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사 -하 - 완역판 까치글방 155
풍우란 지음, 박성규 옮김 / 까치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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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근대의 철학은 대체로 각 시기의 경학 또는 불학에서 찾아야 한다. 중세와 근대는 각 시기마다 경학이 달랐던 만큼 상이한 철학이 생겼는데, 각 시기의 철학이 달랐기 때문에 상이한 경학이 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경학과 불학 내의 각 종파는 대체로 각기 그 전성기가 있었다. 고대 자학시대의 사상은 횡적인 발전이 더 두드러졌다면, 중세와 근대 경학시대의 사상은 종적인 발전이 더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 P6

서양의 학설이 처음 동쪽으로 전래되었을 때 중국인들 예컨대 강유위 무리는 여전히 그것을 경학에 부회하여 낡은 병에 극히 그 새로운 술을 담으려고 했으나, 낡은 병은 용량을 늘리는 일이 이미 한계에 달한 데다가 또 새 술이 아주 많고 극히 새로웠기 때문에 결국 터졌던 것이다. 경학의 낡은 병이 터지자 철학사의 경학시대도 끝이 났다. - P7

중국철학사 상권은 자학시대를 다루고 있었다면 하권은 경학시대를 다룬다.

상권은 공맹을 비롯하여 중국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인물들을 살펴보았다면 하권은 기존의 사상가들의 저작을 해석한 여러 명의 사상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우리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대의 인물들이라 낯익은 이름들이 많았다.
하지만 복병은 있는 법. 하권 시작하자마자 도학의 기초가 된 저서인 주역의 이론이 등장하여 머리가 아팠다. 해석하려다 이는 단기에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동중서는 전한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은 사상을 대표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의 저작은 모두 경학의 의미를 해명한 것들인데 특히 『공양춘추』는 음양의 학설을 담아냄으로써 유자들의 영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동중서의 성설(性說)은 한편으로 맹자와 순자를 조화시킨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동중서 역시 사람의 바탕에는 본디 선단(善端:선의실마리)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설은 사실상 맹자의 성선설과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동중서는 성 속에 겨우 선단만 있는 까닭에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 P32

전한시대 경학자들은 음양가의 말을 빌려 유가의 경전을 해석했다. 『역(易)』은 본시 시초점)에 쓰인 술수(數)의 일종이었던 만큼 그런 해석을 수용하기가 더욱 쉬웠다. 소위『역위(易緯)』가 바로 그 방향으로 『역』을 해석한 것으로서, 전한시대 중엽 이후 ‘위서(書)‘가 출현했다. 이른바 "위(緯 : 씨줄)"란 "경(經:날줄)"에 대한 말이다. 위서 외에 또 ‘참서(書)‘가 있다. - P75

중국의 상수학은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학설과 비슷하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수"는 제일 원리로서 존재하는 사물의 질료인(material cause)이고, 수의 요소는 홀수와 짝수를, 홀수는 유한이자 속성과 상태를 구성하고 짝수는 무한을 나타낸다. 하나로부터 둘이 나오고 하나로부터 모든 수가 생기며 온 우주가 모두 수라고 생각했다.

음양가의 주요 동기는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우주 만상을 포괄하고 또 그것을 설명하는 데에 있었다. 비록 그 방법이 틀렸고 그 지식은 엉성했으나 우주간 여러사물을 체계화하여 우주간 여러 사물의 존재 이유(所以然)를 알려고 했으니 진실로 과학정신이 있었다. - P106

우주를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어쨌든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놀랍다. 과학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옳은 것인지 검증하는 일이다. 과학은 반증가능성이 있으므로 언제나 새로운 이론으로 교체되기 마련이다. 나중에 이론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해서 과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전한 시대에 음양가를 대적하는 학파가 있었는데 그들이 고문학파다. 고학은 고문학의 경학이다. 고학을 주장한 이들은 경을 해설할 때 공자를 "스승"의 지위로 되돌린 사람들이었다.
다만 전한 말 후한 초는 위서와 참서의 전성기였으므로 도가 학설이 부흥하였다. 고대 사상 중 노자를 비롯한 도가가 활개를 쳤다고 볼 수 있겠다.

대인 선생이 있었는데 천지를 하루아침으로, 만백년을 순간으로, 해와 달을 창문으로, 광활한 대지를 뜰로 여겼다. 지나다녀도 흔적이 없었고, 거처는 집도 오두막도 없었다. 하늘을 천막으로, 땅을 자리로 삼아 마음 내키는 대로 행했다. 머무를 때는 술병을 잡고 술잔을 들었으며, 거동할 때는 술통을 휴대하고 술병을 쥐었으니, 오직 술에만 힘썼고 그밖의 일은 개의치 않았다. - P171

우선 현재의 삶을 즐기면 되지 무슨 겨를에 죽은 뒤를 생각하랴? - P176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유가에서 중요시한 도덕과 관습의 속박을 거부하고 인생의 중요 가치를 쾌락에 두었다. 이는 서양의 에피쿠로스 학파와 견줄 수 있겠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행복의 도에 이를 수 있을까? 나만 산다면 가능하겠지만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사는데 쾌락만을 좇을 때 충돌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도가를 자유분방함으로 오해했던 것 같다. 정작 노자와 장자는 자연주의를 주장했을 뿐이지 자유분방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노자는 자연주의, 장자는 자연주의에서 신비주의까지 결합한 형태로 자신들의 사상적 얼개를 세웠다.

