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김윤아 콘서트를 다녀왔다. 솔로 콘서트는 오랜만이라 긴장도 되었지만 오히려 편안한 마음도 있었다. 커플들도 많았지만 나처럼 혼자 온 이들도 많았다.

공연장이 대학교 안이여서 간만에 젊음(!)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공연장을 찾는다고 헤매다가 처음 부닥친 건물이 알고 보니 공과대학이어서 나의 대학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속으로 공대생들 화이팅!을 외쳤다는). 분수대에 분수는 끊임없이 나오고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무척 찌는 날씨만 아니였다면 캠퍼스를 배회할 것을 그러기엔 너무 무더웠다.

공연은 전체적으로 "사랑의 시작과 끝!"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사람은 본디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이므로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가 아닐까. '행복한 사랑은 없네'라는 콘서트의 부제가 말해주듯 뭘 모르던 때의 사랑은 낭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지만 사랑의 본질은 어쩌면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내게 사랑은 욕망이라는 단어와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끝까지 탐하며 쫓아가면 그 끝은 파멸이라는 것과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고 심하게 회의적이다. 이런 사람이 결혼을 한 게 아이러니하기는 하나 오히려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현실적이어서 기대치가 낮아서 가능한 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노래 사이에 김윤아의 이야기가 더해져 공연 마지막이 되면 한 줄기의 스토리가 완성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에는 노래 사이에 관객과의 소통과 대화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 방식이 마치 연극에서 배우들이 하는 대사처럼 느껴져 신선했던 것 같다.

특히 오랜만에 듣는 도쿄 블루스, 강, 담, 유리가 정말 좋았다.




가창은 말해 무엇하리오. 2시간 20분 간 완벽한 기승전결의 서사가 이어졌고 앵콜곡이 되자 눈물이...



그리고 책과 커피를 샀다.
공교롭게도 모아 놓으니 붉은 계열이 되어 버렸네.

첫 번째 책은 7월의 여성주의 책인 <성의 변증법>이다. 표지도 강렬해서 기가 살짝 죽는데 내용도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아 걱정이 된다. 7월 초부터 바짝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는 바바라 터크먼의 <8월의 포성>이다. 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를 다룬 전쟁사로 정평이 나 있는 책인데 기존 책의 중고가가 어마무시해서 사려고 해도 엄두가 안났는데 마침 딱 새로 나와주어 감사한 마음으로 질렀다. 두껍지만 양장본이 아니라 무겁지도 않아 마음에 든다.
커피는 알라딘 일산 블렌드라고 하는데 그냥 물 많이 타서 숭늉처럼 마시려고 샀다^^;



토요일에 집에 들어오니 거의 일요일이 된 시간이어서 무리하지 말자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오늘 휴가를 미리 내 놓았고 오늘까지 푹 쉬었다. 덕분에 컨디션은 괜찮다.


<한국전쟁의 기원> 시리즈를 완독하여 6월에 큰 독서 목표는 끝낸 셈이라 마음이 홀가분하다.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짧은 시간 내에 급격하게 국지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하여 걱정이다. 다들 비 피해 없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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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26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김윤아 콘서트라니~참 좋으셨겠어요! 고등학생 때 노래방 가면 꼭 누군가는 부르던 노래가 자우림의 일탈이었는데 ㅎㅎ 나중에 솔로 1집 사서 한동안 빠져있기도 했던 기억입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같은 벽돌이를 금방 완독하신 화가님께 존경의 눈빛 발사!!!😍😍😍

거리의화가 2023-06-27 13:12   좋아요 1 | URL
<일탈>은 노래방에서 불러줘야 제맛인 곡이죠! 한참 공부로 스트레스 쌓였을 때 그 곡은 정말 해소제같은 곡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솔로 1집 명반이죠. 저도 정말 좋아하는 음반입니다^^
<한국전쟁의 기원> 미국 정치계 인물들 이름이 많이 나오고 그 관계들이 어지러워서 좀 몽롱해질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땐 그러려니 하고 전체적인 흐름만 잡고 가는 식으로 가야지 다 잡으려다간 힘들더군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3-06-27 0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던 책 다 보셔서 기쁘시겠습니다 그 뒤 콘서트에 가셨군요 대학 안에 있는 공연장이어서 색다른 느낌이 들었겠네요 덜 더웠다면 둘레도 걸어봤겠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 좀 더웠죠 비가 오고도 습기가 심해서 좀 덥기도 합니다 장마 시작부터 비 많이 온다고 말해서 걱정하기도 했네요 큰 피해 없이 지나가면 좋을 텐데...

거리의화가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27 13:09   좋아요 1 | URL
저는 대학 안에 공연장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보통 올림픽홀 공연장이나 블루스퀘어 같은 전용 공연장 같은 곳만 갔었어서 색다르더군요. 말씀하신대로 좀만 덜 더웠어도 돌아봤을텐데 그러기엔...ㅋㅋㅋ
희선님 이번 한주도 즐겁게 보내세요*^^*

자목련 2023-06-27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시간 보내셨네요. 콘서트에 가 본 기억이 너무 너무 멀리 있네요.
<한국전쟁이 기원> 6월에 완독하셨다니 계획적이고 의미있는 독서였겠구나 싶어요.
이제 7월의 독서로 돌입하시는 건가요?

거리의화가 2023-06-27 13:11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좋았어요. 콘서트 저도 자주는 못가고 결국 좋아하는 가수가 공연한다고 하면 그때 한번씩 가는 것 같아요. 이번엔 1년 만이었네요^^
<한국전쟁의 기원> 6월을 넘기지 않고 끝내서 마음이 후련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 중에 한두 권 정도 더 읽으면 7월로 넘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레삭매냐 2023-06-27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지난 토요일 너무
무더웠습니다.

그래도 독서모임의 시간
은 즐거웠네요.

