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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지성사 강의- 감정과 의지, 이성으로 풀어 쓴 정신의 발전사
프랭크 터너 지음, 리처드 로프트하우스 엮음, 서상복 옮김 / 책세상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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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세기의 가문- 발터 벤야민과 20세기 독일의 초상
우베-카르텐 헤예 지음, 박현용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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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뉴턴의 물리학과 힘- 17세기의 동역학
리처드 샘 웨스트펄 지음, 차동우 외 옮김 / 한국문화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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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학의 기원들
데이비드 C.린드버그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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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주의- 500년의 역사와 주요 개념에 대하여
장바티스트 구리나 지음, 김유석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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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쉽게 풀어낸 어려운 생각
모티머 J. 애들러 지음, 김인수 옮김 / 마인드큐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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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양극과 유비- 초기 그리스의 사유에 나타난 두 가지 논증 유형
제프리 로이드 지음, 이경직 옮김 / 한국문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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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철학사
F. C. 코플스턴 지음, 김보현 옮김 / 북코리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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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프랑크 하르트만, 『미디어철학』(강웅경, 이상엽 옮김) 13장 요약>

 

1. 역사의 종말

 

   20세기 이후 인간을 둘러싼 매체환경은 완전히 변했다. 매체는 사실을 전달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기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매체 기술의 발달이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많은 매체이론가들은 인간이 이 기술에 지배되었다는 도식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그러나 플루서는 이런 도식만으로는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매체환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매체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소통에 관한 학문, 즉 코뮤니콜로기Kommunikologie라고 이름붙였다.


   코뮤니콜로기의 입장에서 세계사는 두 단계로 해석된다
. 하나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변하는 단계로, 산업혁명 시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방식이 변하는 단계로,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는 알파벳에서 비-알파벳으로 나아가는 코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가 어떤 정치적 효과를 일으킬지 현재 우리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코드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방식(즉 존재방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코뮤니콜로기는 바로 존재방식의 변화를 연구 과제로 삼으며, 전통적인 철학적 연구를 대체하는 기획이 된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알파벳 코드로 기록되었다
. 이런 의미에서 비-알파벳 코드를 향한 변화는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고, 동시에 역사가 새로 쓰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과연 플루서의 코뮤니콜로기가 사용하는 이런 수사는 단순한 표현이나 선동에 해당하는가? 또는 매체환경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방법인가?

 


2.
텔레매틱스 사회

 

   플루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놀라운 것이 하나 있다. 그는 인터넷 세계나 컴퓨터 환경 등 우리가 지금 늘 쓰고 있는 매체환경이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점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매우 정밀하게 예견했다. 그는 현상학적 방법으로 매체를 분석해 그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전화기는 일대일 소통수단이기 때문에 발신자와 수신자의 주체성을 지켜주는 매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플루서는 통화를 위해 가설된 여러 종류의 선들이 실제로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매체를 가능하게 해주고 작동시키는 체계이며, 이들을 이용하는 (문화적) 코드가 바로 전화번호라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전화 체계는 인간이 사용할 비
-알파벳 코드를 암시한다. 역사의 종말 이후에 도래할 사회의 의사소통은 전화번호와 같은 비-알파벳 코드로 이뤄질 것이다. 이는 방송 형식을 통해 파시즘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지만, 동시에 다대다 매체로서 대화의 형식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이 아마도 매체이론의 과제가 될 것이다. 대화의 형식이 성취된다면, 모든 이에게 모든 필요한 사실이 알려지는 완전한 공공성(공지성) 또는 정치적인 이상향이 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화는 대상에 의식이 현존하는 방식을 근거리
-직접 현존에서 원거리현존Telepräsenz으로 바꿨다. 사람들은 서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매체를 매개로 삼아 서로 아주 가까이에 있게 된다. 귄터 안더스는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Tele-vision이 세계를 우리의 집으로 배달한다고 말했다. 이런 매체환경을 근거리-직접성을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다면 매우 위험스럽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매체를 통해 펼쳐지는 현상은 실재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루서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전환하여, 근거리-직접성이라는 기준이 환상에 불과하며 버려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원거리현존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졌다. 이 환경을 구성하는 매체들을 텔레매틱스라고 부른다. ‘텔레비전Tele-vision/Fern-sehen텔레Tele-phone/Fern-hören, 그리고 텔레센서Tele-sensor/Fern-spüren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플루서가 보기에 텔레비전만으로는 진정한 텔레매틱스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 텔레비전은 일대다 매체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다대다-쌍방적 매체가 확산되고 정착되는 그 때가 되어야 진정한 텔레매틱스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회가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는 지금 예측할 수가 없다.