천하에 서로 피차 관계 아닌 것은 없고, 피차 모두 자신을 위하므로 마치 동서로 갈라지듯 서로 상반적이다. 그러나 피차는 서로 이와 입술 관계에 있다. 이와 입술은 서로 상대를 위하고 있지 않지만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 - P196

무위(無爲 : 억지로 꾀하지 않음)란 조용히 침묵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각자 스스로 꾀하게(自爲) 맡겨두면 성명(性命)은 평안해진다는 말이다. 부득이(不得已)함이란 위협적인 형벌로 핍박한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도의 순수함을 견지하고 필연의 법칙에 맡기면 천하는 저절로 복종한다는 말이다. - P203

감추어두지 않고 모두 그대로 맡겨두면 사물과 더불어 합일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항상 변화와 합일한다. 따라서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죽음도 없고 삶도 없이 천지와 일체가 되고 변화에 합일하면 달아날 곳을 찾아도 찾을 수 없다. - P225~226

남북조시대가 되면 중국에 불교가 수입된다. 한반도는 이때 삼국시대였고 고구려에서 불교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이래 백제, 신라도 불교를 수입하게 된다. 이후 중국은 송대 초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사상의 중심을 이끌게 된다. (한반도도 마찬가지. 고구려, 백제, 신라도 그렇고.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당시의 중국인들은 불교철학을 접하고는 우선 그것을 중국철학 고유의 술어로 번역한 뒤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다. 불교철학을 선양한 사람들도 반드시 불교철학의 사상을 중국고유의 철학 술어로써 설명해야 중국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방법을 당시에 "연류(連類)" 혹은 "격의"라고 불렀다. - P235

수당 시대 무렵이 되면 걸출한 불가 학자들이 등장한다. 길장, 현장, 법장처럼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다.

불가의 학자들은 홍황사의 도랑의 가르침을 받들어 세 단계의 이제 이론을 수립했다. 제1단계 이제는 유(有)라고 말함은 세제이고, 무(無)라고 말함은 진제임을 밝힌다. 제2단계 이제는 유라고 말하고 무라고 말함은 모두 세제이고, 유도 무도 아니다고 즉 둘이 아니다고 말함이 진제이다.……제3단 - P294
계 이제의 의미는 이제란 ‘유’·‘무’는 둘(二)이면서 또 ‘불이(不二)’도 아니다는 것이니, 둘이라고 말하고 둘이 아니다고 말함이 세제이고 ‘둘이 아니고‘ ‘불이도 아니다‘고 말함이 진제이다. 이렇듯 이제는 세 단계가 있어서모든 설법은 반드시 이제에 의거하고, 모든 발언은 이 세 단계를 벗어나지않는다. - P295

현장이 서술한 유식 사상의 핵심은 "환화인은 참된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있었다. 각각의 핵심이 달랐던 만큼 강조한 내용도 달랐다. 현장 역시수행자의 성불 이후의 활동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언급하지않았는데 강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단지 일부의 사람에게만 부처의 무루종자가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람마다 모두불성이 있고 사람마다 모두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식(識)이 "의타기(依他起 :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남)"이니 그 속의 종자도의타기일 것이므로 한 번 생성되어 불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수는 있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성불할 가능성은 다르다. 또 그가 말한 수행은 반드시 일정한 단계가 있었으니 돈오(頓悟)가 아닌점수(漸修)를 주장한 셈이었다.
당시에 현장이 논한 불학을 그르다고 여긴 사람이 있었는데 법장(法藏, 643-712)이 그 대표자이다. - P334

법장은 하나의 영원불변한 진심을 세워 일체 현상의 근본으로 여겼으니, 그의 설은 하나의 객관적 유심론이다. 주관적 유심론보다 객관적 유심론이 [소박한] 실재론에 가깝다. 그 설에 따르면 객관적 세계가주관을 떠나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객관적 세계 속의 각각의사물은 모두 진심 전체의 현현이므로 그것의 진실성은 상식에서 진실로 여기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우월하다. 법장이 말한 공은 현장이 말한 공의 공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법장의 말에 따르면 "사(事)" 역시 당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은중국인의 사상 경향이기도 하다." - P353

