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장

북한은 단순히 소련의 위성국이아니었다. 1945~1946년 널리 확산된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성립된 다소비중앙집권적인 통일전선정부에서 시작해 소련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행사한 1947~1948년을 거쳐 1949년(즉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전이며동유럽의 스탈린주의화가 시작된 시점이라고 브워지미에서 브루스가 정의한 시기이에는 중국과 긴밀히 결속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은 두 사회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40년대 후반 북한 체제는 한국.소련·중국의 경험이 융합된 것으로, 한국의 정치문화가 모델로서 깊은 영향을 줬다. 또한 북한은 특히 당 구조와 지도 체제에서 소련·중국과는 크게 달랐다. - P432

1947~1948년 소련과 북한의 전략적 이익은 분명히 일치했다. 김일성이보기에 소련에 의존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필요했다. 이 시기의 시작부터 중국 국민정부군은 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됐다면 김일성은 앞문에는 호랑이가, 뒷문에는 늑대가 있는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의심할 필요 없이 장제스와 이승만은 거슬리는 뾰루지를 짜듯 북한을 압박하려고 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몇 년 또는 수십 년 더 산속에서 유격대 투쟁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8~1949년 중공군과 북한군이 국민정부군을 중국 동북 지역에서 몰아내면서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 짜낼뾰루지처럼 보인 것은 남한이었다. 마오쩌둥의 승리는 북한의 상황을 극적으로 바꿨고, 소련에 대한 요구 수준 또한 높였다. 이제 동북아시아는 현지의 거대한 공산군에게 지배됐다. 스탈린은 그것을 대단히 복잡한 심정으로바라봤을 것인데, 현지 정권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시도도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P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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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 페미니스트 법 이론
낸시 레빗.로버트 베르칙 지음, 유경민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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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스트 법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법 이론은 공통적으로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공유한다.

바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observation)과 나아가야 할 목표(aspiration)다. 먼저 페미니스트는 현재 남성이 누리는 권력과 특권은 남자들만이 이 세상을 만드는데 참여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페미니스트 법학자는 남성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문명의 법을 만드는 데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미국 역사에서 남자가 만든 법이 남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다음으로 모든 페미니스트는 여성과 남성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평등을 달성하는지에 관해 의견을 달리한다 - P28


대한민국 국민 중 헌법을 읽거나 공부해 본 이들이 얼마나 될까? 법관이 되기 위해 필요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면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법적 싸움에 휘말리거나 아니면 사회에 어떤 문제적 사건이 벌어져서 법리 해석에 따른 논쟁이 있을 때 해당 조항을 확인하지 않을까.


나도 그 대부분의 사람에 속한다. 솔직히 법이라는 것을 몰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거 월급을 못 받아서 고통 받던 일과 더 과거로 가면 집안에 돈 때문에 타인과 분쟁이 생겼을 때 몰라서 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법을 어설프게 알거나 제대로 모르면 당하는 일이 사실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전세사기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건설사, 공인중개사 등은 법의 허점을 노리고 덤벼드는데 계약자는 그 빈틈을 제대로 알지 못해 당한다. 언제까지 각자도생이라고 그냥 넘길 것인가. 법의 구멍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법의 개정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편 윤리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가부장제에 의해 생성된 것이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법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져 여성들에게는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거 미국 여성들이 법적으로 어떤 권리를 위해 싸워왔는지 여성들의 지난한 소송(법적 싸움)의 역사를 알려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훓어볼 수밖에 없는데 1장에서는 때문에 페미니즘의 역사와 정립된 이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페미니즘 이론이 실제 어떻게 법으로 만들어지는지 맥락화하여 보여준다. 


특히 동등대우 이론(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과 문화 페미니즘(남녀 차이와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대우는 달라야 한다)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기 때문에 실 사례에서도 논쟁이 많았던 이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 페미니즘과 지배 이론(여성과 남성은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은 서로 비슷한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지배 이론은 특히 가부장제를 문제 삼는다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다양한 법적 주제를 담고 있는데 개인별로 관심이 가는 부분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아무래도 직업과 고용, 교육, 섹스와 폭력에 특히 주목하여 보았던 것 같다. 


