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가족,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성에 관한 윤리적 담론은 인류가 “가치”에 관한 개념을 가장 오래도록 결부시켜온 역사적 형성물이다. 번식은 본능이고 성차는 자연의 산물이라는 생물학에 기반한 편견에서부터 전통으로 확립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문화적 합리화에 이르기까지, 사실 성 담론은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을 억압하는 기능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공격받고 해체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가 채 300년이 되지 않았으며, 이 진보는 페미니즘의 등장 및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표방하고 있진 않지만, 러셀의 『결혼과 가족』은 그 움직임에 작은(어쩌면 큰) 보탬이 된 책이 아닐까 싶다.


밀의 『여성의 종속』이 그러하듯, 러셀 또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도덕지상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담론들을 공격하고 성의 해방을 주장한다. 우선 그가 누누이 강조하는 “인간의 성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관한 지식”의 교육의 중요성이 그러하다. 쾌락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러셀이 주로 개신교 신자들이라고 범주화하는) 억압적인 사람들이 아이들의 도덕교육을 맡는 순간, 아이들은 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배울 기회를 영영 박탈당한다.


러셀은 이런 기회박탈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좇아 행위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투명한 공개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인으로서의 최소한의 합리적 판단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그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연애시장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게끔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기에, 도덕주의자들이 우려하는 타락과 방탕의 문제는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이 억압은 단순히 당사자의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성에 관해 갖게 되는 잘못된 죄책감을 시작으로, 성에 대해 미숙해서 벌어지는 젊은 세대의 연애의 불행,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의 불행, 결혼을 통해 구성된 가족 안에서 부모의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하는 아이의 불행, 나아가서 그런 불행한 자들이 구성하는 사회 전체의 불행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사회적 불행의 결과는, 정말 불행하게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다. 우리의(더 정확히는 러셀이 아는 한에서의 서양의) 역사는 여성에 대해서 온갖 종류의 압박이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나 현재(러셀이 살았던 시기에) 문제되는 것은, 강한 금욕주의가 사실상 여성에게만 강제되는 형태로 실천되어 왔다는 점이다. 남성들은 그들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이유로 각종 암묵적 장치들(성매매)을 통해 성적 방탕과 타락이 사실상 용인되었다.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그들이 지켜야 할 제1의 가치로 정숙(순결/정조, chastity)이 내세워지기에, 한 편으로는 남성과 동료가 되어 사회생활을 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조 관념이 없는 사람이라며 지탄을 받는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여기에다 도덕적 덕목을 지키려는 것은 남자, 유혹해서 그를 파괴하는 팜므 파탈은 여자라는 도식까지 더해지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전 인구의 절반이 겪고 있는 끔찍한 불행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러셀의 진단이다.


러셀의 평가는 이렇다. 이 모든 종류의 구식 도덕지상주의와 금욕주의는 우리 사회의 현대적 변화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이런 여성 억압은 그 자체로 옳지 못하다”는 주장과는, 약간은 결이 다르다. 이런 종류의 도덕적 신념이, 단지 현대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 잘 어울리지 않기에(적합하지 않기에) 행복을 증진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발상은, 그가 책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는(행정서류상 그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의 논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그가 내놓는 정책적 제안은, 밀의 입장에 비해 한 발 더 나아간다. 혼인 이외의 성관계는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 당사자간 합의 하나면 이혼이 성립하게끔 법을 고쳐야 한다는 것, 초등학교 때부터 성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알려주는 교육을 장려할 것 등이 포함된다. 나아가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행되는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의무교육 이상의 보편육아, 아동수당 지급, 육아휴직과 복직의 보장 등을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핵심은 이런 제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정책이기 때문에 시행해야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삶의 형태에서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잘 어울리는(적합한) 제도이기 때문에 시행해야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즉, 그는 어떤 도덕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한, 자신이 제시한 것과 같은 정책들은 필연적으로 시행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아동노동을 금지하고, 의무교육을 시행하며, 아이들의 독립된 재산권을 인정한 것을 발전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여기에서 더 나아간 발전이란 (러셀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의 역할로 간주되던 것을 국가가 완전히 대체하는” 공동체로 변모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1929년에 출판된 것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이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각각에 속하는 어떤 특성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 같은 것이 그렇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동시대의 거의 모든 페미니스트들 또한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체로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의 해방의 논리는, 여성성으로 간주되었던 여러 특성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가치를 높게 매겨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논리를 남성이 반복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줘야할지는, 약간은 의문이다.