진·수(陳隋) 무렵의 지(智顗, 538-97)는 불학의 한 종파의 대사로서 지자 대사(智者大師)로 일컬어졌다. 그 종파는 지의가 천태산(天台山)에 살았으므로 천태종(天台宗)으로 일컬어졌고, 또『법화경(法華經)』을 근본 경전으로 삼았으므로 법화종으로도 일컬어졌다. 이 종은 혜문(文)이 제1조(祖), 혜사(慧思, 515-77)가 제2조, 지의가 제3조이다. 지의는 이 종을 선양 발전시켰고 저술도 매우 많지만 그 내용은 주로 수행방법이고 철학적 흥취가 있는 것은 별로 없다. - P355

송명 도학은 당나라 시대 한유(768-824)와 이오(7723-841)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오의 학설은 불교가 끼친 영향이 아주 컸다. 이오와 송명 도학자들은 사람들이 유가의 부처가 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불학을 유학에 가져오면서도 불학은 배척하였다는 것이 인상깊었다.

도학자로서 도교사상을 도학에 도입한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면 주렴계(1011-77)와 소강절(1017-73)이다.
주렴계는 주돈이로 잘 알려져 있으며 「태극도설」로 유명하다. 「태극도설」은 도사들이 수련 때 사용하는 「태극도」를 가지고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송명 도학파 내의 대표작이라할 수 있다.

「태극도설」은 오행을 "5기"라고 했고, 「통서」는 음양을 "2기"라고했다. 즉 염계는 음양오행을 모두 기로 여겼다는 말이다. 「통서」의이 구절 이름이「리성명(理性命)」장이므로 소위 "하나"란 리이고 또한 태극이다. 태극은 리이고 음양오행은 기이다. 리·기 두 관념은 송명 도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데, 그 의미는 주희에 이르러 비로소 상세히 설명되었지만 염계가 그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하겠다. - P448

"건도(乾道)의 변화에 의해서 [만물은] 각기 본연의 성(性)과 명(命)이 바르게 될 때" 성(誠)은 수립되며 순수 지선(純粹至善)하다. 따라서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이 바로 도이다. 도를 계승한 것이 선이고 도를 성취한 것이 성이다"고 했다. 원형(元亨 : 즉 사물의 발전단계)은 성(誠)의 통철함이고 이정(利貞: 즉 사물의 성숙단계)은 성의 복귀이다. 위대하다, 역이여! 성명(性命)의 근원이다. - P449

역설은 도교 내에 붙어서 전수되다가 북송 때 이르러 도학 안으로 도입되니 그것이 상수학이었다. 소강절의 세계연표는 역의 수를 바탕으로 천지의 시작과 끝을 규명하였다. 그 이전 도교나 불교에는 찾을 수 없었던 놀라운 사상이었고 이후의 도학자들의 우주발생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초반에 역설의 이론에서 '양의', '4상', '8괘', '64'가 되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소강절의 태극도의 원리를 보고서야 비로소 눈이 좀 뜨이는 느낌이 들었다.

태극이 분화되면 양의(兩儀)가 수립된다. ‘양‘이 아래로 ‘음‘과 교합하고 ‘음’은 위로 ‘양’과 교합하여 4상(四象)이 생긴다. ‘양‘은 ‘음‘과 교합하고 ‘음‘은 ‘양‘과 교합하여 하늘의 4상을 낳고, ‘강’은 ‘유’와 교합하고 ‘유’는 ‘강’과교합하여 땅의 4상을 낳는데, 여기서 8괘가 이루어진다. 8괘가 서로 섞이게 되면 만물이 생긴다. 그러므로 1은 2로 나뉘고, 2는 4로 나뉘고, 4는 8로 나뉘고, 8은 16으로 나뉘고, 16은 32로 나뉘고, 32는 64로 나뉜다. 즉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면서 교대로 ‘유’·‘강‘이 작용하여 역(易)의 여섯 위치가 완전히 드러난다. - P458

장횡거(1020-77)는 주렴계와 소강절과 거의 동시대에 사람으로 불교와 도가를 전전하다 육경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는 기에도 성이 있다 주장하였다.

만물은 곧 기가 모인 현상이다. - P481

정명도(1032-1107), 정이천(1033-1107)은 송명 도학을 완성한 이들이다. 정이천은 리학, 정명도는 심학을 주장하였다. 스승이 주렴계였으며 소강절은 친구, 장횡거는 친족이었다고 한다.

세계의 사물은 모두 리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리가 있으니, 하나의 사물에는 반드시 하나의 리가 있다. - P500

명도가 말한 천리나 리는 구체적 사물의 자연적 추세이니 사물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후 도학 내의 심학 일파는 모두 리는 사물을 떠나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 P506

정이천은 리란 영원한 존재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기에 보편적 준칙으로 보았다. 반면 정명도는 사물 안에 리가 존재하므로 기 속에 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주자(1130-1200)는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이정(정이천, 정명도)를 집대성하여 리학(理學)을 완성한 도학자이다.
그는 유가 경전인 사서를 주해하였고 선대 사상을 포괄적 체계로 만들어 도학을 집대성하면서 중국 뿐 아니라 한반도, 일본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주자의 형이상학은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기초로 소강절의 수(數), 장횡거의 기(氣), 이정의 리(理)와 기(氣)의 구분 등을 융합한 것이다.

