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브레인 - 삶에서 뇌는 얼마나 중요한가?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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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문제, 즉 물질로서의 우리의 몸과 마음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누구나 한번씩 생각해보게 되는 영원한 떡밥이다. 상식적으로야 우리의 몸은 물질로 이뤄져있고 물질은 물질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뇌에 대해서 한 번쯤은 관심을 갖고, 또 알아두면 유용한 이유도 바로 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글먼의 "더 브레인"은 우리의 관심사가 뻗칠만한 거의 부분을 전반적으로 가볍게 건드리고 들어가는, 좋은 관문이 될 것 같다. 우리의 뇌가 성장하는 과정에서부터 의식의 문제, 이상행동에 관한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법과 뇌과학과 관련된 우리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던 내용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새로 알게 된 실험(예를 들어 몰리뉴 문제의 현실 버전인 2장에 나오는 메이 사례)이나 접근법(역할전환 교육이 아이들의 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나오는 5장) 같은 것들은 꽤 흥미로웠다.


이 책의 챕터 중에서, 위에서 예로 들었던 2장과 5장이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다. 2장에선 익숙한 논의에 새로운 실험을 더했고, 5장은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윤리학적-사회적 영향에 관한 내 관심사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유아기의 생후배선 과정에서 적절한 자극에 노출되지 않으면 그 부분은 평생 회복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부분에선, 정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상하게 바라보고 싫어하며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의 상당수는, 우리 공동체 모두가 그런 행동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부분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즉, 너무 압축적이고 단편적인 실험결과를 나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다큐멘터리에 기반한 책이기에, 동전의 양면처럼 “컴팩트”하다는 특성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 언급되는 실험들은 저자 본인이 엄선해서 고른 대표적 실험들일테고, 실제로는 그 실험들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어마어마한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실험들이 있을거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다큐멘터리와 이런 책이 아예 나올 수가 없었을테니까.


이런 아쉬움은, 내가 시간이 되는대로 책의 뒷편에 있는 참고문헌들을 차차 읽어나가면서 해결해나가면 될 것 같다. 내게 이 책은, 오랜만에 오래된 관심사를 벗어나 다른 사람의 연구를 가만히 앉아서 떠먹는 마음 편한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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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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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임 문명4를 참 좋아한다. 어느 방학엔가는 식음을 전폐하고 하루에 18시간 씩 한 달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말할 수 없다. 어쨌든 마우스와 키보드가 눌리는 대로 플레이했고,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했기에 아무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 이야기를 하고자 문명4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내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대체부품”을 개발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온다는 짧은 문구가 멋드러진 영어 번역으로 등장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형이상학에 나온다는 이 말은 정치학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권에서부터, 그리고 각 권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나 전체로서의 정치체제와 그것의 구성원인 개별 시민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개별 시민의 목적을 단순히 합친다고 해서 전체의 목적이 바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전체의 연구를 위해서 부분의 성격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성격이 전체의 목적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또는 방해가 될 수도 있는지)를 계속해서 캐묻는다.


(21세기에 사는 우리와는 매우 동떨어져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논변을 계속 펼치는데, 그 중에서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의 관계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가장 흥미를 끌었다. 그는 주로 3권 4장에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몇몇 부분에서 자신의 견해를 직접 제시한다. 그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사람과 좋은 시민은 분명 다르긴 하지만 공통된 점이 있으며, 아마 좋은 사람은 어느 공동체를 가든 좋은 시민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종으로서 하나이지만 정치체제는 여럿인데, 그럼에도 좋은 사람은 탁월성을 지니고 그것을 행위로 보여주고 여기에는 각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법규에 따르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이유를 들어서, 즉 좋은 시민은 법을 잘 따르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인 사람이기에, 이 둘의 접점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떤 정치체제라도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의 눈에는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을 것이고, 여기에 저항하는 것은 일종의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 물론 2500년 전 사람의 생각과 내 신념을, 복잡한 논증을 제시한 주장과 아직 여물지 않은 내 아이디어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겠으나, 여하튼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의 다른 저서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읽은 이 책에서 만큼은, 그는 계속해서 비유를 시도한다. 그리고 나는 이 비유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 즉 개인의 도덕과 정치공동체가 밀접하게 이어져 있으며 같은 원리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정치체제의 상태는 올바른 인간의 상태와 연결되며, 바람직한 정치적 행위는 바람직한 의술이나 제작술과 연관된다. 그는 이런 비유가 설명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고, 그 설명의 기능이 가능한 이유는 두 대상 사이에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진짜” 설명인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비유의 부분들은 아주 직관적이어서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각종 고대적 편견들(특히 생산직 종사자나 여성에 대한 줄기찬 비하)을 약간만 걷어내고 바라본다면, 그의 생각은 정치인들을 비도덕적이라고 디스하는 우리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정치학 연구는 이십여 세기를 흐르고 흘러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졌고, 나는 나름의 공을 들여서 이 책을 읽었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았던 것들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관심사가 정치를 떠나지 않는 한, 그리고 인상적인 구절들을 열심히 표시한 포스트잇 플래그들을 다 떼어버리지 않는 한, 나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돌아보고 싶을 때 다시 한 번 쯤 들여다보게 될 책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이 책은 내 독서능력에 대해서도, 내 관점에 대해서도, 도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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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 - 왜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가?
심기용.정윤아 지음 / 알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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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 개념 자체에 대해선 큰 불만이나 이견이 없으므로 (제 관심사인) 이론적 세부사항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첫째, 조나단 하이트의 도덕감정이론에 관한 오독: 아쉽게도 하이트의 도덕감정이론은 폴리아모리를 설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에 서있는 사람들을 훨씬 더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에게서 감정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본능적인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그게 바람이든 폴리아모리를 향해 가는 진행과정이든) 기분이 나빴다면, 그런 감정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이트에겐 훨씬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도덕감정이론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진화심리학을 인용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감정적 직관”이 생물학적 본능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또 그의 “직관의 6가지 기본 유형”중에 하나는 한 사람 또는 어떤 한 가지에 대한 충성, 즉 loyalty다. 누가 보더라도 폴리아모리는 loyalty에 대한 중대한 위반인데, 한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고 모노가미를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하이트의 결론은,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적 급진적 운동에 반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의 감정적 거부감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운동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는 쪽에 기울어있다. 이런 입장과 폴리아모리가 일관성 있게 어울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책 초반부에서 삐끗.