몇 년전 남성과 여성의 급여율에 대한 비교 리포트를 기사에서 보았었다(아마 주기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질텐데). 그 비율이 충격적이었던 것인지 지금도 그 비율이 기억이 난다. 69%였던가. 

그러니까 남성이 100만원 받을 때 여성이 69만원 받는다는 이야기다. 

전문대학이긴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입사를 했다.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하루 빨리 취업을 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입사하자마자 내 급여가 얼마였는지 지금도 기억나는데 솔직히 창피해서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문제는 초봉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매년 연봉이 오를텐데 나는 너무 더디게 올라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 남성과 초봉이 얼마나 차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다고 하더라도 남성들은 희한하게 나중에 보면 비율이 나와 다른 것이다. 

아무튼 나는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얼마 오르지 않았다(천 단위 올라가는 것이 왜 그리 오래 걸리는지...). 안 그래도 박봉인데 나는 늘 중소기업, 그것도 잘 나가는 회사가 아닌 곳들만 전전하며 다녀서인지 회사가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임금이 성별에만 좌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방끈의 길이에 따라, 전문성(스킬)에 따라, 태도 등 여러 가지 평가 기준이 있겠지만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굳이 이걸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내가 남자였다면 좀 더 나았을까 싶기도 했다. 

직업군 별로 여성의 비율이 높은 직업이 있고 남성의 비율이 높은 직업이 있다. 물론 꾸준이 이 비율의 차이가 줄어든다지만 여전히 교사, 간호사 등은 여성의 비율이 높고 트레이너, 군인, 지게차 기사, 철강/기계 종사자 등은 남성의 비율이 높다.

애초에 이런 직업들은 남성 또는 여성만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소수자들의 경우에도 이로 인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직업 간의 장벽이 사라지고 넘나듦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직업적인 차별도 줄어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미국 사례이다보니 재미는 덜하다. 그러다보니 한국 법 사례는 어떨까를 계속 생각하며 읽었던 것 같다. 관련 책이 있을 지는 모르겠고 없다면 이런 책이 나와주면 좋겠다.

법은 실생활에 적용되는 만큼 중요한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지켜보면서 법적 권리의 싸움에서 패소/승소하는 사례가 누적되어야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다.


여성 문제를 묻는다는 것은 겉보기에 중립적인 듯한 법률이 어떻게 성편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데이터를 사용하는, 어느 정도는 실증적인 평가이다. 여기서 특정한 법률이 여성의 경험을 고려하는지, 법규범이 암묵적으로 하나의 성에 우호적인지, 사회적 관행이 불법적인 성적 고정관념을 조장하는지에 관해서 반드시 질문해야 한다. 젠더의 영향을 평가하는 사례에는, 특정한 고용주에 의해 승진된 남성과 여성의 숫자를 세어보는 것, 엄마와 아빠 중에 누가 더 아이의 양육권 분쟁에서 이기기 쉬운지를 기록하는것, 학교 수업에서 소녀와 소년의 대우에 관한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포함된다. 조사 결과는 항상 여성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은데, 남성 역시 법에서 성별 편향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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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6-20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의 구성 비율이 높은 직종일 수록 성별 급여 차이가 좀 더 컸던 걸로 기억이 되네요?
지금도 그러한가 보군요?ㅜㅜ

거리의화가 2023-06-21 10:11   좋아요 1 | URL
직업별 성별 비율에 대한 구분이 없어져야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제가 다닐 때보다는 여성들도 임금의 수준이 더 나아졌겠지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차이는 존재하는 듯해서 씁쓸하네요.