<8월의 포성>이란 책은 처음
들어보는데 바로 땡기네요.
이 책은... 희망도서로다가 도
서관을 이용해 볼까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6-27 16:28   좋아요 0 | URL
오후 5시가 넘은 시각이었는데 해가 작열하고 끓어오르고 있더라구요. 도심의 지열까지 더해져서 장난이 아니었네요. 심지어 콘서트 끝나고 나왔는데도 후텁지근한 공기가...ㅎㅎ

독서모임 즐거우셨겠어요. 예전엔 종종 했었는데 이젠 서울에 가려면 3시간 정도는 생각하고 가야 해서 부담이 되더군요ㅠㅠ

<8월의 포성> 매냐님도 좋아하실 책일 듯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6-27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대생 파이팅!!! ㅋㅋㅋ
저도 함께 외쳐봅니다^^
자우림 김윤아는 이제 자동적으로 화가 님 가수같아요^^
저는 지인들이 동네나 부산 인근에 가수들 콘서트 공연 있다는 소식이 뜨면 보자!!!! 그래서 따라가는 편이어서 나의 가수는 정녕 보진 못했네요.
최근에 변진섭 가수가 남쪽에 내려온대서 보고 왔어요. 목소리는 여전하던데 외형이 조금 변해서 깜놀했네요ㅋㅋㅋ
김윤아 가수 공연도 보고 싶어요. 남쪽엔 안내려오나 봅니다?
작년 겨울엔 알리랑 정동하 가수 듀엣 공연 봤네요. 저 지금 여기서 웬 자랑을?ㅋㅋㅋ

다시 책 얘기로~
<한국전쟁의 기원> 완독은 축하드리며 부럽기도 합니다^^
목표를 세우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마는 화가 님! 믿음직 합니다^^
7월의 여성주의 책은 <성의 변증법>이로군요? 벌써부터 긴장됩니다. 어려울까봐서요.ㅜㅜ
여성주의 책은 읽을 수록 어려워 공부가 더더 많이 필요하겠단 생각을 매번 하면서도 돌아서면 공부를 하지 않다가 또 그 달의 책을 잡고 읽으면 어렵네? 공부해야지! 늘 이러고 있는 제가 참...한심하단 생각도 들어요.ㅋㅋ
강렬한 책 표지의 두 권이 눈에 확 띄네요^^

거리의화가 2023-06-27 17:57   좋아요 1 | URL
ㅋㅋ 공대생 건물 오랜만에 갔는데 반갑더라구요.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닌데도 왜 연대감이 느껴지는지!ㅎㅎ

좋아하는 가수들은 많은데 자우림, 김윤아 이야기만 유독 해서 그런게 아닐까 싶네요. 공연 갔다는 이야기도 적었었고!
세월이 가면 외모야 뭐... 그래도 목소리가 안 변하셨다면 관리를 그만큼 열심히 한 것이 아닐까요? 성대도 관리 잘해줘야하더라구요. 자우림 공연은 지방 간간히 있었어요. 이번 솔로 콘서트는 아쉽게도 서울에서만 5, 6일 진행하는 것 같더라구요. 언젠가 지방에서도 하면 좋겠네요.

성실성 빼면 내세울 게 없는 저라. 저는 목표를 세워야 진도가 나가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ㅋㅋ <성의 변증법> 표지에서부터 아우라가 뿜뿜입니다. 아직 들춰보진 않았는데 이 책이 여성주의 책 읽기로 재독인 걸로 아는데 저는 이번에도 조금이라도 얻어가자라는 생각으로 읽어야겠습니다.
 

그 자신이 부자인 푸아 대공은 열다섯 명의 젊은이로 구성된 우아한 사단에 속했으며, 뿐만 아니라 생루도 가담한 보다 폐쇄적이며 항상 붙어 다니는 4인방 그룹에 속했다.
언제나 함께 초대받는 그들을 사람들은 제비족 4인방이라고불렀고, 항상 같이 산책하는 모습을 보아 왔으므로 성관에 초 - P156

대할 때도 서로 통하는 방을 주었다. 더욱이 이들 4인방이 모두 미남인 탓에 이들이 은밀한 관계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나는 생루에 대해서는 가장 단호한 방식으로 그 소문을 부정할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중에 이 소문이 네 사람 모두에게 사실로 판명되었지만, 이들 각자는 반대로 나머지 세 사람에 관한 소문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욕망을, 아니 차라리 원한을 해소하려고, 아니면 상대방의 결혼을 방해하거나 비밀이 발각된 친구를 지배하려고, 상대방에 관한소식을 알려고 무척 애를 썼다. - P157

사유의깊이를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 예술가가 직접 작품 속에 자신의 사유를 표현할 필요는 없다. 신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창조’가 너무 완벽해서 창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자의 부정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 P172

엘스티르는 자신이 느낀 것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노력은 우리가 자주 시각이라고 부르는 그 논리적 추론의 집합체를 해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엘스티르는놀랍게도 자신이 그린 ‘흉물‘을 싫어하는 사람들, 샤르댕이나페로노, 그리고 사교계 인사들이 좋아하는 다른 수많은 화가 - P179

들을 찬미했다. 그들은 엘스티르가 실재 앞에서 그 자신을 위해(어떤 유형의 탐색에 대한 취향을 보여 주는 특별한 지표와 더불어) 샤르댕이나 페로노와 동일한 노력을 했으며, 따라서 엘스티르가 자신을 위해 작업하기를 멈출 때면 이들 화가들에게서 자신과 동일한 유형의 시도와 자신의 작품을 예고하는 단편들에 감탄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교계 인사들은 그들로 하여금 샤르댕의 그림을 좋아하게 하고 적어도별다른 거북함 없이 그 그림을 보게 한 ‘시간‘이라는 전망을생각 속에서나마 엘스티르의 작품에 첨가하지 못했다. - P180