주자가 리학을 집대성했다면 육상산(1139-93)은 심학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상산은 어려서부터 이천과는 다르지만 명도와는 아주 가까웠다. 명도는 「식인편(識仁篇)」에서 "배우는 자는 먼저 인(仁)을 인식해야 하며", "그 리를 인식하고 성(誠)·경(敬)으로 보존하면" 만사 그만이다고 여겼는데, 상산의 설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 P570

청대(淸代)에 이르면 시대의 기풍은 한학(韓學)으로 바뀐다. 한학은 공맹 성현의 도의 참 의미를 알려면 한인(漢人)들이 해설한 경전에서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도학과는 다른 경향인 금문경학파는 19세기 서양의 입김이 강해지고 전통 사회가 동요하던 때 공자를 성인의 위치로 추앙시키면서 옛 것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강유위가 있다.

강유위의 사상에 내재된 시대적 특징은 "격의(格義)"로 볼수 있다. 두 문화가 접촉하는 초기의 외국 문화 수용자는 흔히 수용한 외국 문화의일부 측면을 즐거워하며 중국 문화의 어떤 측면과 견강부회하는데,………이런 부회가 "격의"이다.……………강유위는 유신변법의 각 주장들을 제시할 때 항상 "탁고개제"의 방법을 써서 그의 추진 내용이 결코 서양 신문화의 채용이 아니라 도리어 공자의 교의의 실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외래 문화와 대항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치를 찬양했다. 그러나 그의 찬양은 오직 그것이 공자의 삼세설의 교의에 부합한다는 점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옛것을 가지고 새것을 해석했고 중국 고유의 문화적 안목에서 서양 전래의 문화를 비평했다. - P682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중국의 사상 기반이 된 것은 음양가, 도교와 도학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유학일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건 중국 여행을 하면서도 느꼈던 부분이었는데 미신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 점괘 등이 현대 중국인들에게 일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작을 즐기고 어떤 일이 닥치면 점괘를 치는 것 등이 그런 예일 것이다.
(한국도 민간 신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무당을 부르고 정화수 떠놓고 산신님께 비는 형태로 일상을 살았을 사람들. 불교가 도입되고 이후에 유교가 퍼지고 천주교, 기독교 등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신앙은 겹겹이 쌓였다.)

주렴계, 소강절, 이정(정이천, 정명도), 주자가 나오기 이전까지 도교와 불교가 중국 사상계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해 있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로써 중국철학사를 마무리한다. 이 책을 통해서 중국사를 읽을 때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읽을 때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그 나라의 사상을 아는 것은 기초에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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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9-02 1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은 뒤에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네요.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은지라... 하루하루도 만만치 않은 삶인데... 이번 건강 검진에서는 좋지 않은 기록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데 어찌 사후 세계까지 헤아린단 말인가요?
현실에만 충실하는 걸로 가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9-02 13:4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페크님 저도 현실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사후를 생각하면 너무 막연해요. 철학자들의 사상이란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을 할까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고 그렇습니다^^;

mini74 2022-09-02 14: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ㅠ 이 책도 재미있겠어요 화가님..어제 화가님께 땡투를 날리며 시민의 한국사를 샀는데....시민의 한국사 읽고 이 책에 침 발라야겠어요 ~~~

거리의화가 2022-09-02 14:47   좋아요 2 | URL
미니님은 내공이 있으셔서 이 책 정말 잘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분야든 철학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중국 사상은 한반도나 일본과도 밀접하다보니 더 도움이 될 듯합니다^^ 땡투도 감사해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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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역사를 한 권에 담은 책을 만났다.


합스부르크는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문이었다.

특히 15세기 이후가 되면 합스부르크에 대한 세력이 커지고 제국화되면서 전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기존에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합스부르크의 역사는 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었던 스페인 제국의 시기와 제국의 종말을 불러온 1차 세계대전 무렵 때이다.

이 책에서 남은 빈틈을 채우는 목표를 세워보자 하며 읽게 되었다.


화려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작은 과연 어떠했을까?


기록상에 근거한 시작은 10세기 말 슈바벤 공작령에 속하는 땅에서 칸첼린(991)으로부터였다. 