다락방 2023-06-20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연하게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구체적 사례들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달리 생각하는 경험을 이 책을 읽으며 하고 있어요. 읽어두면 좋은책인 것 같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고 완독 축하합니다.
전 최근 회사 너무 바빠 스트레스 가득이라 좀처럼 진도가 안나가네요. 빨리 따라갈게요!!

거리의화가 2023-06-21 10:18   좋아요 0 | URL
네. 구체적인 사례들이 많아서 도움이 되더라구요. 단편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론에 따른 다양한 시각을 보여줘서 좋았어요. 한국에 관련된 법 사례에 대한 책도 나와주면 좋겠습니다ㅠㅠ
다락방님 많이 바쁘실텐데 건강 잘 챙기시고 완독도 응원합니다! 화이팅!
 

어제는 아침에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산책을 했다. 아침 기온도 20도 가까이 되니 괜찮겠다 싶었다.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바로 나왔는데 아뿔싸! 아무 것도 안 바르고 심지어 안경도 안 끼고 나왔다.

그 와중에 헤드폰은 챙겨 나와서 토지 18권을 들었다.

이제 6월도 중순이 넘어가니 녹음이 짙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나올 때만 해도 이른 시간이라 해는 안 떴는데 10분쯤 걷다 보니 점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반팔만 입어 좀 춥다 여겼는데 해가 나고 걷다 보니 추운 것이 가셨다.

안경을 안 쓰니 뵈는 것이 없어서 오히려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 기미가 걱정됐을 뿐(어차피 생긴 기미 조금 더 생긴다고 뭐 어떠랴).

이제 여름이 되었으니 한동안 주말에는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해야겠다.







거리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많지 않았다. 화신백화점 앞에도사람은 많지 않았다. 백화점의 임자가 친일파는 아니든 간에조선의 소시민들의 자존심 같은 화신백화점에서 새나오는 불빛은 황황했으나 어떤 적요감이 감돌고 있었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시(戰時), 구매력이 감소된 것도 사실이며 그보다 현저히 나타난 것은 물품의 기근이다. 사람들은 어디 어느상점에서 생필품인 무엇을 팔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곳으로왕창 몰려갔고 그러고 나면 그 상점은 잠잠해진다. 보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 있는 사람은 암시장을 찾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맬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인 관공리, 권력 있는 자들은 모든 귀한 물품, 생선이며 버터 치즈에 이르기까지 배급을 받으니 그들만은 전시 밖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아직은 암시장에 가면 값이 비싸 그렇지 대개의 것은 다 구할수 있었다. - P30


살기 위한 몸부림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그 당시 소시민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분투했으리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고 식민지민은 그 때문에 더 팍팍해졌다.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흉악해지는 것은 인심이 아니겠는가. 

요즘 천일염이 공급 대란이라 마트에 가면 그 자리가 비어있다고 한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임박했는데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되었다.



이틀동안 한국전쟁의 기원 2번째 권을 읽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을 통해 국가(인물)별 이해 관계와 정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다.

미국과 한국의 입장으로 나뉘어서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대부분의 사건은 얽혀서 서로 영향을 준다. 사건 하나만 덩그러니 벌어지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다.


국제협력주의·봉쇄· 반격이라는 일반적 범주는 한·미 관계를정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최초의 공식적 한국 정책, 곧 1943년부터 1947년 초반까지 다국적 신탁통치를 추진한 것은 국제협력주의적 단계를 보여준다. 신탁통치는 한국인이 좋아하지 않았고, 일본 패망 이후 몇 주또는 몇 달 동안 고심한 끝에 봉쇄 정책을 선택한 미 점령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봉쇄정책은 1947년 봄 공식적으로 승인돼 유엔의 집단 안전보장이라는 국제협력주의의 의상을 걸쳤지만, 그리스와 터키에서 나타난 것 같은 현실 정치로서 봉쇄라는 성질을 지녔다. 그 단계는 1949년 여름,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지속됐지만, 미군이 떠나자마자 반격이라는 대안이 탁자 위에 놓였다. 반격 정책은 전후인 1950년가을에야 실시됐지만 그 전조는 1949년에 나타났으며, 얼핏 보기에 기묘한세력의 지원을 받아 태어났다. - P72


월요일이지만 금요일 퇴근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왜냐! 공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윤아 솔로 콘서트다. 