현재 시각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생학’과 관련된 몇몇 주장이다. 예를 들어, 그는 정신적인 이상이 있는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는 충분히 진보적인 것이다. 단순히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아이를 낳을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의 논리를 일부 받아들여 정신적인 이상이라는 것이 상당수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에, 그가 인정하는 제한의 폭은 더욱 줄어든다. 그럼에도 현재 시각에서 보았을 때, 우생학의 주장을 일부나마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거슬릴 수 있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의 예측, 그리고 그의 정첵적 제언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요약해놓은 러셀의 발상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이 책이 출판되고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상당히 많다. 이유는 가지각색일 것이다. 여성의 권리 신장을 싫어하는 사람, 어떤 종류의 문화를 성적인 문란과 퇴폐라고 생각하는 사람, 현재 사회의 질서가 자연의 섭리이므로 그것을 비판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라도, 러셀이 자신의 글 전체를 정리하며 사랑은 육체적 결합과 정신적 결합이 등비를 이루는 조합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결론 부분만큼은 꼭 한 번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결국 그는, “사랑이란 대지에 뿌리를 내리며 동시에 하늘로 가지를 뻗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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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개정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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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독서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큐레이터 한 분과 함께 미술관 두 곳을 갔다왔다. 금호미술관과 선재아트센터. 각각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심드렁하게 본 것도 있었고, 생각해볼만한 것도 있었으며, 시각적으로 신기해서 충격을 준 것도 있었다. 그 중에 정말 모르겠던 것은, 포켓볼에 쓰는 솔리드 8번 공을 몇 개 늘어놓고 설치미술이라고 하는 작품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남자들은, 바닥에 구 모양의 물체가 놓여있으면 걷어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작품이니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술인지 머릿 속에 드는 의문에, 그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적절한 해답을 주는 것 같다.


이 책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어떤 인공물을 미술로 분류하는 행위는, 맥락의존적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문화로서의 맥락의 공고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작가가 무언가 만들어놓은 뒤 예술로서의 맥락을 잘 설명하기만 한다면 어떤 인공물도 미술이 될 수 있다. 저자인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인공물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다양한 맥락들이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것을 잘 드러내주는 인공물을 보여준다. 이 맥락에 포함되는 미술과 그 주변의 문화적 산물들은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다. 작품, 주체성, 기예, 미학, 작가, 학계(미술계/아카데미), 박물관/미술관, 미술사, 대중문화, 동시대 미술이 그 산물들이다.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이 모든 산물들에 대해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이 대체로 18~19세기 사이에 생겨난 것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18세기 중반에 아름다움에 대한 합리적 분석이라는 근대적 모토 아래 미학이 생겨났고, 아름다움을 담는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이 생긴 다음에야 미술작품이 분류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분류된 작품들의 변천을 선형적으로 엮어 만들어진 미술사책이 처음 출판된 것이 18세기 중반이었다. 이런 작품은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창조적 영감을 지닌 천재가 만들어낸다는 미학이론은 19세기 초반 낭만주의의 소산이며, 이런 작품이 세계 전체를 재창조해내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작품의 창조란 유아론적인 근대적 주체의 표현이다. 창고의 잡동사니를 근대적 지식체계에 따라 분류해 전시하면 박물관, 그 중에서도 순수예술로 분류되는 인공물을 꺼내 전시하면 미술관이 된다. 최초의 공공박물관은 1820년대에 생겼다. 이 모든 작업은 프랑스의 절대왕정시기부터 각 국가에 형성/설립되기 시작한 학계(아카데미)에서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인사들이 수행한다. 그리고 20세기의 미술은 이 모든 것의 전복과 이종교배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설명은 미술/미술계/미학의 역사에 대한 표준적 방식이다. 아주 낯선 주장이나 논증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에 대한 정석적 설명보다는 미래의 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가 미술작품이라고 이해했던 것들을 그 인공물이 생산된 시기의 사회/문화/경제적 맥락 속으로 융해시키고, 그것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다시 묻는다. 그에게 미술의 본질은 아름다움, 특히 시각적 아름다움의 표현에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작품이란 생각의 표현이다. 그 생각이란 자신의 만들어낸 인공물이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의 동의어다. 이 단계에서 미술은 다른 ‘사상적’ 인공물들, 예를 들어 철학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것들에 개입하는 장치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이것은 미술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특히 미술이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는 표준적 설명에 덧붙여진, “주체가 되는 강력한 방식으로서의”(이 책의 마지막 문장) 예술이라는 아이디어가 특히 그렇다. 미학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름다움이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가치들로부터 독립된 어떤 것이라는 믿음은 저자가 설명하듯 그리 오래된 발상이 아니다. 그래서 미술이 아름다움이라는 제한된 영역을 넘어서 세계 전체를 대면하고 창조하는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저자와 비슷한 듯 하면서 결이 약간은 다른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미술이 이렇게 거창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어쩌면, 미술은 애초에 아름다움이라는 거창함에 관한 무엇도, 주체에 관한 무엇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미술이 아닌 다른 인공물을 대할 때 그러하듯, 대체로 모든 인공물들을 창조하는 동기는 재미, 즉 유희에 대한 욕망인 것 같다. 물론 유희에 대한 자신의 욕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재미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여기에 덧붙여져야 되는 것이 이른바 생각, 즉 이 인공물의 재미에 대한 설명이다. 그 설명이 반드시 아름다움만 고려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아름다움을 배제하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문제는 재미이고, 재미에 대한 이유니까. 나는 이런 완화된 태도가 오히려 아름다움과 올바름과 참됨을 하나로 통합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취향판단(의 한계)에 조금 더 부합하는 것 같다.


