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CIA는 "지리적 인접성과 경제 발전의 특징 때문에 동북아시아와 일본 경제의 상호 보완적 성격은 [더욱] 높아졌다"고 주장하고, 시장과 원자재를 핵심 요소로 지적하면서 만주의 철광석과 북한의 합금철金鐵을 보기로 들었다. 그 지역을 통합하면 "극동에서 가장 큰 산업 잠재력이 될 것"
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일본이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에서 배제되면" "일본이 본래 유지하던 무역 형태가 급격히 왜곡될 것이며, 미국이 상당한 액수의무역 적자를 계속 보충해줄 용의가 있어야만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 - P262

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보고서는 미국이 목재·펄프·점결탄粘結같은 "각종 기본 원자재"를 일본에 공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지 않으면일본은 "경제를 다시 정상화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소련과 연합할 것"이라고예측했다. - P263

곧잘 국무부 "친일 인사"의 한 명으로 간주되던 맥스 비숍은 봉쇄 이후의 새로운 논리를 처음 파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48년 12월 국무부 동북아과장이던 그는 동아시아의 상황이 변하고 있으므로 한국정책의 시행과 관련된 국가안보회의 문서 8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 세력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사실로 굳어지면 일본 열도는 3면이 이어진 활 모양의 공산 세력 영토에 포위될 것이므로 우리 - P263

는 일본을 미국의 영향권 안으로 포함하는 데 점점 더 큰 어려움에 맞닥뜨릴 것이다." 남한이 무너지면 미국은 "대륙에서 마지막 우방을 잃는 것이다.
한국의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데 실패하면 "태평양에서 미국의 안보는 끝내무너질 것이다". 이것은 한국이 일본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라는 히데요시와메이지 지도부의 오래된 전략 논리였다. - P264

비숍드레이퍼 로열 같은 관료가 분명한 친일 입장을 가진 부류와 연결됐다는 숀버거와 로버츠의 판단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다. 전전 비숍은 도쿄의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일본의 경제 부흥 계획을 수립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그는 로열과 드레이퍼를 수행해 자주 일본에 갔다.
앞서 본 대로 그는 국가안보회의 문서 48을 입안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 뒤 드레이퍼는 대동아공영권의 배후에는 개발이 낙후된 지역의 식량과 원자재를 일본의 기계·섬유·공업 제품과 교환하려는 구상이 있었다고 썼다. "이런 경제적 목표는 전체적으로 건전했으며, 평화롭고 공정하게 추구한다면 그 지역 전체의 1인당 자산을 늘리고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었지만 (-) [일본은] 무력으로 공영권을 획득해 폭력으로 경제생활을 지배하려고 했다]." - P273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은, 애치슨이 대체로 대중을 그렇게 봤던 것처럼, 소련을 감정에 치우쳐 바라봤으며 반격 세력이 선호한 악마 같은 이미지를소련에 부여했다. 그 문서에서는 소련 국민을 새로운 용어로 표현했다. 즉 "전체주의의 국민이라는 것이었다.

세계는소련 안팎의 공산주의자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꿀 때까지는 평화로워질 수 없었다. 이런 식의 병적인 오리엔탈리즘과 인간성을 무시한 서술은 국가안보회의 문서 68 이 악마 같은 이미지를 이용하는 데 개의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 P279

남한의 "파시즘은 북한의 "공산주의와 매우 비슷했으며 중국의 검증을 거친 서구의 이념을 비서구적 맥락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이범석은 장제스의 경험을 자신들의 우익 정치의 가장 가까운 모범으로 삼았고, 이승만은국민당 체제와 장제스가 신구 이념을 혼합한 것을 본받아 막연히 이해한 유럽 파시스트 정치 방식을 동양의 전통과 유교에 여과시켰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한국화한 파시즘이 아닌 파시즘화한 한국 정치였다. - P298

이승만은 "행동하는 것은 쉽지만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는 장제스의 말에 동의하고 그와 대비되는 마오쩌둥의 격언-"생각하는것은 쉽지만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ㅡ은 조잡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전제에 따라 그의 정권 그리고 이후 줄곧 남한 정치 운영에서 나타난 특징은 이론에서는 단호한 자유주의였지만 행동에서는 위선이었다. 통치의 첫 번째 원리는 올바른 사상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었고, 그 사상이 정치적 현실과 자주 괴리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통치 원칙은 이론과 실천에서 한국 유교와 서구 파시즘, 민주주의적 구호口號, 중국국민당의 허세와 불운 그리고 일본의 효과적 통치 방법을 혼합한 것이었다. - P317

1950년 무렵 CIA는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노쇠"했고 소수의 고문에게 큰 영향을 받으며 "단호하고 강력한 의지와 고집"과 "큰 설득력"을 가졌고, 소련에게는 "철저하고 타협하지 않는 두려움과 증오를 품었으며, "내각과 요직에 대일 협력자를 수용했다. 그는 합법적 야당이라는 개
‘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용인하지 않으면서 "엄중한 검열과 경찰폭력 - P340