초기에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로 이어지는 곳에서 세금 및 통행료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시작은 칸첼린이지만 가문을 창건한 것은 루돌프(1339~1365)란 사람이다. 그는 혼인 관계를 통해서 주변의 제후들을 가문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실패) 중앙유럽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에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대공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15세기에는 프리드리히 3세(1415~1493)와 막시밀리안(1459~1519)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가문을 위한 세습 재산을 한 단위로 재편하였고 제후들을 설득하여 자신은 로마인왕으로 등극한다. 


막시밀리안은 자기 홍보의 대가였다. 그는 망상과 과시 행동으로 개인적으로는 말이 많았으나 결혼과 전쟁을 통해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며 후대 가문이 유럽과 신대륙의 대부분을 호령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막시밀리안에 대해서는 백색왕의 우화가 전해진다. 백색왕은 새로운 언어를 금방 익히고 7개 국어를 구사한다. 그는 자기 통치에 도전하는 국가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많은 땅을 정복한다. 백색왕은 누구? 당연히 본인 자신이다. 


16세기는 제국의 가장 화려한 시기였다고 평가된다.


먼저 세계의 통치자라로 알려진 카를5세(1519년 집권, 1556년 퇴위)가 있다. 카를 시기에 제국의 영토는 대서양을 넘어 태평양까지 뻗쳤다. 다만 종교 갈등으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따라 루터파를 신봉하는 제후들이 통치하는 영토와 기존 가톨릭을 고수하는 소수파가 통치하는 영토인 신성로마제국으로 나뉘게 된다.


보헤미아왕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는 1558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에 즉위한다. 그는 강력한 귀족 세력과 의회, 개신교를 믿는 다수파를 등에 업는 것이 필요했다. 결국 그는 루터파의 득세를 허용하고 양형영성체파(얀 후스)의 요구도 수용하였다.



펠리페2세는 1556년 스페인왕, 1580년 포르투갈왕, 1554년부터 1558년까지 아일랜드왕까지 겸임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판도를 전세계적으로 이끌고(!) 나간다. 중앙 유럽에는 루돌프 2세가 있었다. 1576년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연금술과 마법에 빠져 있었고 왕궁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우울증을 겪었던 모양인데 이를 두고 자발적 고립이라고 하는 거겠지.



17세기는 제국에 힘을 빼게 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마티아스(1612년 황제 즉위)는 티롤과 이너외스터라이히 공작령을 제외하고 개신교를 공식 합법화하는 쾌거를 이루어낸다. 하지만 뒤이은 페르디난트 2세(1619년 황제 즉위)는 중앙유럽에서 개신교도들을 굴복시키게 만든다.


1618년 보헤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30년 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의 주체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연합 국가간의 대결이었다. 전쟁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진다. 이때부터 스페인 식민지와의 무역 혜택이 제공되면서 네덜란드는 노예무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베스트팔렌조약은 서양에서 강조하는 국제법의 기준이 된 조약이 되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이 조약 이후 네덜란드가 식민지를 접수한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네덜란드가 이익을 얻었지만 뒤이어 제국의 길을 밟는 프랑스와 영국도 마찬가지다.




합스부르크는 카를로스 2세(1665년 스페인왕 즉위)를 마지막으로 스페인 영토에서 물러나면서 제국의 범위는 유럽 대륙의 범위로 축소된다. 


18세기는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1745년 황제 즉위)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인물들 중 가장 흥미로웠다. 그녀는 집권 기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그 무렵 프로이센의 힘이 강성해져서 부딪힐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당시 프로이센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집권 중이었고 프로이센의 군대는 막강했다. 그녀는 프로이센의 군대의 이점을 배워 제국의 군대 제도를 개혁했다.


19세기 프란츠 2세는 1804년 오스트리아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그의 집권기 신성로마제국이 소멸하면서 마지막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는 당시 외무장관이던 메테르니히와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국내 정책 권한을 주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1815년 무렵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경선을 확정하게 된다. 


뒤이은 프란츠 요제프는 1848년에 황제에 즉위한다. 그는 신절대왕정(군주정)을 추구하면서 제국 내 민족정체성에 대한 반감과 분노들이 커지게 되는 역설을 불러온다.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6)는 18세기를 마무리하고 19세기를 연 황제다. 이 무렵 제국의 변경에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서 더는 제국을 팽창할 수 없게 되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1879년 무렵 이후 제국의 행정가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주민들을 종교상 문제로 곱게 보지 않았다. 1908년 제국은 결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였고 세르비아와 가까웠던 러시아는 이를 두고 보지 않으면서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전쟁이 벌어진다. 세르비아가 남쪽의 오스만령 마케도니아로 세력을 뻗치게 되자 황실은 제국 내에 있는 세르비아인들을 러시아가 해방시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1914년 보스니아에서 총성이 울리고 이 사건을 기화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만다. 제국은 민족감정에 호소하며 징집령을 내렸고 이에 응해 나간 800만명의 군인 중 100만명이 사망, 200만명이 부상, 400만명이 다치고 150만이 포로가 된다. 



