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클리블랜드 토박이인 내게 제철소는 늘 풍경의 일부였다. 그것은로키 산맥이나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처럼 붙박이고 배경이며 당연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여름날 오후에 차를 타고 녹슨 공장 건물을지나가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빠는 공과금을 내거나소포를 부치거나 웨스트사이드마켓에서 장을 보거나 할 때 나를곧잘 데리고 갔고, 그럴 때면 제철소 용광로에서 내뿜는 주황빛 불꽃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 P14

러스트벨트의 도시에서 주황빛 불꽃은 단순히 역한 냄새와 오염의 전조만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착오도 아니며 혁신의 부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나 보스턴 같은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존재일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일자리고 세금이다. 그것은 경제성장을 가리킨다. 저 불꽃이타오르면 클리블랜드가 잘 굴러간다는 뜻이야, 하고 철강 노동자들은말한다. 저 불꽃은 우리 역사와 우리 정체성의 일부다. 그것은 어떤것도 영원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 P23

제철소로 오기 전 평범한종에 종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중 40시간 노동이라는 표준에 익숙한 터라 제철소의 고된 일정이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상태였다. 철강 노동자의 삶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노동이라는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의 노동자가 12시간 교대 근무에 초과근무는 의무이고 밤낮을 오가며 일한다. 어떤 이들은 오전 3시에출근해서 오후 3시에 퇴근한다. 또 어떤 이들은 여명과 황혼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밤교대 근무에 시달린다. 많은 미국인은 아침 6시가이른 시간이라고 하겠지만 철강 노동자들은 아침 6시가 상대적인개념이란 걸 잘 안다. - P46

의사들은 혼합 상태의 양극성장애가 제일 위험한 형태 가운데하나라고 말한다. 울증은 자살 충동을 일으키고 조증은 충동을 더한다. 혼합 상태의 양극성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살을 결심하면 실행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런 발병시기 중간에는 속수무책으로변덕에 휘둘린다. 미사일에 묶인 채 고요한 도시로 날아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다가도 허공에 대고 재잘거리는뚜라미가 된다.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였다가 꼭두각시의 목소리를내는 술 취한 복화술사로 변하고 그다음 순간에는―이상하게도ㅡ꼭두각시놀음을 창가에서 지켜보는 관음증 환자가 된다. 한마디로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스스로 회의하게 하는 그런 질병이었다. - P49

나도 그새 알게 된 사실인데, 부서 간에는 비공식적 위계가 있었다. 제선부가 최악이고 제강부와 열연부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품질관리부와 설비관리부는 그리 나쁘지않았고 운송부도 괜찮은 편이었다. 정수처리부에서 일하는 건 더없이 행복했다. 전력관리부는반대였다. 전기와 기계관리만을 담당하는 부서가 몇 개 더 있지만그곳에서 일하려면 정비사이든지 전기기술자여야 했다. - P66

가장 기본적인 용어로 압연기는, 회전하는 두 개의 원기둥 사이에 강철을 넣어 압축하는 설비를 일컫는다. 압연기마다 목적이 다르지만 열간압연기 Hot Mill는 고온의 강철을 길게 늘이는 한편 연속압연기Tandem Mill는 상온의 강철을 길게 늘이고 조질압연기Temper Mill는 강철을 굴려서 단단하게 한다 모든 압연기에는 거대한 밀대 모양으로 생긴 금속 분쇄기처럼 강철을 우그러뜨리는 회전하는 한 쌍의 원기둥이 있다.
열연공장의 직원들은 제강공장에서 오는 화물차에서 강철 슬래브를 내린다. 그런 다음 섭씨 1260도가량이 될 때까지 슬래브를 용광로에서 재가열한다. 강철이 빨갛게 달구어질 만큼 높은 온도지만강철을 녹일 만큼 고열은 아니다. 슬래브는 형태를 유지하되 유연성 - P76

