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두 가지 비판이 있다. 하나는 공화주의가 과거회귀적이며,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현대사회에서는 실현불가능한 이념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공화주의 공공철학의 이념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일리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공화주의가 바람직하지 않으며, 배제와 억압의 정치학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배제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나, 현대사회의 특징 덕분에 공화주의적 이념이 억압으로 작동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억압적 공화주의자인 루소와 열린 공화주의자인 토크빌의 차이에 주목해보면, 공화주의가 반드시 억압을 동반하는 것만도 아니다. 즉, 공화주의 공동체란 동질성이 강한 시민권자격자들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민주적 과정에 대한 이해와 공적 참여에 대한 강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로 이뤄진 연대체다.


  절차적 공화정은 우연적인 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하며, 그에 따른 두 가지 징후(결과)를 만들어냈다. 하나는 절차적 공화정이 회피한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이상한 해답을 유도해내는 잘못된 도덕주의를 향한 운동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을 둘러싼 도덕 공동체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지배(자기-지배)의 상실이다. 공화주의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자들의 경우 복지프로그램을 축소시키면서 시민적 노선에 속하는 이유를 들었다. 즉, 공짜로 주어지는 복지프로그램이 수혜자들의 근로의욕을 감소시키고 노력 없는 댓가에 길들임으로써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에 의거한 사회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언어와 논증은 1990년대에 이르러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까지 옮겨갔다.


  반면 진보주의자들 또한 시민적 노선에 서서 불평등을 비판했다. 이전의 불평등 비판은 권리와 자유의 축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최근의 불평등 비판은 가난이 인격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극심한 불평등은 계층 사이의 공간적-시간적 분리 또한 가속화시키는데, 이런 경향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익혀야 할 현대사회에서의 시민적 덕의 학습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빼앗아간다. 이런 분리는 사람들을 사적인 영역으로 몰아넣으며, 공적인 것에 대한 고려 또는 상상의 능력을 지워버린다. 이런 주장은 약간은 역설적이게도 90년대 중반 민주당 정부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라이히에게서 나왔다.


  정부 주요 각료들의 담론 이외에도 공화주의적 경향이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지역개발조합의 재조명, 20세기 초반에 사라졌던 반체인법을 연상시키는 스프롤 버스터 기업형 슈퍼마켓 반대운동, 공공성을 띈 기관들을 중심으로 도시를 재조직하는 신도시기획운동, 종교공동체나 마을회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삼은 지역사회 공공부조조직인 산업지역재단의 발흥이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의 운동의 동기와 활동방식은, 자기지배를 학습하는 시민화 프로그램으로서의 소규모 공동체라는 미국 건국시기의 이상을 닮아있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의 시민적 덕성의 함양이라는 사회 모델이 전지구적 네트워크가 이미 형성된 현대사회에도 유효할까? 이 질문은 특히 국민국가 단위로 조직된 정치체에 비해 너무나도 비대해져버린 초국적 경제권력의 전횡에 시민적 노선이 유효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현재 EU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정치적 난항으로부터, 그리고 193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경제구조 조직 논쟁으로부터 현 상황에 대한 대응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런 대응으로서 등장한 것이 세계시민윤리라는 노선이다. 이 노선의 옹호자들은, 마치 경제규모에 대항해서 정치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말하듯이 전지구적 거대 경제조직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의 인격적 기반은 세계시민적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발주의적 자유주의의 절차적 공화정에서 추상적 인간의 모델이 윤리의 기반으로서 실패하듯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세계시민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란, 자유주의자들이 머리에 그렸던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시민 정체성으로서의 윤리보다는 지역공동체성을 살리는 것이 오히려 이 시대에 더 요청된다. 세계시민적 태도보다는 정치에 대한 통제의 경험이 훨씬 더 참여와 변화에 대한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공동체의 조직과 그 증가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고양시킨다. 미국은 연방주의 논쟁의 과정에서 소규모 공동체의 조직과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공동체들과 주권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숙고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하부의 소규모 공동체들로 주권을 일부 이양하면서 공동체적 경험과 잘 조직된 연방정부를 동시에 만들고자 노력했던 역사를 지닌 것이다. 또한 흑인민권운동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운동이 단순히 권리에 대한 청원이 아니라 문화적 변혁과 영적 고양을 목표로 삼은 운동이었다는 것은, 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여러 코멘트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우려와 달리, 그래서 공화주의적 공동체 또한 다중적인 정체성을 묵과하지 않는다. 특정한 공동체 내부와 외부에 수많은 정체성들을 놓고 고민하고 토의하며 결정하는 과정이야말로 시민적 덕성의 고양의 과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중적인 정체성의 공화주의를 위협하는 두 가지 잠재적 요소가 있다. 하나는 다중성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다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나와 우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부유하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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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델의 관점에서, 절차적 공화정은 한 가지 역설을 품고 있다. 독립된 개인이 누려야 할 자유와 그에 해당하는 권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실제로는 개인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구조에 대한 종속이 더욱 심화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시민적 덕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시민적 덕성이 강조하는 공동체의 자치에 대한 참여의 덕목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회의 확대와 공동체의 확대의 구별, 의존의 심화와 공동체성의 강화의 구별을 내세운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의 규모를 점점 키우고, 고도의 분업이 사람들의 사이의 의존을 심화시켰지만, 이것이 공동체 의식의 강화로 연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이 거대한 규모의 사회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개인의 한계상황만 심화되었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공공적인 것”에 관한 관념과 인식을 가지는 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응하는 담론의 역사를 추적해봄으로써, 절차적 공화정을 향한 전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대규모 조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보주의자들은 과학적 관리법, 전문가주의를 도입해서 이런 대규모 조직들에 대응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도 진영을 막론하고 시민적 덕성의 담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응하기 위한 두 가지 노선을 살펴보면 이런 점이 드러난다.


  첫째는 대규모 기업집단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를 탈집중화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동참한 사람들은 대규모 회사의 운영자들이 확보한 대규모의 금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했다. 또한 소속 피고용자(노동자)들을 회사에 묶어놓아서 이들이 시민적 덕성을 고양시킬 기회를 박탈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산업민주주의라는 담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기업을 고용주와 피고용자 모두의 통제범위 안에 놓으려는 발상이다. 이것은 피고용자로 있다가 기술을 배워 자영업자로 독립하는, 자유노동의 이상에 충실한 아이디어였다.


  반대로 대규모 기업집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모를 키워야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이런 생각은 기업집단의 대규모화가 역진불가능한 현상이라는 진단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대적인 규모의 경제라는 발상과 달리, 이들은 대규모화에 따른 시민적 공동체의 대규모화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지역공동체성이 아닌 국가정체성을 매개로 시민들을 규합하고, 이들의 열망을 대규모화된 정부에 집중시키자는 발상이었다.


  반면 이런 대규모 기업집단이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소비자주권이라는 개념을 꺼내들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더 이상 가치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공동체는 유효하지 않다. 하지만 기업집단과 그들의 판로가 커질수록, 그 기업집단의 생산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은 어느 시대보다도 확고해졌다. 그러므로 사회 또한 소비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될 것이라는 전망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생산자 기반 가치 중심의 사회관에서 소비자 기반 만족 중심 사회관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 사회관은 두 가지 방식으로 옹호되었다. 한계효용의 법칙에 따라, 소비로 인한 생산과 분배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방식과, 소비생활이 더 이상 도덕적 명령에 구속받지 않고 완전히 자발성을 확립한다는 자발주의적 방식이 그것이다. 이들에게 모든 사회적 조직의 목표는 “가장 광범위”하고 완전한 “경제적 만족”이었다.


  이런 변화를 추적해보기 위해서는, 경제와 관련된 서로 다른 두 가지 법의 서로 다른 운명을 살펴보면 된다.


