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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양장) - 사유의 보폭을 넓히는 새로운 장자 읽기 ㅣ 이학문선 8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 지음, 김경희 옮김 / 이학사 / 2015년 2월
평점 :
이 책은 (과장을 섞어 말하면) 장자를 가장한 중국철학사 책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장자 책 자체가 단일한 저자에 의해 일관된 관점에 따라 쓰인 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저자들이 남긴 단편을 이어붙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장자 본인의 생각과 더불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등장했던 장자주의자들의 생각, 장자의 사상에 일부만 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 모두가 담겨있다. 둘째, 이 책의 저자 그레이엄이 장자를 완전히 해체한 뒤,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을 분류한 뒤에 재조립했기 때문이다. 이 분류는 장자 본인과 그의 동시대, 그리고 후대의 반응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각 장의 처음, 그리고 중간중간마다 그는 그 구절들을 이 곳에 배치한 문헌학적-철학적 이유와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물론 처음 출간된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기에 현재의 연구성과와 다소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상당부분 수긍이 간다. 그렇게 그레이엄의 장자는, 장자를 중심으로 기술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사다.
이 책은 그래서 기존의 중국 고전들에 대한 번역이나 연구서와, 특히 도가 계열의 책과 결이 약간은 다르다. 고전의 맛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풍스럽지도 않고, 메타포를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독자를 도사가 되는 길로 인도하는 실수를 않는다. 즉, 현대어로 이해 가능한 최소한의 합리성은 갖추었다. 물론 가장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는 도가 사상 자체의 특성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그레이엄의 설명과 함께 읽는 장자는 ‘천천히 따져보며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안쪽으로는 들어오는 것 같다.
이렇게 편역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더라도, 장자의 생각은 여전히 철학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정복하기 힘든 높은 산 중에 하나다. 두께의 압박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그는 어떤 세계에서 살았으며, 어떤 세계를 넘어서려고 했을까? 장자 자신은 어떤 비전을 보았기에, 언어와 사고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무기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잠정성’이라는 속성을 부여했던 것일까. 또 (그레이엄이 ‘원시주의자’로 묶어서 설명하는 사람들처럼) 세계 자체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했던 퇴행적 사고에 빠지지 않고 초월을 논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문명적 사고방식도 반문명적 본능도 아닌 비문명적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 그레이엄의 장자 해석을 보고있자면,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른다.
조금은 내 멋대로, 가장 속편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실천적 잠정성에 기반한 태도의 무한한 변화와 그에 따른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나 스스로는 이런 사고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관점이 제시하는 여러가지 사고실험은, 가끔은 심심할 때 공상하는 소재로 쓸 수도 있으며, 더 가끔은 내 머리를 맑게 만들 때 이용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부분을 메타포와 문학적 수사로만 냅다 달리는 장자의 서술방식은, 이렇게 근거없이 납득하는 수작을 약간은 용인해주기도 한다.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것을 한데 모아 정리한 편역자 그레이엄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장자를 일관되게 정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왕 이렇게 된거, 나도 그냥 장자를 조각조각 이해하련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다시 꺼내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장자에 나오는 우화를 인용해보기도 하고(가장 유명한 나비 이야기라든가, 우물 안 개구리,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 홍수 때문에 죽은 미생 등등) 내게 대입시켜 생각해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통독하면서 얻은 최고의 소득은, 내 앞에 놓여진 길을 조금은 풍성하게 만들어줄 몇몇 이야기를 얻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