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대 이상으로 재미나게 읽었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고려사는 대부분 내부의 입장에서 쓰여져서 읽다 보면 비슷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 책은 요사, 송사, 일본사 등 주변 국가의 기록을 참고하여 거란과 송의 당시 상황과 관련 인물들을 설명해주어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지도와 그림으로 인물의 이미지, 도시의 위치와 경로의 이동 상황 등을 표현해주어 이해를 돕는다. 이미지가 정직한 2D 이미지여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이 귀엽게 느껴졌다. 


5대10국 시대를 정리하고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조광윤)은 북벌을 단행하는데 연운16주를 회복하여 거란을 북으로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연운16주는 거란에게 뺏길 수 없는 땅이었다는 것이다. 이 무렵 거란은 송나라 뿐 아니라 동쪽에서는 발해부흥세력과 여진족, 서쪽에서는 몽골 등이 압박을 하는 중이였다. 경종은 몸이 병약했다고 하며 승천황태후가 경종을 대신해 거란을 통치하여 970년대부터 1009년까지 사실상 거란을 지배한다(p45). 새로운 인물을 알아가는 것은 역시 재미있다. 승천황태후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는 그녀의 승하 기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기에 요사를 봐야만 알 수 있는 인물이다. 승천황태후가 거란을 사실상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젊은 인재들인 한덕양, 야율휴가, 야율사진, 소배압, 소손녕 등을 발탁했기 때문이다(p46). 


고려와 거란 사이에 만부교 사건이 발생한 후에 공식 외교는 단절된 상태였다. 대신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고려의 유학생들을 송나라의 국자감에 입학시키는데 이 중 강전(~1006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강전은 송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 사망했기 때문에 고려 역사에는 기록이 없고 송사에만 기록이 남아 있다(이런 인물이 많을 것 같다). 강전은 송나라 유학 전 발해부흥세력을 돕기 위해 거란으로 가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또 일단의 고려군과 함께 천 오백리 이상을 행군하여 거란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그 길은 거란의 영토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대장정이었다. 


거란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받은 고려는 "전국에 군사들을 소집하라!" 하고 박양유, 서희, 최량을 보내 거란군을 막게 한다. 이때 성종도 친정을 단행했다. "지금 인근의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적을 물리치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p71). 당시 거란군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군대였는데 친정을 감행한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졌다. 고려군 리더 서희는 거란군 리더 소손녕에게 화친을 제의하는데 소손녕은 먼저 항복해야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에서는 대책회의를 벌이고 대신들 간에 항복론과 할지론으로 두 파로 나뉘게 된다. 성종은 항복이 불가하다 생각했고 영토를 떼어주는 할지론에 따르기로 한다. 그러나 서희는 이 결정에 불복하며 "전투의 승부는 국력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의 빈틈을 보아 기동하는 데 있습니다!"(p80)하며 영토를 언제까지나 내어줄 수는 없으며 승부를 본 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과 강화협상을 끝마친다. 


송 태조는 거란에 친정을 단행했다 패배한 후에도 거란에 연이어 대패하여 수세에 몰려 있었다. 고려 성종은 994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거란이 이 사실을 눈치챈다. 고려와 거란 간에 강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전쟁이 휴전된 것일 뿐 종전은 아니었다. 양국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데 이 때 강동6주를 고려가 여진으로부터 뺏어 장악하고 성을 쌓아 방비하게 된다. 

성종이 승천황태후의 사위를 요청하자 거란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성종은 소손녕과의 딸과 혼인을 맺게 된다. 이후 거란은 고려 성종을 거란 황가의 일원으로 대우했고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는 아예 끊고 거란과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럼 이후 거란과의 싸움이 없었어야 하지만 성종이 사망하는 바람에 양국은 다시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공교롭게도 성종이 사망한 다음 해 서희도 사망했다). 성종과 서희의 관계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만 둘은 굳건한 믿음 아래 서로를 믿어주는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신하였고 훌륭한 왕이었다. 

  

강조의 변으로 왕위에 오른 현종은 내부를 다스릴 새도 없이 거란의 침입에 맞닥뜨리게 된다.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공신으로 최고위직에 올라 있었으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거란군을 여러 차례 물리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거란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란군이 강조의 막사를 들이닥치자 그는 사로잡히게 된다. 