  첫번째는 체인점 숫자가 늘어날수록 점포당 세율이 누진되는 세법인 반체인법이다. 19세기 말 반체인법이 처음 시행될 때, 옹호자들은 체인점이 지역 공동체에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는데, 반면에 소상공인들은 이웃의 사정에 밝고 공동체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시민적 덕성의 고양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런 소규모 공동체들은 시민적 덕성이 가장 잘 발현되는 경제체제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반체인법은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다. 반면 반대자들은, 상점의 목적은 최고의 제품을 최저가에 공급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소비자주의적 논증에 기대고 있었다. 이 주장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힘을 얻었고, 반체인법은 1930년대 폐지된 이후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두번째는 기업간의 연합이나 개별 기업의 규모, 독점을 제한하는 반트러스트법이다. 19세기 말 이 법이 처음 생길 때, 이 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시민적 덕성에 의존하는 논증을 펼쳤다. 즉, 큰 기업은 정치를 침범하고 시민들의 연합을 고용-피고용 관계로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나쁘다. 이렇듯 반트러스트법은 가격과 무관한 이슈로 등장했다. 오히려 이 법의 최초의 반대자로 기록된 노동운동가 건턴은, 소비자주의와 유사한 논증으로 반트러스트법을 반대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생산품의 가격이 내려가고, 노동자에게 안정된 고용과 높은 임금을 보장할 것이다. 물론 건턴 또한, 이런 환경이 시민적 덕성의 육성에 더욱 유리할 것이라는 주장도 동시에 내놓았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효율성과 시민적 덕성에 각각 의거한 논증을 통해서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했다. 우선, 대규모 기업집단은 규모의 경제보단 경직성이 훨씬 더 부각된다. 또한 그들의 성공은 효율성보단 독점을 이용한 가격조정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기업집단의 대규모화는 규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노력에 따라 성공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민적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증도 내세웠다. 브랜다이스의 이런 입장은 가격 고정정책에 대한 그의 옹호에서 잘 드러난다. 생산품 가격을 고정시키는 것은, 폭탄할인을 쏟아내는 대형 할인매장으로부터 소규모 상점들을 지켜내서 “경쟁을 보호하는” 정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반면 루스벨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보수적인 법학 교수인 아놀드는, 반트러스트법을 구닥다리라고 매도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 정부에서 반트러스트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까지 유명무실하던 반트러스트법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두가지 모습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샌델이 볼 때 그의 논리는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트러스트법에 반대할 때도, 책임자로서 이 법을 활용할 때도 가격 지표와 효율성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즉, 기업의 규모는 더 이상 반트러스트법의 압박대상이 아닌 것이다. 반면 독점으로 인해 기업이 시장가격 이상으로 판매할 때에는, 지체없이 반트러스트법의 기소대상이 되었다.


  물론 루스벨트 시대 이후 1950, 60년대까지도 시민적 덕성에 의존하는 논증은 간간이 살아남았다. 이런 입장을 기반으로 의회에서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하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업집단이 점점 커져가는 것, 즉 경제력의 집중은, 실제로 특정한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대도시의 탐욕스런 경영자와 투자자들이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집중의 정도와 권력의 크기는 비례하므로, 기업의 크기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1970년 이후로 이런 논증은 담론지형에서 소수로 전락한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후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에서의 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레이건 정부 시기의 보크는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 향상을 위해서는 반트러스트법에 반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전에 이슈가 되었던 가격고정에 대해서도, 시장 참여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면 필연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에 반대했다. 반면 진보주의자인 네이더는, 독점은 필연적으로 비최적분배상태를 야기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트러스트법을 옹호했다. 또한 유통채널의 장난으로 인한 비효율가격의 출현을 막기 위해 가격고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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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현대 자유주의의 공공철학


  샌델은 현대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공동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현대 미국의 공공철학인 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치관에 대해 중립적이어야한다는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이미지가 이런 상실감의 원인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고 미국의 역사 또한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확대해온 역사로서 해석된다.


  그러나 샌델이 보기에 미국의 역사에서 공존했던 두 가지 유형의 공공철학이 있다.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다. 공화주의는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과 인간상이 정해져있으며, 이 지향점을 향해 공동체가 움직이고 구성원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을 바람직한 공동체상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공화주의 공공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치(self-government)”다. 이런 견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으로부터 유래했으며, 미국 건국 초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샌델이 자신의 이론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견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제시하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은 덕(도덕적 탁월성, arete, virtue)를 갖춘 인간이다. 여기에서 덕은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행위들과 그 너머에 있는 행위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도덕적으로 좋은” 행위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성향 또는 성격을 뜻한다. 덕 개념의 도덕철학적 함축은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 판단의 다면성, 그리고 평가의 다면성이다.


  반대로 칸트, 밀,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적 전통은 개인이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는 권리를 중심으로 정치행위를 사고한다. 권리는 인간이 가진 자유, 즉 선택할 능력으로부터 생겨난다. 국가 또는 공동체는 개인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개인의 선택할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되며, 가치관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런 견해는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 미국의 이해를 대변한다.


  칸트주의적 방식은 칸트의 논증에 대한 롤즈의 해석에서 비롯한다. 칸트의 도덕철학 프로젝트의 핵심은 세계의 구체적 사실로부터 비롯한 모든 “경향성”을 제거하고 이성을 통해서 파악가능한 “법칙으로서의 도덕법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도덕형이상학 기초』에서 그는 이 작업을 물리학에 비유한다. 즉, 다양한 결과값을 산출해낸 모든 개별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내는 것이 자연철학의 방식이듯, 구체적 개인이 보여주는 모든 도덕적 판단과 행위로부터 도덕성의 일반원칙을 찾아내는 것이 도덕철학의 목표라는 것이다. 롤즈는 이 해석을 이어받아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즉, 구체성이 모두 배제된 개인들이 도출해낼 원칙은 결국 각자의 가능성 즉 권리의 평등한 할당에 베팅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 추정했다.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주장하는 국가의 중립성을 정당화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상대주의적 방식, 공리주의적 방식, 칸트주의적 방식. 상대주의적 방식은 어떤 것이 “실제로” 더 좋은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국가가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적 방식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을 때 가장 행복하며, 그러므로 그 때에 “행복의 총합”도 가장 크다고 주장한다. 칸트주의적 방식은 좋음에 대한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 논증, 즉 인간의 본래적 능력에 의해 발현되는 몇몇 권리들은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받아서는 안된다고 논증한다. 현대적 방식의 자유주의는 이 칸트주의적 논증에 많이 의지한다. 칸트주의적 정당화는 자유와 평등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매력이 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능력으로부터 오는 자유와, 공동체에게 기본적인 존중을 요구하는 근거로서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주의적 방식은 우리가 삶에서 실제로 수행하는 의무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어려움에 부딪힌다. 칸트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수행하기로 약속한 것만 의무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의무라는 이름 아래 수행하는 것 대부분은 자발적 동의 이상의 어떤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의무들이 우리의 도덕적 삶의 상당한 부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구체적” 인간으로서 가진 다양한 정체성에 따른 의무를 지는데, 우리가 도덕적 갈등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이런 의무들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특정한 정책을 – 주로 평등주의적인 – 시행하려 할 때 내적인 모순에 부딪히는데, 권리를 보장한다는 이름 아래 시행하는 많은 정책들이 실제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지정해주는 특정한 가치관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칸트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입장을 약간 변경한다. 이 변경된 입장을 최소주의적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다원주의적인 현실 속에서는 특정한 도덕적-종교적 입장을 공공생활에서 표명해서는 안된다. 어떤 입장도 상당한 수의 동의를 얻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공생활을 결정할 정책, 즉 정의나 권리에 관해서 논의할 때에는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유보하는 것만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존을 도모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런 최소주의적 자유주의조차도,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에서 가장 우선하는 목표여야 하는지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어떤 실천적 관심은 공동체의 존속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도 하며,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때로 어떤 중요한 도덕적 갈등들은 괄호를 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 도덕적 갈등은 그 문제를 둘러싼 여러 가치관들 중 어떤 것이 실제로 참인지 논쟁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에서 가치관들에 괄호를 친다는 것은 의도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특정한 가치관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만약 이렇게 괄호를 친 상황에서 국가의 중립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인 타협에 이를 경우,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신념에 큰 타격을 입는다. 그것이 국가로부터 지지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가치관에 반하는 특정한 정책들이 입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주의적이든 최소주의적이든 자유주의는 좋은 “공공철학”이 아니라는 것이 샌델의 결론이다. 그의 입장에서 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것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철회이고, 자신의 가치관을 퍼뜨리고 동료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접으라는 지시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귀결은 “도덕적 진공상태”다. 이 상태가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이 공화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가장 좋은 근거가 되는, 편협한 태도와 불관용의 정책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주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덕목을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실제로 그 이념이 의도했던 바, 즉 특정한 가치관에 구애받지 않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2장: 권리와 중립적 국가


  샌델에 따르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공공철학은 두 가지 점에서 대조된다. 하나는 옳음과 좋음의 우선관계다. 자유주의는 옳음을 우선시하는 반면, 공화주의는 좋음을 우선시한다. 공화주의에서의 좋음은 인격의 특정한 형태를 뜻하기 때문에, 공화주의에서 공동체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또는 구성원 전부)이 이런 특정한 인격을 갖추게끔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목표와 개인의 가치관 사이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으며, 이것 때문에 개인들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공공생활에 참여한다.