주말에도 무더웠는데 오늘도 무더울 예정이지만 그래도 공연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한주를 잘 보내야 별 탈없이 공연에 갈 수 있겠지. 컨디션 조절을 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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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19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나무 싱그럽네요. 나무는 초록초록 여름에 정말 좋은것 같아요. 물론 봄에도 좋고 가을에도 좋지만요. 훗.

저는 토지 듣기 포기하고 윌라 멤버십 해지했어요. 거리의화가 님 토지 벌써 18권이라니. 와- 응원합니다!!

공연도 즐겁게 관람하고 오셔요!!

거리의화가 2023-06-19 17:05   좋아요 0 | URL
저 각도를 무척 좋아해요^^ 나뭇잎이 무럭무럭 자라서 하늘을 가리는데 그 사이로 햇살이 쫙 들어올 때 참 아름다워서요.
이제 3권 남아서 두근두근합니다. 괭님하고 함께 달리고 있어서 외롭지는 않네요!ㅎㅎㅎ
공연을 생각하니 빨리 금요일 퇴근 때가 오면 좋겠습니다^^*

stella.K 2023-06-19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의 기원. 그 두꺼운 책을...?!
저도 읽고 싶긴하지만 압도하는 두꺼움 때문에.ㅠ
김윤아 저도 좋아하는 가순데 설레이시겠어요.
부럽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6-20 09:10   좋아요 1 | URL
예전에 천페이지에 육박하는 책도 읽은지라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물론 두껍기는 하죠^^;
공연장이 멀어 안 갈까 했는데 그래도 또 언제 공연할 지 모르니 갈 수 있을 때 가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공연 다녀오고 나서 간단히 후기 올려보겠습니다^^

희선 2023-06-22 0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주말 이틀만 지나면 오는군요 이틀이 천천히 갈지 빨리 갈지... 기다리는 시간이 즐거워도 기다리면 시간이 잘 안 가기도 하죠 그래도 그날이 오면 벌써 그렇게 됐나 하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공연 즐겁게 다녀오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22 09:43   좋아요 0 | URL
네. 어느덧 목요일이군요! 다행입니다ㅎㅎㅎ 비가 와서 좀 후텁지근했는데 오늘은 상큼하게 개어서 이 또한 좋네요. 이 날씨가 주말까지 쭉 가면 좋겠습니다. 희선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거리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많지 않았다. 화신백화점 앞에도사람은 많지 않았다. 백화점의 임자가 친일파는 아니든 간에조선의 소시민들의 자존심 같은 화신백화점에서 새나오는 불빛은 황황했으나 어떤 적요감이 감돌고 있었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시(戰時), 구매력이 감소된 것도 사실이며 그보다 현저히 나타난 것은 물품의 기근이다. 사람들은 어디 어느상점에서 생필품인 무엇을 팔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곳으로왕창 몰려갔고 그러고 나면 그 상점은 잠잠해진다. 보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 있는 사람은 암시장을 찾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맬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인 관공리, 권력 있는 자들은 모든 귀한 물품, 생선이며 버터 치즈에 이르기까지 배급을 받으니 그들만은 전시 밖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아직은 암시장에 가면 값이 비싸 그렇지 대개의 것은 다 구할수 있었다. - P30

신문에는 온통 전쟁에 관한 기사뿐이었다. 물론 여태까지 신문은 전쟁에 관한 것 일색이었지만 전선이 달라지고 적대국이달라지면서부터 일종의 히스테리처럼 신문지면은 요란해진 것이다. 식량증산, 저축장려, 국방헌금, 유기·기타 금속류의 헌납, 지원병 독려와 아울러 동태 상황에 대한 선전, 각종 단체들은 영일(寧日)없이영미)를 성토하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연일 진충보국(盡忠報國)과 성전환수를 외쳐대고 있었다. 특히 지식층, 그 중에서도 글 써서 행세해왔던 문인들 문학단체들은 남 먼저, 보다 과격하게 일왕(日)에 대하여 충성을맹세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마치 총 든 놈이 뒤에서 목덜미를 겨누고 있기라도 하듯이. 오늘 신문에도 저명한여류시인의 시(詩) 전승부」가 실려 있었다. - P53

