 대항하는 “공유지”의 지위를 차지하고, 정동공동체인 사이버 스페이스의 성격을 획득한다.


하지만 사이버 스페이스엔 베충이와 깨시민들이 훨씬 더 많이 기거하지 않는가? 페미니즘 비평이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이 한남편향적 공간에 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다. 5장은 박가분, 김어준, 유시민과 386에 관한 이야기다. 각 인물들은 각각 합리적인 척하면서 선별적으로 사실을 짜깁기하고, 합리성을 완전히 포기한 채 복수를 위한 스토리텔링에 눈이 멀고, 그 눈먼자들을 위한 지식정보를 제공하는 자들을 상징한다. 전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셋은, 역설적으로 모두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로 묶여있다.


반지성주의 핵심은 진실을 말한다는 사실과 진실을 말한다고 부여된 자격 사이를 구별하지 않고 지식인 집단을 싸잡아 매도하는 태도다. 나무위키는 서브컬처 향유자들의 집단지성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이용자들은 익명성에 기반해 진실을 말한다고 부여된 자격을 체계 내에서 박탈하고 사전의 형식을 빌림으로써, 선별된 감정의 나열을 팩트로 가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전환은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에 가장 성공적으로 활용되었다. 밝은 서재의 운영자 박가분은 이 전투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느라 바쁘다. 


이에 대한 거울쌍인 김어준(과 유시민과 386)은 끊임없는 소수자 정체화와 죽은 전 대통령에 대한 미안한 감정의 소환을 통해 진실의 중요성을 폐기하고, 우리는 언제나 속이는 거대 악의 끊임없는 환기를 통해 개별 행위자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적 수준을 막론하고, 진실을 외면한 채 어용 시민으로서 자신을 규정하기에 바쁘다. 베충이와 깨시민 모두, 진리를 말한다는 사실과 진리를 말한다고 부여된 자격을 (무의식 중에 혹은 의도적으로) 섞어버린 뒤에 양쪽을 모두 폐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한 거울쌍이다.


1장에서 5장까지가 페미니즘과 직접 관련된 사회 현상에 대한 독해인 데 비해, 이후의 6~9장의 내용은 미디어 상품에 대한 이론적 접근의 성격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있다.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적 기반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후의 논의도 앞쪽과 어느 정도는 연결점이 있다.


“구멍의 정치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적당할 6장의 전체 논지는, 영화와 관련된 몇몇 “구멍”들이 기존과 다른 시공간을 상상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기회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첫번째 구멍은 필름의 양쪽으로 나있는, 영사기에 걸기 위해 필요한 구멍이다. 이 구멍은 실제로 스틸컷을 동영상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즉 여러 스틸컷을 균질적이고 깔끔하게 배열해서 마치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이것은 시공간의 배열에 대한 근대적 관점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하지만 실제 필름의 효과는 그 구멍이 아니라 컷과 컷 사이에서 발생한다. 만약 컷과 컷 사이를 전혀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갖고 동영상을 만든다면, 이 구멍에 의해 비선형적 세계가 펼쳐진다. 이 상상력이 바로 정치의 영역이다.


우리는 이 곳에 무엇을 집어넣어야 할까? 영화 만신은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근대적 변화에 의해 미신으로 치부되어 밀려난 굿을 의도적으로 비춘다. 이 굿은 컷과 컷 사이의 균열 그리고 미신의 복권이라는 사회적 맥락에 기반해서 근대의 정점에 균열을 낸다. 이 균열은 영화정치가 작동해야만 하는 또 다른 “구멍”이며, 이 구멍을 채우는 일이 영화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다양한 계층의 외국인을 조명하는 것은 방송의 단골 소재다. 7장은 최근의 이방인 촬영작인 JTBC 비정상회담을 통해서 분화된 이방인의 구조를 추적한다. 짧게는 IMF, 길게는 70년대 이후 세계경제에 편입되어 신자유주의의 장 아래 놓인 우리에겐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생겨났다. 백인과 비백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고, 또 같은 인종이라도 남성과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각각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은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남근주의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차하면서 생겨났다.