  다른 하나는 자유(liberty/freedom)와 자치(self-government)의 관계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선택의 능력에서 비롯된 불가침의 기본권을 의미하며, 이것이 개인의 삶의 토대를 이룬다. 반면 공화주의에서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공동체의 여러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도 공동체의 모습에 영향을 주는 형태의 “자치”가 개인의 삶의 토대를 이룬다. 자치를 통해 개인은 공동체의 가치관을 습득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을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공동체에 관철시키는, 공동체와의 상보적 관계를 구축한다.


  이 두 공공철학에는 뚜렷한 강점과 약점이 있다. 공화주의는 고대인들의 견해를 대변하고 공적 활동에 대한 참여를 촉진시키지만, 다수의 압제에 취약하다.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의 이런 약점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으며, 미국의 역사에서 헌법해석의 경향에 점점 더 강한 영향을 끼쳐왔다. 자유주의에서의 기본권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개인이 다수의 경향에 반대할 수 있다는 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 미국에서의 “자유” 개념은 자기지배의 범위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었지, 기본권을 의미하진 않았다는 것에서, 우리는 건국 초기의 공화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샌델은 현재 미국을 구성하는 “절차적 공화정”의 구성 요소를 세 가지로 분석한다. 개인의 우선권, 국가의 중립성, 선택의 능력이 있는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시민. 이 중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 개념과 함께 가장 먼저 역사에 등장한다. 즉, 법 자체로부터 그 법이 지키고자 의도하는 어떤 것들을 분리해내고, 그것들을 수호하는 상위법으로서의 “헌법”이라는 개념을 꺼내면서 그 대상이 된 것이 개인의 우선권이다. 따라서 헌법은 개인의 우선권을 수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 특히 정부의 구조를 선언하고, 한 공동체 안에서 최고의 원칙으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헌법과 별개로 만들어진 권리장전이 헌법적 지위를 가지는지, 즉 자연권으로서의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지에 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었다. 특히 이것은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갈등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논쟁의 초기에는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에서의 정부의 구조에 의해 보장될 수 있는지 여부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즉, 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연방을 약화시킨다면 개인의 권리는 자연스럽게 보장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매디슨이 권리장전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개인의 우선권이 헌법적 지위를 가지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이러한 해석이 실제 판결로 반영되는 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후 남북전쟁을 지나 로크너 시대에 이르면, 개인의 우선권에서 연장된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가치관이 헌법재판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특히 산업의 독점권을 허용하는 주법들, 노동과 관계된 여러 보호장치를 규정한 주법들에 대한 헌법재판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요소가 갈등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것은 주에 대한 연방의 우위를 표명한 것임과 동시에, 연방헌법과 연방헌법재판관들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의 중립성을 동원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판단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홈즈 등의 판사에 의해서 국가의 중립성이 더욱 부각된다. 하지만 로크너 시대와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유지상주의에 부합했던 로크너 시대의 자유 개념과 대비되어, 1900년대 이후의 재판관들이 인용하는 자유 개념은 매우 폭넓게 쓰인 것이다. 홈즈는 미국의 헌법이 특정한 철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단지 헌법 정신이 보장하는 민주적 제도 자체에 대한 사법적 존중을 표현한다고 이해했다. 로크너 시대의 자유지상주의적 자유 개념 이해에서 시작한 이러한 경향은, 역설적으로 모든 가치관에 대한 괄호치기로 그 이해의 방식이 변형됨으로써 개인의 우선성, 국가의 중립성, 그리고 선택의 능력을 가진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이해가 결합된 절차적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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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까지 샌델은 연방대법원의 판례와 판결문을 통해서,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헌법의 해석에 영향을 끼쳐온 역사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유주의 공공철학은 법해석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담론의 지형에도 똑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정부의 각종 정책, 특히 경제정책에 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사항은 번영과 공정성이다. 즉, 그 정책이 얼마나 성장과 분배의 적절성에 기여하는지에 따라 도입 여부가 판가름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우리의 정치적 담론으로 자리잡은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미국의 건국 초기의 정치경제학 담론에서 경제정책의 목적은 번영이나 공정성이 아닌, 시민적 덕성의 함양이었다. 특정한 산업의 육성이나 새로운 정책의 도입이 공공선, 공익, 명예, 권력에 대한 열망 등을 시민들의 마음 속에 북돋울 수 있는지 여부가 정책 도입의 찬성 또는 반대의 핵심적인 논거였다. 건국 이전에 제퍼슨은 시민적 덕성의 함양에 반대가 된다는 이유로 제조업 육성에 반대했으며, 몇몇 논자들은 무역항의 개수를 제한하는 항구법이 대형 상업도시를 키움으로써 사람들을 타락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같은 논의선상에서, 미국의 독립 또한 영국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끔 미국 시민들의 도덕적 타락을 조장한다는 이유에서 쟁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 이후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시민적 덕은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즉, 입안자들이 헌법을 기본법으로서 시민들의 덕성 함양에 기여해야하는 장치로 간주한 것이다. 한 편으로 시민적 덕성을 교육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입할 것을 명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헌법을 통해서 시민적 덕에 의한 통치를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해밀턴, 매디슨 등). 특히 매디슨은 시민적 덕을 통치의 주요원리로 작동시키기 위해 헌법에 정부 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의 논리를 삽입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것을 이익집단 다원주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시민적 덕의 함양이라는 매디슨의 명확한 목적을 고려했을 때, 이런 해석은 틀렸다. 또한 민주정과 공화정의 대립이라는 당시의 정치이념적 지형도를 고려한다면, 시민적 덕을 중심으로 정치조직을 구성하려는 것이 공화주의자들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해밀턴이 제안한 중앙집중적 재정정책에 관한 논란도 시민적 덕성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해밀턴은 각 주의 부채와 연방정부의 부채를 통합하고 이 통합된 부채를 관리할 기관을 만든 뒤에 이 부채를 시민들에게 판매하고 수익을 보장함으로써, 이익을 매개로 한 국가와 주, 시민의 통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반대에 부딪힌다. 이렇게 이익을 매개로 맺어질 경우, 국가가 이익집단화된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큰 이익이 걸려있는 사람들 또는 많은 채권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편향된 결정이 이뤄질 것이다. 또한 이런 편향된 결정은 불공정한 자원분배를 낳고,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을 낳을 것이라고 반대자들은 주장했다.


  국가의 주요산업에 대한 논쟁에서도 시민적 덕성이 주요한 쟁점으로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해밀턴은 상공업 중심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로 제퍼슨과 매디슨은 농업이야말로 미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산업이라고 믿었다. 해밀턴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상공업이 진흥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수입의 증가와 이에 맞물린 사치풍조가 사람들의 풍기를 문란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제퍼슨과 매디슨의 주장은, 상업사회는 사람들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하게 땀흘려 일한 댓가가 돌아오는” 농업이야말로 시민적 덕의 함양에 어울리는 사업이다. 따라서 해밀턴은 서부와 남부로 뻗어나가는 영토확장이 무의미하며 낭비적인 사업이라고 간주한 반면, 매디슨과 제퍼슨의 옹호자들은 이런 개척이 시민들의 도덕적 고양을 도와주는 사업이라고 주장했다.