"친일하는 사람이나 반일하는 사람, 방관하는 사람, 그들도 각기 개인에 따라 사정은 다르지요. 친일도 열광하는 사람, 열광하는 척하는 사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그게 어찌 다 일색이라 할 수 있겠어요? 여하튼 지금은 비상시국아니에요? 방관자나 비협조자를 그냥 놔둘 여유가 없는 것만은사실이에요. 어떤 형식으로든 바람은 불 거예요."
스스로 달변에 취하여 배설자의 얼굴 근육은 잘게 흔들리고있었다.

"지금 예술계에서도 전적인 개편이 있었고 국민문학 국민연극 등 전환을 부르짖고 있잖아요? 그게 다 정비 작업의 전초 아니겠어요?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새로운 잡지들이 나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까 대일본제국에대한 충성을, 피 한방울까지 성전(聖戰)을 위해 바쳐라, 그렇게떠들라는 거지 뭐겠어요?" - P75

"그 얘기를 하니까 얼핏 생각이 나는데요. 무용으로 총후보국(銃後報國)이라는 그 기사가 나온 같은 날짜의 신문인데요, 박춘금(朴春琴)씨 질문에 대하여 도조[東條] 수상이 답변하기를 조선의 징병제도에 대하여 실시 여하를 연구 중이라, 그랬어요.
앞으로 조선 청년들도 모조리 전쟁에 나가는 거 아닐까요?"
덕희의 말이었다.
"그건 이미 예상된 일 아니겠어요? 그리고 연구 중이라 한 말은 곧 실시하겠다는 뜻 아니겠어요?"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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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장

CIA는 "지리적 인접성과 경제 발전의 특징 때문에 동북아시아와 일본 경제의 상호 보완적 성격은 [더욱] 높아졌다"고 주장하고, 시장과 원자재를 핵심 요소로 지적하면서 만주의 철광석과 북한의 합금철金鐵을 보기로 들었다. 그 지역을 통합하면 "극동에서 가장 큰 산업 잠재력이 될 것"
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일본이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에서 배제되면" "일본이 본래 유지하던 무역 형태가 급격히 왜곡될 것이며, 미국이 상당한 액수의무역 적자를 계속 보충해줄 용의가 있어야만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 - P262

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보고서는 미국이 목재·펄프·점결탄粘結같은 "각종 기본 원자재"를 일본에 공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지 않으면일본은 "경제를 다시 정상화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소련과 연합할 것"이라고예측했다. - P263

곧잘 국무부 "친일 인사"의 한 명으로 간주되던 맥스 비숍은 봉쇄 이후의 새로운 논리를 처음 파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48년 12월 국무부 동북아과장이던 그는 동아시아의 상황이 변하고 있으므로 한국정책의 시행과 관련된 국가안보회의 문서 8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 세력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사실로 굳어지면 일본 열도는 3면이 이어진 활 모양의 공산 세력 영토에 포위될 것이므로 우리 - P263

는 일본을 미국의 영향권 안으로 포함하는 데 점점 더 큰 어려움에 맞닥뜨릴 것이다." 남한이 무너지면 미국은 "대륙에서 마지막 우방을 잃는 것이다.
한국의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데 실패하면 "태평양에서 미국의 안보는 끝내무너질 것이다". 이것은 한국이 일본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라는 히데요시와메이지 지도부의 오래된 전략 논리였다. - P264