비정상회담과 가장 뚜렷하게 비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10년 전의 미녀들의 수다다. 설령 선진국의 백인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배치 방식과 진행 등 방송에 동원된 여러 장치에 의해 패널들은 이중적인 역할을 떠안게 되었는데, 하나는 성적 소비의 대상이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성적 소비 대상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지적사항의 나열이다. 반면 10년 뒤의 비정상회담은, 성적 대상으로는 비춰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과 대등한 자리에서 논의를 나누는 남자들의 말의 성찬을 보여줌으로써 젠더 권력을 은밀히 드러낸다.


다시 영화비평으로 돌아온 8장은, 장소의 문제를 다룬다. 근대적으로 조직된 장소에서 근대적으로 규율되지 않은 사람은 쫓겨난다. 이것은 남성의 젠더 권력에 의해 조직된 곳에서 여성은 비정상으로 간주되어 축출되거나 굴종의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지만 몇몇 영화들은 이런 공간성의 위계를 뒤집어, “무장소성” 사이의 연대를, 탈규율의 영역에서의 연합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 공간의 재편을 남성 권력과 짝지을 때, 그 대립항으로서 무장소성은 여성 젠더와 결합한다.


푸코는 이것을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 장소는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데, 위기와 일탈의 관리라는 측면을 지닌다. 역설적으로, 위기와 일탈이 춤추는 공간이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며, 이 공간을 구성한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역할을 한다. 영화 김씨표류기는 밤섬을 배경으로, 우리집에 왜왔니는 다른 이의 집에 침입한 사람을 소재로, 페스티벌은 서울에서 가장 헤테로토피아적인 마포구에 머무르며 각각의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위안부 문제가 아닐까? 특히 민족주의적 선입견을 비판하고 식민지적 남성권력의 가부장제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와, 그 대립물인 귀향 류의 강제징용과 강간의 눈물 서사 모두를 제대로 비판하고 넘어서는 것은 한국의 페미니즘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처럼 보인다. 9장은 이 뜨거운 감자를 차분히 풀어가며, 사회의 지배이념을 이해하는 박유하의 방식이 얼마나 단순한지, 그리고 위안부가 실제로 어떤 식민지 이념에 복무했으며 어떤 지배이념들이 교차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려는 시도다. 그리고 이를 통해 페미니즘 비평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두 번 말할 것도 없이 식민지의 복잡성을 가부장제로 단순하게 환원한다. 이 비판을 위해 (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고진의 자본-네이션-남근 스테이트 구상을 끌어들여, 식민지 착취는 이 세 가지 지배이념이 동시에 작동해야만 식민지 위안부라는 개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을 놓친다면, 실제 민족주의 즉 네이션 개념에 기반해 행정 체제를 굴렸던 일본 제국주의의 면죄부를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귀향은, 비평의 관점에서 실패한 영화다. 폭력을 폭력으로, 고통을 찡그린 표정으로만 재현하는 게으르고 손쉬운 재현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반면 똑같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면서도 영화이자 드라마인 눈길은 폭력 대신 비루함을, 고통 대신 비참함을 전시함으로써 독특한 미학적 성취를 이뤘다. 이 차이는 익숙한 서사의 강화와 새로운 서사의 발견이라는, 전혀 다른 반응을 이끌어낸다.


나는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는 손희정의 진단이, 반은 맞고 반은 모호하다고 생각한다. “리부트”의 결과물은 이른바 헬페미, 트페미의 급진적 운동들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역사상 있었던 다른 종류의 급진적 페미니즘과 비교했을 때 지역의 차이 말고는 뚜렷한 이념적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자본-네이션-남근 스테이트라는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차하는 사회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또한 운동이나 담론의 측면에서 차이를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헬조선의 페미니스트들이 역사 속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과 얼마나 다른 담론을 제시했는가? 나는 아직 모르겠고, 아마 그것은 내 과문함 탓이리라.


그저 느낌일 뿐이긴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최근의 다양한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한 양가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체계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그래서 그것에 균열을 내기 위해선 분명 급진적 운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배이념의 힘은 세고, 급진적 수사는 때로 다른 운동의 영역을 폄훼하거나 침범한다. 그래서 이런 운동으로부터 일말의 가능성을 애써 발견하려는 태도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낙관적 전망을 애써 내놓고픈 분투로 점철된 지식인의 자세다. 그것이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나는 아직 판단 유보의 상태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비슷한 태도를 지닌 사람을 책을 통해 만났다는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일종의 위안이었다.