재미를 설명해야 하다니, 이것만큼 재미없는 작업이 또 있을까!(물론 나는 설명충이므로 이런 것이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저자 스타니스제프스키가 말한 “주체가 되는 작업”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과 크게 떨어져있는 발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공물에 대해서 생각을 늘어놓는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저 재미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나 스스로를, 내 인공물을, 내 생각을 문화적 맥락 안에 자리매길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재미를 추구하며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쉽고도 짜릿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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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오리진 - 전2권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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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은 댄 브라운의 책이 『다빈치 코드』였기에, 나는 그를 『다빈치 코드』의 작가로 기억한다.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그렇게 기억하는 모양이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재미있었다”는 인상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글쓰기 수업 수강생이 독후감을 써올 책으로 선정했기에 같이 읽어보았다. 단적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량에 비해 건져낼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생명의 탄생과 인류의 미래를 예측했다고 주장하는 유명 IT기업가가 자신의 예측결과를 공개하는 프리젠테이션 행사 도중에 살해당하고, 『다빈치 코드』의 주인공인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이 그 결과를 다시 세계에 공개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이 책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 책에서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엄청난 이야기가 숨겨져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1권을 다 읽어나갈 무렵이면 뒤에 펼쳐질 내용이 대강 예상된다. 몇몇 부분은 작가가 큰 반전을 의도했던 것 같기도 한데, 아쉽게도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다. 설정 충돌이 의심될 정도로, 몇몇 캐릭터의 능력치가 들쭉날쭉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설명하면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하게 풀어놓을 수는 없으나, 하나는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랭던이 기호학의 전문가라는 설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결코 들지 않는다.


소설 속 세계에서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간주되는 그 예측결과도 별 것 아니다. 기술발전에 대한 별 근거없이 편향된 입장의 아주 얄팍한 반복일 뿐이다. 포스트 휴먼이니 트랜스 휴먼이니 하면서 이미 몇 년 전부터 현실세계에서 거론되던 담론이, 이 소설에서 다루는 범위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형성되어있다. 그래서, 적어도 내겐, 신기할 것이 없었다.


그 예측결과가 별 것 아니라는 점이 내 입장에선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과 두려움과 놀라움의 크기가 소설 속 세계의 분위기 그리고 사건의 발단/전개/절정/결말 모두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소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한 신선한 시각을 기대하던 나로서는, 결말 부분이 너무나도 허탈했다. 겨우 이 정도 견해 때문에 사람들이 그토록 난리를 겪는단 말인가? 배경이 1990년대나 2000년대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겠으나, 소설 속 세계는 사람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우버 택시를 이용하는 그런 곳이다. 이런 세상에서 기술에 대한 낙관주의와 과학에 대한 신뢰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호응을 받는다는 것도, 위협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나 덧붙일 내용도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이 책에서 다루는 학설은 현재 소수의 지지만을 받는 비주류 입장이 되었다. 이 소설 안에서는 이상한 아이디어 취급을 받는 판스페르미아 가설, 즉 대충돌 시기에 우주에서 생명의 원초적 형태(유기화합물)가 날아왔다는 설명을 오히려 신뢰하는 과학자도 있다(이 부분에 관해서 나는 이정모의 『공생 멸종 진화』, 그리고 과학 팟캐스트인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를 참고했다). 물론 이런 연구결과가 소설이 집필되는 도중 나왔다면, 그것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디테일이 눈에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소설을 집필하는 데 도움을 준 “과학 자문”의 이름도 감사의 말에서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이야기 전체의 중추를 이루는 소재, 즉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잘 구성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반적인 긴장감이 너무 떨어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답을 찾으려 하기보단, 혼자서 생각해보거나 다른 책을 읽는 것이 더 나을거라 생각한다. 우리에겐 이런 문제에 훌륭한 대답을 해주는 소설과 영화가 이미 많이 주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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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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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강력한 추천으로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왜 추천해줬는지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다른 사람에게 이 책을 주저없이 추천할 것이다.


