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중앙대학교 교지 『중앙문화』기고> 

 

베스트셀러?

  올해 5월, 서점에 책 한 권이 등장했다. 표지에는 ‘JUSTICE’라는 모양이 크게 박혀있다. 한글 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 글쓴이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라는데, 하버드 대학의 교수다. 이 책은 그가 ‘정의Justice’를 주제로 삼아 해마다 여는 강의의 강의록 혹은 강의초안이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학생들이 모여, 경제정책도 신기술도 아닌 정의에 대해 배우는 강의라고 한다. 목차에는 칸트니 아리스토텔레스니 하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과목에나 나올 것 같은 이름이 들어가있다. 

  이런 면모들을 조합해보았을 때, 이 책은 다른 인문학 책들이 그렇듯이 1000권이나 겨우 넘길까 말까 한 판매부수를 기록하는 게 정상이었다. 표지도 예쁘지 않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 대부분이 이름만 얼핏 아는 정도인 샌델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욱 낯선 이름일 것이다. 다루는 내용은 머리에서 잊어버렸던 수능 공부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못난 표지와 유명하지 않은 글쓴이와 지루한 내용의 3박자가 골고루 갖추어진, 다시 말해 망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한 마디로 말해 대박을 터뜨렸다. 출간 이후 급하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더니,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11월 초에는 50만부를 넘겼다. 지금 추세로는 스테디셀러 반열에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서는 예약이 밀려있는 경우가 보통이며, 학교 중앙도서관에도 무려 13권이나(!) 있다. 조금 더 과장을 섞자면, 2010년에 지하철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다음으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문제는 이 책이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퓨전무협이나 트렌디한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이라는 것이다. 

  무척 당혹스럽다. 비슷한 주제에 비슷한 명성을 가진 사람이 쓴 책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만큼 팔린 사례는 없다. 예를 들면, 존 롤즈John Rawls가 쓴 『정의론Theory of Justice』은 한국에서 얼마나 팔렸을까? 『실천이성비판』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또 어떤가?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자신의 희망사항을 덧씌우기도 한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정의를 갈망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나. 그리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이 사회의 병리를 점검할 수 있는 척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그 평가를 내린 자신이 사회를 공정하지 않다고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하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비슷한 주제에 비슷한 입장을 펼치는 다른 책들이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대통령이 휴가를 가면서 들고 갔다는 소문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식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말 정도다. 

  그러면 읽어보어야 한다. 이 책은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샌델은 왜 이렇게 글을 썼는가? 그리고 이 책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왜 베스트셀러일까?

  어떤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회적인 맥락을 짚어내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 책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도 틀린 방법은 아니다. 베스트셀러를 결정하는 데 사회 분위기와 책의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어야, 그 내용이 사회와 부합하여 판매부수라는 실제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정의란 무엇인가』는, 책 자체로도 매우 괜찮은 책이기 때문에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끊임없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누구나 부담없이 읽기가 편하다. 도덕과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으레 등장하는 괴상한 개념과 명제들이 이 책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샌델이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인용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대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례 속에 모두 담겨있다. 이 이야기들은 여러 쟁점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가 신중하게 선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 사례들이 매우 자극적이다. 그리고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부자의 부에 대해 국가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라는 말 대신 ‘미국 부자 1등 빌 게이츠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도 되는가?’를 사용한다.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을 죽여도 되는가?’,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슬픈가?’ 는 질문도 들어있다. 대개 샌델의 질문은, 일상에서 일어날 법한 밋밋한 사건들이 아닌, 생명이나 권리가 걸린 상황에 대해 선택을 강요한다. 마치 잘 짜여진 TV 쇼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셋째, 이 이야기들 때문에 샌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함의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어, 이것은 문제인데.’ 라고 읽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런 방식의 효과는 크다. 따라서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론들도, 샌델의 사례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곧바로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 자습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사례가 말해주는 사항을 글쓴이가 어느 정도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로 직접 정리해주기도 한다. 

  넷째, 사실상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도덕에 대한 매우 다양한 입장을 효과적으로 단순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샌델은 윤리학사에 등장한 여러 입장을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칸트와 롤즈), 덕 이론(아리스토텔레스)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몇몇 특수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이 샌델의 모델에서 포착할 수 없는 입장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 책에서 쉽게,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완성된 형태로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장점들이 지금처럼 화제에 오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내용을 읽는 사람이 마주치는 사건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적용해보기 쉽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책과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도덕적인 문제에 직면해있으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 고민해야하는지 알아간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론적 수단을 제시해준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 모든 욕구를 채워주기에 아주 알맞은 형식으로 써진 책이다. 그리고 바로 샌델이 자기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위하기를 바랐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샌델의 위치?

