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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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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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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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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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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내전 6- 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잡괘전雜卦傳.附 발례
왕부지 지음, 김진근 옮김 / 학고방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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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내전 5- 계사전繫辭傳
왕부지 지음, 김진근 옮김 / 학고방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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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내전 4- 정괘井卦 ~ 미제괘未濟卦
왕부지 지음, 김진근 옮김 / 학고방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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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내전 3- 함괘咸卦 ~ 곤괘困卦
왕부지 지음, 김진근 옮김 / 학고방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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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정
리쩌허우 지음, 이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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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 전6권
쳔 꽝싱 외 지음, 백지운 외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60,000원 → 57,000원(5%할인) / 마일리지 3,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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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체와 성체 7- 주희철학 3
모종삼 지음, 황갑연.김제란.이기훈 옮김 / 소명출판 / 2012년 7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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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체와 성체 6- 주희철학 2
모종삼 지음, 황갑연.김제란.이기훈 옮김 / 소명출판 / 2012년 7월
33,000원 → 29,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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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이 뽑은 20세기의 명저 100선


원글의 주소는 http://blog.aladin.co.kr/trackback/vairocana/2851495

원글 작성하신 비로자나 님께 감사드립니다.

리스트 순서는 100위부터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보이는'과학혁명의 구조'가 1위입니다.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책은 영어책을 그대로 등록했습니다.


목록에 없는 저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25. 사회와 사춘기 자기이미지 society and the adolescent self-image, 모리스 로젠버그 (알라딘에서 검색불가)

아마존 링크 : http://amzn.com/0819562289


31. 조직이론, 제임스 마치&허버트 사이먼 (번역서 있으나 알라딘에서 검색불가)

RISS 링크 : http://www.riss.kr/link?id=M6617636


41. 사회적 선택과 개인의 가치, 케네스 애로우 (번역서 있으나 알라딘에서 검색불가)

RISS 링크 : http://www.riss.kr/link?id=M93401


44. 인적문제 해결 human problem solving, 앨런 뉴웰&허버트 사이먼 (알라딘에서 검색불가)

아마존 링크 : http://amzn.com/0134454030


61. 사회이론과 사회구조 social theory and social structure, 로버트 머튼 (알라딘에서 검색불가)

아마존 링크 : http://amzn.com/0029211301


65. 푸코 전집인데 도저히 못밝히겠다... 1980년 푸코 저서는 권력/지식


66. 변형 : 생성문법의 원리, 노엄 촘스키 (번역서 있으나 검색불가)

RISS 링크 : http://www.riss.kr/link?id=M57573


85. 언어행위, 존 설 (번역서 있으나 검색불가)

RISS 링크 : http://www.riss.kr/link?id=M55077


95. 복지경제학 피구 (번역서 있으나 검색불가)

RISS 링크 : http://www.riss.kr/link?id=M3052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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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통사구조
노엄 촘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 알마 / 2016년 7월
17,500원 → 15,750원(10%할인) / 마일리지 8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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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용소- 정신병 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에세이
어빙 고프먼 지음, 심보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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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회적 구성- 지식사회학 논고
피터 버거 외 지음, 하홍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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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연출의 사회학-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어빙 고프먼 지음, 진수미 옮김 / 현암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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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 2016-06-2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게 잘 찾아주셨네요.
역시 번역되었으나 절판 등의 이유로 알라딘 DB에 없는 책들이 꽤 되네요.

박효진 2016-07-01 00:28   좋아요 0 | URL
우와 원글쓴이께서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감사합니다 ㅠ.ㅠ
제가 이 리스트를 만든지도 벌써 2년이나 되었네요
그 동안 새로 번역되어 나온 책도 더러 있을 거 같습니다.
또 상대적으로 늦게 만들어진 업체다보니 교보 DB에는 있지만 알라딘엔 없는 책들도 몇몇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여튼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가시광선 2020-09-22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2019.11.8. 보충합니다.