 


3.
언어현상학적인 자극 유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매체에 현상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고전적인 철학적 탐구가 거의 소용없어진 시대에 관해 상상한다. 이들이 소용없어진 이유는, 그런 철학적 문제를 만든 매체환경이 사라지고 새로운 매체환경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플루서는 인간되기Menschwerdung’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에세이에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루서는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매체환경, (매체)현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전의 매체환경에서 언어적 개념들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 즉 매체적 한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간은 텔레매틱스를 통해 이 한계를 넘어선다. 만약 이 시대에 철학을 한다면, 우리는 지금 상황을 표현할 언어적 개념을 가지지 못한 채 말 없는 철학(형상으로 철학하기)을 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철학이 우상숭배금지
, 즉 형상금지를 원칙으로 삼았던 이유는 형상을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상은 실재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기까지 한다. 그래서 철학은 알파벳 언어의 나열을 매체로 삼았다. 그러나 매체의 변화, 특히 사진기의 등장은 형상과 실재 사이의 차이에 의문을 제기했다. 급기야 이 둘의 위계는 역전되었고, 그렇다면 철학의 매체 또한 바뀌어야만 했다. 철학은 실재를 대상으로 삼는 탐구인데, 이제는 형상이 실재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이 사진기를 거쳐 인간의 의식에 떠오르는 과정은, 이제 매개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대상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미국에서 실제로 이뤄진 기술발전은 플루서의 이런 아이디어와 호응한다
. 바네바 부시는 미국 내 과학연구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해 지능증폭 논리기계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는 도서관 모델을 대체할 지식의 창고로서 기획된 것이다. 이후에는 이미지를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비트매핑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 두 아이디어의 핵심은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는 것처럼 미디어가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4.
/글쓰기

 

   플루서는 문자와 형상의 대립구도를 포기함으로써 실재와 가상이라는 대립도 포기하고, 철학(인식론)에서 매체철학으로 옮겨간다. 실재, 그리고 실재하는 것에 관한 개념은 사라져가고 그 자리를 모든 의식된 대상에 공통된 매체규칙이 대신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손에 은유해 표현한다. 인간은 손이 두 개인데, 하나는 철학적인 손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손이다. 기술적인 손은 세계를 움켜쥐는(개념화하는begriff) 손이고, 이것을 도와주는 여러 수단을 이용하는 손이다. 그러나 개념화 이후의 시대를 진단하는 손은 철학적인 손이다. 이 둘이 맞잡는다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철학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또한 어디에도(어떤 일에도) 잘 들어맞지 않아 노는 손들은 서로 다른 손들을 맞잡아 텔레매틱스 사회를 구현한다. 근대 사회에서 손을 맞잡는 것은 근거리-직접성이 성립되는 곳에서만 가능했지만, 텔레매틱스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은유 그 이상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 반드시 사회과학적 분석이 뒤따라야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논의가 될 것이다. 플루서는 실제로 자신을 시험삼아 이런 분석을 시도했다. , 전통적인 철학의 작업인 글쓰기에 관해 정리하고, 새로운 형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글쓰기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의미의 생산, 글쓰기의 포기, 글쓰기가 구시대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는 글쓰기라는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였다. 자신의 글을 인쇄하지 않고 디스켓에 담아 출판해서 이런 유형분석이 맞는지 시험해보았다.


   특히 그는 이 디스켓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해 끝없는 추가글을 달아주길 바랐다
. 텔레매틱스 사회에서 글 쓰는 도구와 글쓰기의 관계, 그리고 나아가서 저자와 독자, 원래글과 추가글의 관계가 바뀐다. 그의 디스켓 출판의 의도는 이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런 생각은 미셸 푸코가 글쓰는 주체의 종말이라는 주제로 엮어낸 의견과 유사하다. 근대의 글쓰기와 텔레매틱스 사회의 글쓰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책문화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지식을 유포하는 여러 체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특히 지식 자체가 중요시되는 사회로 진행되면 될수록, 어떤 저작들은 저작의 성과 그 자체로 수용된다. 그리고 그 성과는 지식의 체계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성과로 자리매김한다. 반대로 저자(즉 주체)의 이름은 그 성과의 이름으로만 붙여질 뿐이다.