  제조업에 관한 찬반논쟁도 마찬가지로 시민적 덕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즉, 어떤 사람은 제조업이 시민의 육성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은 제조업이 시민들의 인격적 상태를 나쁘게 만들것이라고 생각했다. 옹호자들은 제조업이 번성할수록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 대한 무역 분야에서의 예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역 분야의 예속은 수입품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사치 풍조를 조장하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계급간 격차를 심화시킴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해치기 때문에, 예속을 벗어나는 것은 공동체의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각자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써 농업 생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통치를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들의 이런 입장은, 제조업의 육성을 옹호하더라도 고도화된 분업이 이뤄지는 공장제 생산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반면 제조업의 육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조업의 육성은 필연적으로 분업과 공장제 생산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장제 생산은 생산품에 대한 예속, 임금에 대한 예속, 생산수단을 소유한 고용주(자본가)에 대한 예속을 낳는다. 이런 예속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제대로 된 시간과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은 사치와 낭비에 따른 도덕적 타락은, 생산이 충분히 고도화된다면 국내제조물품들만으로도 충분히 촉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웰 공장은 이런 제조업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 어떤 발전을 겪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로웰 공장은 도시가 아닌 농촌의 주변에 지어졌고, 주변의 농민들과 순환근무를 하는 체계를 갖췄으며, 강한 규율과 노동자 교육을 통해 근검절약정신을 전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시간이 가면서 붕괴하고 말았다. 우선,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관계가 문자 그대로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관계로 변화하고 말았다. 또한 강한 규율과 교육에 대한 반발로 파업이 빈번했다. 주변의 농민들과 순환근무를 함으로써 공장근무를 하면서도 시민적 덕을 쌓을 기회를 준다는 계획은, 이민자들을 점점 더 상시채용함으로써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공장은 이주했고, 로웰과 같은 공장들이 한 곳에 모여들면서 시민적 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대도시가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시간이 흘러 잭슨 대통령의 시기가 되었을 때, 산업이 제조업과 상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민적 덕성에 관한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 논의는 민주당과 잭슨의 옹호자들 대 휘그당의 잭슨 반대파의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들의 논의는 표면적으로 번영과 공정성을 축으로 삼는 현대의 경제정책논쟁과 유사해보이지만, 정책패키지는 정반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번영을 목표로 하는 휘그당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했고, 반대로 분배의 공정성을 옹호하는 민주당은 정부의 불간섭을 주장했다.


  민주당은 엘리트로 구성된 정부에는 내재적인 불공정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즉, 정부를 구성하는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정부의 정책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개입은 분배정의의 붕괴를 의미한다. 따라서 분배정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을 탈집중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는 시민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당시 민주당은 중앙은행을 설립한다는 정책에 반대했는데,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이러한 기관은 반드시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또한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결정권에 접근하고 은행권발행의 조작을 통해 “땀흘리지 않고 돈을 버는” 문화가 조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이유로 거론되었다.


  반대로 휘그당의 인사들은 탈집중화된 경제가 행정부의 상대적 비대화를 부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적은 돈은 제대로 분배해봐야 가치가 없다는 고전적인 논증을 통해 성장을 옹호했으며, 이런 성장을 위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경제성장에는 반드시 상업화에 따르는 타락만이 있는 것이 아닌데, 더 넓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통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히려 국가와 시민간의 일체감 증진, 즉 국민통합의 발판이 된다. 물론 상업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강력한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휘그당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편적 덕성함양교육을 내놓았다. 즉, 국가적인 차원의 공동체 의식 고양을 통해 상업사회에서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상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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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함께 하는 정치경제학독서소모임 발제>


한국어판 서문 – 최장집


  법의 지배라는 개념 안에는 여러 생각들이 겹쳐져있다. 우선 법의 지배의 이상은 모든 인민이 통치자이자 동시에 피통치자인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현실에서 법의 지배는 반드시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분리된 상태를 고려해야만 제대로 된 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 또 법의 지배를 둘러싼 세 가지 생각이 경합하고 있다. 도덕적 명령으로서의 법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 법에 명시된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복종,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법에 대한 준수. 이 세 가지 중 현실주의적 관점인 뒤의 두 가지 생각을 취하면, 법의 지배와 법에 의한 지배는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즉, 정도의 문제로 바뀐다. 이 정도는 수평적 책임성(정부 내부에서의 견제와 균형)과 수직적 책임성(선출된 대표로서 유권자의 요구사항을 이행해야 할 의무)이 달성된 정도에 따라 평가해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법의 지배라는 개념에 비추어봤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정과 집행의 완전한 분리의 상태다. 한국의 헌법과 법률은 위에서 언급한 수평적-수직적 책임성이나 현실의 갈등의 제도화를 거치지 않은 채 수입되었다. 따라서 비현실적이었으며, 그래서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이런 상황 가운데 행정부가 법의 해석과 집행의 과정에서 임의성을 개입시켰다. 또한 사법부의 경우 세 가지 이유 때문에 행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했다. 첫째,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는 반공주의라는 정치적 압력에 시달렸다. 둘째, 민주화 이후에는 경제 엘리트 집단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다. 삼성의 전환사채발행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과 비정규직법이 이 압력을 잘 보여준다.


  통치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법에 종속시키는 현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선출된 자의 책임(매디슨), 비합리적 행위로부터의 자발적인 거리두기(엘스터),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합리적 선택(마키아벨리). 반면 한국은 법의 지배에 필수적인 요소인 사법부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성취가 지연되었다. 긴 역사에 걸쳐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행정부 엘리트 계급과 강한 일체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내부적인 인사고과 평가라는 압력 또한 사법부의 독립을 저해했다. 만약 법의 지배의 정도를 책임성의 여부로 평가할 수 있다면, 사법부 또한 수평적-수직적 책임성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회적 갈등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노출시켜야 한다. 이런 책임성을 지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국가기관은 정당이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힘의 불균형을 조정-해소하는 역할을 맡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영문판 서문 – 쉐보르스키


  법의 지배라는 개념에 대한 두 가지 이해방식이 있다. 하나는 도덕규범적 이해다. 이것은 풀러의 정식, 즉 법이 보편성/공표/비소급/이해가능/체계 내 무모순/실행가능/지속적인 안정성/규범 내에서의 축차적 질서라는 조건을 만족한다면 그것이 도덕적 명령으로서의 힘을 가지는 법이 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입법의 과정이 이 정식을 만족시키기만 한다면 법의 존재 자체가 복종의 의무를 생성시킨다. 다른 하나는 현실주의적 이해다. 법의 지배는 사회의 각 부분에서 권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할 때 발생하는 충돌이 만들어내는 힘의 균형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제도적 균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만약 권력을 소수만 행사한다면, 우리는 흔히 그런 상태를 법에 의한 지배라고 부른다. 반면 다수가 행사한다면 균형상태에 더 가까운 법의 지배라고 부를만하다. 즉, 법에 의한 지배와 법의 지배는 완전히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다.


  하지만 법의 지배에 대한 이런 현실주의적 설명은 사회적 차원의 제약과 법이라는 특수한 장치를 구별하지 않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적 차원의 제약은 법으로서 설정한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 일정한 절차를 부과하기 위해서 법을 만든다. 적용가능한 절차는 다양하고, 우리는 그 중에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반정부적 집합행동을 일으킬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최고의 법으로서 헌법을 제정한다. 마지막으로, 법의 지배를 확립해 정부와 피통치자 다수에게 예측가능성과 기대를 부여하는 제도화된 권력을 창출해낸다. 제도화된 권력의 유인 효과는 캘버트의 감독관 실험에서 잘 드러난다. 법은 또한 구성적 제도라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구성적 제도로서의 법은 사람들에게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고, 그 권한에 기반해서 법에 따를 유인을 만들어낸다. 이 유인이 사람들의 행위에 일관성, 즉 예측가능성을 부여하고, 임의성을 배제한다.


  구성적 제도로서의 법은 곧 제도적 균형상태를 달성한다. 사람들은 법이 제공하는 권한과 유인에 의해 이익과 권력을 취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각 개인이나 집단에게 이익이 되고 사람들이 그 제도에 따를 때, 제도적 균형상태가 달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의 강건함이 소득 즉 법을 준수할 때 얻어지는 이익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보았다.


  가르가레야의 논문은 수직적 책임성에 주목해 법의 지배를 설명하려 한다. 다수의 인민(유권자)으로부터 주어지는 압박은, 다시 권력을 행사할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신중해져야 한다는 신호를 수권자에게 지속적으로 보낸다. 그러므로 수평적 책임성의 중요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웨인개스트는 반정부적 집합행동과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법의 지배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실각은 수권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 트로페는 정부 내의 상호견제를 통해 법이 지배에 접근한다. 갈등처리 메커니즘을 잘 구상했을 때 사람들은 법에 복종한다. 이것은 서로의 권한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이념을 다시 표현한 것이다. 정부 내 힘의 균형만으로도 제도의 자율성과 사법부 독립, 법의 지배가 확립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몇몇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과 달리, 민주주의(즉 다수지배)와 법의 지배는 양립가능한 개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둘의 양립가능성은 이익집단 사이의 정치의 문제로 환원된다. 폰타나는 16세기 프랑스를 언급한다. 이 때 사법부는 독립적이었지만 판결은 편파적이었다. 정치가 개입하지 않은 결과였다. 페레존과 파스키노는 정부의 일부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권한을 제한하는 상태에 돌입했을 때 균형이 맞춰지며,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가운데 하나가 지나치게 비대해지지 않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마라발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사례를 든다. 입법부가 입법과정을 비공개처리하자, 정부 밖의 시민단체와 기업이 소송을 제기해 처리방식을 바꾸었다. 입법부가 징세와 관련된 법안을 처리하자 사법부가 개입해 무효화시켰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선거무효소송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법을 통해 정치적 적대세력을 공격하는 수단이었다.