이런 양가감정은 트위터에 대한 서술에서도 느껴진다. 다른 모든 SNS에선 왜곡된 시장논리나 검열에 의해서 페미니즘이 사라져갔다. 반면 막말의 전시를 동반하는 주목경쟁이라는 트위터의 환경은 오히려 페미니스트 진영이 그곳에서 존속하게 만든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주목경쟁이 이념의 당위를 넘어서는 순간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연출되는 그 곳에서, 이른바 먹물들은 어떤 의미를 읽어내야 할까. 이런 작업을 통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작업을 통해 그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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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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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래퍼 슬릭의 마이크 스웨거 프리스타일에서 “헬페미”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이 바닥은 아직도 기집애 같다는 말을 욕으로 쓴다”면서 “그게 힙합이라면 난 힙합 관”둔다는 “hell of fucking feminist” 슬릭의 외침은, 어딘가 통쾌했다. 지옥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묘사가 불가능한 한국의 현실이 폐를 쥐어짜는 “ㅎㅔㄹ” 발음을 통해 터져나온다는 미학적 쾌감이 있다, 는 식의 멋드러진 묘사를 하고 싶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 통쾌함의 이유는, 그냥 내가 슬릭의 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은 “ㅎㅔㄹ” 페미니즘의 궤적을 추적하며 한국에서의 포스트-페미니즘을 정당화하는 시론이다. 헬조선 담론에서 배제된 여성 청년들을 말하고, 메갈리아를 둘러싼 트위터와 세계의 담론을 드러내 (줄여서 말하면 절대 안되는 바로 그 단어) 한국남자들의 남성 연대와 유사 매카시즘을 지적하고, 폭로라는 발화 형식을 통해서야 공공의 논쟁의 대상이 된 강간문화를 비판하며, 최소한의 주관성마저 탈각된 정동의 형태인 통감의 사회화를 통해 여성(과 다양한 소수정체성)의 목소리를 유체연대의 형식으로 복권시킬 것을 주장한다.


전체적인 논지엔 대체로 동의한다.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구분선이 임의적이며, 공공 영역에 권력과 남성을 동시에 놓는 개념적 조직을 통해 이념의 역사에서 그리고 권력의 역사에서 여성이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이런 배제는 사회 전체의 성격을 결정짓는 구획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성차별(sexism)이 아니라 여성혐오(misogyny)라고 불러야만 한다. 여성혐오에 포획된 문명사회의 구성원들은 (성을 가리지 않고) 미시적으로, 일상 속에서, 단 1g의 나쁜 의도도 없는 말로 이것을 실천한다. 나를 시민으로 만들어준 인간의 조건 자체가 나에게 적대적이니,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지옥에 떨어져있다고 말하지 않다면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굳이 “헬”조선의 페미니스트 뿐만 아니라, 몇 세대가 되었건 페미니즘을 자각한 모든 여성들은 “헬페미”가 될 수 밖에 없다.