게르망트 사람에게 있어(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적인 존재란 남을신랄하게 비판하고 악의적인 말을 할 줄 알고 논쟁에서 이긴다는 걸, 또 그림이나 음악과 건축에 관해 상대방에게 맞서고영어를 말할 줄 안다는 걸 뜻했다. 쿠르부아지에는 지성에 대해 이보다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만약 그들 세계에 속하지 않는 누군가가 지성인이라면, ‘필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일 놈이다.‘란 의미와 그리 멀지 않았다. 쿠르부아지에에게 있어 지성이란 도적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지렛대 같은 것으로, 그 덕분에 하와인지 아담인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놈들이 가장 존경받는 살롱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 때문에, 따라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받아들이다간 머지않아 반드시 후회하게 되리라 여겼다. 아무리 무의미한 말도 사교계 인사가 아니라 지적인 사람이 말하면, 쿠르부아지에 사람들은 그 말을 체계적으로 불신했다. - P217

평등 사회에서의 예절은 철도의 발달과 비행기의군사적 이용보다 더 큰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예절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이 불행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끝으로 사회란 사실상 민주화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은밀한방식으로 서열화되어 가는 게 아닐까? - P239

사교 생활의 공허함이 망가뜨린 게르망트 부인의 지성과 감성은 너무 자주 흔들리는 탓에, 뭔가에 열중하다가도 금방 싫증을 내고(그녀가번갈아 추구하다 버린 지성의 유형에 또다시 끌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어느 마음이 착한 남자에게서 발견한 매력도 그 남자가 지나치게 자주 그녀 집에 드나들거나 그녀가 줄 수 없는 조언을지나치게 그녀에게서 구하면 곧 귀찮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는데, 부인은 이런 귀찮음이 그녀의 찬미자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여겼지만, 실은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데도 쾌락은 얻 - P266

지 못하고 그저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때 느끼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공작 부인에게서 판단의 변화는 그녀의 남편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었다. 남편은 그녀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언제나 강철 같은 성격, 그녀의 변덕에도 무관심하고 아름다움도 경멸하는 난폭한 성격, 결코 남에게 굽히지 않는 의지를 느꼈으며, 이런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에야 예민한 인간은 비로소 안정을 찾는 법이다. - P267

공작에게서 삶의 모든 관심사는 그가 한 번도 사랑한적 없으며 계속해서 배신해 온 이 여인의 외부 세계에 있었다.
공작 부인이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게르망트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걸이가 안감에 걸리지 않도록 바로잡 - P282

아 주면서 손수 외투를 부인에게 입혀 주는 등 열성적이고 정중한 보살핌으로 출구까지 길을 내는 모습을 보았는데, 한편부인은 이러한 남편의 보살핌에서 단순한 처세술의 표시만을 보는 듯 사교계 여인의 냉담한 표정으로 받아들였고, 때로는 더 이상 잃어버릴 환상이 남지 않은 미망에서 깨어난 아내의, 조금은 냉소적인 씁쓸함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에도 ㅡ 이미 지나간 먼 시절,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먼 시절로 마음속 깊은곳의 의무를 표면으로 옮겨 놓은, 예절의 또 다른 부분인 이런겉모습에도 공작 부인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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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2-2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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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안한 시기에는 늘 그렇듯 대립과 음모의 흔적이 없는 주말은 없었다. 전형적인 여름 날씨와는 대조적인 기사, 그러니까 "(미)군 전투부대는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승선항으로 얼마나 빨리 이동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대기 상태에 있었으며 그 검증은 7월 1일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기사가 묻혀 있는 것을 주의 깊은 독자만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과 일본에 있는 미군 전투부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검증을 위해)경계 태세에 있었다. 이것은 우연일 가능성이 컸지만, 중국이 타이완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측과 관련된 것이었다. 6월에 세계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59만1000명이었다. 거기에는 미국 국내의 10개 전투 사단 36만 명과 가장큰 규모의 해외 파견부대인 주일미군 10만8500명이 포함됐다(독일에는 8만명이 파병됐다. 일본에는 4개 사단-제7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갑사단이 주둔했다. - P243




한국전쟁 발발 한 해 전 1949년 6월 무렵 38도선을 둘러싸고 수많은 전투가 일어났다. 전투는 한국전쟁의 개전 초 작전과 복사판이었으며, 시간만 다를 뿐이지 특징은 같았다. 1949년 북한은 전투를 벌일 준비가 덜 되어 있었지만 1950년은 그렇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1949년 전투는 남한 정부가 주도적으로 일으켰는데 이는 한국 정부 지도층의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며 자신들의 이익과 영토를 지켜주길 원했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과 애치슨은 타이완 문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로서는" 타이완 방위 계획은 없다 밝혔다. 흔히 애치슨 라인은 남한이 범위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으로 오해되어 스탈린이나 김일성에게 청신호를 켜주고 한반도를 분열로 몰고 간 외부적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본은 방어되며, 위협받는 그 밖의 국가(한국 같은)는 공격받을 경우 처음에는 스스로 방어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상황은 다시 평가될 것임을 암시한 것이었다(P70). 애치슨의 방위선은 정치와 경제적으로 "거대한 초승달 지대"를 만들어 일본부터 인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확보해 발전시키려는 구상이었다. 평양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믿었고 애치슨의 이런 의도는 북한 정권의 동요였다고 판단했다.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북 정치 지도자들의 회담을 촉구하는 발표를 하면서 6월 19일 38도선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으며, 8월 초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실시해 평화통일을 이루고 해방 5주년 기념일에 새로운 통일 국회를 소집하자고 요구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한의 무소속 의원들에게 특별성명을 발표해 호소하면서 여운형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조선 민족의 애국자"라고 불렀고, 김구가 암살된 것을 애도했으며 김규식의 통일 노력을 칭송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의 복구를 요구했다. 무초는 북한이 이런 요구와 관련된 선전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말하면서, 그 주장은 "겉으로 보기에 합리적이며 "아직도 38도선의 철폐를 갈망하는 남한 여론 대부분과 국회의 "혼란스러운 자유주의 세력"에게는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지방의회가 구성될 가능성은 없겠지만, 한국 전역에서 그로 인해 초래될 결과는 "전면적 내전의 전초단계"가 될 수도 있다고 무초는 지적했다. - P160~161