법의 지배의 계보 – 홈즈


  왜 합리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지도자들은 법의 지배를 받아들일까? 마키아벨리의 설명을 참고해보자. 그는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리고 통치에 유용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법의 지배를 받아들인다고 쓴다. 그렇다면 왜 역사상 다른 정부는 그러지 않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리더가 비합리적이어서, 근시안적이어서, 감정적이어서 그렇다(토크빌). 반면 마키아벨리의 눈에 이런 상황은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권자에게 손해이며 수권자가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법의 지배가 아닌 다른 지배상태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분석은 정부의 행태의 예측가능성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법의 지배에 관해 논하려면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정부의 대우는 개인과 집단에 따라 차이가 난다. 힘이 센 집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통치에 유리하므로, 정부는 힘이 센 집단에게 더 잘해주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권력의 사회적 지형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중국가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것을 비대칭적 다원주의(루소)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익집단의 숫자와 범위를 늘리면 된다. 그러면 정부는 그 모든 이익집단의 요구에 반응할 것이고, 보장되는 권리의 범위도 같이 늘어날 것이다.


  - 자기 제한의 계보 수권자가 자기 절제를 하는 이유에 관한 설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제가 도덕적 명령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자제하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도덕적 명령이라는 설명은 수권자가 아닌 사회적 약자들이 보장받는 권리가 역사적으로 유동적이라는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 도덕적 명령이라면 이 권리의 범위가 도덕적 명령에 따라 확정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목적으로서의 장기적 이익의 추구라는 동기는 단기적 손실이나 평판과 같은 요소들을 한데 설명할 수 있다. 자기 제한은 권력의 분립, 즉 집중된 여러 권한을 쪼개 다른 사람 또는 부서에게 이양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 사법부 독립의 계보 수권자가 사법부를 독립시키는 이유는 부인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집중된 권력의 수권자의 시간낭비를 초래한다. 따라서 업무의 분장은 수권자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준다. 특히 일상적이고 성가시고 귀찮고 하찮은 것으로 간주되는 일에 대한 결정권부터 떼어준다. 그리고는 비난을 받을만한 결정에 대한 책임을 사법부에게 돌리고, 수권자 본인에 대한 원한을 낮춘다. 해밀턴은 이 논리를 배심원제의 장점에 관해 설명하는 데 이용했다. 또한 정의로운 처분은 호감은 살 수 없으며(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반감만 살 수 있을(어쨌든 내 사람에게 해를 입혔기 때문) 뿐이기 때문에, 수권자는 정의에 관한 일관된 처분의 권한을 사법부에 넘기는 것을 선호한다.


  - 신뢰의 계보 우리는 사적인 개인 사이에서 복수에 드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다. 불을 지르는 데 돈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불벼락맞을 일을 해서는 안된다. 사적인 개인 사이의 이런 관계를 집단 간의 관계로 확장시켜보자.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완전무결하게 방어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 따라서 수권자 집단은 인민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서 반감과 반란의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나아가서 협력의 철회를 방지하는 것도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필수적이다. 자기 제한은 이런 협력을 지속적으로 얻기 위한 수단이다. 물론 이런 자기제한은 하층계급의 조직된 행동의 직접적 결과일 수도 있지만, 공중보건에 투자하는 부자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반드시 그런 행동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


  현재 유지되는 특정한 체제로부터 이익을 취하고 있는 집단은, 이 체제로부터 과거에 이익을 취하지 못했던 집단까지 모두 포섭해서 다같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강고한 이해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마키아벨리는 이것을 “파르티잔 친구들”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전략은 현실 속에서 인민을 군인화하고, 대신 군인이 될(된) 인민들에게 참정권과 재산권, 소송권 등을 부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체제가 강건하게 유지될수록 수권자 집단은 지속적 이익을 얻는다. 예측불가능한 지배자는 남도 파괴하려들면서 동시에 자기도 파괴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법의 지배 아래에서 일관성을 보이는 수권자는 최소한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역사적 조건이나 제약에 의해서, “합리적”인 수권자 집단이 있는 공동체가 반드시 “번영”하는 것은 아니다.


  - 갈등에 대한 법적 관리 사람들은 제멋대로 군다. 그래서 상류계급의 사람은 하류계급의 사람을 놀리고, 후자는 전자를 때린다. 이런 행태가 만연한 공동체는 스스로 붕괴한다. 특히 다른 공동체와의 갈등 – 전쟁에서 패배한다. 그렇다면 이런 갈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이 또한 법의 지배를 통해 관리한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민사적 갈등이었다면, 여기에서는 공정한(것처럼 보이는) 형사재판의 출현이 중요하다. 형사재판은 하층계급에게는 사회적 불만을 해소시키는 장이며, 상층계급에게는 하층계급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절차를 규율로서 강제하는 효과를 지닌다.


  - 정의의 수축과 확장 위의 논의를 일관되게 적용하면, 협의 집단의 확대 즉 정의의 확립은 협력의 대상이 늘어나야 할 필요를 수권자 집단이 느낄 때, 즉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압력이나 변화가 있을 때 일어난다. 축소는 그럴 필요가 줄어들었다거나 필요없다고 느낄 때 일어난다. 법의 불공정한 집행은 중요한 요소이긴 하나, 정의의 확장이나 축소라는 현상을 촉발시키는 요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불공평은 대개 수권자 집단에게 유리한 불공평이고 그 집단은 불공평을 변화시킬 유인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 자해의 달콤함 무력에 의한 강제는 쉬운 이탈을 낳는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권을 위해서 합리적인 수권자 집단은 무력 대신 인민에 대한 법의 지배를 수용하며, 자신도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만들어진 법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은 타인 지배인 동시에 자기 지배의 방식이다. 자기 지배는 루소의 사회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마키아벨리는 “내 결정에 의한 상처는 덜 아프다”고 적고 있으며, 해밀턴은 “사람들은 자기 없이 결정된 사안에는 일단 반대한다”는 통찰을 남겨놓았다. 토크빌은 준법의 동기로서 자기지배를 강조한다. 법에 따르면 작으나마 권한이 주어지고, 그 권한에 따른 직책도 주어지며, 그 권한을 통해 체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가능성도 슬며시 비치기 때문이다.


  - 권리들의 배열 하층 계급에겐 최초의 협력 이후에 주어진 권리 자체가 스스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상층 계급은 재산보호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장기적 이익을 거머쥐기 위해서 절제한다. 이런 행동은 맨슈어 올슨이 떠돌이 도적과 붙박이 도적을 설명하는 곳에서, 세수증대는 수권자집단에게도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자기절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연방주의자 문서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생산력을 비교하면서 자유상업번영론을 찬양하는 흄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채택하고 있는 전형적인 경제자유와 번영에 관한 논증, 즉 특수이익입법이 사회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과연 특수이익입법은 법의 지배를 해치는가, 아니면 오히려 돕는가? 우리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자유화 이후 러시아는 보편입법을 열심히 실시했음에도 상층계급이 행정을 통해 이권을 장악해서 보편입법의 취지가 무색해졌다. 이것은 보편/특수이익입법이 법의 지배와 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노인들 때문에 함부로 복지축소를 감행하지 못하는 일부 자유주의 국가들이나, 투표권 행사를 잘 하지 않는 여성에게 복지부담을 덮어씌우며 복지축소를 감행하는 일부 구 공산권 국가들의 행태도 참고할만하다. 이들은 모두 특수이익입법과 보편이익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즉, 특수이익이 입법으로 관철되는 경험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공유되는 순간, 다양한 이익집단이 조직되며 법의 지배로 점차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 “법 앞의 평등”의 계보 루소는 이상적 관점에서, 특수이익입법의 법의 정신에 완전히 위배되는 부패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인간의 합리적 특성 때문에 특수이익입법은 필연적이다. 법은 나만 빼고 다 지키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를 막는 최소한의 장치는 권력분립인데, 때로는 이조차 잘 작동하지 않기도 한다. 인종 간에 서로 다른 처벌 강도 같은 것들이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익 집단의 수를 늘려 특수이익입법에 따르는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법에 의한 지배와 법의 지배가 집단의 수에 의존적인 연속된 개념이라는 것, 그리고 모두가 법에 의지해 권력을 행사하게끔 하는 것이 법의 지배다. 너도 나도 법에 호소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경험가능한 정의의 상태rough justice다. 이것을 부패의 분산, 부패의 일상화라고 부를 수 있겠다.