반면 마뜩찮은 부분도 없지는 않다. 우선, “헬”조선의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헬페미”라고 부르는 것 이외에 “헬페미”가 다른 21세기 페미니즘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려면, 한국 사회 특유의 쓰레기같은 가부장제도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이론가의 일이 아니라고 반박할 것 같고, 그 반박은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하이데거식 말장난”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개별 단어에 대한 독창적인 의미부여도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갈만하다. 분노와 혐오, 폭로와 고백, 동정과 공감과 통감 등 “헬페미니즘”으로 나아가는 노정에 놓여있는 이 책의 중요한 논지들은 거의 전적으로 이 방식에 기대고 있다. “이미 알려진 것”을 둘러싼 정치운동의 감정으로 분노와 혐오를 분석한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폭로와 고백 사이에는 제도적인 간극이 놓여있다는 충분한 설명이 있으니, 그래도 납득할 수 있었다. 반면 동정-공감-통감 사이에 책에서 설명하는 분량 만큼의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결국 세 가지 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작용인데, 우리가 내면을 성찰해서 저 셋을 구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이론적인 논의들을 뒤로 하면, 누가 뭐라고 하든 한국사회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이 책에 언급된 몇몇 사건에 내 친구들이 연루가 되었기에, 그 변화는 관찰과 분석과 연구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시간으로서 내 마음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 되새김이 앞으로도 한동안은, 어쩌면 평생, 나를 어딘가 불편하게 하는(또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 글을 어떻게 맺어야할지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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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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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유시민을 읽는다. 원치 않는 이유로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은게 벌써 몇 년 전인지. 유시민을 읽으면서 항상 생각한다. 항소이유서를 썼을 때나,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했을 때나, 정치인에서 지식인이자 문필가로서 다시 돌아온 현재에도 그의 글은 언제나 편안하면서 날카롭다.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계속 자신의 글을 갈고 닦으면서, 항상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 같다. 무협만화의 성실한 절정고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유시민이 자신의 뒤를 돌아보는 역사서를 썼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우선 아주 넓은 분야에 걸쳐서 잊어서는 안되는 사건을 빠짐없이 언급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물론 큰 목차는 경제-정치사의 주요한 사건을 언급하는 기존의 역사서술의 틀을 따르고 있지만, 그 사건이 가져다준 사회-문화적 파급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⅓ 정도는 아는 내용이었고, ⅓ 정도는 타임라인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헷갈리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⅓ 정도는 잊고 있었거나 모르는 내용이었다. 유시민이 정리한 현대사를 보며, 나도 나름대로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재정리-환기할 수 있었다.


역사서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건조함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이 책에 나름의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내 눈에 그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의 현대사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자신의 기억을 중간중간에 삽입시킨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먼 사건이나 풍경일 때 그의 서술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만 같다. 그가 겪었던 것은 곧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은 사건이기도 하다. 물론 교사의 아들이며 인문계 학교에 진학해 중고생 시절 내내 전교 수위권을 놓치지 않았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생이자 독일 유학파인 유시민과, 소규모 자영농의 아들-딸이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바로 생계에 뛰어든 부모님의 사고의 구조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에선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동감을 부여하는 다른 한 가지 방식은, 잊을 만 하면 등장하는 실명 언급이다. 2장의 서두에 인용된 말마따나, “300년을 30년에 압축해서 경험한”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기술하는데는 아주 많은 지면이 필요하며, 따라서 현대사 책의 저자라면 효율적 기술을 위해 지면을 아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유시민은 특정한 사건을 설명하며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연루된 인물을 일일이 거론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그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즉, 언급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인물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몇몇 이름들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현대(2010년대!!!) 한국 정치계의 주요 인물들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역대 대통령과 국무총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직업정치인의 주류로 간주되는 이른바 “386” 친구들(심재철, 우상호, 이인영, 송영길 등)과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운동권 시절 친구 심상정 등. 심지어 아프리카TV 사장 문용식의 이름도 등장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이름을 하나하나 부름으로써, 이 책은 현대사가 단순히 역사가 아니라 현재라는 사실을 계속 환기시킨다.


이렇게 생동감을 부여하는 그의 전략에서, 나는 교훈으로서의 역사라는 유시민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라는 하나의 단어에는, 사건의 진상을 명확하게 밝혀내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인간 사회의 반복되는 실수를 경계하게 만들고 도덕적 모범을 보여주는 교훈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후자의 관점을 채택한다면, 역사적 사건은 과거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로”(에필로그)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실험실의 비교대조군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무턱대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건에 대한 건조한 기술과 해석의 관점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수적 연구자들의 저서도 (다소나마)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예를 들어, 이승만을 언급하는 책의 초반부에 그가 유영익의 책을 인용한 것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유영익은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이승만 무조건 찬양론자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인 북한 문제와 복지정책의 확대에 관한 서술에서도, 자신이 보수적인 학자들의 연구도 참고했다는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유시민의 한국현대사는, 최근의 정치-사회적 후퇴에 대해 민중이 반성하고 맞서게 만들어주는 도구로서의 이야기다. 우리는 1992년 서해 훼리 사건을 겪었으면서 2014년에 세월호를 또 겪는다.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통치는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에 부활했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이기에 우리는 과거의 저항과 무기력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물론 무엇을 배울지는 유시민이 정리한 한국현대사를 읽는 독자 각자의 몫일테다.