이 책은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해서 「씬짜오, 씬짜오」, 「한지와 영주」 등 소설 7개가 한데 묶인 소설집이다. 각 작품의 제목이 다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 책에 담긴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나는 ‘상처’라고 대답할 것이다. 대체로 이런 평가에는 사람들이 많이 동의하는 것 같다. 구글에 “쇼코의 미소”와 “상처”라고 검색해보면, 두 키워드를 엮은 리뷰가 꽤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물론 그 뒤에 ‘치유’라는 키워드도 추가되는 것 같은데, 치유는 작품별로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각 작품의 주인공들은 제각기 상처를 안고 산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봉합해야 할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내왔고, 그 상처를 외면하는 임시방편을 끊임없이 반복해오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그것을 직시해야 하는 일도 생기고, 때로는 내 상처를 외면한다는 것이 상대의 상처까지 외면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씬짜오, 씬짜오」). 내 상처와 다른 사람의 상처의 충돌은 대체로 오해를 낳지만, 때로는 그 겹쳐보임이 위로로 바뀌기도 한다(「미카엘라」).


문제라고 할까, 아니면 주어진 것이라고 할까. 대부분의 상처는 우리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겨나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내 몸과 마음을 주조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 상처는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상처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이별을 맞이한다(「한지와 영주」). 제가끔의 상처를 이런 방식으로 끌어가며 각자의 사람들이 시간의 위를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인가? 이 질문에 이 책은 그렇다는 대답을 주는 것 같다. 누구도 상처를 자랑하거나 숨기지 않는 것처럼, 그 상처를 묘사하는 작가의 방식도 자랑하거나 애써 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 상처가 대체로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사회가 구성원 모두에게 강제로 내버리는 어떤 생채기 같은 것이라는 점을 작가는 굳이 부인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치유라는 의미가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미카엘라」나 모녀 3대를 묘사하는 「비밀」 같은 것이 그렇고,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나 주요한 시점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받은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는(그리고 미래의 나 자신에게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 같은 것을 갖고 있다. 굳이 혁명을 부르짖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이런 소망은 아마 세상을 바꾸는 밑거름이 될지 모른다.


설령 허구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의 목적은 간접 경험이다. 『쇼코의 미소』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며 내 상처를 돌아보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상처인 사랑을 다룬 「한지와 영주」였다. 물론 이 소설은 누군가에겐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읽는 내내 웃었다가도, 마음이 무거웠다가도,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다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허공에 뱉어낸 그 말들도 내 상처가 원인이었고, 그리고 누군가의 가슴에는 흠집을 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결론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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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말하다 - 무엇이 나를 인간답게 만드는가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4
라르스 스벤젠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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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쓰인 것처럼, 자유는 어쩌면 사람들 사이에서 결코 합의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 단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 가지 이론으로 자유를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 자유는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감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삶의 토대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정식화가 틀어지는 순간, 우리의 삶 전체는 형이상학적/도덕적/정치적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유의 의미와 그 가능성/한계를 탐색했다. 이 책은 철학의 역사 속에서 이뤄졌던 수도 없이 다양한 접근을 압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내용들이 아주 간단한 몇 가지 개념과 논증으로 축약된 탓에, 천천히 뜯어서 보지 않으면 의식의 옆길로 새기가 십상이다. 


이 책의 특별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의식을 탈출시키는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책의 초반인 “자유의 형이상학” 이다. 우리는 자유에 관해 다룰 때 대체로 정치적 자유, 표현의 자유, 행위의 자유와 같은 도덕적인 부분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가 일상적 감각과는 달리 “진짜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면, 도덕적/정치적 자유에 관한 논의는 무의미해진다. 양립가능론이나 자유의 의미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초반부가, 자유에 관해 다루는 다른 여러 책에 비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체로 나는 저자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저자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자유지상주의자다. 즉, 그는 세계의 구조가 비결정적이라고 믿으며 그래서 인간이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가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철학자다. 그에 관한 논증을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도 인지하고 있듯이, 나는 이 둘의 논리적 연결고리가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세계가 결정론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면 내 의지의 자유는 별 의미가 없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생길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 있으며, 그래서 세계가 비결정적이면 우리는 “실제로”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자유로운지 확인조차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그래서 양립가능론자다.