고려군 본진은 패배했으나 고려군에는 뒷배가 있었다. 통주와 곽주 사이에 완항령이라는 큰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에 일단의 군사들이 곽주 쪽으로 후퇴하다가 완항령에 매복한 것이다. 좌우기군들은 거란군들이 완항령에 접어들자 창과 칼 같은 단병기를 빼어들고 거란군에 돌격했다(p150). 그럼에도 거란군은 계속 진격하여 곽주, 안주, 숙주가 그들 수중에 들어가고, 거란군은 서경까지 들이닥친다. 결국 동북면에 있던 고려군 병사들이 서경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서경 방어를 책임진 여러 장수가 전사하거나 도망가자, 성안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진다(p164). 이 때 조원은 "서경이 없으면 고려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조원은 비록 중하급 관료였을 뿐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았던 사람이었다. 이후 조원을 비롯하여 성안의 군민들은 합심하여 밀려드는 거란군을 막아낸다. 

거란군에 의해 점령당해있던 곽주에 포로들이 남아 있었다. 이 때 양규는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서, 거란병사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성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구하여 통주로 옮겼다. 그는 단 7백명의 결사대로 6천명의 군사를 막아내었는데 방어하는 성을 공격하여 군민들을 빼내고 승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곽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거란군 황제 야율융서는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돌아가지 않고 개경으로 남하한다. 야율융서도 정말 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허를 찔린 공격에 고려군은 대책을 세우는데 이 때 강감찬이 현종을 이렇게 설득한다.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때 굳이 몽진을 해야 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무턱대고 그들을 맞아들여서 피해를 당하기보다는 시간을 버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현종은 강감찬의 말에 따랐는데 몽진길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고려 군민들의 태도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속사정을 알 수 없는 군민들이 보기에 현종의 나주행은 피난이었고 도망길이었을 것이다. 그걸 감수하고 현종은 울분을 삼키며 고스란히 감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때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식으로 벌을 주었다면 그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왕위를 순탄히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몽진길에 공주에서 김은부를 만난 것도 그에게는 운명이었다. 김은부는 현종을 극진히 대접했기에 현종은 감읍할 수 밖에 없었고 김은부의 딸들을 현종이 비로 맞아들이면서 이후 이 사이 낳은 혈통이 고려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야율융서는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를 잃고 물자의 손실을 감당했기에 고려 왕이 친조하기를 원했고 현종이 오지 않는다면 강동6주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는 강동6주를 포기할 수 없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강감찬은 1012년 동북면병마사로 군대를 지휘 중이었다. 감찰어사 이인택이 그를 탄핵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현종은 감찰어사를 파직하면서 강감찬을 지켰다. 만약 이 때 강감찬을 파직시켜버렸다면 이후 거란과의 싸움은 힘들었을 것이다. 1013년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넌다. 이때 거란군을 리드하는 이는 소배압이었다. 그는 북쪽에 있는 모든 성을 무시하고 개경을 향해 직진했다. 어느 정도 병력의 희생을 감수하고 평지인 개경에서의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자가 아닐 수 없다. 개경은 청야작전으로 들판이 모두 비워져 있었고 고려의 백성들은 궁궐 안에 피신한 상태였다. 소배압은 궁궐 안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야율호덕을 개경 통덕문에 파견해 철군하겠다고 통보한 뒤, 몰래 기병 300기를 금교역으로 진입시켰다. 김종현과 동북면병마사의 지원군은 아직 개경에 도착하지 않았다. 개경 안의 병력은 절대 부족했다. 거란군 선봉대가 금교역 쪽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현종은 결단했다. "출격하라!"(p296). 동북면병마사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현종은 현재의 군민으로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다행히 고려는 앞선 거란과의 전투들을 치르면서 거란군과 맞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깃발들이 순간 북쪽으로 나부끼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갑자기 남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비구름이 남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름 아래, 하나의 깃발이 있었다. 구름은 마치 그 깃발 끝에 걸려서 오고 있는 듯 보였다. 깃발을 필두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군사들. 개경을 호위하러 갔던 김종현과 1만 정예군이 도착한 것이다(p306). 


건조한 역사서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장면이라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이다. 