북한은 6월 19일 남북 의원의 회의를 개최하고 8월 15일까지 남한 국회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에 통합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이는 선전 책략이자 공격을 은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5월 30일 총선 결과 이승만 세력이 아닌 중도파와 온건 좌익이 승리했기 때문에 북한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조만식과 남로당 지도자인 김삼룡,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파격적인 제안도 내건다. 하지만 교환 방식에 합의를 찾지 못했고 6월 23일 북한은 6월 26일 정오에 교환하자고 제안했다(교묘하다). 이건 대놓고 전쟁 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준비를 착실히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장제스가 직면한 난제는 타이완섬을 지키려는 국제협력주의자들과 총통을 옹호하는 반격론자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공군력은 나라를 구할수 있는 만능의 수단으로 생각됐기 때문에 국민당은 중국 본토의 연안 도시들을 폭격하고 남한에 공군기지를 확보해 만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미국 정치를 조종해 자신의 정권을 보호할 수 있는 지원을 얻는 것이었다. 미 해군은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 P190

타이완은 설탕, 바나나, 원자재를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기계와 기관차, 옷감 등을 수입하며 1948년 무렵부터는 미국의 태평양 영해에서 전략적 가치이자 경제적 효용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1950년 초 장제스는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하이난섬은 4월 셋째 주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고 워싱턴은 지원을 끊으면서 국민당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장제스는 쿠데타/암살 위기에 직면하고 필리핀과 한국에 망명을 신청하기까지 한다. 미국은 중국 정책이 위기에 빠졌다 판단했고 6월 초 타이완 문제는 유엔 위원회로 넘어간다. 하지만 6월 22일 무렵 맥아더는 타이완이 연합국에 갖는 가치가 크기 때문에 장제스의 권한은 유지시키고 타이완은 유지되어야 한다 주장한다. 러스크 장관은 장제스에 대한 쿠데타 계획을 애치슨에게 제안했고 트루먼에게 그 사안은 상신되었다. 트루먼이 결정하기 전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 정권은 한국 전쟁으로 존속될 수 있었다.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저자는 세 가지 모자이크를 제시한다. 세 가지 모두 음모론(또는 가설?)이며 소련과 북한이 침공을 은밀히 준비했다는 설, 남한이 이유 없이 기습했다는 설,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을 이야기한다.

널리 제기되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북한이 지도부의 파벌 다툼 때문에 침공했다는 것이다. 박헌영과 그 세력은 남한에 있는 자신들의 기반을 잃을까 우려했고 전면 공격을 일으키면 대중이 호응해 봉기해 공산주의의 승리를 신속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런 가설은 CIA, 김일성 지도부, 일본에서 작성된 한국 관련 자료 그리고 미국의 중요한 일부 학자가 동의한 특이한 사례다. 그 가설의 장점은 6월이라는 시점에 공격이 시작된 까닭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한에 있던 유격대가 1950년 봄에 정말 소멸되고 거기에 토지문제가 더해졌다고 가정하면, 그 가설은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 - P116

또 다른 학설은 북한은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에 통일을 추구하려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지금 독자들은 이것을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묘한 시점이라는 요소가 있다. 몇 년 동안 북한은 이승만이 "북침해 한반도를 강제로 통일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1945~1946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요구와 1948년 5월 총선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분단주의가 아니라 북침의 기반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언제나 해석했다.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1950년 5월에 처음으로 북한 문서는 이승만이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쟁 이후 상투적 표현으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이것은 전쟁 이전 북한의 표현에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앞의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어떻게 남한이 한반도의 항구적 분단을 바라는 동시에 북한을 공격하려고 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 P120

6월 25일 이른 아침 전쟁이 서부에서 동부로 확산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첫 번째 모자이크, 다시 말해 잠들어 있고 준비를 갖추지 못한 남한을 38도선 전역에 걸쳐 갑자기 전면적 침공을 개시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조지프 대리고는 전투가 시작됐을 때 38도선에 있었던 유일한 미군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포성에 잠을 깼다. 초기 전투에 관한 그 밖의정보는 모두 한국군 정보원에서 나왔으며, 1949년 여름에 얻은 증거가 보여주듯, 그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증거조차도 전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몇 시간에 걸쳐 번져나갔으며, 한국군 제6사단은 적어도 하루 정도 먼저 경고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문산·춘천이나 동해안에서 그리 좋은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남한 부대들이 저항으로 보기 어려운 반격을 하거나 싸움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은 개성과 의정부를 돌파할 수 있었다. 북한이 투입한 병력도 군사전략 측면에서 보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존미어 샤이머는 치밀한 논리를 전개한 저작에서 전격전술을 사용할 때 "전략적 돌파"를 성공시키려면 공격 측의 병력이 3대 1 정도 우세해야 한다고 서술했다. 6월 25일 이후의 전투 과정은 고전적 전격작전과 비슷하다. 하지만 전투 데이터의 순서를 따라가보고 증거들에 살펴보더라도 이는 비슷한 규모이거나 더 큰 규모의 적을 상대로 진행된 전격전이었다. - P296~297