이처럼 이 책은 역사에 대한 확고한 관점이 있고, 자신이 의도한 (것처럼 보이는) 목적을 훌륭하게 성취하고 있는 좋은 책이다. 하지만 나는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이 기분의 원천은, 결국 민주정부 10년 특히 참여정부 시기에 대한 내 박한 평가다. 그래서 이 걸리적거림이 유시민의 역사서술이 실제로 가진 한계인지, 아니면 유시민에 대한 내 편견이 반영된 것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마음 한 켠의 찜찜함만 묻어둔다면, 참으로 간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59년생으로 유시민과 동갑인 내 어머니와 이 책을 같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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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향연』은 사랑에 관한 책이다. 이 짧은 말은 『향연』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면서도, 동시에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누군가에겐 매력적일 수도, 누군가에겐 지루할 수도, 누군가에겐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향연』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관해 논한다. 파이드로스는 모든 역경을 뛰어넘는 영웅적인 행위의 원천으로서 사랑을 말한다. 파우나시아스는 사랑의 대상에 따라 세속적 사랑과 고귀한 사랑은 나누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우리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뤽시마코스는 조화를 사랑으로 정의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달을 닮은 인간의 원형에 대한 설화를 죽 늘어놓으며, 하나됨(충만함)을 향한 욕구를 사랑과 동일시한다. 아가톤은 그 자체로 칭찬할만한 것으로서 사랑의 여러 측면들을 밝히고,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각을 디오티마에게 들은 양 아가톤을 논박한다. 그 와중에 만취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얼마나 사랑하며, 또 소크라테스는 얼마나 사랑받을만한 사람인지를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이렇듯, 그들이 사랑을 논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향연』이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설명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선 도입부터, 전해들은 것을 전해들었다고 전해줌으로써 이 이야기에는 논리적 연결고리 따위는 뭉텅이로 빠져있을 수 있다는 점을 예고한다. 등장인물들은 때로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다가도, 한 페이지 뒤에선 사랑의 상징인 에로스 신에 관해 떠들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껍데기만 같을 뿐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의미를 구겨넣기도 한다. 등장인물들과 우리 사이의 시공간적 차이와 함께, 이런 중구난방식 논의는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이해를 가리는 “거대한 문화적 맥락의 숲”(독일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표현)을 조심스럽게 헤쳐나가는 것이 고전읽기의 묘미인 것 같다.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나, 내가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녔던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나는 지금껏 결핍을 채우는 것을 사랑이라고 간주해왔고, 내 주변 사람들을 사실상 착취해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착취는 사랑에 대한 나의 잘못된 관념과, 사랑“한다”는 내 생각을 드러낼 때 내가 보여준 수많은 잘못들로 설명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사랑은 앞으로 어때야할까. 나는 어떤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며, 그럴만한 자격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낯선 표현방식이지만, 그래서 난 사랑에 관한 많은 고민과 그에 대한 단편적인 대답이 이 책에 담겨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디오티마 부분부터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납득할 수 없어서, 한 문장을 두 세 번씩 되풀이하며 두 번이나 읽어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특히, 모든 성질이나 대상에 그에 대응하는 형상이 존재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발상은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다. 그저,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거대한 담벼락같은 어려움을 피하거나 넘기기를 바랄 뿐이다.


PS. 명색이 철학으로 석사"씩이나" 한 자로서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이 책을 한 번 완독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학교 다닐 때 읽었던 플라톤의 작품들(에우튀프론이 묶여있는 박종현 번역본)에 관해서 내가 갖고 있던 인상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았고, 독해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철학사에서 유명한 그리고 매우 어려운 작품을 하나 클리어한 것이 뿌듯하다.


PS2. 번역이나 다른 판본들과의 비교 같은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어쨌든 번역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것은 미주와 각주를 동시에 쓴 이 책의 방침인데, 한꺼번에 미주로 처리하거나 한꺼번에 각주로 처리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학술적인 내용+문화적 맥락에 대한 설명인 것은 별 차이 없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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