사실상 제국은 이로써 종말로 끝이 났다. 긴 세월동안 유럽을 주무대로 주름잡던 제국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나는 우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형성되는 과정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민족간의 분열이 심화된 원인이 궁금했는데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책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역사를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였다는 것일 것이다. 기존에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려면 각각의 영토와 지역사, 나뉘어진 세계사를 통해서 엮어나가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책의 맨 앞에는 왕의 계보도가 있고 참고 사진 자료는 따로 2~3부분 정도로 나누어 넣어 놓았다. 사진은 칼라로 보는게 좋으니 따로 둔 걸 이해는 하지만 계보도는 책을 보면서 앞으로 왔다갔다하려면 번거로울 것 같다. 계보도는 따로 이미지 스캔화시켜놓고 책을 읽을 때 바로 도움을 얻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나의 가문으로 시작했던 왕가가 몇 개의 영토와 대륙을 거느리며 세계를 주름잡았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현대에도 미국과 중국을 비롯해서 패권을 쥔 국가들이 존재하니 그들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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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8-30 1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돈도 없고 힘 없던 가문이 어떻게 일어서는지 거기에 얽힌 전쟁과 음모 배신 등 저도 화가님 소개로 재미있게 읽어어요 *^^* 왕들의 별명도 인간적이라 재미있고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08-30 13:2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맞아요. 저는 막시밀리안 홍보방식이 놀랍더라구요. 요즘 이렇게 홍보해도 먹힐 것 같은?ㅋㅋ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고... 별명 갖다붙이는게 처음엔 좀 적응이 안 됐는데 읽다보니 또 재밌더군요^^; 1000여년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독자는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쉽게 배움을 얻어갈 수 있어 좋은 것 같아요ㅎㅎㅎ

scott 2022-08-30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몇 세대손 인지는 모름)
후손을 대학원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친구들이 알려줌)

박물관에 걸려 있는 초상화 속 조상들과 턱 모양이 같아서

진짜 왕족의 혈통(주걱턱)이구나 ㅎㅎ
결혼도 자신들 가문 후손과 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8-30 17:18   좋아요 1 | URL
세계 곳곳에 합스부크르 가문 후손들이 퍼져있을텐데 스콧님은 만나보셨군요ㅎㅎㅎ

왕가가 근친결혼이 문제가 되어서 자손들의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았더군요. 혈통이 그리 중요했던건지...ㅠㅠ

shirleytemple009 2023-11-0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스부르크 가문은 아직도 존재해요. 물론 오스트리아에서 아직도 알게모르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요. 딸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합스부르크 가문 아이가( Franz Josef I의 고손) 다니고 있었어요. 성이 합스부르크.. 상태가 안 좋은것은 글쎄요.. 직접 만나본 바로는 개인적인 생각으론 별차이를 못느끼겠던데요..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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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 순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산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 P217


융합은 객관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사유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을 '트랜스버설(trans/versal)'이라고 하며, 횡단(橫斷)으로 번역한다. 단어 그대로 가로지르는 것이다. 가로지름(crossing)은 수직적인 수용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을 파괴하고 재생산하고 다른 의미의 생명체를 만드는 일이다. 

- P21


정희진은 글쓰기를 위한 방법론으로 융합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융합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융합은 더하기도 아니고 하나로 합치는 것도 아니고 전문성의 반대말도 아니다. 이는 crossing, 경계넘기다. 그녀는 횡단의 정치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핵심 메시지는 결국 융합(횡단의 정치)과 공부라는 키워드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융합을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특히 2장의 테마는 공부가 주제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다. 그러므로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epoche, 판단 정지)이다. '나는 모른다'는 자세가 공부의 시작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력부터 의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 몸에는 이미 많은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다. 

- P98


저자는 공부가 중노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1% 이하일 정도로 높지만 문해력은 다르다. 문해력은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그럼 지식을 쌓으면 문해력이 증가하느냐? 그건 아니다. 문해력은 가치관과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중에서 "나는 고학력자고 많은 것을 아는데 (여성들이) 하는 이야기는 못 알아먹겠으니 너희들이 잘못인 것 아니냐!."라고 이야기하는 자가 있다면 문해력이 갖춰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공부를 해오면서 내가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판단중지'였다. 멈추지 않으면 자기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나가니 얻는 것이 있다고 해도 적을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질문이나 문제를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빨리 결론내려고 한다. 그런데 공부는 질문을 찾고, 품은 질문을 가지고 고민하고 공부하고 오래도록 모색한 끝에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막상 항상 놓치는 부분이다. 나의 공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지침이고 이는 평생 안고 가야할 숙제인 것 같다.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 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생각과 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수학 공부의 이치와 비슷하다. 남이 풀어놓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읽기)과 자기가 직접 푸는 능력(쓰기)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수학 점수가 안 오르는 지름길이다. 