10.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 (Erving Goffman, 1959, 5200)
자아연출의 사회학: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6080136

41.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P. L.. Berger 1966 3700)
실재의 사회적 구성: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03079

81. Asylums(E. Goffman 1961 2200)
수용소: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1950809

2020.09.22 추가
23 システムの科学 Herbert A. Simon 1969 4400
인공과학의 이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5649

29 近代とはいかなる時代か? Anthony Giddens 1990 4200
포스트 모더니티: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3974

48. Mind, self and society(G. H. Mead 1934 3300)
정신 자아 사회: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630488

49. Judgement under Uncertainty(D. Kahneman, P. Slovic, A. Tversky 1982 3300)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122220

70. Consciousness Explained(D. Dennett 1991 2500)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629069

77 危険・不確実性および利潤 F. H. Knight フランク・H.ナイト 1921 2300
위험과 불확실성 및 이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4119987

93. The analysis of the self(H. Kohut 1971 2000)
자기의 분석: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3101

99. The restoration of the self(H. Kohut 1977 1900)
자기의 회복: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58125



박효진 2019-11-09 00:29   좋아요 0 | URL
보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간 출간된 책이 있는지 한 번 다시 봐야겠네요. :)
 

<2013년 규범윤리학연습 과제>

1. 서론

 

   어떤 행위의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을 나누는 도덕적 분별 또는 도덕적 판단 능력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 없이 확실한 반면, 이런 능력을 갖게 되는 이유 또는 원인에 대한 대답은 분분하다. 적어도 플라톤 이래로, 이 주제에 관해 철학사를 지배해온 대답은 이성 또는 합리적 사고였다. 올바른 도덕적 판단은 이성의 (올바른) 사용에서 비롯된다.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려면, 욕망이나 의지 등 인간 내부의 다른 능력 또는 다른 요인에 의해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 이성 이외의 다른 것들은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고, 나아가서 올바르지 않은 도덕적 판단을 하도록 영향을 끼친다. 이런 경향을 도덕적 이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이성주의자이다
. 그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인간적인 좋음은 이성적인 것이다. 이성은 다른 것들과 공유되지 않는, 인간에게 고유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잘 사용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내가 어떤 행위를 할지 결정할 때에도 이성을 사용한다. 어떤 행위가 좋은 행위가 되려면, 그 행위는 반드시 이성으로부터 이끌려 나온 행위여야만 한다. 좋은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지 결정할 때 사용할 이성적 방법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도식이 바로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반면에 도덕적 판단의 원인 또는 이유를 이성이 아닌 감정 또는 감성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모든 도덕적 판단은 그 행위가 좋거나 싫다는 감정의 표현이다. 특정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게 되는 과정은 몇몇 근본적 감정에 의해 환원적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개인의 도덕적 판단 또는 한 집단의 도덕적 판단의 일관성은 여러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 규칙을 반영하는 것이지, 이성적 필연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흄은 근대 도덕철학에서 이런 경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도덕적 판단의 기초가 이성이라는 주장들을 논박한다. 그에게서 이성의 기능은 일치와 불일치를 비교하고, 관념들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다. 도덕적 판단의 기초가 이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흄의 견해에 비춰볼 때 이런 일치와 불일치, 또는 관념들의 관계가 도덕적 판단의 기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성의 대상들은 동기가 되는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동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실에 대한 오해옳음에 대한 오해가 잘못된 도덕적 판단에 대한 책임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도덕적 이성주의를 비판한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 두 가지 오해와 도덕적 책임을 연결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 이성을 사용한 도덕적 판단, 즉 실천적 삼단논법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히려고 한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보편적 전제와 개별적 전제로부터 해야 할 행위를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전제와 결론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올바르지 않은 도덕적 판단을 내렸다면, 그것은 두 전제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흄의 언어로 바꾸면, 도덕적 판단의 옳고 그름은 관념의 일치와 불일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오해와 옳음에 대한 오해는 실천적 삼단논법에서 각각 소전제와 대전제에 대한 오해로 볼 수 있다. 흄은 이 두 오해가 도덕적 판단의 책임의 원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오해에 관한 흄의 주장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도식 아래서 도덕적 책임 여부를 판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비판하는 것이 된다.