   이런 생각을 참고해보면
, 플루서가 놓친 점이 드러난다. 그는 생산된 정보가 각자에게서 개인적으로 수용 및 처리될 것이라 생각하고, 사회적 맥락에서 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단순히 디스켓으로 출판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구상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여전히 출판이었으며, 여전히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5.
상상하기-이야기하기-정보만들기

 

   위와 같은 플루서의 단편적 입장들을 종합해보면 코뮤니콜로기 기획의 성격과 목표가 대강 그려진다. 우리는 정보가 모여있는 공간이 전자매체를 통하면 모두에게 열리는 매체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 매체환경에서는 인간의 존재 양식이 새롭게 정의된다. 그는 이 과정을 추상화과정으로 요약한다. 그 단계는 각각 생활세계, 상상, 서술(기술), 분석(비평), 비선형적 재형상화 단계를 거친다.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은 형상으로 철학을 하고, 모든 것이 집적된 종합적 형상을 투사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매체는 그림
(즉 형상)과 구술언어다. 그러나 구술언어는 지속시간이 짧고 적은 정보만을 전달하기 때문에,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그림이 매체로서 쓰였다. 그러나 그림은 개인의 의식의 투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림을 해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의사소통을 위한 그림의 해석 체계 즉 그림 코드가 만들어지고 이어져 내려왔는데, 이것이 종교의 매체이론적 기능이다. 또 그림 코드는 평면 위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차원적이다. 다음 추상화단계로 알파벳이 나타난다. 이 문자들은 상징이긴 하지만 지시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으며, 분리되어있다. 그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독해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부터 인간이 하는 모든 일들의 선형성을 발견한다. 문자는 단일한 방향으로, 즉 선 위에 배열되기 때문에 일차원적이다.


   그 다음 추상화단계는 비
-알파벳 코드다. 플루서는 이 단계는 영차원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매체기술과 매체장치를 통해 기술적 형상을 접한다. 그러나 매체장치들 사이에서 그 형상들 자체가 옮겨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일정한 형식의 부호로 변환된 뒤에 매체장치들 사이를 오고 간다. 인간은 결코 그 부호들을 직접 독해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부호를 지배하는 것은 기계들이며, 그들이 대상을 산출한다.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컴퓨터가 이런 견해에 부합하는 장치들이다. 인간은 점점 실재를 해석할 권리를 기계들에게 넘겨준다. 그들은 부호를 해석하는 독자적인 코드를 지니고, 실재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호와 그 해석을 전달한다. 끝내 인간이 접하는 세계는 이 매체장치가 조직해놓은 것이 되고, 인간은 이 조직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변한다.


사회적 코드

사유형식

미디어형식

문화기술

기본행동

사회형식

미학

알파벳 이전

순환적(신화)

상징화하는 장면

해석하기

상상하기

마법적 문화

이차원적

알파벳

선형적(이성)

선형적 과정

읽기/쓰기

이야기하기

산업사회

일차원적

알파벳 이후

점형적

(모자이크)

상황

컴퓨팅하기

정보만들기

지식사회

영차원적

 


6.
선형성의 위기

 

   그러므로 이 시대는 분명히 위기라고 진단할 수 있다. 우리는 매체장치들이 어떻게 세계를 조직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전에 코드가 변화하던 시기를 참고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변화를 맞이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알파벳 코드의 등장은 그림과 그 해석 전통이 지니고 있던 마술적인 힘을 약하게 하는데 성공했고,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매체를 이용하려는 계몽주의적 기획으로 발전했다. 플루서는 마치 알파벳으로 넘어올 때 그랬듯이, 우리 시대는 알파벳 코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기술적 상상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파벳 코드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여러 담론들, 즉 철학, 정치, 과학 등의 담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알파벳의 등장에 관한 그의 분석을 자세히 살펴보자
. 인간에게 매체가 주어지기 전, 세계는 세계와 인간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매체는 세계를 인간의 의식 안으로 끌어들이고 '주체화'하면서 주체가 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했다. 이것이 탈존Ek-sistenz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탈존을 가능하게 한 첫 매체는 그림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그림은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의 전통을 따로 전해야만 했는데, 이는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알파벳은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 지시를 통한 직접적인 독해를 지향한다. 그러나 알파벳 코드는 직접적 독해를 얻는 대신 그림에서 한 번 더 추상의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세계와 더욱 동떨어졌다(소외). 알파벳이 하지 못하는 묘사는 또 다른 추상적 언어인 숫자로 보충되었다. 알파벳과 숫자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 나열과 지시의 일차원적 특성은 인간의 사고 양식을 지배했다. 급기야 계몽주의의 최종적 모습에서 언어를 계산하는 행위에 관한 발상이 등장했고, 여러 수학적 기법들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수학적 기법들은 세계를 프로그램화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 이제 더 이상 알파벳 코드는 필요하지 않으며, 한 단계 더 추상화된 비선형적 상상력이 등장한다. 현대의 매체기술은 이런 구조에 기반해 작동된다. 매체장치들은 세계를 완전히 낱낱이 해체한 뒤 다시 재조립한다. 인간은 이런 매체들을 통해 인식하고, 더 이상 세계 자체와 매체가 보여주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이것이 매체 개념의 필연적 귀결이다. 매체와 사유의 선형성은 매체장치의 기술적 발전 때문에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고, 선형성에 기반을 둔 근대적 주체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7.
주체에서 기획으로