이 훨씬 좋아진다. 벌겋게 달아오른 슬래브는 컨베이어벨트를 타고내려가면서 각각 1만 마력의 모터가 달린 여러 쌍의 산업용 롤러에눌린다. 강철은 열간압연기의 롤러들이 내리누르는 압력을 받아 길고 얇은 강판으로 늘어나는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슬래브는 보통 길이가 9미터, 두께가 20센티미터쯤 된다. 몇 분 만에 9미터가 900미터가 되고, 20센티미터가 몇 밀리미터가 된다. - P77

강판은 열간압연기 한쪽 끝에서 지름 60센티미터 가량의 가로로놓
감개에 감긴다. 감개는 엄청난 속도와 압력으로 돌면서 강판인
을 구부러뜨려 실타래처럼 감는다. 몇 초 만에 수백 미터의 강판은 - P77

운반하기 쉬운 1.5미터나 1.8미터 높이의 원기둥으로 바뀐다. 감개에서 풀린 원기둥의 지름 한복판에는 폭 60센티미터의 구멍이 생긴다. 제철소 용어로 이 원기둥을 코일이라 부르고 구멍을 눈이라 부른다. 크레인은 코일의 눈 안으로 고리를 집어넣어 코일을 바닥에서들어올리고, 이로써 수십 톤의 강판을 비교적 쉽게 다루고 운반하는 게 가능해진다. - P78

안전 지킴이의 설명에 따르면, 피클 라인의 노동자들은 각각의 코일을 펴서 흐르는 염산에 집어넣어 열연 작업 중 강판 표면에 묻은불순물을 제거한다. 그런 다음 강판 코일은 연속압연기를 통과하면여러 쌍의 밀대에 눌려 더욱 길게 늘어난다. 연속압연기를 거친강판은 어디든 갈 수 있다. 강판 중 일부는 곧장 고객에게 판매된다.
일부는 조질압연기를 거쳐 강도와 균질성을 향상시키고, 또 다른일부는 녹을 방지하기 위해 아연 도금한다. 어느 길을 가든 강판 - P79

들은 결국 형광등 아래 환히 빛나는 코일로 다시 감긴다. 이렇게 마감된 코일은 화물차와 세미트레일러에 실려 전국 각지의 구매자들에게 배송된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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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 서촌편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황정수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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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배경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생소한 예술가들의 이름들이 나올 때가 많아 계속 흠칫 놀라며 읽었다. 심지어 에피소드들도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다. 단지 지면상 작품들이 책에 모두 실리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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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5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화가들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밌더라고요. 예술가들이라 그럴까요...

거리의화가 2023-05-15 17:10   좋아요 0 | URL
그쵸^^ 작가별로 작품 세계도 정리하면서 비하인드 스토리 읽는 재미도 있어서 즐겁습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 북촌편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황정수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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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근처에서 주로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간단한 이력,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동양/서양 화가 뿐 아니라 공예가, 서예가, 조각가, 사진가 등 의외로 모르는 예술가들을 새롭게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다만 지면 고려상 설명에 나온 작품들이 책에 다 실리지는 못한 점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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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며칠 되었던 책인데 리뷰를 쓸 수가 없었다. 좀 혼란스러웠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점을 느꼈다 하는 것은 정리해야할 것 같아서 간단하게 써 본다. 


이 책의 기본적인 시각은 '외부에서 바라본 유대인과 유대인 사회' 인 듯하다. 그러나 외부에서의 시선을 이야기하려면 내부의 입장에 대한 정리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그 점을 찾기 어려웠다고 할까. 