국내와 국외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던 이승만과 장제스는 봉쇄를 먼저 실시한 뒤 반격을 추진하기를 바란 반면, 애치슨은 한국과 타이완을 모두 방어하기로 결심하고 장제스를 축출하려고 했으며 봉쇄 지역 주변에서 공산 세력이 먼저 공격하기를 바랐다. 당시의 모든 상황은 이처럼 긴장되고흥미로웠다. 1950년 여름 헨리 월리스는 딘 애치슨에게 분노가 담긴 서한을 보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애치슨은 격렬히 반대하는 답장을 보냈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무의식적 실언 가운데 하나가 담겨 있었다.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라면 거기에 아무 의문을품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 공산군은 도발을 받기는 했지만 경고도 정당한 이유도 없이 대한민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증거도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이 먼저 공격했음을 여전히 입증하지 못한다.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면 다음 두 사항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첫째,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그런 도발을 이용해 남한을침략할 태세를 갖췄다는 명백한 증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한의침공을 정당화해주는 한국적 맥락일 뿐이다. 둘째, 정말 남한이 38도선을넘어 공격했다면, 1년 전 한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것을 감안할 때 도발은북한에 동조하는 내부의 적이 일으킨 자작극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침공은 북한이 일으킨 것이 된다. - P320

북한이 명분 없는 공격을 시작했다는 판단은 한반도가 놓인 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바로 2년 전 38도선을 "국제적 경계선으로 만드는 데 유엔이 이용됐다(이승만을 포함한 어떤 한국인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5년 전 미국은 고대부터 이어진 통일국가를 분열시키기 시작했고 소련의 큰 도움을 받아)때 이른 "냉전"을 심화했으며, 반동·친일 세력을 후원해 한국인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국무부의 정책에도 역행하면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이런 일이 모두 이뤄지면서 한국인들이 한국을 침공하는 최악의 역설이 가능하게 됐다. 진실은 남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는도발이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 P341

저자는 세 모자이크 중 두 번째 모자이크의 가능성이 그나마 높다고 이야기한다. 2권 첫번째에서도 의견을 냈지만 어느 것도 100% 증명할 수 있는 설은 없다고 생각한다.

1950년 6월 시작된 전쟁은 1953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스탈린이 더 이후에 죽었다면 미소 지도부의 교체가 늦어져 전쟁이 더 길어졌을지 모르겠다. 한반도의 내전은 군인들 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의 사상이 잇따르고 주요 기반 시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분단 체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뼈아픈 현실이다.

이 책은 미국과 북한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그 부분은 세밀한 반면 중국, 특히 소련에 대한 검토는 상대적으로 많이 약하다. 그래서 소련에 대한 입장은 빈 공간이 많은데 소련의 기밀 문서는 나중에 해제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이조차 여전히 기밀 자료들이 있을 것으로 판단).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한국 전쟁 책들로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내부적 입장을 이만큼 잘 다룬 책은 드물 것이다. 궁금한 독자들은 일독을 권한다.

『타임』지는 소련이 "미국의 시간"을 잘못 계산했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36시간 동안 ‘침묵‘했던 것이었다. "미국의 행동을 예측했다면 소련은 말리크를 유엔으로 보내 미국이 주도한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 소련이 저지른 최악의 실패였다. 달리 말하면 스탈린은 은밀히 침공을 계획했고, 물질적으로 소련을 능가하는 초강대국과 세계 전쟁을 벌일 위험을 각오했으며, 전략과 전술 모두 차례로 큰 실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의 전략에서 남한이 지닌 가치와 전쟁이 일본과 서방의 재무장에 줄 영향 그리고 미국의 참전 의지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는 시간조차 잘못 계산했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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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6-26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빠른 시간에 대작을 완독하셨네요! 거리의화가님 완독 축하드리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3-06-26 18:20   좋아요 1 | URL
가능한 이달 내에 읽으려고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희선 2023-06-29 0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북이 갈라지고 오랜 시간이 흘렀네요 이제는 통일을 바라는 사람은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은 정보가 별로 없기도 하네요 북한은 남한 정보를 얻는다고도 하던데... 한 나라가 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죠 오랫동안 따로따로였으니... 나라를 빼앗긴 것도 나라에 힘이 없어서였고, 독립을 하고 다른 나라 간섭을 받았네요 그런 게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둘로 갈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독립운동 한 사람이 중국쪽 일본 미국으로 나뉘었으니... 전쟁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6-29 09:15   좋아요 1 | URL
통일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좀 어색하게 느껴지죠. 남한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어색한 듯 합니다. 한국이라는 국명이 자연스러워졌고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한을 굳이 알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북한학을 전공한다든지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북한도 많은 것을 과거 자신들도 희생했던 전쟁인만큼 이제는 더 신중해지면 좋겠네요.
 
한국전쟁의 기원 2-1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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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세계는 추상적이기도 하고 국내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건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 사건들은 권력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이용된다. 외부의 위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구 전체의 적과 전면적 대결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 패권국이 중요하지 않은 여러 주변부에 이처럼 관심을 쏟고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세계는 대체로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친 현실과 갈등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위기를 유발하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재료를 폭발시킨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난 뒤 "외교정책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국내에서 전개된 갈등의 결과이며,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은 기본적으로 추상적 형태로 남아 있다. 또한 외국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한 나라 안의 권력 균형은 행정부 쪽으로 기울며, 행정부는 그 위기를 이용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갖게 된다. - P52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이 되었다. 세월이 이리 많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체제에 종속되어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의 종속도 그렇고 일본은 한국 전쟁으로 큰 이익을 얻었으며 중국과 타이완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설들이 존재했다. 어떤 가설도 완전한 진실은 없다고 생각하며 추측성이 존재한다 여긴다. 다만 더 가능성이 높은 설이 무엇이냐를 두고 셈할 뿐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내전이자 혁명전쟁이었다고 해석한다.