  샌델이 이런 방식으로 책을 쓰게 된(혹은 강의를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학문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그가 책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샌델은 존 롤즈에 매우 반대한다. 이런 반대는 비단 롤즈와 샌델에게만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흔히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학문적 논쟁에서 롤즈는 자유주의 진영을, 샌델은 공동체주의 진영을 각각 대표하는 학자이다. 이 논쟁은 샌델이 1982년에 롤즈를 비판하는 책을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도 흥미롭지만, 그 큰 맥락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서술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샌델의 전략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샌델, 그리고 샌델과 함께 대표적인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Alesdaire MacIntyre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보여지는 입장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매우 가까워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샌델과 매킨타이어가 함께 강조하는 것은 바로 덕virtue이다(『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미덕으로 번역되어있는 것 같다). 이 덕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충실하게 지속적으로 사는 삶을 뜻한다. 인간은 영혼, 그리고 영혼에서도 이성이라는 특별한 부분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따라 지속적으로 삶을 꾸려나간다면 그 사람은 덕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은 삶의 목적인 행복한 삶eudaimonia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어떤 특별한 원리나, 모든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지침은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더 가깝다. 오히려, 그는 구체적인 상황마다 그에 맞는 행위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양식을 찾게 해주는 인간의 능력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실제 사건들과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어떤 행위가 가장 적합한지 알아내는 훈련이 요구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습관hexis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이렇게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실천적 지식phronesis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실제 벌어지는 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사건이 없는 한 도덕은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제목,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설정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전통에서는 정의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질문한다. 공리주의에서는 도덕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좋은 것’와 ‘싫은 것’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도덕적 문제들을 이 두 개념으로 환원시킨다. 자유주의에서는 ‘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며, 이와 별개로 ‘자유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여기에 기초하여 권리를 설정하고 그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법의 수립을 추진한다. 정의에 대한 질문은, 선과 정치가 오묘하게 닿아있는 영역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하고 적절한 기준을 제시하려고 했던 그 곳이다. 

  샌델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전략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재현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도덕에 대한 논의는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도덕적·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정치적 판단과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샌델이 여러 윤리적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전략은 자신의 입장에 충실히 따르는 일, 즉 구체적인 사례들을 계속 보여주며 여기에서 가장 적합한 선택 또는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윤리적인 입장에 부합하는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어쩔 수 없이 ‘도덕적 직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매우 위태롭다. 물론 다른 체계를 자기 내면에 담고 사는 사람들도 직관처럼 보이는 판단을 내리지만, 그것은 어떤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며, 추론하는 과정을 빠르게 하거나 생략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짜 직관에는 이런 판단의 체계나 기준이 없다. 당장 아리스토텔레스만 보아도, 샌델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행위하는 것이 이성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여기서 ‘적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듯, ‘적절하다’는 말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적절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떻게?
 

이데올로기?

  우리가 ‘직관’하여 어떤 행위를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어떤 학자들은 신념의 체계라고 부르며, 그것을 한 단어로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는 체계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우연히, 어떤 체계에서 연역할 수 있는 결론을 담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인 추론이나 엄밀하게 검토된 양식이 아니다. 거의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정하게 행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행위들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아까 위에서 잠깐 특수한 몇몇 예외들을 제외하면 샌델의 모델이 거의 모든 윤리학적 입장을 소개해주고 있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이데올로기’를 언급하는 주장들이 이 특수한 몇몇 예외들에 해당한다. 가장 멀게는 트라시마쿠스가 내뱉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라는 짧은 말에서부터, 최근에는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권력의 미시적 작동에 의해 사회 전체가 통제되고 있다고 폭로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같은 사람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만들어진 조건에 따라 아주 우연한 여러 가지 형태로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당위명제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에 편입되는 순간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편입되지 못한다면, 한 이데올로기의 깃발 아래 놓여있는 많은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력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편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실천을 강요할 권능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해도 사회로부터 배척당한다. 나와 너의 분리, 우리와 너네의 분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요소가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샌델의 한계점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샌델은 시장만능주의자들과 낙태찬성자들을 자유지상주의라는 한 범주에 묶었다. 하지만 실제 정치환경에서 이 둘을 동시에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의 시장만능주의자들, 즉 보수주의자들은 대개 기독교도적 정체성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낙태에 반대한다. 다시 말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명령하는 명제들의 묶음, 즉 어떤 특수한 이데올로기이다. 또한 낙태찬성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자유롭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낙태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여성의 몸을 취급하는 방식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맥락이 다른 이야기이다. 

  더욱이 샌델은 지속적으로 어떤 일관된 체계 안에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것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항상 같은 체계에서 연역될 수 있는 선택지를 뽑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가정을 바탕에 두고 논지를 전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런 일관성을 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담아놓은 당위적 명제들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죽더라도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아래에서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죽을 때 덜 슬픈 것이다. 사실 샌델의 판단과는 다르게, 도덕적 직관에 따른 판단은 일관된 도덕적 신념에 위배될 때가 훨씬 많다. 우리는 서로 모순된 행위를, 그것이 모순된 것인지 아닌지 판단을 유보한 채 일단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한다. 사회와 이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샌델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덕목은 모두 이데올로기에 속하거나,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것들이다. 우애, 애국심, 시민적 의무감, 가족애, 형제애 모두가 그렇다. 이런 개념들은,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우나 매우 위험하다. 이들은 인종탄압, 전쟁과 같은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또한 가족이든, 형제든, 국민이든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는 경우를 너무나도 자주 볼 수 있다. 그 이유도 정말 다양하다. 