   이 글이 최종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도덕적 이성주의의 한 단면과 그에 대한 도덕적 반이성주의의 비판을 검토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포괄되는 도덕적 이성주의의 결점들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비판이 적절한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삼단논법

 

   (1) 이론적 삼단논법과 실천적 삼단논법

 

   실천의 영역에 있어서 학문을 할 때 이용되는 삼단논법과 같이 엄밀한 추론의 방식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연구자들 내에서도 논쟁적인 주제다. 그러나 아래에 사례로서 제시할 여러 논증들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인 것에 관해 추론할 때에도 삼단논법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또 그는 영혼에 관하여에서도 삼단논법을 암시하는 구절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세 가지 종류의 운동이 있다. 지식능력은 움직이지 않으며, 정지해 있다. 신념과 명제는 한편으로는 보편자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자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한 편으로는 그런 종류의 {처지}에 있는 {사람}은 그런 종류의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현재의 {행동이} 그런 종류의 것이며, 또한 나는 그런 종류의 {행위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자에 관한 것이 아닌, {개별자}에 관한 의견이 운동을 유발하거나, 또는 둘 모두이지만, 전자는 더 많이 정지해 있는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이론적 삼단논법과 실천적 삼단논법의 차이는, 그 삼단논법의 결론이 행위를 유발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다. 이론적 삼단논법의 결론은 행위를 유발하지 않는 사실의 기술인 반면, 실천적 삼단논법의 결론은 그 자체가 행위이거나 행위를 유발하는 사실로부터 매개되어 행위를 지시한다. 특히 나는 이러저러하고 그것은 이러저러하다는 식의 구체적인 지식이, 모든 이러저러한 인간은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지식보다 실천적인 것에 훨씬 더 많이 연관된다.


   실천적 삼단논법과 관련한 첫번째 문제는 실천적 삼단논법의 대상에 관한 의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타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목적에 관해서는 숙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목적을 설정한 다음 그 목적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질지를 고찰한다.”고 언급한다. 그는 실천적 삼단논법이 적용되는 대상이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실천적 삼단논법은 목적이 아니라 행위를 지시한다. 우리의 실천적 목적은 이미 실천적 삼단논법 내의 대전제 안에 들어있다.


   실천적 삼단논법과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그것의 지위와 역할이다. 특히 실천적 삼단논법이 마치 학문에서 그러는 것처럼 설명을 위한 도구일 뿐인지, 또는 실제로 좋은 사람들이 하는 도덕적 판단의 과정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안에서 실천적 삼단논법에 관해 본격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을 위해서 이 도식을 동원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은 적어도 가설적인 수준으로라도 그것이 실제 과정이라고 믿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보인다. 그러므로 실천적 삼단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좋은 사람들의 도덕적 판단에 관한 설명이자, 동시에 실제로 그 사람들이 판단하는 과정을 기술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2) 실천적 삼단논법의 사례

 

   먼저 다음과 같은 언급을 살펴보자. “예를 들면 이렇다. 만일 단 것은 모두 맛보아야만 하는데, 이것이 개별적인 것들 중 하나로서의 단것이라면, 맛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방해받지 않는 자는 동시에 이것을 행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 예시는 매우 명쾌한데, 다음과 같이 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제1

모든 단 것은 맛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전제2

이것은 단 것이다.