아무튼 이 순간 개경군은 얼마나 큰 안심이 되었을까. 고려는 전군을 좌우로 좁혀가며 거란군을 압박하여 승기를 잡았다. 거란군 진영이 무너지며 북쪽으로 내달리자 고려군은 그들을 공격한다. 거란군 10만은 전투에서 대부분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살아서 돌아간 인원은 수천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 고려군의 피해는 겨우 173명이 전사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후에도 거란과 소소한 전투는 이어졌지만 더 이상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고려 군민의 힘이 있었지만 현종의 역할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공격한 이를 용서할 줄 아는 관대함을 지녔고 거란군에 맞서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고려를 지켜냈다. 고려 후기 대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현종을 논평했다. "현종은 무엇 하나 흠을 잡을 수 없는 분이라 할 것이다."(p317)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꾸준하게 2023-10-25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11월부터 최수종 씨 주연으로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한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3-10-26 13:00   좋아요 1 | URL
그 드라마 보려고 미리 고려의 역사를 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사극 정극 드라마라 기대가 커요. 특히 최수종 사극은 믿고 보니까ㅎㅎㅎ

희선 2023-10-26 0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가 소설도 썼더군요 고려와 거란 싸움... 그게 오랫동안 이어진 거였군요 고려가 이겨서 다행이기는 한데, 그렇게 싸우는 동안 백성은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힘든 건 백성이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26 13:0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희선님. 저는 어떤 전쟁이든 피해는 고스란히 피지배층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기 때문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하루 빨리 종식되어야겠죠.

자목련 2023-10-26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거리의 화가 님의 정리된 리뷰 좋습니다. 덕분에 한 번 더 책을 읽은 듯해요. 곧 드라마가 시작되니 기대하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3-10-26 17: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덕분에 저도 고려와 거란의 전쟁만 다룬 책을 읽게 되었어요.
드라마가 곧 방영이라 더 두근합니다!ㅎㅎㅎ
 

제5장 에토스, 세계관, 그리고 성스러운 상징의 분석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대립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강화한다. 에토스는 세계관이기술하는 실제의 상황이 의미하는 생활양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계관은 그러한 생활양식이 진정한 표현이 되는 실제의 상황에 관한 이미지로 제시됨으로써 감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존재의 일반적 질서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제시하는것은 그러한 가치나 질서가 어떻게 생각되든 간에 모든 종교에서 본질적인요소이다.

성스러운 상징은 존재론과 우주론을 미학과 도덕에 연결시킨다. 그것들의 독특한 힘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사실을 가치에 결합시킨다고 생각되는 능력, 즉 단지 실제의 것에 불과한 포괄적인 규범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서 유래하고 있다. - P155

한 민족이 찬양하는 것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그의 세계관에 묘사되고 그 종교에 상징화되며 나아가 그 생활 전반의 질로 표현된다. 그들의 에토스는 단지 그들이 찬양하는 고상함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비난하는 비천함에서도 현저히드러난다. 즉 악덕은 미덕과 더불어 양식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지지하는 종교의 힘은 그러한 가치가 그것의 실현에 대립하는 힘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구성요소가 되어 있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종교적 상징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것은, 막스 베버를인용하면, "사건들이 그저 존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의미를지니며 그 의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상상력을 나타내고 있다. - P1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레이첼 모랜 지음, 안서진 옮김 / 안홍사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매매된 여성이 갖게 되는 온갖 경험들 중 학대와 폭력 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 ‘인간성의 상실‘이 가장 큰 아픔이라 여겨진다.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경험을 잃고 인격과 연결고리를 놓쳐버리는 것이 상실이다. 이 글은 개인의 내밀한 고백을 넘어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잡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10-23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책 읽느라 고생 많으셨고 완독 축하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3 20:4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재독하느라 고생많으셨어요. 좋은 책 함께 읽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10-24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잡이!
끄덕끄덕 공감이 됩니다.
완독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4 09:37   좋아요 1 | URL
직접 경험한 이가 써서 절절했지만 저자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을 책이었을 것 같습니다.