 

   플루서의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주요 입장을 매체이론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는 명석판명한(견고한) 대상성이 없다. 대신 세계는 일종의 장으로서,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특정한 매체는 이 장을 해체하고 재조립시켜서 그 가능성들 가운데 몇몇을 펼쳐놓는다. 대상의 특성이 이렇게 바뀐다면, 그것을 다루는 주체의 특성 또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주체는 가능성들 가운데서 어떤 것을 재조립해서 현실로 승인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주체적 행위는 투사(기획)적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뀐다.


   투사적 행위자들은 의미없는 장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
. 의미와 의미 사이의 소통은 계산으로 이뤄진다. 단지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장 속에서 각자가 전혀 다른 투사방식으로 현실을 승인하기 때문에(즉 각자의 계산방식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완벽한 계산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투사적 행위자에게는 동일한 코드가 전혀 다른 현실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매체이론은 시학
poesie로 마무리된다. 그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며 어떤 일을 중요하다고 간주할 것인지는, 아직 다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세계는 매체를 통해 점과 여백으로 흩어져 재조립되고, 주체는 가능성의 장 속에서 특정한 가능성들을 끄집어내는 투사적 행위자의 좌표로 표시된다. "점에서 점으로의 전환"이라는 말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는 듯 하다. 플루서는 이런 진단을 통해 새로운 매체환경 속에서는 의사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구성적 성격을 그리고 우리의 구성적 특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세계의 구성의 권리를 내주고 기술파시즘에 종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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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글루에 써놓은 글을 옮겨놓습니다.>

 

3년동안 쓴 연습장을 마무리하는 글.
300에 대한 호평으로 시작해서 반자본주의로 끝나는구나
허허 참 인생의 질곡이 많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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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친구와 야심한 밤에 논쟁을 벌였다. 축약하자면, '시장경제가 한국의 경제에 기본으로 삼을만한 원리가 될만한가?' 라는 문제였다. 그 친구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혹은 현재까지 인류가 개발한 경제체제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선택이라고 말하였고, 나는 시장경제의 원리 자체에 반대하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발전의 방법, 타국의 상황 등 세부적인 경제적 자료가 필요한 수준까지 나아갔기에, 결국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관념적인 수준에서 시장경제를 반대한다. 


  시장 경제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세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 둘재는 이익을 얻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셋째는 이런 개인들이 모인 곳에서 여러 상품의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숫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넷째는 이런 사회적 구조 아래 개인은 노동과 매매를 통하여 상품을 생산-소비한다는 것, 다섯째는 이 구조에 어떤 큰 단위가 강제적인 조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여섯째는 이와 같은 활동이 생산과 소비를 늘려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 스스로를 급진주의자라고 칭할 것인데, 그 이유는 위의 원리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에 전혀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품이 거래되는 것을 교환이라 한다면, 교환과정에서 양자가 비대칭인 경우를 너무 잘 볼 수 있다. 그런 일은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양자가 비대칭이라면, 한 쪽이 이득을 보았을 때 다른 한 쪽은 손실이 생길 것이다. 만약 양쪽이 동시에 이득을 보았더라도, 한 쪽이 더 많은 이익을 보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양쪽이 모두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결국 논리적으로 재화의 크기를 현재 상태보다 더 키워야 할 수 밖에 없다. 발전이란 시장의 결과가 아니라 요청인 것이다. 


  설사 인간이 이득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합리적으로 추구한다는 말 또한 의문을 남긴다. 사실상, 인간은 이익을 합리적으로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 합리적인 면에서 벗어나 있는 여러 심리적 요소,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한 정보의 부족, 추론과정에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 등. 이런 면모들은 경기의 과잉상승(거품)과 과잉하락(장기침체)를 불러오며, 시장은 이것을 결코 해결해주지 않는다. 