둘째,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과 폴리아모리의 관계설정: 책에서도 설명되어 있듯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실체인 신을 중심으로 해서 인과적으로 강하게 맞물려있는 세계를 상정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는데, 하나는 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은 자연이라는 점 즉 문명사회에 대한 분류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모든 현상이 가치의 측면에서 동등한 값을 갖는다는 점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해서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세계관 속에선 “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 라는 질문에 “꺼져 이 개새끼야”라고 대답하는 것과 “난 네 전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네 모습도 사랑해”라고 대답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위계가 설정되지 않는다. 내게는 이 둘 중에 어떤 대답을 할 선택권이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또 이 두 대답 중에 "그래도 널 사랑해”를 선택해야할만한 도덕적 우월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꺼져 이 개새끼야”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 것 만큼이나 “그래도 널 사랑해”라고 대답할만한 이유도 없어진다.


물론 이 책의 필진들은 이 정도만 되어도 사회의 지배이념에 대한 공격으로서 의미있는 이론적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보이나, 문제는 본인들 스스로 지배이념의 반대항에 있는 폴리아모리에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 슬쩍슬쩍 비친다는 데 있다. “진정성”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수사라고 공격해놓고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 “진정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한다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 같다. 그리고 이 욕망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 논리적으로 그다지…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들뢰즈의 강도 개념과 문명의 문제: 스피노자를 이어받은 들뢰즈의 강렬도intensity 개념은 사람들의 감정을 질적인 언어로 파악하는 우리들의 “문명적” 습관을 양적인 개념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 철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스피노자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자연과 문명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의 성격 또한 그대로 물려받는다.


문명이 억압인 것, 맞다. 우리 행위의 양식을 조직하고 그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시도를 판옵티콘마냥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문명의 본질이라는 것,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억압으로부터 우리는 단순한 종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역진불가능한 질적 도약을 통해 문명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문명화된” 시선에서 특정한 정도의 강렬도를 가진 감정을 사랑이라고 규정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그에 알맞는 행위의 양식을 조직해 나가거나 기존의 양식을 반복한다.


이 둘은 사실 다른 말이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렇게 사회를 억압과 동일시하고 비판하면서도, 우리는 “문명화된” 사회 안에 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사랑의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고 그 안에 성소수자 운동으로서 폴리아모리도 포함된다는 저자들의 논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저자들이 그렇듯 나 또한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넷째, 선택의 문제: 그래서 폴리아모리는, (제가 몇 번 말씀드렸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선택의 문제에 부딪힌다. 빨간 옷을 입고 나갔다가 마음에 드는 검은 옷을 보고 구입해서 입는 이유는 빨간 옷보다 검은 옷이 마음에 “더” 들었기 때문이다. 즉, 비교평가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는 엄마를 더 좋아합니다만) 내 마음을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엄마와 아빠 둘 중에 한 명에게 반드시 상처를 주는 현명하지 못한 대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도 나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선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내가 누군가에게 one & only가 아닌 다음에야 결코 충족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진정한 폴리아모리는 이런 위계 자체를 거부한다지만, 마음씀이란 언제나 상대평가의 개념인 것 같아서… 잘 모르겠다.