모나리자 2023-10-24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일부러 의도하지 않으면 잡기 어려운 책인데,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3-10-24 17:30   좋아요 1 | URL
이번 달 <여성주의책 함께읽기> 책이었기 때문에 읽을 수 있었어요. 아마도 저 혼자 읽을 생각이었으면 쉽게 손이 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힘들지만 완독할만한 가치가 넘치는 책이었어요^^

건수하 2023-10-25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3-10-26 11:43   좋아요 1 | URL
수하님도 완독 축하드립니다^^
 

성매매에 유입되면 자기 자신과 감정을 보존하기 불가능해진다‘라는 성매매 국제 연구 결과에 동의한다. 여성들은 성매매에 유입되어 있는 동안 관계를 형성하지만(내가그랬고 다른 여성들 또한 목격했다) 오염된 역동의 작용으로 관계들이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는다. 이 역동들은 여성이 성매매를 떠나는 바로 그날 작동하기 멈추지 않으며 그후에도 어느 때고 그 영향은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
친밀하지 않은 관계의 여성과 남성 간 상호 작용과 관계들 속에서도 이 지속적인 오염이 나타난다. ****************** - P382

성매매가 인생에 야기할 지도 모르는 불화에 대한 예상. 연못에 던지는 자갈들같이 마음과 삶에 퐁당퐁당찾아오는 이런 자각들이 여진이다. 그 여진들이 생기는 이유를 알아도 물 표면에 잔물결이 형성되는 걸 예방하지는않는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때로 관찰하는 것뿐이다. - P392

인간의 비인간화는 노예의 필요조건이었고노예제는 노예가 된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원인과 결과가된다. 나는 이 이중적인 역동을 성매매에서 경험했다. - P403

불타는 건물을비유로 들 수 있는데, 불타는 건물을 빠져나올 만큼 운이좋았다면 그 집에 불이 났다고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옳다.
그래야 그 안에 여전히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희망이 생긴다. - P4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Ch 30 ] The Aryans of India


Life on the Ganges River

인더스 계곡에 신비한 도시 모헨조다로 유적의 요새가 오래 전 사라지고 난 뒤 새로운 이들이 인도땅에 들어왔다. Aryans(인도유럽어족의 아리아인)다. 그들은 유목민이었으나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사이의 땅에 정착하여 농경과 목축을 한다. 그들은 Shiva라고 하는 신을 믿었다. 

Shiva와 Ganga를 믿는 이들을 Hindus(힌두교도)라 하고 이들의 종교를 Hinduism(힌두교)라 부른다. 힌두교도들은 유일신이 아닌 다신을 숭배했으나 힌두교도들은 갠지스강을 숭배했다. 오늘날 힌두교 순례자들은 갠지스강변에 해질 무렵 불켜진 초를 띄우고 Ganga(river-godess)에게 기도를 한다. 


The Castes of Ancient India

힌두 경전인 Rig Veda에는 힌두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나온다.

Purusha라고 하는 거인이 살았다. 그는 수천개의 머리와 수천개의 눈과 수천개의 발을 지녔다. 신들은 Purusha의 머리를 하늘로, 그의 눈을 태양으로, 그의 다리를 지구로, 그의 숨을 바람이 되게 하고 몸 바깥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을 만든다. Purusha의 입에서 성직자인 브라만(the brahmin), 그의 팔에서 귀족 전사(the noble warriors)를, 그의 무릎에서 traders and farmers, 마지막으로 그의 발에서 the servant를 만든다. 이 네 계급은 castes(카스트)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남은 여생도 자신의 계급에서 살아가야 한다.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Untouchables”로 불리며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Siddartha

싯다르타는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그는 궁에서 자라 주변에 온통 화려하고 진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이 그런 것일 거라고 믿으며 자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바깥 세상이 궁금해진 그는 아버지인 King Suddhodana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내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그곳에서 구걸을 하는 노인을 만나 충격을 받는다. 마차를 모는 사람에게 저 사람은 뭐가 문제인가요? 묻고 “그는 아프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Untouchable’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후 이어 “죽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니 “죽음은 삶의 끝이죠.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당신조차도요. 싯다르타!”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는 궁전으로 돌아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모두 가짜이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좋은 옷을 벗고 허름한 옷을 입고 세상을 향해 나간다. 수년이 지나 거지로 남은 일평생을 살다 죽는다. 싯다르타는 오늘날 부처(Buddha)로 알려져 있고 그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르쳤다. 오늘날 부처를 믿는 이들을 불교도(Buddist)라 하는데 인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다.



[ Ch 31 ] The Mauryan Empire of India


The Empire United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하여 많은 도시들을 건설하고 각자 살고 있었는데 이들 중 한 종족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인도를 통일하며 마우리안 왕조가 탄생한다. 마우리안 제국에 Asoka(아소카)라는 황제가 있었는데 그는 정복한 곳들의 사람들의 고난을 보며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 나는 정직과 자비로 제국의 사람들을 이끌겠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폭력을 멈출거야.” Asoka는 자신의 생각을 석비에 새겨 제국 전체에 세움으로써 오늘날에도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지침처럼 자비를 실천했다고 한다.