  여기에서 시장은 결코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합리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다. 따라서 시장을 움직이는 힘은 반합리적(비합리적) 요소인 욕망의 수요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잇다. 욕망이란, 경제에 참여하는 주체의 필요에 따라 생성될 것이고,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장을 주체들의 욕망에 놓아두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류는 역사적인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때에는 항상 욕망이 개입된다. 거품이 생성되는 때에도 이들이 개입한다. 도한 사태가 모두 지나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최근의 미국 부동산 위기(서브프라임)나, 그 전의 정보기술기업주들의 몰락(닷컴거품 붕괴) 등의 사례들은 하나같이 경제주체와 시장의 비합리성, 비이성성을 증명한다. 


  이런 기초 위에서 경제가 운용되는 이상, 아무리 정부의 규모가 비대하고 규제와 제한이 많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혹은 정부구조의 왜곡에 의해 이런 면들을 고의적으로(굳이 고의적이지 않더라도) 방관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은 어떠한 사건과 직접 연관이 없는 경제주체들에게까지 타격을 주는 위기로 커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국제금융기구의 원조(IMF 사태)가 그랬고, 카드 사태가 그랬다. 따라서 큰 정부 구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매력적인 방안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분석해본 시장 경제의 원리 가운데 다섯 째에 대한 반론이 될 것이다. 


  설령 큰 정부 구상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정부는 경제를 예측가능하게 메타적으로 통제하는 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의 경향을 짚어보았을 때 - 특히 '제3의 길' 이라는 이름으로 시장경제원리를 경제의 토대로 삼는 현재의 추세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즉, 정부는 거대한 재정을 바탕으로 시장을 교란시킬 뿐 통제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정부도 경제를 구성하는 경제주체가 되어, 시장의 비합리성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정부가 제공해야 할 여러 가지 용역 - 교육, 의료, 공공시설, 생계보장 등 - 을 줄여 정부의 손실을 메우는 현상을 필연적으로 낳는다. 


  시장경제는 무엇보다도 발전에 대한 환상 때문에 그 영향력이 유지된다. 바로 여섯째 원리에 대한 신봉이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제1세계 국가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의 역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현재 실제로 이들 국가는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여전히 선진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선은 앞에 썼듯이 '발전은 시장의 결과가 아니라 요청이다.' 라는 관념적인 반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두 가지 반론을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시장 경제가 발전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장경제 원리를 채택해 발전하는 국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들도 있다. 2차대전 이후 갑자기 해방을 맞이한 국가 가운데, 시장경제를 원리로 채택한 국가는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들 가운데 실제로 발전구도에 진입한 나라는 몇이나 될까. 친미 성향의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서 시장경제를 채택한 나라들, 경제적으로 우파인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나라들. 한국인의 눈에는 이런 곳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객관적 경제지표의 성장을 들어 시장과 발전의 연관성을 강조하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 경제지표는 그 자체가 은폐성이 짙은데다가, 시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성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현재 선진국들은 전혀 시장적이지 않은 여러 방법으로 자국의 경제지표를 성장시켜왔다. 관세장벽을 높여 자국산업을 보호육성한다든가, 군사력을 통해 강제로 시장을 개척한다든가, 물리력을 동원해 우너자재를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매입하고 비싼 값에 팔았고, 생필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손실분에 대해서는 정부비축을 명목으로 대신 매입하거나 보조금을 지급했고, 저축을 장려해 단기간에 엄청난 자금을 끌어모아 관 주도로 국가기간산업에 투자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런 방법이, 내수를 폭발적으로 진작하고 경제를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또 다른 반론은, 시장경제원리 아래서 발전은 필연적이지 않은 데 비해, 시장경제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시장의 붕괴와 그에 따르는 파국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상적 시장은 위험을 언제나 내포한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기술이 특정한 상품공금자에 의해 발전하면서, 시장의 균형을 깨뜨린다. 이 공급자는 가격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단숨에 올라서고, 가격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공급자를 시장에서 쫓아낸다. 물론 이 과정은 공급자 간의 경쟁이 아니라 합리적 수요자들의 선택과정에서 생겨나므로, 공급자의 의지와 무관하다. 자본은 선도적인 공급자에게 쏠리고, 어느 순간 독점적인 지위 혹은 그에 준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공급자에게 넘어가고, 소비자는 높은 비용을 치러야한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다른 하나는, 경제-사회 전반적으로 기술 수준이 높아질 경우, 노동자 집단은 그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게 된다. 기술 향상은, 같은 양의 상품을 만드는 데 더 적은 양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의 생산수준을 유지하면, 노동자 집단의 소득은 줄어든다. 생산량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기술수준이 높아지기까지 투자한 비용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에 제품의 단가는 동일하다. 이전과 노동시간이 같으므로 임금 역시 동일하다. 어느 쪽이든 실질적인 수요는 감소할 수 밖에 없고, 결과는 어느 쪽이든 경제위기다. 이상적인 시장이 붕괴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지구 전체가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가는 추세인 지금도, 이러한 필연은 똑같이 반복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중국은 경제가 정부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돈 놓고 돈 먹는 식의 규제 없는 금융화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미명 아래 경제주체들의 욕망을 자극해 정기적인 파국을 불러온다.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집단은, 다름아닌 금융상품에 투자해 시장을 교란하려던 정부다. 국제적인 노동력의 이동은 어느 지역에서든지 노동의 조건을 가장 나쁜 상태로 만든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은 좀 더 싼 임금을 받고 일하는 다른 노동력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싼 임금을 선호하고 또 그에 대해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선호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용자에게 주어저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시장경제는 적어도 경제를 제도화할 때 근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급진주의자가 추구하는 경제모델은 '급진적 민주주의에 의해 생산 전반이 통제되는 경제'이다. 이와 같은 이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되었으나, 시장중심주의적인 환상에 의해 묵살된 상태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현실사회주의'와도 다르다. 현실사회주의로서 드러난 국가들은 결국 생산계획조정계층이 특권계층이 되는 것 이외에 더 다른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장의 생산방식에 대항하는 운동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것은 시장경제가 품고 있는 근본적 한계에 대한 저항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계획(을 포함한 경제정책 전반)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에게 동등한 참여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방향은 생산된 상품을 올바르게 분배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것마저 확보되지 않는다면, 소비의 주체인 경제주체들이 소비의 수단이 될 소득재분배를 올바르게 받지 못할 것이 뻔하다. 경제주체들의 소비감소는 곧 경제의 왜곡과 붕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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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있었으나 이 이상 진행시키지 못하고 일단 스탑.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뒤의 이야기인데,
그것은 경제 이야기가 진짜 관념적인 수준의 이야기이므로
일단 떼어놓고 쓰기.
태클 및 첨언부언 대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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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연습 발제. 프랑크 하르트만, 『미디어철학』(강웅경, 이상엽 옮김) 8장 요약.>