결론

이것은 맛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만약 누군가가 연한 고기가 소화도 잘 되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지만 어떤 것들이 연한 고기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건강을 산출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류 고기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건강을 산출해낼 것이다.”는 언급이다.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좋다. 그러면 건강한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들도 좋을 것이다. 이 논증에서 연한 고기는 건강의 수단이다. 우리 앞에 어떤 고기가 놓여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먹어도 되는지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앞에 놓인 그 고기가 우리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고기인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 고기가 연한 고기라면 우리의 건강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제1

모든 연한 고기인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전제2

이 고기는 연한 고기인 것이다.

(이 고기는 연한 고기가 아니다.)

결론

이 고기는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 고기는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결론2

이 고기는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고기는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유형도 있다. “그러므로 만일 한편으로는 맛보는 것을 말리는 보편적인 의견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것은 모두 즐거움을 주는데 이것도 단것이라는 의견이 바로 이 의견이 실제로 움직이게 만든다 있다면, 또 마침 [단 것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면, 한편에서 의견은 이것을 회피하라고 말하지만 다른 편에서 욕망은 이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 경우, 내 앞에 놓인 어떤 것이 단것이라는 점이 확실하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여러 요인에 의해 그 사람이 추구하는 목적이 여럿이 된다는 점이다. 여러 목적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행위를 지시함으로써 갈등이 발생한다. 보편적인 의견은 단 것은 맛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견은 좋은 목적에 의해 정당화된 의견이다. 예를 들어, 단 것이 건강을 해친다면, 위의 두번째 삼단논법에서처럼 단 것을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 보편적인 의견일 것이다. 반면 그의 욕망은 즐거움의 충족을 목표로 삼는다. 단것은 즐거움을 충족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의 수단이다. 만약 어떤 이가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면 일반적으로 단것을 맛볼 것이다. 이를 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전제1

모든 단 것은 먹으면 안되는 것이다.

(모든 단 것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전제2

이것은 단것이다.

결론

이것은 먹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3) 실천적 삼단논법과 도덕적 이성주의

 

   또 전제에는 두 종류가 있으므로 두 종류의 전제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라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의 형식이 도덕적 판단과 결정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도덕적 판단 또는 결정을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낸다고 할 때,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은 세 가지가 될 것이다.


   첫째, 논증의 내용의 측면에서, 삼단논법의 전제가 되는 두 명제가 참이어야 한다.


   둘째, 논증의 형식의 측면에서, 어떤 사람이 세운 실천적 삼단논법이 형식적으로 타당해야 한다.