  흔히 이런 경우에는 덕목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우리가 어떤 기제들에 묶여있는 것은 아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존재하던 덕목들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윤리학을 정립시켰고, 샌델도 그 뜻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윤리학의 진정한 의미가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라면, 우리가 굳이 그들을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 넓은 시각에서, 자신이 영위해온 삶의 양식에 대해 총체적으로 반성해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샌델의 설명과는 달리 칸트의 견해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칸트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매몰된 행위지침들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편적인 윤리적 체계에서 자유에 대해 설명하려 한 그의 견해에 비춰볼 때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는 시민윤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언제나 세계시민적인 관점, 인류 전체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또한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시민사회들이 통합을 거듭하여 결국에는 세계시민적인 윤리가 확립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런 예측은「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이라는, 그가 쓴 아주 유명한 논문에 등장한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시민적인 관점을 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는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하라.’ 라는 칸트의 공식과, 그 공식을 실제로 세계에 펼칠 수 있는 사회가 출현함으로써 성취된다. 물론 그도 이 과정이 대단히 길고 힘들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 게다가 이것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현상계(감성계)에서 포착할 수 없으며,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계(예지계,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지적 세계’로 번역되어있다.)를 향해 인간이 스스로 요청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의 윤리학은 진정한 도덕적 인간의 밑그림을 그려준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재의 덕목들을 윤리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들,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않는 공리주의적 생각,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의란 무엇인가』 다시 들여다보기

  샌델은 영국과 미국에서 논의된 윤리학의 전통만 다루고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될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이야기 중심의 책 구조는 책 내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만든다. 그 사례들이 충분히 사람들의 상상력을 들뜨게 할만한 일들이기에 그 효과는 몇 배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은, 윤리학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샌델이 설정한 모델을 핵심만 뽑아내어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은 이런 것들이다. 아주 재미있고 실용적인 윤리학 책이다. 

  이런 서술구조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샌델의 학문적 성향 때문이다. 구체적 사례 속에서 직접 실천함으로써 윤리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샌델은 자신의 윤리학 체계를 만들어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책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고, 앞에서 나왔던 여러 이론들을 반박할 수 있는 최고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적합성’이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적합한 행위를 함으로써 도덕적인 인간 즉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샌델도 여기에 동의하며 시민적 덕을 자기 윤리학의 중요한 자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샌델이 제시하는 덕목들은 특정한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좌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미국이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적, 사상적 전통에서 나온 (미국)시민적 덕목들은, 요즘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볼 때 그리 바람직하지만은 않아보인다. 물론 샌델은 그 덕목들이 발휘되고 있지 않거나 잘못 발휘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미국사회를 비판한다. 하지만 특정 집단의 가치들을 일반화하고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 한 권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학자들에게도, 샌델에게도 한계점은 분명 존재하게 마련이다. 샌델이 부정적으로 설명한 칸트가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답이 꼭 옳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이 뒤를 고민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이 책은 5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바로 ‘이 뒤’를 고민할 사람이 적어도 50만 명이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주 기쁜 일이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 윤리적 삶의 첫걸음을 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만 명 각자의 삶, 나아가서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더욱 진지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다는 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매우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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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단상
    from 효진이네 : 꼼꼼히 읽기 2018-02-17 07:01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 번째 읽는다. 학교를 다니며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불만에 가득 찬 리뷰를 교지에 투고했다.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막 나왔을 때 쯤이었으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새로 번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판형과 종이가 바뀐 정도 이외에 큰 차이는 못느끼겠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초판을 읽은지 오래 되기도 했고. 다시 번역이 되고도 30쇄나 더 찍을 만큼 많이 읽힌 책이고, 그에 대한
 
 
에브리온 2010-12-0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지적에 글을 보며 감탄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것을 비롯해서 이제까지의 서평 중에 가장 풍성하면서, 동시에 정확한 글인 듯 합니다. 즐겨찾기 등록하고 갑니다 !

박효진 2010-12-07 00:46   좋아요 0 | URL
엇... 감사합니다... ㅠ.ㅠ
이 글은 중앙대학교 교지인 중앙문화에 기고한 글입니다. 저는 중앙대학교 철학과 학생이고요. 교지에 다른 좋은 글도 많으니 시간 되시면 찾아서 읽어주세요 ㅎㅎㅎ

남규 2010-12-16 23: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은혜로운 바쿄진님..ㅜ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