나는 '반공 세대'는 아니었고 그 끝 무렵, 그리고 이제 더는 통일이라는 것이 요원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 걸쳐 있는 세대인 듯하다. 교련 수업을 고등학교 때 받으면서도 이걸 왜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통일이 막연해도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던 것 같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를 바랄 뿐 한 체제, 한 국가로의 통일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나가듯 북한을 안전하게 여행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질 뿐이다. 죽기 전에 가능이나 할런지...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총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권의 내용은 앞선 1권과는 성격이 다르다. 1권은 한반도 내부에 포커싱을 맞추어 전쟁의 기원을 살펴보았다면 2권은 마치 조감도로 외부에서 한반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성격이 엿보인다. 첫 번째 권은 총 2부로 1부는 미국에 초점을 맞추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 이후 미국을 둘러싼 세계와 미국의 외교적 변화를 살펴본다. 2부는 한국 내부의 상황을 살펴보되 외국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1권과 2권의 내용을 모두 살펴보아야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47년은 어떤 해였는가. 이 시기 트루먼 독트린이 실시되면서 한반도 뿐 아니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이는 1950년 초반까지 그 흐름이 이어진다.
모스크바 3상회의 후 한반도의 신탁 통치 논의를 두고 여러 차례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이 무렵에는 남한과 북한의 체제가 이미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영향이 여전하던 남한에서 미국의 힘은 막강했을 것이므로 미국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 외교정책은 1947년 전후부터 1951년 사이에 크게 변화한다. 미 외교가에는 크게 세 집단이 존재했는데 첫 번째는 '국제협력주의(제국주의)'다. 이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세계에 적용한 것으로 세계시장 체제를 규제 관리하고, 문호 개방 정책 또는 "광대한 지역" 정책에 규제를 가미한 것이며, 자유무역과 경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개방성을 추진하고 장벽을 제거하며, 경제 침체와 다루기 힘든 나라들을 길들이는 데 필요한 규제를 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봉쇄'다. 국제협력주의와 민족주의가 타협한 것으로, 자본주의 지역에서 자유무역과 개방된 체제, 세계경제의 동력으로 일본과 서독의 부흥을 꾀하고, 방어벽을 세워 지상군과 관료기구를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격 '으로 국제협력주의에 반대하고 봉쇄에도 불만을 가진 세력으로 반공 기치를 내세우고 군사 부문을 강화하는 것이다.
1943년부터 1947년 이전까지는 한반도에 다국적 신탁통치를 기치로 한 '국제협력주의' 외교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신탁통치는 한국인에게 인기가 없었다. 1947년 이후 1949년 주한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봉쇄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의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타이완의 안보에 위기가 드리운데다 한국전쟁 발발 후 가을 무렵이 되면 미 외교는 반격 정책으로 돌아선다.

트루먼 정부에 대표 중요 인물 중 딘 에치슨은 누구인가. 그는 트루먼독트린과 마셜 플랜의 핵심 인물이었고 1947년부터 1950년까지 한국 정책을 전반적으로 설계하였다. 그는 군부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미 점령군의 봉쇄는 애치슨의 구상에 영향을 주었고 1947년 이후 남한이 트루먼독트린에 사실상 포함되게 만들었다.
에치슨에 대한 뛰어난 묘사에서 I. F. 스톤은 1952년 "미국에서는 공직자가 역사와 인류에 품위 있는 동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라고 썼는데, 애치슨은 바로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
냉전의 열기로 뒤틀린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만 애치슨은 실제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거칠고 거만한 표현을 쓰자면 그는 "개명한 보수주의자"로 보였다. 전전戰前 애치슨이 재무부 관료로 워싱턴에 처음 나타나자 뉴딜 정책 지지자들이 그를 "모건사에서 파견된 사람", 월가에서 보낸 트로이의 목마, 거대 은행들이 침투시킨 첩자라고 비난했다는 사실을 매카시즘이 휩쓸 때 누가 기억할 수 있겠는가?
봉쇄 정책은 미국 영국 서유럽 일본은 지키되 산업적으로 낙후되고 공격에 취약한 지역, 특히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부패한 아시아의 국지전이나 혁명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에치슨을 비롯한 미 관료들은 아시아 대륙의 여러 지역을 일본의 부흥과 연결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중요했지만 주변국에 전쟁이나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일본의 군사력을 제한적으로 증강하는 것이 고려되었다.