  또 다른 필요조건도 있다. 특수이익입법을 원활하게 해줄 엘리트들의 존재와 엘리트들 사이의 경쟁이다. 다수 하층 계급을 돕는 엘리트에게 그의 행위는 도덕적 즐거움과 실제적 이익 모두를 안겨주는 유인이 있는 행위다. 하지만 엘리트들은 이런 유인이나 별다른 이익이 없는 한 이중국가체제를 통해 자신들과 나머지를 분리하기도 한다.


  - 잠자고 있는 권력을 깨우는 규칙 법의 지배는 지배자가 공석인 기간, 즉 권력의 공백을 메워준다. 군주정에서는 수권자의 죽음, 민주정에서는 교체의 필요성에 의해 헌법적 수준에서 “권력을 쟁취 또는 승계하는 절차”가 가장 먼저 설정된다. 이 절차는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특정한 인간 또는 집단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규칙이다.


  이런 규칙이 설정되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가. 마키아벨리-해밀턴의 아이디어는 “공화국들의 공화국”이다. 비상상황에 대비한 재량권은 불가피하게 독재를 낳는다. 독재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사람들은 잘 모르고, 대항할만한 조직이 없고, 독재자 쪽이 훨씬 세기 때문에 그 진행을 막기가 쉽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도시공국의 연맹체를, 해밀턴은 주들의 연합체를 구상했다. 최상층부가 전제적으로 변하려 할 때 개별 공국-주의 지도자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한다. 이 가능성에 의해서 연맹의 수평적-수직적 권력분립이 유지된다. 이 분립을 명문화하면 바로 헌법이 된다.


  - 부자들의 아편인 의존부인 엘리트의 자기파괴적 오만, 즉 내가 잘나서 잘나게 되었는데 다른 이들이 왜 나를 방해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오만에 의한 반감과 반란의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선출제가 도입되었다. 선출제를 통해 다수 대중과 엘리트 사이의 연결고리가 생성되고, 선출을 통해 공동체에 유익한 아이디어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된다. 반감을 낮추기 위한 노력은 시민권 패키지의 범위와 대상의 확대로 연결된다. 동시에 이런 권리가 부여된 것 자체로 대단한 교육의 효과를 낳는다.


  -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가 어쨌든 엘리트들은 사람이기에 근시안적이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특히 엘리트 집단 안에서 권력의 이양에 대한 견해가 자연스럽게 발생하기를 기대하긴 쉽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외생변수를 언급하나, 외부 엘리트와 내부 엘리트의 연합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권력, 규칙, 그리고 준법 – 산체스-쿠엔카


  피노체트의 협박은 법의 지배가 권력관계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통치행위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의 지배는 통치행위가 법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법을 따르리라는 기대를 품고 법을 신뢰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언제든지 취약해질 수 있다. 법의 지배를 달성하려면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기에 아무도 파괴하려 하지 않는 체제를 고안해내야 한다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과제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형식적 안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 지속성이다. 이 두 가지는 준법의 문제와 직접 연결되어잇다. 준법의 문제를 현실의 역학관계롤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이것은 제도화된 권력과 제도 밖의 권력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제도의 독리성과 자율성을 드러낼 다른 설명방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설의 구성적 규칙과 규제적 규칙의 구분법을 차용할 것이다. 구성적 규칙이란 규칙 자체가 새로운 행동양식과 권한을 만들어내는 규칙을 뜻한다. 구성적 규칙으로서의 제도는 규칙을 통해 제도화된 권력을 만들어내며,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을 가능한한 배제하거나 최소한 통제하려 한다. 이런 상태를 법의 지배라고 부를 수 있다.


  법의 지배에서 준법은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 첫째, 사람들은 왜 법을 따르는가 하는 문제다. 제도와 제도 밖의 수단이 동시에 주어질 때 사람들은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것은 법이 완전히 구성적 규칙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둘째, 제도화된 권력과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의 분포의 불일치는 준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권력의 불일치 속에서 제도가 제공해주는 이익이 더 클 때 준법이 실현된다.


  - 법의 지배의 이상 사람들이 모두 법을 따르고, 법이 사람들의 최소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상황을 우리는 법의 지배라고 부를 수 있다. 풀러 정식 중 8번은 준법을 조건으로 달고 있다. 즉, 앞의 7개 조건이 잘 지켜진다고 하더라도 준법은 실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함축하는 것이다. 만약 행정부가 임의성을 띈다면, 풀러 정식과 관련된 준법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입법부가 임의적이라면, 이것은 법의 지배와 연관된다. 풀러 정식에 부합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해서 준법의 소극적/적극적 형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시 법에 대한 복종/법에 대한 종속, 정적인 준법/동적인 준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모든 구별에서 후자는 통치자의 입법권에 제한이 가해지는 형태를 의미한다.


  - 정치에 관한 구성적 규칙 존재하지 않았던 권한을 부여하는 규칙(하트)로서의 법이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법은 구성적 측면과 규제적 측면을 지닌다. 그 중에서도 정치에 관한 구성적 규칙으로서의 법엔 고유성이 있다.


  다른 종류의 구성적 규칙과 법을 비교해보자. 첫째 사례는 게임이다. 게임 규칙은 외부세계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있다. 또 내가 참여하고자 하는 순간 모든 행위가 규칙에 의존적인 것이 된다. 게임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온전히 내 선택이다. 둘째 사례는 언어다. 모든 발화는 규칙인 문법에 의존적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이탈을 뜻한다. 구성적 규칙으로서의 법과 비교해보자. 법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이탈(또는 전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공동체를 떠나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기에, 이 법을 거부한 뒤의 대안이 사실상 없다. 이 두 가지는 차이점이다. 반면 규칙에 의존적이라는 것, 그리고 부정행위는 규칙과 무관한 어떤 행위로 간주된다는 점은 공통점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적 규칙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규칙 자체의 파괴나 변화가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완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진 않다고 간주해야 한다.


  또 제도에 근거한 사실과 제도에 근거하지 않은 사실이라는 구분법으로 이 둘의 차이를 살펴볼 수도 있다. 게임과 언어에서는 이 두 종류의 사실이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정치적 규칙에서는 그렇지 않다. 제도화된 권력에 접근하는 제도화되지 않은 방법이 현실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을 제도화하는 방법도 열려있다. 예를 들어, 타국을 공격해야 전쟁인가 의회에서 선전포고를 해야 전쟁인가? 이런 가능성은 법이 그 독립성과 자율성을 상대적으로만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로 이 상대적 독립성으로부터 준법의 문제가 도출된다. 왜 다른 방식이 아닌 제도에 기반한 방식을 통해 제도화된 권력을 취하는가? 에콰도르의 3인 대통령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선출된 대통령 부카람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큰 반대에 부딪혔다. 의회는 정신병을 근거로 부카람의 당선이 무효이며, 의장 알라르콘을 후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부카람은 이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다. 부통령 아르테아가는 대통령 공석 시 부통령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는 헌법조항을 근거로 자신이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비정치적 권력으로서의 군이 개입해서 상황을 정리한 뒤에야 이 사태는 수습되었다. 군은 법에 의해 제한받는 제도화된 권력이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 무력으로서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이기도 하다. 즉, 제도화된 권력이 인민의 의지나 군대 등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도 있으며, 이것은 제도화된 권력의 위기상황이다. 요약하자면, 법의 지배는 정치행위가 구성적 규칙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내포한다. 하지만 구성적 규칙의 유지와 준법의 여부는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이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서도 그 권력은 정치 행위에서는 배제되어 있다. 이런 긴장으로부터 파생된 자율성이 두 가지 권력의 형태 사이의 불일치를 만들어낸다.