 

1. 설명 대신에 기술

 

   분석철학적 경향은 19세기 말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경향을 띄는 철학자들은 반형이상학적 경향을 보였고, 철학은 전적으로 과학적이어야 하며 또 그만큼 엄밀한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인 철학에서 다뤄온 여러 주제는 여기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수학철학, 과학철학 등의 연구에 의해 이런 엄밀함은 갖춰지기 힘들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사실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화두는 세계의 확실함과 과학의 엄밀함 즉 '설명'에서, 이들을 설명할 때 동원되는 명제들의 유의미함 즉 '기술'로 넘어갔다.


   이 속에서 철학은 학문의 논리
Wissenschatslogik이 된다. 철학의 과제는 새로운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각 분과학문들이 내놓은 주장들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것이 되었다. 철학 또한 한 분과학문으로서 스스로를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전통적인 철학에서 다뤄왔던 주제들이 포함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이다. 이들을 학문에서 추방하는 것은 일종의 개혁운동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뭉쳐서 비엔나 학파를 만들었고, 이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모든 분과학문들이 하나의 체계 아래 놓인 통일과학Einheitwissenschaft이었다.


   이들은 통일과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분과학문 사이의 소통을 위해 통일된 표기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이런 요구는 매체철학적인 의미에서, 각 분과학문들에 고유하게 사용되던, 다시 말해 그 분과의 역사에 지배당하는 언어로부터 벗어나 탈역사적인 미디어 추구라는 과제와 연결된다. 만약 고유하고 역사적인 언어들이 우리의 사고를 흐릿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면, 탈역사적 언어들은 내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해주며 나아가서 의사소통의 불투명함도 없애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요구는 매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깨끗한 매체, 해방된 상징에 대한 요구로 이해할 수 있다.