- P138


저자는 공부 방법으로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쓰기 도중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점검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하다 못해 책을 읽고 리뷰를 쓰지 않으면 기억의 휘발성이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책은 읽고 나서 기억 속에서 잊힌다. 하지만 리뷰를 쓰고 쓰지 않고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쓰는 과정에서 내가 읽은 부분에 대해서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배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쓰기로 화두를 던졌다면 그것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왜 세계관이 학과로 축소되어 게토(ghetto)화되었을까.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학과'로 불리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학과는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관점이자 사상으로 간주된다.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분과 학문에서 이미 융합되었고 학문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바꾸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신분석, 여성주의, 미학, 문학, 미술, 역사학, 사회학 등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었지만, 여성주의나 생태주의, 평화주의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 P117~118


오늘날 학과의 구분만큼 무의미한 것이 있을까 싶다. 굳이 학과를 나누었으나 공부하는 내용은 겹치거나 해서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학문만 공부한다고 이해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상이나 가치관을 위해서는 여러 학문이 융합되어야 하고 상호 간 교차되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낼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기초 한자 병기를 제안하면 비난하는 교사들이 많다. 한자는 한국어를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인데도, 한자 병기는 학생들의 학습량만 늘리고 사교육을 부추긴다며 염려한다. 그러나 외국어 조기 교육의 효율성과 중요성은 당연시된다(잘못 알려진 교육학 이론이다). 

- P126


한국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한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교육 시스템에서 중요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배울 때만 해도 필수 과목은 아니었지만 배울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다. 저자도 이야기하지만 단순히 한글만 된 단어는 음만 같고 뜻이 다른 것이 태반이다.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단순하게 "말"이라는 단어도 달리는 말인지 언어의 말인지 한글만 표현해서는 저 단어만으로는 알 수 없다. 책을 읽을 때 간혹 답답한 경우가 발생할 때가 한자어를 표기하지 않는 경우이다. 적어도 책에서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표기해야 오독을 범할 확률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선택하는 능력과 안목은 융합적 사고뿐 아니라 개인의 인생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이다. 안목은 그 사회의 수준과 개인의 노력, 환경의 총체다. 무엇이 중요하고 바람직하고 아름다운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판단력이 없는 사람을 만나서 잘못 엮이면 내 인생도 재앙을 맞는다. 파트너 선택이 가장 흔한 예다. 자기 프레임을 모르는 사람이 오피니언의 리더, 고위 관료, 통치자가 되면 역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민생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 P233


한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계급'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빈자와 부자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 이것을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타개하려는 노력 없이 한국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어서인지 회의적인 생각만 든다.


저자의 말처럼 지금의 문제를 확인하고 나아가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기존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존의 지식과 사고 체계와 보편적 관념으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은 갈등만을 양산할 뿐이다.


융합은 원래 존재했고(혼종성, hybridity), 대화가 필요하며(learning), 기존의 지식을 넘어야 한다(trans~). 물론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 P191


융합은 프레임 이동의 정치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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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8-26 18: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 언제나 비슷한건 같지만 결코 같지 않은 매일 매일이군요~!!
마지막 융합에 관한 문장 좋네요 ^^

거리의화가 2022-08-26 21:13   좋아요 4 | URL
저는 솔직히 가장 소름돋은 문장이라면 그 문장을 꼽을 것 같아요. 그래서 리뷰 맨 처음에 적은 것입니다^^* 마지막 융합 문장도 좋죠? 이 책으로 인해서 횡단의 정치, 융합, 크로씽에 대한 개념을 잘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미미 2022-08-26 18: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가 다행히 문맹률은 낮은데 문해력은 꽤 떨어진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어요. 융합하려면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할 듯 한데 저도 회의적인편이라 갈길이 더 멀게 느껴집니다. ^^*

거리의화가 2022-08-26 21:15   좋아요 3 | URL
그러니까요. 문해력과 문맹률의 차이가 이리 클줄이야… 생각해보면 성인 중 대부분이 책도 잘 안 읽고 사유라는 것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까 싶어요^^; 알라딘 서재에 들어오시는 많은 분들은 그런 면에서 대단한 분들이라는! 특히 정치인들은 더한 듯합니다. 전형적인 기존의 개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분들이잖아요.

mini74 2022-08-26 1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심심한 사과를 표한 업체에 분노한 사건이 인터넷에 떠돌더라고요. 사과를 심심해서 하냐고 ㅠㅠ 어떤 작가님이 문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라고, 설마 사과하며 심심하다의 뜻을 그렇게 썼겠냐며, 불신의 시대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화가님 글의 융합이 그런 문해력의 문제해결에 열쇠같다는 생각듭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8-26 21:16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ㅎ 미니님 빵터졌어요^^; 문해력의 문제 해결에 융합은 필수인 것 같습니다. 미니님 지적대로 이전 사고에 갇혀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한 듯합니다…ㅜㅜ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희선 2022-08-28 0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기도 하죠 자신과 다른 생각도 있다는 걸 알고 그게 어떤지 생각해 보면 좋을 텐데...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건 안 좋겠지만, 다른 것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08-28 05:26   좋아요 1 | URL
기득권층은 너무 자신들을 안 바꾸려고 하는 것 같아요. 자신들이 가진 게 많으니까 지금의 이 질서가 바뀌는 걸 원치 않겠죠. 대기업 규제 완화, 중대재해처벌법 완화나 변경 이야기도 나와서 가진자들만 배부른 세상이 되어가는 듯 싶습니다. 그들이 서민의 생각을 듣기나 하는지.
 