  - 정치에 관한 구성적 규칙의 상대적 자율성 법의 지배에 대한 고전적인 사회주의적 관념은, 법의 지배가 사회적 권력관계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것이었다. 영구헌법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준법은 그 법이 실제와 유사할 때 실천되며(라살레), 모든 권리는 상부구조이고 권력이 그 원천이라는 것이다(코엔). 그러나 이런 권리와 권력의 대응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법적 권리의 사례가 분명히 존재하며, 이를 통해 상대적 자율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대적 자율성은 어떻게 확립되며 유지되는가? 즉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고 지키는가? 캘버트의 감독관 모델을 참조해보면, 협력여부를 알려주는 새로운 제도에 의해서 균형이 창출된다는 것이 확인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모델에서는, 모든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이 양도되면서 그 행사가 불법화되는 과정에 의해 균형이 창출된다. 이렇게 구성적 규칙이 구성된 이후에 사람들은 이것을 “지킨다.” 지키는 이유에는 준법이 이익이 된다는 하나의 이유, 또는 제도변경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제도 자체가 관성을 띄게 된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구성적 규칙은 제도에 근거한 이익을 발생시킨다. 제도에 근거한 이익이 제도에 근거하지 않은 이익보다 크면 사람들은 준법을 실천한다. 이 두 유형의 이익은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정당의 의회 참여문제에서 드러난 바 있다. 또한 매디슨은 제도에 근거한 이익을 발생시키는 것이 제도 밖 권력을 제한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제도에 근거하지 않은 이익이나 권력이 제도에 근거한 이익이나 권력으로 완전히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관성의 문제를 살펴보자면, 이미 확립된 구성적 규칙은 그 자체로 변경이나 전복에 엄청난 비용이 든다. 이것은 쉐보르스키의 명제, 즉 GDP가 높으면 민주주의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체벨리스의 명제, 즉 거부조건이 까다로울수록 법이 잘 준수된다는 주장도 첨언할 수 있다.


  - 결론 정치제도는 완전히 독립된 규칙도, 현실의 파워 게임의 단순한 반영도 아니다. 그래서 법의 지배는 규칙의 우선성에 관한 주장도, 이념적 추상도 아니다. 법의 지배는 이 중간에 위치하며, 그래서 준법의 문제가 발생한다. 제도에 의존하는 권력과 이익에 접근할 수 있는 제도 바깥의 권력/수단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준법은 제도에 기반한 이익이 크거나 제도 자체를 변화 또는 전복시키는 데 드는 비용이 클 때 발생한다.



법치국가에서 복종과 의무 – 트로퍼


  법치주의는 사실과 당위를 통합한다. 법이 있다는 사실이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 수권자가 법을 준수한다는 사실은 준수에 대한 나의 의무를 정당화하는 한 요소가 된다. 이것은 법이 안정적이라는 것, 그리고 법이 자발적으로 제정된 것이라는 생각에 의해 뒷받침된다. 법의 지배와 법치국가는 같은 것인가? 다르다. 법의 지배는 달성해야 할 이상으로 제시되지만, 법치국가는 그것이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존의 법치국가 이론이 그 주장을 제대로 뒷받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어떻게 법의 지배를 현실화할 수 있을까?


  - 법치국가이론1: 법에 복종하는 국가로서의 법치국가 법치국가는 어떤 법에 복종하고 있는가? 자연법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사조가 있다. 이 사조에서는 자연법은 인민주권을 보장하기 때문에, 법치국가와 인민주권이 양립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연법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가 의심스러운 측면이 있으며, 그 때문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여기에서 자연법과 실제 규칙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하며, 결정적으로 자연법에 복종하는 것을 자율성의 표시로서 법의 지배로 볼 수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 제기된다. 다른 하나의 사조는 실정법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법은 최초의 설계방법부터 인간에 의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법은 시시때때로 너무나도 자주 바뀔 뿐만 아니라, 자연법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법이 지닌 지나친 일반성으로 인해 해석의 문제가 제기된다. 역시 법의 지배로 간주하기 힘들다.


  - 법치국가이론2: 법의 형태를 띈 국가권력으로서의 법치국가 상위법은 대체로 내용이 일반적이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실제 집행상의 재량은 온전히 국가에게 주어져있다. 이 까닭에 집행은 법치의 외피를 입고 있다. 국가는 자신의 집행사항이 상위법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사법부의 전문성과 넓은 재량은 사법부에게 사실상의 입법권을 부여한다. 둘째, 행정부 각 부서의 비대화와 재량권 또한 집행의 과정에서 입법 활동과 비슷한 결과를 낸다.


  - 법치국가에서의 실제 제약들1: 구성적 규칙 구성적 규칙은 규칙 자체에서 특정한 효력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행위는 반드시 그 규칙들을 따라야 할 수 밖에 없다. 국가 또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자 할 때 몇몇 구성적 규칙을 따라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이것이 법치국가 내에서 인민의 준법을 정당화하는 요소가 된다.


  - 제약들2: 메커니즘으로서의 헌법 헌법은 특별한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 특히 잘 설계된 헌법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한다. 영국 헌법을 예로 들어보자. 영국의 명목상 최고행정집행자는 왕이다. 동시에 왕은 입법부의 일부를 구성한다. 이런 왕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정책의 실행에 대한 책임은 왕이 아닌 각 행정부처의 장관이 진다. 왕은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입법기관을 견제하는 동시에, 장관들로부터 견제를 당한다. 물론 이런 잘 설계된 헌정질서를 고안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제약들3: 재량권 행사의 제약 해석상의 제약이 발생하는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선거권을 확대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의미에 관한 해석에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권리도 있고 투표권 행사도 가능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나, 이후에는 행사를 제한당하고, 이후에는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로 한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인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또 다른 예는, 대체로 합의체로 운영되는 최고법원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합의체로 운영되기 때문에 급진적인 의견이 나오기 어렵고, 객관적 설득력이라는 외피를 반드시 갖춰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재량권의 제약이 발생한다. 또 최고법원은 자신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을 개인들을 고려하면 할수록 직접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판결을 내리게 되는 역설적 상황을 마주한다.


  위의 세 가지 제약들은 법치국가의 어떤 상태가 법의 지배와 비슷해보이도록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는 이론화에는 실패하게 된다. 우선 위와 같은 제약은 법의 지배라는 현상 전부를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제약을 받는 구성원들의 이념이 더 많은 결과물을 설명해줄 수 있다. 또한 이런 제약들에 정말로 상위규칙들이 적용되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마지막으로, 법의 지배 자체가 확립되어있지 않는 한, 시민이 법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재량에 따른 의지에 종속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토대와 법의 지배”에 대한 발문 – 웨인개스트


  쉐보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법은 규범이 아니라 유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복종한다.” 이 관점은 유효한 것으로 보이며,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 우선, 헌법의 경우 적절한 기대치와 그 배반에 대한 집단적 반란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지켜진다. 따라서 합리적 수권자는 법을 준수하여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한다. 역으로 법은 이런 유인을 수권자에게 충분히 제공해야지만 지속성을 기대할 수 있다.


  - 법의 지배에 대한 균형접근법의 논리 쉐보르스키와 웨인개스트의 입장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이익 자체가 복종의 요인인 반면, 후자는 불복의 손해의 크기가 중요한 요인이다. 물론 어느 쪽을 선택하든 패배한 다수파의 협력-집합행동의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어떤 통치행위가 피지배 시민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또 묶어주는가? 이를 위해 네 가지 조건을 검토해보면 좋을 것이다. 첫째, 의사결정절차에 대한 협약, 둘째, 협약의 존재가 이익이 된다는 각 집단의 판단, 셋째, 다른 집단과 행동을 같이 하겠다는 약속, 넷째, 지배층에 저항해 협약을 지키겠다는 의지, 즉 공동전선의 구축.


  - 합의의 함축적 의미 합의(와 정치문화)는 이전 연구자들이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소다. 하지만 웨인개스트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합의가 아니라 협력이 중요하다. 협력이 합의의 문화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있었다. 의견불일치(비합의)에도 불구하고 협력이 있다면 공동전선의 구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은 협력이다.



정당은 왜 선거결과에 복종하는가 – 쉐보르스키


  선거제도에 대한 정당의 복종을 설명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하나는 법의 지배 자체를 존중하는 문화적 코드에 기반한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익과 갈등의 평형상태에 기반한 설명이다. 어느 쪽이 더 타당할까?


  데이터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소득이 높을수록 민주주의가 지속될 확률이 높다. 소득수준에 따라 선거에서 이긴 세력과 진 세력의 행동 패턴이 다르게 나타난다. 아주 낮을 땐 둘 다 불복하고, 중간일 땐 패배자만 불복하며, 높을 땐 둘 다 복종한다. 한 정당이 입법부 하원의 2/3 이상을 차지하면 민주주의가 무너질 확률이 높으며, 반대로 주기적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공동체에서는 민주주의가 지속된다. 즉 한 세력의 장기집권이 없을 때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 문화와 민주주의 문화중심 설명은 문화가 결정적 요인이며 민주주의는 소득과 상관없다는 강한 주장으로 정식화되어야한다.