비숍드레이퍼 로열 같은 관료가 분명한 친일 입장을 가진 부류와 연결됐다는 숀버거와 로버츠의 판단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다. 전전 비숍은 도쿄의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일본의 경제 부흥 계획을 수립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그는 로열과 드레이퍼를 수행해 자주 일본에 갔다.
앞서 본 대로 그는 국가안보회의 문서 48을 입안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 뒤 드레이퍼는 대동아공영권의 배후에는 개발이 낙후된 지역의 식량과 원자재를 일본의 기계·섬유·공업 제품과 교환하려는 구상이 있었다고 썼다. "이런 경제적 목표는 전체적으로 건전했으며, 평화롭고 공정하게 추구한다면 그 지역 전체의 1인당 자산을 늘리고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었지만 (-) [일본은] 무력으로 공영권을 획득해 폭력으로 경제생활을 지배하려고 했다]." - P273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은, 애치슨이 대체로 대중을 그렇게 봤던 것처럼, 소련을 감정에 치우쳐 바라봤으며 반격 세력이 선호한 악마 같은 이미지를소련에 부여했다. 그 문서에서는 소련 국민을 새로운 용어로 표현했다. 즉 "전체주의의 국민이라는 것이었다.

세계는소련 안팎의 공산주의자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꿀 때까지는 평화로워질 수 없었다. 이런 식의 병적인 오리엔탈리즘과 인간성을 무시한 서술은 국가안보회의 문서 68 이 악마 같은 이미지를 이용하는 데 개의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 P279

남한의 "파시즘은 북한의 "공산주의와 매우 비슷했으며 중국의 검증을 거친 서구의 이념을 비서구적 맥락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이범석은 장제스의 경험을 자신들의 우익 정치의 가장 가까운 모범으로 삼았고, 이승만은국민당 체제와 장제스가 신구 이념을 혼합한 것을 본받아 막연히 이해한 유럽 파시스트 정치 방식을 동양의 전통과 유교에 여과시켰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한국화한 파시즘이 아닌 파시즘화한 한국 정치였다. - P298

이승만은 "행동하는 것은 쉽지만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는 장제스의 말에 동의하고 그와 대비되는 마오쩌둥의 격언-"생각하는것은 쉽지만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ㅡ은 조잡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전제에 따라 그의 정권 그리고 이후 줄곧 남한 정치 운영에서 나타난 특징은 이론에서는 단호한 자유주의였지만 행동에서는 위선이었다. 통치의 첫 번째 원리는 올바른 사상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었고, 그 사상이 정치적 현실과 자주 괴리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통치 원칙은 이론과 실천에서 한국 유교와 서구 파시즘, 민주주의적 구호口號, 중국국민당의 허세와 불운 그리고 일본의 효과적 통치 방법을 혼합한 것이었다. - P317

1950년 무렵 CIA는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노쇠"했고 소수의 고문에게 큰 영향을 받으며 "단호하고 강력한 의지와 고집"과 "큰 설득력"을 가졌고, 소련에게는 "철저하고 타협하지 않는 두려움과 증오를 품었으며, "내각과 요직에 대일 협력자를 수용했다. 그는 합법적 야당이라는 개
‘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용인하지 않으면서 "엄중한 검열과 경찰폭력 - P340

같은 전체주의적 수단 그리고 청년 단체와 무장한 ‘애국적‘ 단체 같은 정부외의 기구를 사용해 비공산주의 대항 세력과 정당을 위협하고 파괴하기를망설이지 않는 인물이다. - P341

미군 방첩대의 정보에 따르면, 당시 도지사 유해진은 "극우인사"로 광복청년회·대동청년단과 연결된 본토 출신이었다. 그는 "대립하고있는 정당을 독재적인 방식으로 가차 없이 다뤘다. 그는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나 김성수의 한민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좌익"이라고 생각했다. 1947년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이 명확히 승인한 정당을 제외한 어떤 정당의 집회도 저지하려고 했다.
유 지사는 제주도의 경찰 부대를 본토와 북한 출신으로 채웠고, 그들은
"극우 정당의 테러리스트"와 함께 행동했다. - P377