이건 사족: 이 책을 읽기 직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었다. 7권 마지막 부분에 이런 멘트가 있다. “우리는 맨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모든 것들을 더 좋아하니까.” 그것이 설령 윤리적 사회적 위반을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우정도 사랑도 장난감도 우리는 새것을 더 좋아한다. 이건 폴리아모리로 해결될 문제라기보단, 그냥 인류의 비극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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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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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첫사랑이니 젊을 때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젊음은 쓸데없는 상상력과 사람을 응대하는 기술의 미숙함을 포함한다. 글에서 드러나는 블라디미르도 그렇다. 본인이 하고싶은 대로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끌리는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고, 하고싶은 대로 하고 싶어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거역하지 못하고 곧이 곧대로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글로는 다 적을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있다. 글로 적을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글은 내밀하고, 그 내밀함이 마치 내 감정인 양 읽어내려갈 수 있을만큼 잘 선택된 어휘들로 꾸며져있다. 잘 선택되었다는 것이 정제되어있다는 뜻은 아니다. 젊은 사람의 감정이 정제되어있을 리 없으니까.


지나이다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제비뽑기 벌칙놀이를 하는 장면에서부터 등장한 그 사람들이 읽는 내내 맴돈다. 그들의 옆에, 내가 겪었던 여러 사람들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욕망의 분출들이 스쳐간다.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내가 느낀대로 모두 적어내려가자면, 아마도 문학이 아니라 저급한 르포르타주 정도가 되겠지. 젊은 주인공의 시선에서 모든 사건이 눈부시고 아름다우며 찬란하게 그려진 것이 오히려 다행인 것일까.  문학이 아니면 불가능할 장치들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첫사랑에는, 내 첫사랑이 아버지의 내연녀였고 그래서 부부싸움이 났다거나 혹은 서른 살도 안되어서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자는 신문의 가십란에서 볼 법한 이야기같기도 하고, 후자는 아마 의학의 발달로 인해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가 되었겠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음"이나 "상실"이라는 말로 요약될 인생의 전환점은 누구나 첫사랑을 통해 겪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스포일러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어떤 거대한 존재가 결국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고 내 인격을 박탈해버리면서도 나는 그 폭력에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진다는 것도, 상징으로서의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이 글에 모든 것을 기입할 수 없다. 소설은 소설로서 남겨두고, 기억은 기억으로서 묻어두어야만 할 것 같다. 소설은 재미있었으되, 나의 기억은 아프다. 감상을 하기엔 더없이 좋지만, 감상문을 쓰기엔 더없이 답답하기만 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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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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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아름답다, 착하다, 올바르다, 정의롭다, 유익하다, 와 같은 언어들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어떤 행위를 하고 그 결과를 검토해보는데 이런 언어들은 필수적이다. 이런 단어들은 하나같이 가치평가, 특히 우리 인간들의 행위와 관련된 평가에 동원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에티카" 즉 윤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여 인간들의 가치평가의 본성과 원리를 연구한 책 중에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고 또 가장 유명한 축에도 속한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연구는, 대체로 각각의 사람들이 인간사에 대해 가지는 견해들(doxa)에서 시작해 일상적 사용에 담긴 언어적인 혼란을 걷어내고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 의견들 중 가장 그럴듯한 의견을 선별하고 그것의 핵심을 포착한 뒤 그 핵심들을 논리적으로 배열한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이 드러낸 본질이 평범한 용법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준다.


그의 연구방향은 윤리학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두 가지 큰 줄기 가운데 하나를 대표한다. 나머지 하나는 세속적 의견을 물리치고 이상향로 직접 나아간 뒤에 그 이상향으로부터 구체적인 행위의 여부를 연역해내는 플라톤적 방식이다. 플라톤적 방식에서는 연역의 결과가 얼마나 현실적인지, 또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받아들여질만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옳은 것은 옳은 것이라는, 강한 신념의 산물인 것이다.


뭐, 나는 개인적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스타일을 훨씬 더 좋아한다. 물론 그의 설명은 어렵지만, 그래도 천천히 뜯어보다보면 감이 어렴풋이 잡히기도 하고, 또 3~4장에 걸쳐 펼쳐지는 "중용" 개념에 대한 여러 사례의 언급에서는 내가 알고 있거나 주변에서 벌어졌던 여러 사례들을 이것저것 떠올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에 관한 논의, 아크라시아에 관한 논의로 넘어갔을 때는 나의 경험도 떠오르고, 친구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성을 중요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연구 스타일의 가장 큰 묘미다. 멋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일단 재미를 붙이고 나면 재미있다.


학교 다닐 때는 레포트도 쓰면서 수차례 읽어봤던 책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신념에 기반한 플라톤 스타일(플라톤을 좋아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을 훨씬 더 좋아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수 반동분자라고 속으로 매도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읽다가 피식 웃었다. 읽으면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 그냥, 내가 변했나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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