1949년 후반 트루먼과 맥아더는 충돌한다. 미 국내에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고 개인과 사회는 서로 대립했으며, 정치, 경제와 세계에서 미국이 세계에서 가져가야할 역할이 무엇인가 갈등은 폭발하였다. 고립주의자이자 반격 세력은 아시아가 유럽보다 덜 중요하고 통제하기 어렵지만 개방되어 있어 이익을 낼 수 있는 곳으로 보았다. 팽창주의자는 아시아 중 중국에 주목했다. 이 중 반격 정책을 지지한 맥아더는 누구인가.
맥아더는 아시아를 새로운 국경으로 봤다. 그는 한국전쟁 이전에는 극동에서 반격 구상을 추진하는 데 상당히 소극적이었으나 그의 지지자는 대부분 우파 고립주의자들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1951년 한국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령부를 떠날 때까지 한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간절히 바랐다. 중국의 거대 재벌과 국민당 인사들은 깊은 교류 관계가 있었고 중국 로비를 위해 상당한 액수가 미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지 매카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이용하여 매카시즘 광풍을 만들어냈다. 그는 성(동성애), 공산주의를 증오의 뿌리로 매도했으나 사실은 미국의 뿌리에 존재하는 미국의 정치였다. 적색공포가 외면으로 표출되었을 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메산골과 빈민가, 서부의 소박한 개신교적 정신(좌익은 대중 영합주의적 진보적이며 우익은 무지함)과 동부의 남보스턴 정신을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비유하자면 후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지하 묘지로, 동부 상류상회의 두 영역(자유주의자와 월가)에 있는 경박하고 건망증 심한 유력자들에게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왔다. - P178
중국의 공산화, 미국 내 팽창주의자에 반하여 미국 내 공산 세력은 좌불안석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화당을 지지하는 주요 언론 기업주도 매카시에 협조했다.
매카시는 1950년 3월 13일 오언 래티모어를 공격한 뒤 3월 21일 "소련의 간첩 두목"을 적발했다고 말하며 그를 지목했다. 표면적으로는 래티모어를 말했으나 궁극적 목표는 애치슨이었다. 트루먼을 제외하면 그 무렵 장개석은 공산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기댈 자가 미국 내에 없었다. 5월 매카시는 한국 정책과 관련하여 "애치슨-래티모어 추축"을 공격하면서 애치슨을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남한 체제의 권력 핵심층은 부를 가진 우익 세력이었고 이들은 경찰은 물론 군정 사령부, 일선 현장 대부분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한 자체로 안정을 바랐으나 일반 대중들은 통일에 관심을 두었고 분단 정책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수많은 청년 단체를 비롯하여 광신적 우익 대중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승만과 이범석은 파시즘화한 한국 정치를 이끌었다.
우익 단체는 조선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광복청년회, 이승만의 대한독촉청년총연맹 등이 있었고 조선민족청년단이 미군정이 자금줄을 댄 공식 기관이었다. 청년 단체를 조종한 것은 이승만, 이범석, 조병옥, 장택상 같은 우익 인사들이었고 경찰은 우익 청년들을 후원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좌익의 탄압과 색출에 적극 활용했다.
이승만은 미국인이나 미국에서 여러 해를 보낸 측근 인사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친일파들을 기용하고 그들에게 로비 자금을 받으면서 면죄부를 주었다.

1947년 제주 4.3이 발생하고 1948년 여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한 정부는 빨갱이 색출에 혈안이 되어 경찰과 청년 단체들을 동원해 이들을 색출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북한을 "괴뢰"라 명칭하라 지시하고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으며 공식적인 좌익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은 유격대 활동에 영향을 끼쳤고 제주와 전라도 중심이던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격대는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고 `촌락을 공격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유격대 관련 사건은 1949년 4월부터 10월까지 증가하다가 11월부터 점차 감소하였다. 미국은 다른 어느 곳보다 전라남도가 남한에서 가장 좌익적인 도라고 판단했는데 이는 빨치산 활동이 지리산에 집중되었던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전라남도 유격대는 1950년 초 대규모 토벌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지하로 숨거나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1950년에는 유격대 주요 활동지는 경상북도였다. 우거진 지형 덕분에 은신이 쉬워서 경찰들도 많은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이외에서 유격대는 강원도와 충청도 영동군 정도에서 활동이 있었다.

북한은 인민위원회를 기반한 정부를 구성하고 인구의 12~14퍼센트(성인 인구의 1/4 이상)를 포괄하는 대중 정당인 로동당을 만들면서 김일성에 대한 충성 지지층을 확보한다. 북한은 빈농을 포용하여 프롤레타리아로 개조시켰는데 이들이 군 단위의 공무원이나 장교도 꿈꿀 수 있게 함으로써 김일성의 정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만들었다. 당의 지도부는 항일 유격 투쟁에 활약을 했던 이들로 채워졌다.
1947~1948년 소련과 북한의 전략적 이익은 일치했다. 이 시기의 시작부터 중국 국민정부군은 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장제스와 이승만은 거슬리는 뾰루지를 짜듯 북한을 압박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8~1949년 중공군과 북한군이 국민정부군을 동북 지역에서 몰아내면서 이제 짜낼 뾰루지처럼 보인 것은 남한이었다. 스탈린은 그것을 대단히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봤을 것인데, 현지 정권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P476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북한 외교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 전까지는 소련에 의존해야 했다면 이제는 중국의 전쟁에 한 몫을 거들어 승리를 거둔 것으로 사회주의 동맹을 얻은 셈이었다. 1948년 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외부의 공격이 있을 때 서로 방어해준다는 내용의 협정을 소련과 체결했고 1950년 중소 간에도 이런 협정이 맺어졌다. 반면 1949년 3월 김일성은 경제, 문화, 군사 협정을 맺고 돌아왔으나 소련에 유리한 조건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만주에서 일본 및 중국 국민당에 맞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중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중국은 한국이 중국의 경세론과 문화를 모방하고 중국의 적에게 영토 점령을 허용하지 않는 한 한국의 문화적 정치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선의의 무시"를 해왔다. 


2-2권은 1950년 이후 전쟁의 서막과 종막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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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26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해 하던 책이었는데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현대사
에도 관심이 많아, 일독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6-26 18:19   좋아요 1 | URL
네.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이 된 전쟁과 현재 체제의 기원을 엿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이런 불안한 시기에는 늘 그렇듯 대립과 음모의 흔적이 없는 주말은 없었다. 전형적인 여름 날씨와는 대조적인 기사, 그러니까 "(미)군 전투부대는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승선항으로 얼마나 빨리 이동할 수 있는지검증하기 위해 대기 상태에 있었으며 그 검증은 7월 1일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기사가 묻혀 있는 것을 주의 깊은 독자만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과 일본에 있는 미군 전투부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검증을 위해)경계 태세에 있었다. 이것은 우연일 가능성이 컸지만, 중국이 타이완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측과 관련된 것이었다. 6월에 세계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59만1000명이었다. 거기에는 미국 국내의 10개 전투 사단 36만 명과 가장큰 규모의 해외 파견부대인 주일미군 10만8500명이 포함됐다(독일에는 8만명이 파병됐다. 일본에는 4개 사단-제7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갑사단이 주둔했다. - P243

