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된 정의에 숟가락 얹기 - 『정의란 무엇인가』멋대로 읽기
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 번째 읽는다. 학교를 다니며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불만에 가득 찬 리뷰를 교지에 투고했다.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막 나왔을 때 쯤이었으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새로 번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판형과 종이가 바뀐 정도 이외에 큰 차이는 못느끼겠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초판을 읽은지 오래 되기도 했고. 다시 번역이 되고도 30쇄나 더 찍을 만큼 많이 읽힌 책이고, 그에 대한 정보도 웹 상에 차고 넘쳐나니, 샌델을 둘러싼 여러 가지 정보들보다는 내 감상과 평가로 곧장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우선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리해보아야겠다. 처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때 나는 샌델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가 이 책에 제시한 윤리학적 입장들은 영국-미국 전통의 정치철학에서는 표준적인 분류법이긴 하고, 그 정보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그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개진되는 후반부였다. 내가 당시에 옹호하던 여러 종류의 진보적 가치들을 그는 의문에 부치거나 부정했다. 물론 샌델의 논의에 기반해서도 그런 가치들을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샌델의 표현에 따르면) “국가의 정치적 중립성” 이론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그 가치들을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아주 강한 롤즈식 평등주의와 (당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마르크스주의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물론 (이른바)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고 칸트-롤즈 전통의 자유주의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샌델의 입장,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에도 우리의 도덕적 삶을 관통하는 어떤 통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유념해야 할 부분은, 역시나 모든 인간들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고 그 공동체가 정체성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가 상당 기간 동안 유지해 온 여러 가지 종류의 가치들을 ‘우연’이라는 이유로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 가치들은 인간이 세계에 투영하는 도덕적 세계관과 도덕적 사실의 일부를 실제로 반영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가치들은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설령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유지해온 편견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예전의 나는, 논리적 일관성만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윤리학이란, 그리고 윤리학의 이론이란, 이런 가치들 중 일부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재구성하거나 또는 이런 가치들에 순서를 매기는 메타 이론을 만드는 작업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 윤리학이라는 작업 자체가 우리에게 딜레마를 던져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관성은 없지만 일상을 지지하는 가치들의 탄탄한 그물로 나를 지탱할 것인지, 아니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면서 엄밀하고 엄격하게 구성된 이론에 따른 삶을 만들어나갈 것인지. 앞쪽 입장을 지지한다면 샌델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고, 뒤쪽 입장을 지지한다면 아마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의 서열을 매기는 독특한 입장을 개발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샌델이 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사례, 그리고 우리가 신문과 SNS로 접하는 여러 가지 사건에 자기 입장을 적용해보는 연습을 통해서 관점을 정교하게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잘 짜여진 한 편의 각본 같이 구성되어 있다. 현대(19~20세기) 영국-미국 윤리학/정치철학의 발전사를 간략하게 짚어나가며, 이론으로 처리하기 힘든 복잡한 현실의 판례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판례들은 다음 챕터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 구실을 한다. 이전에 등장한 이론과 이번 이론의 차이와 쟁점도 역시 사례를 통해서 잘 단순화된다. 이런 전략은 아마도 그가 뒤에 매킨타이어를 인용하면서 제시할 “서사적 자아”라는 개념을 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공부를 더 했더라도 내 입장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만큼, 나는 여전히 샌델에 대해 비판적이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들여 목적론의 의의를 강조하면서 공공선이 민주적 토론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혹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적어도 내 생각엔 양립할 수 없다. 목적론적 세계관 속에서 좋은 것에 관한 사실이 이미 있거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면, 민주적 토론 같은 것은 무의미하거나 형식적 겉치레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선(좋은 것)이 객관적 사실로서 확립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들의 민주적 합의와 무관하게 공공선(공동선)이 무엇인지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공공선을 실현시키거나 그것이 증대되게끔 봉사하면 그만이다. 민주적 토론이란, 최소한 공공선의 내용과 그 객관성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 이용할만한 발견술 정도로 그 의미가 한정된다. 하지만 또 다시 애석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보수적으로 해석하자면, 시민은 이성을 통한 목적의 파악을 통해 공공선(또는 객관적 선)을 알 수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공동체의 과업에 참여한다는 것과 샌델이 말하는 민주적 토론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악의적 왜곡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자유주의 정치사상이 샌델 본인이 아주 공격하기 쉬운 형태로 재단되어 소개된다는 문제점도 있다. 특히 연대책임과 연대의식을 논하는 8장에서 이런 태도가 두드러진다. 자유주의자들은 공동체적 연대책임을 지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의사양반! 물론 샌델의 말처럼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사과가 ‘진짜로’ 할아버지들의 잘못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라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책임을 지는 행위양식이 될 수 없다는 샌델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과는 미안함과 뉘우침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그런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선언으로서의 사과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도 충분히 설명가능하다. 즉, 반인륜적 범죄는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어선 안되는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며, 나는 앞으로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그런 반인륜적 범죄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것은 내 할아버지가 A급 전범이었거나 학살자였거나 단순가담자였거나 저항운동가였다는 사실과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무관하다.


나는 아직도 중립적 국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고, 그 기능을 우리가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한 국가 운영이 사람들을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다.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지금 현실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노예제 옹호 파시스트이다. 매킨타이어와 샌델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이 점을 완화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객관적으로 밝혀진 선(좋은 것)과 현대 다원주의 사회 사이의 긴장은 여전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네가 좋아하는 것이 상호 모순을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며, 그 둘이 정말로 모순이라면 결국 둘 중 하나만이 관철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샌델은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보단 공화주의적인 훈련이 된 시민들 사이의 토론에 맡겨야한다며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현실 속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의 편견이 반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편견에서 양산되는 소수자는 그만큼 불행해질 것이다. 샌델은 이 지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그래서 선을 앞세우는 태도는 민주적 태도와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이야기하듯, 바로 선이 무엇인지 합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런 현실 때문에 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목적은 선택의 권리를 통해 알아서 결정하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협상을 통한 요구의 관철이라는 측면에서는, 특정한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행위가 법적으로는 수행가능하다는 사실이 패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임신중절에 관한 논증에서 볼 수 있듯,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현실의 여성들을 위해 중절을 허용해서 아이를 다 죽여버리자!!!”가 아니라 “숙고 끝에 내리는 결정에 대해 국가가 도덕적 가치를 들먹이며 그 길을 원천봉쇄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다 사람이니 일점일획도 타협할 수 없다는 쪽과, 중절의 조건에 관해 엄격함의 정도를 설정할 수 있는 쪽 중 어느 편이 더 유연하다고 봐야할까?


어쨌든, 나는 샌델과 근본입장이 다르기에 그의 서술에 대해 부정적 언급을 더 많이 하긴 했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는 분명 볼만한 책이다. 언젠가 구입했고 또 그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꽤 쏠쏠한 구절과 아이템을 건져올릴 수 있다.다른 책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 책만으로도 영국-미국 전통에서의 논의를 음미해볼 수 있는 책이다. 그저 그런 것보다는 나은 윤리학/정치철학 입문서. 긴 기간을 뛰어넘어 한 번 더 들여다본 내가 느낀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