 


2.
시각적 방법의 도입

 

   이런 요구가 채택한 방법은 시각적 방법의 도입이었다. 당시 새로 등장한 미디어 기술은 활자인쇄 이외에 다른 형식의 미디어들(영화, 음반 등)이 대량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는 이런 점에 착안해 과학의 성과들을 공유하는 데 이들을 이용하면 훨씬 더 그 목적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비엔나식 방법에 따른 그림통계학Bildstatisik nach Wiener Methode>이라는 논문에서 시각매체로 문자를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실험결과를 이미지로 재현하면, 보는 사람은 활자로 재현한 것보다 훨씬 더 보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매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수많은 재구성이 개입하는 활자 매체와는 달리, 실험과정과 결과를 거의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시각매체는 처음에는 과학자들 사이에서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활용되며
,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급되어 과학의 성과를 직접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해주는 수단 즉 계몽의 도구로 활용된다. 또한 활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교양Bildung 중심의 계몽주의, 데카르트와 칸트의 세계로부터도 벗어난다. 체코의 신학자인 코멘스키(코메니우스)는 그림으로 이뤄진 백과사전(<세계도회>)을 만들려 했는데, 노이라트는 이를 인용하며 자신의 기획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그의 다른 면모들보다 매체철학적 이론과 공헌이 더욱 부각된다
. 그는 새로운 매체의 발견을 통해 분석철학적 목표와 계몽의 꿈을 동시에 실현하려 했다. 그는 1924년 비엔나에 사회경제박물관을 세우고, 미래의 박물관에 관한 구상을 현실화시켰다. 그가 생각하기에 박물관은 옛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아닌 지식의 교량이 되어야 했다. 그런 지식은 세대를 막론하고 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시각매체들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나타낸 것은 각종 통계 및 평가자료였다.

 


3.
과학적 표현의 전달 능력

 

   노이라트는 언어와 활자화가 더 이상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짚어냈다. 아날로그 기술이 등장한 이후 활자가 아닌 다른 매체들을 통한 대중적 의사소통이 급격히 확산되었고, 새로운 형태의 시각적 논증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그는 이것을 활자를 대체할만한 과학적 성과의 보급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시각매체의 모양이 메세지 전달에 핵심적인 요소이므로, 이를 잘 고안한다면 효과적으로 과학의 결과들을 널리 알릴 수 있다. 그는 매체에 관심을 쏟으면서 언어의 명료함이라는 이론적 문제와 계몽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계몽에 걸맞는 지식세계의 구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가 직접 만든 인공언어를 유포시키는 것도, 사회의 전체적 수준이 과학적인 단계로 올라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 사회는 공학적 접근을 통해서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존에 신뢰하고 있던 여러 체계들도, 특정한 사회적 전환기에 가해지는 급격한 충격으로 인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또 그 자리를 기획된 다른 체계가 차지한다. 그는 전쟁을 겪으며 이런 순간을 경험했으며, 그러므로 이런 사회공학이 가능하다 믿었다.


   계몽은 이런 사회공학의 목표다
.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각매체를 중심으로 지식세계 전체가 재편되어야 한다. 지식세계의 재구성에 기초한 사회개혁이 바로 계몽이며, 이는 애매모호함 없는 의사소통에 의해 과학적 지식이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과학자 사회에서 통일된 언어를 구축하고 이들을 그림언어로 표현해 대중에게 보급하는 두 단계를 거치면 노이라트의 계몽의 기획이 완료된다.


   이런 사회공학적 노력이 한데 모인 것이 백과사전이다
. 그러나 근대의 계몽 기획과 달리, 매체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백과사전에 대한 관점이 변화한다. 근대에 백과사전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이 축적된 장이었다면, 노이라트의 관점에서는 당대에 통일과학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근대의 계몽은 백과사전의 편찬으로 결실을 맺지만, 노이라트는 계몽적 노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지식을 전달하려고 백과사전을 편찬한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른 역사, 그리고 그에 따라 다른 언어를 소유하게 될 후세대들이 어떻게 지금 우리의 백과사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노이라트의 계몽 기획에서는, 이 대목에서 다시 의사소통의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탈맥락적, 탈역사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파벳 활자가 아닌 다른 수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4.
그림통계의 '비엔나학파의 방법'

 

   "현대인은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인간이다. 광고, 계몽포스터, 극장, 삽화, 신문, 잡지 등은 대중을 교육시키는 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조차도 그림이나 삽화에서 보다 많은 자극을 받는다. 피로한 인간들은 읽어서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는 쉽게 알아낸다. 이뿐만 아니라 그림교육학은 많이 교육받지 못했지만 시각적으로는 잘 수용하곤 하는 성인들이나 혜택받지 못하고 별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 오토 노이라트, <비엔나식 방법에 따른 그림통계학>


   노이라트는 그림언어가 활자와 숫자가 보여주지 못하는 총체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탈역사적이고 편견에서 자유롭기에 과학을 설파하는 데 매우 적절하다. 이것은 '말은 분리시키고 그림은 결합시킨다'는 표현에서 압축되어 드러난다. 이런 노이라트의 생각을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매체가 단순한 중간자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접하는 세계의 질서와 그에 관한 사실을 구현한다는 현대적인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과학의 전파 매체로 그림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체에 관한 관점에서 노이라트는 현대적이다.