6월 25일 이른 아침 전쟁이 서부에서 동부로 확산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첫 번째 모자이크, 다시 말해 잠들어 있고 준비를 갖추지 못한남한을 38도선 전역에 걸쳐 갑자기 전면적 침공을 개시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조지프 대리고는 전투가 시작됐을 때 38도선에 있었던 유일한 미군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포성에 잠을 깼다. 초기 전투에 관한 그 밖의정보는 모두 한국군 정보원에서 나왔으며, 1949년 여름에 얻은 증거가 보여주듯, 그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증거조차도 전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몇 시간에 걸쳐 번져나갔으며, 한국군 제6사단은 적어도하루 정도 먼저 경고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문산·춘천이나 동해안 - P296

에서 그리 좋은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남한 부대들이 저항으로 보기 어려운 반격을 하거나 싸움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은 개성과 의정부를 돌파할 수 있었다. 북한이 투입한 병력도 군사전략 측면에서 보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존미어샤이머는 치밀한 논리를 전개한 저작에서 전격전술을 사용할 때 "전략적 돌파"를 성공시키려면 공격 측의 병력이 3대 1 정도 우세해야 한다고 서술했다.18 6월 25일 이후의 전투 과정은 고전적 전격작전과 비슷하다. 하지만 전투 데이터의 순서를 따라가보고 증거들에 살펴보더라도 이는 비슷한규모이거나 더 큰 규모의 적을 상대로 진행된 전격전이었다. - P297

국내와 국외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던 이승만과 장제스는 봉쇄를 먼저 실시한 뒤 반격을 추진하기를 바란 반면, 애치슨은 한국과 타이완을 모두 방어하기로 결심하고 장제스를 축출하려고 했으며 봉쇄 지역 주변에서공산 세력이 먼저 공격하기를 바랐다. 당시의 모든 상황은 이처럼 긴장되고흥미로웠다. 1950년 여름 헨리 월리스는 딘 애치슨에게 분노가 담긴 서한을보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애치슨은 격렬히 반대하는 답장을 보냈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무의식적 실언가운데 하나가 담겨 있었다.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라면 거기에 아무 의문을품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 공산군은 도발을 받기는 했지만 경고도 정당한이유도 없이 대한민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증거도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이 먼저 공격했음 - P319

을 여전히 입증하지 못한다.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면 다음 두 사항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첫째,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그런 도발을 이용해 남한을침략할 태세를 갖췄다는 명백한 증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한의침공을 정당화해주는 한국적 맥락일 뿐이다. 둘째, 정말 남한이 38도선을넘어 공격했다면, 1년 전 한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것을 감안할 때 도발은북한에 동조하는 내부의 적이 일으킨 자작극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침공은 북한이 일으킨 것이 된다. - P320

북한이 명분 없는 공격을 시작했다는 판단은 한반도가 놓인 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바로 2년 전 38도선을 "국제적 경계선으로 만드는 데 유엔이 이용됐다(이승만을 포함한 어떤 한국인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5년 전 미국은고대부터 이어진 통일국가를 분열시키기 시작했고 소련의 큰 도움을 받아)때 이른 "냉전"을 심화했으며, 반동·친일 세력을 후원해 한국인들의 열망은말할 것도 없고 당시 국무부의 정책에도 역행하면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이런 일이 모두 이뤄지면서 한국인들이 한국을 침공하는 최악의 역설이 가능하게 됐다. 진실은 남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는도발이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 P341

. 『타임』지는 소련이 "미국의 시간"을 잘못 계산했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36시간 동안 ‘침묵‘했던 것이었다. "미국의 행동을 예측했다면 소련은 말리크를 유엔으로 보내 미국이 주도한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 소련이 저지른 최악의 실패였다. 78달리 말하면 스탈린은 은밀히 침공을 계획했고, 물질적으로 소련을 능가하는 초강대국과 세계 전쟁을 벌일 위험을 각오했으며, 전략과 전술 모두 차례로 큰 실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의 전략에서 남한이 지닌 가치와 전쟁이 일본과 서방의 재무장에 줄 영향 그리고 미국의 참전 의지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는 시간조차 잘못 계산했다. 애치슨은 편안히 앉아 스 - P381

남한에 유격대가 만연한 것은 미국이 적과 민간인을 구별할 수 없는 새로운종류의 전쟁에 직면했다는 뜻이었다. 인민군은 군복을 벗고 전형적인 농민 - P432

의 흰 옷을 입은 뒤 그들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할머니나 10살짜리 아이가보따리에서 총을 꺼내 당신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아주 더러운 전쟁이었다.

적들은 아이에게 탄약을 운반시키기도 하고, 보병의 습격을 감추기 위해 울고 있는 피란민을 미군대열로 들여보내기도 했다. 미군 병사는 미국 사회에서 대부분 피지배자이면서 차별받는 유색인종 출신이었다.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법무 공무원인맥그래스 법무장관은 공산주의자를 "쥐떼"라고 불렀다. 그래서 병사들도 오래지 않아 한국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고 그렇게 행동했다. - P433

조·중 연합군이 반격을 좌절시킨 결과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의 - P507

검토 절차는 종료됐고, 이 위기에 따라 의회는 결국 예산을 통과시켰다. 북한의 침공이나 인천 상륙 때문에 의회는 예산을 승인한 것이 아니었으며, 선거가 치러지는 해라는 원인도 중요하게 작용했다.127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으므로 서둘러 아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국가안보회의의 보고를 받은 뒤트루먼은 12월 15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방동원국을 신설해 제너럴 모터스의 회장 찰스 윌슨(초당파적 조정자로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국방장관을 지냈다)을 수장으로 임명하고 "포괄적 권한"을 줬으며, 180억 달러에서490억 달러로 늘어난 국방비를 승인했는데, 이는 1950년 6월의 4배 수준이었다.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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