또 스트로슨의 반응적 태도/객관적 태도에 관한 논의는, 천천히 뜯어보면 칸트의 예지계/현상계 구별 논의의 변형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형이상학적 자유지상주의자인 저자는 객관적 태도의 가능성 자체에 의심을 품고, 도덕적 피드백의 세계를 구성하는 반응적 태도에 관한 논의에 우호적이다. 역시나 그와 생각이 다른 나는, 우리가 감지하는 세계는 어쩔 수 없이 객관적 태도 하나로만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즉, 반응적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세계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반응적 태도는 “전적으로” 내면의 상황일 뿐이다.


책의 2부에 해당하는, 자유의 정치적 의미에 관해서 아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도 꽤 볼만한 부분이다. 그는 이 부분에서도 자유지상주의자의 입장을 취한다. 위에 쓴 형이상학적 자유지상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같은 영어단어이긴 하지만 한글 글쓰기의 편의상) 정치적 자유지상주의자를 가리킬 때 리버테리언이라는 표현을 쓰려고 한다.


같은 자유주의자로 분류되지만, 대체로 철학의 전통에서 다루는 정치적 자유주의는 롤즈식이다. 특히 그의 초기 대표작인 <정의론>에 기반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거론된다. 이 전통은 리버테리언 전통과는 아주 다르다.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권리 개념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에 같이 속하긴 하지만, 롤즈 계열은 대체로 평등주의적 측면을 훨씬 더 강조하며 기회의 “완전한”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을 역설한다. 뭐, 써놓고 보면 그럴듯하지만 사실 진부한 논의다.


본인이 리버테리언 즉 반-롤즈 주의자인 탓인지, 이 책에서 오히려 반-롤즈 진영의 논의와 <정의론> 이후의 더 최근의 논의가 다뤄진다는 점도 만족스럽다. 공화주의라든가, 경제학적 관점에서의 접근, 센-누스바움의 역량 이론이라든가 (이 책에서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로 명명된)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세일러의 넛지 이론이라든가 같은 것들이 그렇다. 물론 이들 모두 긍정적인 시선에서 다뤄지지는 않는다. 공화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은 실제로는 완전히 자유와 반대라거나, 아닌 척 하지만 세일러의 넛지 개념은 완전히 개입주의적이라거나 하는 식이다.


역시나 나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 공화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그것이 메인 컨셉이 되어선 안된다는 생각도 줄곧 갖고 있다). 또한 넛지 식의 캠페인은, 사람들의 선택권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입조차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효과적인” 캠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


최근의 한국에서 이슈가 되는 내용도 들어있다.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에 관한 논의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다른 챕터의 논의에 간략하긴 하지만, 강경한 리버테리언의 입장에서 이 이슈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를 잘 볼 수 있다. 그는 프라이버시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원초적 권리라는 점에서 그 영역이 넓은 것이 좋다는 생각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는 도덕입법을 우려해 표현만으로 처벌을 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사실 이 두 가지 문제는 자유주의자의 입장에 섰을 때 아주 까다로운 문제이긴 한데, 저자의 입장이 확실히 개별 이슈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깔끔하다는 생각은 한다. 다만, 무형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를 프라이버시 이야기에서는 언급하면서, 무형의 위협이 주는 마음의 상처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만 하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표현의 자유 처벌 반대 논증이 전개되는 것은 약간 갸우뚱한 부분이긴 했다.


어쨌든 이 책에 관한 내 결론은 이렇다. 정치적 자유에 관해 이 이상으로 많은 논의들을 책 한 권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거의 모든 내용을 아주 간단한 터치만으로 넘어가는 탓에, 빽빽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서술 속에서 소개된 학자들의 이름을 기억해두고 각주와 참고문헌의 숲을 하나씩 헤쳐나간다면, 조금 더 넓은 자유를 조망하는 눈을 얻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처럼 “온정주의(후견주의, parternalism)가 판쳐서 무엇이 내 권리인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어버리는” 한국 사회라면, 때로는 리버테리언들(그리고 형이상학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논리적으로는 정교한) 논의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갈만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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