셋째, 무엇보다도 그 논증을 구성하는 사람이 좋은 목적(또는 올바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만 올바른 결정
(또는 좋은 결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잘 숙고한다는 것은 합리적 추론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잘 숙고함에서의 올바름이 그 모든 의미에서의 올바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잘 숙고한다는 것은 유익함에 따른 올바름이자 마땅히 도달해야 할 것, 마땅히 해야 할 방식, 마땅히 해야 할 시간에 따른 올바름이다 논증의 형식적 타당성에 대한 검토는 논리학의 주제이지 윤리학의 주제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전제로서의 지식과 결론으로서의 도덕적 판단 사이의 관계이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두 전제로 구성된다. 위의 사례들에서 전제1들은 모두 일반적인 사실에 관한 서술로 이뤄져있다. 이 일반적인 사실은 내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되며,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 목표에 걸맞는 수단이나 행위들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사실들은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지위는 확보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유를 이 논의의 주제의 본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윤리학은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불확실성이 많이 개입하기에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한 것들에 관한 것의 범위 이상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개별적인 전제들은 이것은 이런저런 것이다또는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다라는 식의 개별적인 것에 관한 지식이다. 위의 영혼에 관하여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실제로 인간의 행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전제는 바로 개별적 전제다. 일반적인 사실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내가 당면하는 바로 이 경우가 그 일반적인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일반적인 원칙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릇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연한 고기가 몸에 좋다는 걸 알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류 고기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건강을 산출해 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단 또는 그 과정으로서 실천적 삼단논법을 수용한다면, 그가 내린 도덕적 판단의 옳고/그름(또는 좋고/나쁨)의 여부와 그런 추론을 하게 된 전제들의 참/거짓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 형식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전제된다면, 실천적 삼단논법의 도식 아래서 잘못된 도덕적 판단은 전제로서의 지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7권에서는 잘못된 행위를 하는 인간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 것인지에 관해 다루며, 그 상태를 전제로서의 지식들에 연관시키고 있다. 악덕(무절제)과 자제력없음, 그리고 짐승같음이라는 세 가지 상태는 모두 인간적인(그러므로 도덕적인, 윤리적인) 비난의 대상에 속한다. 짐승같음의 경우 아예 인간인 것 같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있으므로, 우리와 더욱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실제로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행위의 뿌리는 악덕의 상태와 자제력 없음의 상태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악덕과 자제력 없음은 여러모로 비교할만한 대상이다. 그 둘은 겉보기에 비슷한 종류의 잘못된 행위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둘을 구분한다. “무절제한 사람은 언제나 눈앞의 즐거움을 추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합리적 선택에 끌려가고, 자제력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면서도 눈앞의 즐거움을 추구하니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제력 없음을 무지와 연관시킨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실제로 모르거나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고 있는 사람이나 미친 사람, 혹은 취한 사람의 경우처럼 어떤 방식으로 앎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지고 있지 않는 상태를 보기 때문이다.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이러한 상태에 놓인 것이다.” 이 무지는 위에 예시된 실천적 삼단논법의 두 번째 경우처럼 구체적 상황에 대한 무지일 수도 있으며, 또한 세번째 예시에서처럼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데 다른 요소(예를 들어 욕망)가 개입하기 때문에 생기는, 목적에 대한 일시적인 무지일수도 있다.


   반면 악덕(무절제)은 이런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무지와는 다른 다분히 의도적인 상태다. “즐거운 것들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사람, 혹은 즐거운 것들을 과도하게 추구하되 선택으로 말미암아 추구하는 사람, 그것도 즐거움 자체 때문에 추구할 뿐 즐거움으로부터 나오는 다른 것 때문에 추구하지는 않는 사람은 무절제한 사람이다. 이들도 일종의 잘못 알고 있는 상태에 놓여있지만, 그 정도나 형태가 자제력 없음과는 많이 다르다. 무절제한 사람은 합리적 선택과 숙고를 통해서 나쁜 행위들을 한다. 이들은 정말로 모르는 상태 또는 잘못 알고 있는 상태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하지도 않고 (...) 고칠 수도 없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자제력없음과 악덕은 무지와 연관이 있으며, 그 무지는 실천적 삼단논법의 도식 속에서 전제들에 대한 무지와 연관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도덕적 책임(도덕적인 성공 또는 실패의 원인)을 지식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사실과 부합하는가가 도덕적 판단의 성패에 결정적이다. 즉 자제력 없는 사람들과 악덕한 사람들이 비난받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한 행위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원리가 그 사람들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된 행위의 원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안에서는 지적인 성실함을 다해 자신이 가진 믿음의 진위여부를 판별하지 않고 여기에서부터 실천적 결론을 이끌어낸 것에서 비롯한다.

 


3. 흄의 도덕적 이성주의 비판

 

    (1) 인간의 행위에서 이성의 제한적 역할

 