  - 문화적 견해들의 역사 문화중심 설명은 몽테스키외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특정한 문화는 그에 걸맞는 특정한 형태의 정부(정치제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분명한 서술은 아니며 후대에 정식화된 것이다. 본인 스스로는 정치제도의 발생 원인에 대해 확정짓지 않았다. 이후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은 문화의 발전에 따라 정부도 발전한다는 입장을 폈다. 밀은 특정한 몇몇 문화는 민주주의와 양립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민주주의를 배운 뒤에는 민주주의자로서의 행위를 수행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문화중심적 설명을 모아보았을 때, 두 가지 난점이 도출된다. 첫째, 문화 내에서 어떤 특성이 민주주의를 향한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 둘째, 정치와 경제와 문화의 변화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는가.


  최근에 아몬드와 버바는 문화중심적 설명을 부활시켰다. 그들은 비서구권 국가들이 서구권국가들의 경제발전을 따라잡으면서도 정치는 후진적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정치발전을 추동하는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그 원인을 “문화”라고 지목했다. 그들은 문화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시도했는데, 이 분석은 개인들에게 던져진 몇 가지 유형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지형도로 구성된다. 이런 질문에는 민주주의적 정치체제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이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이 답변의 지형도는 민주주의 체제의 지속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와 무관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 문화의 어떤 면이 중요한가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문화의 특정한 측면에 대한 가설은 많다. 비이성적 동력(몽테스키외), 감정(스코틀랜드 계몽주의),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선호(밀, 아몬드와 버바), 삶에 대한 만족도와 혁명에 대한 열망(잉글하트) 등등. 또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의 어떤 측면들에 대한 설명도 있다. 민주주의 그 자체를 가치있는 것으로 여긴다거나(토크빌), 자기지배, 즉 자기결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느낀다거나,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걸맞는 시민적 덕성이라거나, 심지어 뭔가에 대한 합의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요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에 대한 인과적 설명의 유형도 나뉜다. 첫째, 문화가 발전하면 경제도 번영하고 민주주의도 달성된다(립셋, 위아르다, 동아시아). 둘째, 문화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되면 민주주의가 출현한다(아몬드와 버바). 셋째, 경제발전이 관대한 문화를 낳고 이것이 민주주의를 탄생시킨다(립셋). 넷째, 민주적 제도가 먼저 출현하고 문화가 뒤따른다(밀, 토크빌, 몽테스키외).


  - 문화 그리고 민주적 문화 민주적 문화에 대한 초창기의 논의는 프로테스탄트주의 즉 종교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자본주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 만큼이나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는 것이 베버에 관한 일반적 해석이다. 다른 종교에 관해서는 어떨까? 유학? 논쟁중이다. 이슬람? 역시 논쟁중이다. 한 종파 안에서도 서로 다른 교리해석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옹호하기도 했다. 이렇듯 문화와 민주주의를 연결하는 것이 무리인 이유는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결과에 심하게 의존한(결과론적) 해석이다. 둘째, 어느 문화에서는 일정한 수준의 민주주의 친화적 성격은 찾을 수 있다. 셋째, 오래된 종교들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정치체제와 공존해왔다. 즉, 그런 종교들이 특정한 하나의 정치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고(할 수 있다고) 간주하기 힘들다. 넷째, 종교든 문화든 전통이라는 것 자체가 가변적이기에 특정한 정치체제와 연결될 수 없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최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나 후쿠야마의 문화투쟁론 같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문화중심 설명의 부활로 간주할 만하다. 특히 이들은 비서구권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인권 제국주의”로 간주하며 거부한다는 사실을 적극 내세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근거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근본주의는 서구와 비서구를 가리지 않는다. 다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근거를 취사선택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문화의 정수로 간주되는 종교조차, 실제로는 사회 내의 이해관계조정 기능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이다. 이외의 다른 연구들 또한 문화로서의 종교보다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 경험적 증거 문화는 유효한 변수로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규모는 민주주의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다문화적 상황은 민주주의도 망치지만 독재 또한 쉽사리 들어서지 못하게 한다. 즉, 다문화적 상황은 불안정 자체일 뿐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 결국 문화중심의 민주주의 이행 설명은 기각된다.


  - 이익과 민주주의: 공동체 모델링 민주주의적 공동체의 원형을 추출해보자. 이 공동체는 선출제로 운영되며 그 과정은 법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1인당 국민소득은 x이며, 계층은 3단계(저, 중, 고), 보수와 진보의 양당이 존재한다. 승리한 당은 자신들이 내세운 정책을 패배한 당에게 강요함으로써 자신들의 가치와 이익을 늘린다. 이 과정을 둘 다 수긍하면 민주정이고, 어느 한 당 또는 두 당 모두 불복하면 독재상태에 돌입한다. 하지만 두 당 모두 독재의 상황을 피하려는 유인이 있다. 독재가 불러일으키는 불안감이 자신들이 내세운 정책을 통한 재분배의 실질적 효과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체 모델에서 민주주의는 생존가능한가?


  - 풍요와 민주주의의 생존 부가 늘어날수록 선거에서 패배했을 때의 손해는 줄어들고, 독재에서 오는 이득과 손해의 격차도 따라서 줄어들다 특정 지점을 지나면 이 둘의 관계가 역전된다. 이 순간부터 선거에 승복하는 행태가 정착된다. 반대로 이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불복과 독재가 출현할 수도 있다. 물론, 가난하더라도 세력균형이 잘 잡혀있고 소득분포도 일정하다면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잘 자리를 잡는다. 인도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세력균형이 흐트러져 있을 때에는 이것을 재분배로 교정해주는 정책을 시행하면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도 잇다. 반면 특정한 세력의 군사력이 압도적인 경우에는 민주주의의 유지가 쉽지 않다.


  - 소득 재분배 획기적인 소득 재분배 정책에 대한 두 가지 제약이 존재한다. 하나는 반란의 위험이고, 하나는 유인을 창출하지 못해 효율이 저하되는 것에 대한 우려다. 그런데 첫 번째 제약과 양립가능한 재분배의 양과 비율은 1인당 국민소득에 비례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한에서의 수권자의 운신의 폭 또한 1인당 국민소득에 비례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진전의 정도와 과세율의 비례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 부연설명과 해석: 승리확률 매우 진전된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일부 정당은 영원한 패배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체제 유지의 이익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의 체제가 진전되지 않았을 때에는, 선거참여와 복종에 대한 유인으로서의 승리확률을 잘 안배해서 제도설계에 신경을 써야한다.


  - 부연설명과 해석: 투표 투표가 민주주의의 유지와 붕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경우를 설정해볼 수 있다. 첫째, 좌파 정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경우, 민주주의는 붕괴한다.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유권자의 힘을 바탕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파는 지지자가 소수이기에 독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1인 당 몫이 커지기 때문에 독재에 대한 유인이 생긴다. 둘째, 좌파가 석패했을 경우, 민주주의는 붕괴한다. 충분한 지지세를 바탕으로 한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데, 첫째 경우보다 지지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독재에 성공시 1인이 가져갈 몫이 늘어남으로써 독재에 대한 유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셋째, 우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경우, 민주주의 체제는 유지된다. 이 경우 우파 지지자들의 1인당 몫이 별 것 없기 때문에, 독재에 대한 유인이 없다. 넷째, 좌파가 아슬하게 이겼을 경우, 체제가 유지된다. 선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독재에 대한 유인이 없고, 우파의 지지자와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 부연설명과 해석: 헌법 헌법은 잘 바뀌지 않는 최고의 법이다. 이는 집단 간 균형을 최초로 설정한 법이기 때문에, 제도의 유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설립동의(즉 규칙에 대한 존중)이 준수(즉 제도에 따른 결과에 대한 존중)를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부연설명과 해석: 균형점 구성적 규칙으로서의 법은 상황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사람들에게 부여한다. 어떤 법은 균형을 만들어주지만, 어떤 다른 법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균형을 이루게 도와주는 법 중 어떤 것은 특정 집단에게 유리하게 편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참가자들은 이 법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경쟁에 뛰어든다.


  - 결론 선거규칙과 결과에 대한 승복은 합리적 이익추구의 결과다. 이 연구는 이미 균형점을 이루고 있는 여러 공동체들에 대한 관찰의 결과인 것이 사실이지만,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지속성에 관한 유의미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들과 집단들의 심리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관한 문화중심의 설명을 채택한 사람들은 이 글에서 보인 것만큼 검증가능한 형태로 자신들의 설명을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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