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많지 않았다. 화신백화점 앞에도사람은 많지 않았다. 백화점의 임자가 친일파는 아니든 간에조선의 소시민들의 자존심 같은 화신백화점에서 새나오는 불빛은 황황했으나 어떤 적요감이 감돌고 있었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시(戰時), 구매력이 감소된 것도 사실이며 그보다 현저히 나타난 것은 물품의 기근이다. 사람들은 어디 어느상점에서 생필품인 무엇을 팔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곳으로왕창 몰려갔고 그러고 나면 그 상점은 잠잠해진다. 보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 있는 사람은 암시장을 찾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맬밖에 없었다. 다만 일본인 관공리, 권력 있는 자들은 모든 귀한 물품, 생선이며 버터 치즈에 이르기까지 배급을 받으니 그들만은 전시 밖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아직은 암시장에 가면 값이 비싸 그렇지 대개의 것은 다 구할수 있었다. - P30

신문에는 온통 전쟁에 관한 기사뿐이었다. 물론 여태까지 신문은 전쟁에 관한 것 일색이었지만 전선이 달라지고 적대국이달라지면서부터 일종의 히스테리처럼 신문지면은 요란해진 것이다. 식량증산, 저축장려, 국방헌금, 유기·기타 금속류의 헌납, 지원병 독려와 아울러 동태 상황에 대한 선전, 각종 단체들은 영일(寧日)없이영미)를 성토하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연일 진충보국(盡忠報國)과 성전환수를 외쳐대고 있었다. 특히 지식층, 그 중에서도 글 써서 행세해왔던 문인들 문학단체들은 남 먼저, 보다 과격하게 일왕(日)에 대하여 충성을맹세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마치 총 든 놈이 뒤에서 목덜미를 겨누고 있기라도 하듯이. 오늘 신문에도 저명한여류시인의 시(詩) 전승부」가 실려 있었다. - P53

"친일하는 사람이나 반일하는 사람, 방관하는 사람, 그들도 각기 개인에 따라 사정은 다르지요. 친일도 열광하는 사람, 열광하는 척하는 사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그게 어찌 다 일색이라 할 수 있겠어요? 여하튼 지금은 비상시국아니에요? 방관자나 비협조자를 그냥 놔둘 여유가 없는 것만은사실이에요. 어떤 형식으로든 바람은 불 거예요."
스스로 달변에 취하여 배설자의 얼굴 근육은 잘게 흔들리고있었다.

"지금 예술계에서도 전적인 개편이 있었고 국민문학 국민연극 등 전환을 부르짖고 있잖아요? 그게 다 정비 작업의 전초 아니겠어요?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폐간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새로운 잡지들이 나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까 대일본제국에대한 충성을, 피 한방울까지 성전(聖戰)을 위해 바쳐라, 그렇게떠들라는 거지 뭐겠어요?" - P75

"그 얘기를 하니까 얼핏 생각이 나는데요. 무용으로 총후보국(銃後報國)이라는 그 기사가 나온 같은 날짜의 신문인데요, 박춘금(朴春琴)씨 질문에 대하여 도조[東條] 수상이 답변하기를 조선의 징병제도에 대하여 실시 여하를 연구 중이라, 그랬어요.
앞으로 조선 청년들도 모조리 전쟁에 나가는 거 아닐까요?"
덕희의 말이었다.
"그건 이미 예상된 일 아니겠어요? 그리고 연구 중이라 한 말은 곧 실시하겠다는 뜻 아니겠어요?"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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