   도덕적 판단의 토대를 이성을 통한 참/거짓의 판별에 직접 두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르게, 흄은 도덕적 판단이 행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이성이 직접 개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눈 앞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놓여있고 그것이 맛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것을 선호하는 우리의 정념이 자극받지 않는다면(예를 들어 배가 부를 때) 맛있다는 판단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행위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와 이성의 관계에서 그가 주장하는 가장 일반적인 사항은 두 가지다. “첫째, 오직 이성만으로는 어떤 의지 활동의 동기가 될 수 없다. 둘째, 이성은 의지의 방향을 결정할 때 결코 정념과 상반될 수 없다.” 이성은 관념들 사이의 비교와 그 관념이 발생할 것에 관한 개연성 이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 관념들 사이의 단순한 비교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할지 알려주지 않으며, 이 비교는 우리가 목적으로 삼은 어떤 것에 종속되어 그 목적과 이 관념들의 비교 사이에 적절한 개연적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주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이런 개연성은 우리가 선호하거나 또는 혐오하는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우리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킨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 행위의 동기가 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호나 혐오이며, 이것은 이러저러한 것이라든지 또는 내가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는 그것이 선호나 혐오를 자극하지 않는 한 우리의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지 않는다.


   또한 다른 부분에서는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 결코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한다. 만약 이성이 정념에 대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흄의 주장과는 달리 이성이 직접적으로 행위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러나 정념은 지각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불러일으켜지는 것인 반면, 이성은 이렇게 불러일으켜진 것에 부차적인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능력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성은 정념에 비해 덜 근원적이기 때문에, “근원적 영향력을 인간의 행위에 행사할 수 없다.


   그래서 이성은 스스로 직접 행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대신 선호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많은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에 따르면 그 방식은 두 가지인데, “이성은 어떤 정념에 어울리는 대상의 존재를 우리에게 일깨워줌으로써 해당 정념을 유발할 수도 있다. 또는 이성은 어떤 정념을 드러낼 계기를 우리에게 제공할 정도로 원인과 결과의 연관을 드러낸다.”

 


   (2) 도덕적 책임의 원천 1 - 사실에 대한 오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삼단논법의 도식 아래서 개별적인 사실들에 대한 특정한 종류의 무지로부터 나오는 행위들이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무지를 통해서 한 행위는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무지 속에서 한 행위는 도덕적 책임을 물어 비난할 수 있다. 그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잘못된 행위를 했기 때문이고, 잘못된 행위를 한 원인은 무지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무지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되는 원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종류의 무지는 쉽게 고쳐질 수 있다고 말하며 오히려 악덕보다 낫다고 평가하지만, 그것이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닐 수는 없다.


   만약 이렇게 개별적인 사실에 관한 잘못된 믿음이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된다는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라면, ‘사실에 대한 오해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흄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대한 반박으로 볼 수 있다. 우선 흄은 사람들은 이런 오해로부터 비롯된 행위에 관해 범죄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사실에 대한 오해가 전적으로 비자발적이라는 점이다. 내가 고통이나 쾌락을 산출하는 대상의 영향력을 잘못 파악하거나 나의 욕구를 충족시킬 적절한 수단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은 나를 비난하기보다는 안타깝게 여길 것이다. 그와 같은 실수를 나의 도덕적 성격의 결함으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의 무지를 통해서 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무효라는 점 또한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흄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대한 반박이 될 수가 없다. ‘무지를 통해서 한 행위는 비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이것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흄은 무지 속에서 한 행위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원인도 무지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자 하는 것 같다.


   무지 속에서 한 행위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았거나, 또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 반대로 행위한 이유는 그 행위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실천적 삼단논법의 개별적인 전제에 관한 지각에서 무지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에서 도덕적 비난은 개별적인 전제에 관한 지각에서의 무지에 주어진다.


   그러나 흄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한 이유는 무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행동이 발생했다는 것은 그 행동의 동기가 정념에 의해 자극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또 그 정념이 자극받았다는 것은 그 정념을 자극할만한 정보가 이성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끊임없이 지각을 통해 정보가 주어지는 이상, 인간에게 사실상 무지의 상태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지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설명하는 것처럼 앎이 없거나 비활성화되어있는 상태인 것이 아니다. 이성을 통해 행위의 주체에게 주어진 여러 지각들이 어떤 한 쪽의 행위 유형에 대한 동기를 더욱 강하게 자극한 것이다. 따라서 무지 속에서 행위하는사람들은 실제로는 무지 속에서 행위하지 않고, 자신이 지각한 것에 따라 충실하게 행위하고 있는 셈이다.