The Jakarta Tales

인도에 전해지는 책 중 Mahayana Tripitaka라는 책에 온갖 종류의 글이 담겨 있는데 이 중 the Jakata Tales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거기에는 부처가 고대 인도 사람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법(goodness, patience, mercy, honesty, friendship will bring happiness)이 담겨 있다. 특히 산토끼(hare)가 자신의 온몸을 던지려하다가 Sakka 신의 눈에 띄어 여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Ch 32 ] China: Writing and the Qin


Calligraphy in China

한자를 글로 쓸 때 몇 가지 획 쓰기 방법(Horizontal Line, Dot, Vertical Line, Downward Strokes, Sweeping Downward Stroke, Hook)을 이용하면 글자가 만들어진다.

또 글씨를 쓰는 붓은 동물의 털 여러 개를 하나로 모아 만든다. 이 때 글자의 크기 종류에 따라 작은 것은 쥐털로, 중간 것은 토끼털로, 큰 것은 양털이나 늑대털을 이용한다. 

중국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써왔으며 최초의 고인쇄본은 the Diamond Sutra(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Warring States

중국은 전국에 여러 명의 군 지도자가 난립하는 형태였다. 최소 6개의 강력한 군 지도자가 있었는데 이 시기를 The Period of the Warring States라고 부른다. 동쪽의 Qin(Chin)이라고 하는 곳에 Qin Zheng이 최초의 중국 황제가 되는데 China는 Qin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다. 그는 강력한 전제왕권에 반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분서갱유는 가장 최악의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The First Emperor and the Great Wall

Qin Zheng은 진시황(Shi Huandi)가 된 뒤로 폭압 정치를 행했다. 북쪽에 있던 이민족들이 변경을 자주 침략하자 성벽을 세울 것을 단행한다. “A wall thousands of miles long! A Great Wall!” 그는 건축가와 설계자들을 소환하여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폐하. 그런 길고 거대한 성벽을 만들 만한 돌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방법을 생각해낸다. The builders made a wooden frame, as high as a man’s waist and as wide as a wall. They sat this frame upon the ground and filled it with loose dirt. Then workers stamped and packed the earth until it was only four inches high and as hard as concrete. They lifted the fame up, set it on top of the packed dirt, and filled it again. They could build a dirt wall as hard as stone, four inches at a time!

진시황은 중국의 장정들을 1년에 1달은 성벽 건설에 동원시켰다. 그가 사망했을 때에도 성벽은 완성되지 않았고 수백년이 지날 때까지 뒤이은 왕조의 황제들이 그 작업을 완수해나간다. 마침내 30마일의 길이의 장성이 완성된다. 


The First Emperor’s Grave

30년 전 서안 근처에 살던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땅이 딱딱하다는 것을 느끼고 발견한 곳이 병마용갱이다. 이곳은 근처에 있는 시황제의 무덤을 보호하는 용병들인데 실제 사람 크기인데 모두 다른 얼굴들을 하고 있다. 시황제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자 거대 지하 도시를 만들어 무덤을 조성할 것을 주문했다. 병마용갱 부근의 토양은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데 양초가 타면서 무덤 안의 용병들의 상태가 오랜동안 유지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Ch 33 ] Confucius


China’s Wise Teacher

공자는 중국의 귀족 가문에 태어났다. 그는 학교에 가서 음악과 궁술을 배웠으나 집안은 가난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전쟁으로 소란스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지도자들에게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권하길 원했으나 지도자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공자의 어록은(The Analects of Confucius) 제자들이 기록하여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It is the wiser person who gives rather than takes.”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23-10-24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부지런하신 화가 님.
읽고 기록하기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근데 화가 님이 해내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만리장성이든 분서갱유든 진시황의 참된 업적이 아닌 황제의 횡포 업적으로 보여져...참....
그에 비하면 인도의 아소카 왕은 참 훌륭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4 09:41   좋아요 1 | URL
ㅎㅎ 매일 한 챕터 읽으면 겨우 이달에 맞춰서 읽을 것 같습니다.
진시황은 욕망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도 문제지만 결국 이것이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게 비단 진시황의 문제일까 생각은 들긴 해요. 어떤 사람도 권좌에 오르면 없던 욕심도 생기는 것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