같은 전체주의적 수단 그리고 청년 단체와 무장한 ‘애국적‘ 단체 같은 정부외의 기구를 사용해 비공산주의 대항 세력과 정당을 위협하고 파괴하기를망설이지 않는 인물이다. - P341

미군 방첩대의 정보에 따르면, 당시 도지사 유해진은 "극우인사"로 광복청년회·대동청년단과 연결된 본토 출신이었다. 그는 "대립하고있는 정당을 독재적인 방식으로 가차 없이 다뤘다. 그는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나 김성수의 한민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좌익"이라고 생각했다. 1947년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이 명확히 승인한 정당을 제외한 어떤 정당의 집회도 저지하려고 했다.
유 지사는 제주도의 경찰 부대를 본토와 북한 출신으로 채웠고, 그들은
"극우 정당의 테러리스트"와 함께 행동했다. - P377

1948년 5월 22일 브라운 대령은 반란군을 분쇄하기 위해 다음의 수단을 도입했다.
경찰은 모든 해안 지역 촌락을 [유격대로부터] 보호하고 무기를 지니고 있는반란군을 체포하며 무고한 시민의 학살과 폭행을 중단한다.
국방경비대는 도 내륙지역 (・・) 인민민주군의 모든 인원을 토벌하는 구체적인임무를 맡는다.
또한 그는 체포한 모든 사람에게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심문을 하고, 유격대에게 물자를 공급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계속해서 그는 도민에게 "공산주의의 해악을 확실히 증명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미국의 방식이 확실한 희망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기 계획을 구상했다. 5월 28일부터 7월 말까지 3000명 이상의 도민이 체포됐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다른 증거가 있다. 이를테면 반란 진압군을 날마다 교육하고 죄수를 심문하며, 유격대를 찾아내는 데 미국 정찰기를 사용하는 것 등이다. 한 신문에서는 4월 하순 적어도 한 사건에서 제주도의 소요에 미군 부대가 개입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6월에 한국인 기자단은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이 비밀리에 제주도로 돌아와 반란 진압을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 P381

여순반란은 1주 남짓 지속된 격렬한 폭풍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이승만은 야당인 한민당이 제기한 미온적이고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끄러운 반대를 물리치고, 이 반란 사건을 이용해 자신의 통치 행위에 제기된 모든 저항을 탄압했다. 규모와 중요성에서 여순반란은 1946년 가을 봉기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일으킨 즉흥적이고 대단히 멍청한 반란으로, 전라남도의 강력한 좌익 기반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을 뿐이다. 실제로 투옥된 한 남로당원은 그 반란은
"성급했다"고 당국에 말했다. 이 말은 당이 대비하지 못했고 따라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남로당 활동가들은 반란에 가담했다. 그것은 그 봉기가 "인민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고 인민은 "혁명을 일으킬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당은 다음 기회에는 인민을 지도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80 이 보고서에는 진실이담겨 있으며 증거와 합치한다. 이것은 남한 좌익의 묘비명이었다. 대중적 기반은 있었지만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활동가들은 반란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불렀다. 여수의 역사적 중요성은 3년에 걸친 좌익활동이 실패의 막을 내렸다는 그 반란적 특징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격대의 투쟁을 본토로 확대하는 데 촉매로도 작용했다. - P395

딘 애치슨과 조지 케넌은 국내의 위협을 진압할 수 있는지 여부가 이승만정권의 자율성을 알아보는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미국이 후원하는 봉쇄 정책도 성공할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승만 정권은 제2의 국민정부가 될 것이었다. 프레스턴 굿펠로 대령은 1948년 후반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에 대해 [애치슨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고 말하면서, 유격대는 "즉시 소탕해야 하며 () 한국이 공산주의자의 위협을떻게 처리하는지 모든 사람이 주시하고 있다"고 썼다. 유약한 정책은 워싱턴의 지원을 잃을 것이었다. 위협을 잘 처리하면 "한국은 높은 존중을 받을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지지는 한국군이 유격대와 싸우려는 의지에결정적으로 달려 있었다.
내부 문건에서는 역겨운 잔혹 행위를 기록했지만,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진압 작전을 칭송했다. - P420

미국인과 한국인은 적절한 진압 방법을 둘러싸고 늘 충돌을 빚었지만, 이런 갈등 속에서 미국의 방법과 일본이 만주의 추운 날씨와 산악 지형에서유격대와 전투를 벌이면서 개발한 진압 기법 그리고 일본군(대체로 만주에서 복무한 한국인 장교들이 시행한 방식이 융합됐다.
그 방법은 기본적으로 날씨와 지형을 이용하며 단호하고 잔인한 수단으로, 유격대를 농민 지지자로부터 떨어뜨려놓는 것이었다.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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