   무지한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그것을 무지라고 판정할 특정한 종류의 지각의 표준이 우선 있어야만 판별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행위에 관한 도덕적 평가와 구체적 상황에 관한 믿음의 참/거짓(즉 이해/오해)를 연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평가는 행위자가 알고서 했는지 모르고 했는지를 판별하는 것보다는, 행위자가 실제로 어떤 행위를 했는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흄의 반박은 다른 식으로도 전개된다. 만약 인식의 참/거짓과 도덕적 평가를 연결시킨다면, 도덕적 평가에 적절한 정도가 없이 오로지 완전히 착하거나 또는 완전히 착하지 않거나(또는 완전히 나쁘거나 또는 완전히 나쁘지 않거나) 하는 평가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개별적 상황에 관한 믿음의 참/거짓에는 정도가 없이 그저 참이거나 혹은 거짓일 뿐이다. 그 믿음이 참이라면 지식이며, 거짓이라면 거짓된 믿음이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행위가 개별적인 상황을 참되게 알았기 때문에 나온 행위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그 행위는 마치 추론의 필연성이 그런 것처럼 옳거나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삼단논법의 전제들이 참이고 타당한 논증일 경우 그 결론은 필연적으로 참일 수는 있지만 개연적으로 참일 수는 없는 것처럼, 실천적 삼단논법에서 전제들이 상당한 정도로 개연적인 참이고 타당한 형식일 경우 행위를 지시하는 결론 또한 전제에 상당하는 정도로 개연적인 참일 것이다. “이성에 대한 일치나 불일치에는 정도가 전혀 용인되지 않으므로, 모든 덕과 부덕이 대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상식적인 삶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 어떤 누구도 실천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거짓된 정보를 이용하지 않으며, 상당한 정도로 참에 부합한다고 생각되는 것들로 추론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천적 추론의 결론들은 그 논증을 지지하는 전제들과 같은 정도로 참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완전히 좋은 실천적 추론의 결론도, 완전히 나쁜 실천적 추론의 결론도 없으며, 우리의 결론은 그 사이 어디쯤에 어느 정도의 진리성만 가지고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상식에 더욱 가깝다.

 


   (3) 옳음에 대한 오해

 

   실천적 추론에서의 잘못은 구체적 상황의 인지에서의 실수 뿐만 아니라 행위의 일반 원칙에 대한 오해에서도 비롯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는 악덕(무절제)’, 즉 나쁜 목표를 설정하고 숙고해서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행위에 관한 일반적인 원칙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흄은 옳음에 대한 오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도 된다(또는 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그것이 그의 행위원칙이라면, 그가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숙고를 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옳음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아야 한다고(훔쳐서는 안된다고) 명령하고 있다. 이 경우 그 사람은 옳음에 관해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흄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실에 대한 오해에서와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즉 도덕적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옳음에 관해 오해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관해서 그는 아주 간명하게 논평하고 있다. “옳음에 대한 오해는 실제적인 옳고 그름을 상정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자면 이런 판단과는 별도로 도덕에서의 실질적인 구별을 상정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오해는 결코 부도덕성의 근원적 원천이라고 할 수 없다.”