   이 두 측면은
, 노이라트의 관점에서는 결국 매체 자체에 관한 연구와 매체의 혁신을 통해 해결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아이소타이프ISOTYPE, 즉 일종의 다양한 아이콘 모음을 개발해 기존의 어휘를 대체하고자 했다. 이 아이콘들은 그것이 표상하려고 하는 바를 즉각 나타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 번, 다섯 번째 볼 때도 아직 계속해서 정보를 주는 그림은 비엔나학파의 입장에서는 교육적으로 부적합한 것으로 비판된다." 이런 그림문자는 관계적으로 사용되고, 규격화-축약이 필요하며, 일관되게 항상 동일한 기호를 사용하고,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자기지시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규칙 아래 제작되었다.

 


5.
민중의 계몽으로서의 그림문자

 

   우리는 이미 이런 그림문자가 일반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아이디어는 성취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각각 아이콘 제작자 만큼의 아이콘을 가지고 있다. 같은 대상을 보고 있더라도, 각각 다른 아이콘 제작자들이 같은 아이콘을 만들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계몽 구상은 기본적으로 과학자 집단과 그 이외 집단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콘 제작의 권위는 과학자 집단에게 주어진다. 이들이 통일성을 유지한다면 아이콘 또한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고, 이 통일성은 방송 환경을 통해서 과학자 집단 이외의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 노이라트의 구상은 당시의 매체환경에 대한 반응이며, 동시에 계몽주의적 공공성(공지성)에 대한 응답이 된다.


   그림문자의 고안은 그를 근대적 계몽을 성취하려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지식세계를 벗어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시킨다
. 스스로 '말하는 기호'들로 적절하게 옮겨진 세계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정보들을 공공적으로 소유한다. 이것이 과학적 인식과 과학적 결과의 전달의 최종 목표다. 여기에서는 정보의 전달이 목표가 되고, 세계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인식론적 물음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이 점에서 그는 근대적 지식세계를 벗어난다. 반면 매체를 바꿔 의사소통 환경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 즉 더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장을 만들어야 계몽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계몽의 기획은 그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6.
보편코드는 기능하는가

 

   또 다른 측면에서, 계몽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줄 그런 언어(또는 기호)가 가능한지를 물어볼 수도 있다. 노이라트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림문자를 고안해보았다. 그러나 그림문자는 실제로 노이라트가 생각한 것처럼 작동할까? 그는 시각매체를 혼란이 덜하고 깨끗한 매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활자언어를 대체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각매체를 충분히 접하는 우리는 많은 반박을 가할 수 있다. 착시 등의 요소 그리고 그래픽 기술은 과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창조해낸다, 기호를 이해하려면 맥락이 필요하다, 특정한 기호에 관한 이해는 그 기호가 만들어지고 통용되는 공동체를 넘어서면 불가능하다 등등이 이런 반론에 해당한다. 특히 기호는 "행위, 동사의 시제, 부사, 전치사를 표현해야 할 경우에는 매우 어렵다." 설령 보편언어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그림만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분명하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그림언어 구상은 분명 매체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 그는 시각매체의 중요함을 통찰했고, 인간의 의사소통을 언어와 활자 중심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런 매체에 관한 통찰을 계몽이라는 철학적 실천과 분명하게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 둘을 연결시키려는 과정에서 '기호''그림'을 혼동한 것은 큰 실수였고, 그의 한계점이다. 그림이 기호가 되려면, 즉 의미를 지니거나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무언가를 가리키는지 계속해서 가르쳐져야 한다. 이것이 기호가 공동체 밖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유다. 그림이 아무리 특징을 잘 잡아서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호가 아니다.


   반면 이 글에서 지금까지 계속 언급한 것처럼
, 미디어이론의 측면에서 그의 의의는 분명하다. 그는 문자와 그림 사이의 위계를 뒤집어서 현대를 예견했다. 그리고 이런 그림이 사람들 사이의 정보교환, 의사소통의 중심이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노이라트 당대에는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기술이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지만, 노이라트의 예언은 현대에 들어서야 딱 맞아들어가고 있다. , 그는 '읽기'가 단순히 책 매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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