1948년 5월 22일 브라운 대령은 반란군을 분쇄하기 위해 다음의 수단을 도입했다.
경찰은 모든 해안 지역 촌락을 [유격대로부터] 보호하고 무기를 지니고 있는반란군을 체포하며 무고한 시민의 학살과 폭행을 중단한다.
국방경비대는 도 내륙지역 (・・) 인민민주군의 모든 인원을 토벌하는 구체적인임무를 맡는다.
또한 그는 체포한 모든 사람에게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심문을 하고, 유격대에게 물자를 공급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계속해서 그는 도민에게 "공산주의의 해악을 확실히 증명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미국의 방식이 확실한 희망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기 계획을 구상했다. 5월 28일부터 7월 말까지 3000명 이상의 도민이 체포됐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다른 증거가 있다. 이를테면 반란 진압군을 날마다 교육하고 죄수를 심문하며, 유격대를 찾아내는 데 미국 정찰기를 사용하는 것 등이다. 한 신문에서는 4월 하순 적어도 한 사건에서 제주도의 소요에 미군 부대가 개입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6월에 한국인 기자단은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이 비밀리에 제주도로 돌아와 반란 진압을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 P381

여순반란은 1주 남짓 지속된 격렬한 폭풍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이승만은 야당인 한민당이 제기한 미온적이고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끄러운 반대를 물리치고, 이 반란 사건을 이용해 자신의 통치 행위에 제기된 모든 저항을 탄압했다. 규모와 중요성에서 여순반란은 1946년 가을 봉기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일으킨 즉흥적이고 대단히 멍청한 반란으로, 전라남도의 강력한 좌익 기반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을 뿐이다. 실제로 투옥된 한 남로당원은 그 반란은
"성급했다"고 당국에 말했다. 이 말은 당이 대비하지 못했고 따라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남로당 활동가들은 반란에 가담했다. 그것은 그 봉기가 "인민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고 인민은 "혁명을 일으킬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당은 다음 기회에는 인민을 지도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80 이 보고서에는 진실이담겨 있으며 증거와 합치한다. 이것은 남한 좌익의 묘비명이었다. 대중적 기반은 있었지만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활동가들은 반란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여수의 역사적 중요성은 3년에 걸친 좌익활동이 실패의 막을 내렸다는 그 반란적 특징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격대의 투쟁을 본토로 확대하는 데 촉매로도 작용했다. - P395

딘 애치슨과 조지 케넌은 국내의 위협을 진압할 수 있는지 여부가 이승만정권의 자율성을 알아보는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미국이 후원하는 봉쇄 정책도 성공할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승만 정권은 제2의 국민정부가 될 것이었다. 프레스턴 굿펠로 대령은 1948년 후반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에 대해 [애치슨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고 말하면서, 유격대는 "즉시 소탕해야 하며 () 한국이 공산주의자의 위협을떻게 처리하는지 모든 사람이 주시하고 있다"고 썼다. 유약한 정책은 워싱턴의 지원을 잃을 것이었다. 위협을 잘 처리하면 "한국은 높은 존중을 받을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지지는 한국군이 유격대와 싸우려는 의지에결정적으로 달려 있었다.
내부 문건에서는 역겨운 잔혹 행위를 기록했지만,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진압 작전을 칭송했다. - P420

미국인과 한국인은 적절한 진압 방법을 둘러싸고 늘 충돌을 빚었지만, 이런 갈등 속에서 미국의 방법과 일본이 만주의 추운 날씨와 산악 지형에서유격대와 전투를 벌이면서 개발한 진압 기법 그리고 일본군(대체로 만주에서 복무한 한국인 장교들이 시행한 방식이 융합됐다.
그 방법은 기본적으로 날씨와 지형을 이용하며 단호하고 잔인한 수단으로, 유격대를 농민 지지자로부터 떨어뜨려놓는 것이었다.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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