   그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이미 설정된 도덕적 옳음과 관련된 원칙과 제도에 위배되는 일을 했기 때문이지, 그가 이 원칙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기존에 설정된 어떤 종류의 원칙(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된다)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실제로 훔치지만 않는다면 그는 어떤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종류의 옳음에 대한 오해가 도덕적 책임의 원천이라고 간주한다면, 그는 그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실제로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도덕적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나 이는 그다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철학의 다른 분야의 관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대, 즉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의 반대로 이해될 수도 있다. 흄은 위에서 언급한 그런 옳음들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이런 옳음들이 있다면, 그리고 어떤 사람이 옳음에 대해서 오해했다면 이것은 도덕적 비난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위의 인용구를 전후해서 흄은 이것이 부차적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까지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그가 의도했던 것은 그런 옳음들이 있다는 주장은 실제로 검증되거나 증명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런 옳음이 있다면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들도 가능해질지 모른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종류의 옳음이 직관의 능력으로부터 사실로서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사실들은 실천적 삼단논법에서의 대전제, 즉 보편적인 전제에 놓인다. 그러나 우리가 윤리학에서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보편적인 전제들이 필연적으로 확실한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 결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판단과 그 평가에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 도덕적 이성주의자이다. 그는 좋은 사람들이 할법한 행위들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실천적 삼단논법을 통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사람들이 추론하는 과정이라고 믿었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이론적 삼단논법과 같이 두 개의 전제와 하나의 결론으로 이뤄져있다. 결론이 바로 행위가 된다는 점이 실천적 삼단논법의 특징이다. 또 두 개의 전제는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실천적 삼단논법에 관해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가 실천적 삼단논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여럿 있으며, 이들은 어느 정도 실천적 삼단논법의 도식으로 형식화할 수 있다. 만약 이 도식에서 틀린 결론이 이끌려 나왔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전제나 개별적인 전제 둘 가운데 적어도 하나가 틀렸다는 점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따라서 실천적 삼단논법을 도덕적 추론의 도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보편적인 전제나 개별적인 전제에 대입할 사실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가 잘못된 행위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그런 잘못된 행위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원인은 지식의 소유 여부가 된다.


   반면 흄은 도덕적 반이성주의자로서, 도덕적 비난과 지식의 소유가 연관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지식은 대상 또는 사실과 일치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흄에게서 관념의 비교를 통해 성립되는데, 이것은 이성의 기능이다. 그러나 흄은 이성이 행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행위는 정념을 자극해야만 일어난다. 이성의 일치만으로 일어나는 행위는 아무 것도 없다. 또한 정념은 인간에게 직접적이고 근원적이지만, 이성은 부차적이다.


   흄은 이런 관점에서 사실에 대한 오해옳음에 대한 오해가 도덕적 비난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에 대한 오해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것은 무지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흄은 이런 무지의 상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흄의 견해에 충실하자면, 인간의 행위는 정념이 동기를 자극한 것이고, 정념은 이성에 의해 자극되는데, 어떤 행위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그런 행동을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못된 지식이 아니라 그저 그런 행동을 불러일으키기에 걸맞는 지각이며, 참과 거짓을 가릴 수가 없다. 이 관점에 따르면 그는 무지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무지의 상태 자체가 있을 수 없다.


   옳음에 대한 오해가 도덕적 비난의 원천이 될 수 없는 까닭은 사실에 대한 오해가 그렇게 될 수 없는 까닭과 그 구조가 비슷하다. 그 사람이 옳음에 대한 오해속에서 어떤 행위를 했다면, 그 행위는 오해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상정된 옳음과 불일치하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 된다. 나아가 흄은 이런 옳음이 있는 것인가에 관해 더욱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옳음들이 사실로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보편적인 전제에 들어가는 사실들이라는 점에서 그의 윤리학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흄이 던진 이 질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적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 즉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일반적인 견해들을 검토하는 것에서 미진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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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데이비드 흄, 정념에 관하여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2(이준호 옮김), 서광사, 1996

데이비드 흄, 도덕에 관하여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3(이준호 옮김), 서광사, 2008

서양근대철학회, 서양근대윤리학, 창비, 2010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강상진 등 옮김), , 2011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유원기 옮김), 궁리, 2001

F. 코플스톤, 영국경험론(이재영 옮김), 서광사, 1991)

 

Paula Gottlieb, “The Practical Syllogism” In R. Kraut (ed.), The Blackwell Guide to Aristotle’s Nicomachean Ethics, pp.218-233. Oxford: Black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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