'살아있는 유대인에게 우리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려면 시오니즘, 유대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 구조 등의 배경에 대한 관점(여러 시각)을 알려주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책만 보고서는 무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어떤 모습이고 그들이 미국 사회에서 어떤 어려움을 갖는지, 최근 들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 등 이 책을 통해서 얻게 된 것들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아있는 우리는 괴롭다. 우리를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주렴.'하는 늬앙스로 읽혀서 어쩐지 찜찜한 부분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책이 떠올랐다. 물론 그 책은 지금의 유대인들과 유대인 사회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은 아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만을 다룬 것도 아니다. 주로 독일, 폴란드와 일본을 중심 지역으로 2차 대전 이후 정부와 민간이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를 통해 과도한 민족주의의 숭배의 문제점, 피해자와 가해자, 희생자의 용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패전 직후 지구적 기억구성체에서 집단적 희생자라는 역사적 위치는 유럽과 아시아 전선에서 먼저 전쟁을 도발하고 이웃 국가들을 침략한 독일과 일본 같은 추축국의 가해자들이 선점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와 전쟁 책임 문제가 기억에서 지워지고 탈역사화하자, 전쟁은 어느 날 문득 할퀴고 간 자연재해처럼 기억되었다. 자연재해에는 가해자가 없고 피해자만 있다. 가해자를 꼭 찾아야 한다면, 신이거나 운명이거나 비인간의 영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전쟁을 탈역사화하고 희생의 역사적 맥락을 지워버리는 순간, 역사의 가해자는 희생자로 위치를 바꾸고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정당화한다. -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中


피해자와 희생자는 언어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이거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같은 언어에서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면 순교자는 언어권의 경계를 넘어 그 의미가 거의 일치한다. 순교자는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신념을 위해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는 정치적 행위를 뜻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유대인은 피해자인가, 희생자인가, 아니면 가해자인가.우리는 어느 범주에 들어가야만 피해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피해자의 범주에 들지 않아 '나는 피해자요' 해도 색안경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소리다. 



책을 완독하고도 계속 고민했다. '내가 잘못 이해했나? 간과한 부분이 있나?' 그런데 마지막 챕터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챕터 별로 편차가 크다는 생각? 어떤 챕터에서는 앞뒤로 수식어나 미사여구가 중언부언 붙어서 '그러니까, 핵심이 뭔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얼빈의 유대인 사회 형성 과정과 결과,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시 유대인 탄압으로 유럽 예술계 인사들이 탈출해야 했던 이야기는 그래도 흥미롭게 읽었으나 나머지는 딱히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분명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사전 정보가 부족한 탓일 수도 있고 내가 선호하는 글의 문체가 아니기도 해서 지루하게 읽히기도 한 것 같다. 아무튼 다른 분들의 감상이 어떠할 지 나는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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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12 1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전문가 화가님이 혼란스러우실 정도면 정말 어렵거나(?) 불친절한(?) 책이 맞는겁니다~!!

건수하 2023-05-12 20:42   좋아요 2 | URL
저도 비슷한 내용의 댓글 달려고 했는데! 동감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3-05-13 07:43   좋아요 2 | URL
조심스럽습니다^^; 다른 분들의 책 감상에 방해가 될까 싶어 시일이 많이 지난 뒤에 올릴까 했는데 그러면 또 흐지부지해서 정리 못하고 넘어갈 것 같아서요. 읽으실 분들은 제 글 염두에 두시지
말고 읽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얄라알라 2023-06-08 13:01   좋아요 2 | URL
저는, 이 책 대출만 해놓고, 거의 손 못대다가, 다른 분께서 예약 걸어놓으셔서 반납하러 가는 길에 화가님의 리뷰를 보고,
좀 제 게으름이 민망하졌습니다.
다음에 읽을 때, 화가님 말씀 떠올리며 볼게요~~~

거리의화가 2023-06-08 13:06   좋아요 2 | URL
알라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 친구분들의 리뷰를 기다렸는데 아쉽게도 아직 글이 안 올라오더라구요ㅎㅎ 감사합니다^^

2023-05-13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4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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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의 전개 과정을 통해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관련한 인물들에 대해 대내외적 인사들이 내린 평가들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중일전쟁의 결과는 중국 내부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나(내전) 현대 미중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쳤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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