만선사, 그 형성과 지속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3
정상우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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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근대 역사학'의 성립과정은 '동양'의 창출 과정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본사를 중심으로, 일본사의 타자로서 한국을 비롯한 주변의 역사를 배치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식민주의 역사학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타자화가 식민지 조선을 향해 나타난 것으로, 일본사의 타자로서 한국사가 재구성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P21


이 책은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학총서' 지원사업으로 진행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3권째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후발 주자로 근대적 학문 연구 방법을 적용하면서 자신들의 침략과 지배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식민사학은 그렇게 등장한 논리다. 

식민지기 일본인 연구자들은 '반도론', '타율성론', '사대주의론', '정체성론', '일선동조론' 등으로 다양한 논점을 제시하며 정당성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렇다면 제목의 만선사는 무엇인가? '만선', '만선사'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로 일제 시기를 거치면서 등장했으나 이는 당시에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어느 범위까지를 지칭하는지 정해지지 않은채 모호한 것이었다. 


일본의 근대화와 주변국 침략으로 인한 제국 판도의 팽창 및 이와 동시에 일본에서 진행된 근대 역사학의 성립 전개에 따른 새로운 역사공간으로서 '동양'의 형성,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과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한국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거대한 문제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과 더불어 만들어진 용어인 '만선(滿鮮)'과 그 역사에 대한 연구였던 '만선사(滿鮮史)'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 P23


만선사를 유일하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학자는 이나바 이와키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만주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시대에 따라 조선사, 일본사, 한중관계사, 한일관계사로 범위를 확장하면서 삶의 마지막까지 연구를 이어갔다. 


1910년대  그는 『만주발달사』 저술을 통해 몽골-중국-만주 셋 간의 역학관계를 비롯, 대륙의 민족들이 만주에 미친 영향을 넘어 대륙과 일본의 관계까지를 만주사의 범위로 정의하였다. 그는 먼저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대한 원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송대 이후 북방 민족의 힘이 강해지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 왕조를 회유하면서 중국 문화가 한반도를 장악했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성리학과 가례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만주사에 대한 관심을 조선으로 확장하는 한편, 조선사를 연구해온 다른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잇기도 했으나 비판하거나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기존 연구자들은 조선의 남부 지역과 일본의 인종적 근친성을 강조하며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 국가를 한국사의 범위에서 제외시키려고 한 반면 그는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요소로 한반도를 꼽으며 거리를 두었다. 


1920년대 『조선사』 편찬 임무를 위해 조선에 들어온 그는 조선의 자료를 이용하며 조선사를 고증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의 정체와 원인을 송 이후 이이제이의 외교수단이 강화되고 성리학의 가례가 반도에 이식되었다는 것에 대한 고증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만선이 분리된 이후 반도의 왕조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반도에 침략 or 교류한 중국 세력과 만주 장악 세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 조선시대의 정치가 귀족정치을 벗어나지 못했고 명의 법과 제도를 모방하면서 귀족과 관료가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1930년대 그는 만주국 건국 후 만주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만주사에 대한 통사를 『만주국사통론』으로 정리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나바는 만주사의 기원을 숙신으로 보고 중국의 한족과 구별되는 만주만의 특징을 바탕으로 비한족이 만주라는 땅에 거주하며 거쳐간 역사를 기술하였다. 만주의 지리적 역사가 아닌 만주 민족의 흥망성쇠를 다룬 역사로 기술한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으로는 만주와 몽골을 함께 장악한 거란의 태조와 청 태조, 강희제의 정복 활동을 만주족의 발전을 위한 전제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만주 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만주의 발전을 위해 만주만이 아닌 몽골까지 장악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만주국은 당시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건국의 정당성이 필요했다. 이는 '오족협화'라는 건국 이념에 대한 선전으로 활용되는 동시에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몽골군의 전쟁에 대한 합리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대륙의 역사적 전개를 체계화면서도 대륙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한사군의 설치가 일본에서도 국가 성립의 계기를 만들었다면서 일본의 국가의 성립 시점을 3세기로 끌어올렸고, 임나 일본부의 출현 시기도 앞당겼다. 고대 중국과 일본의 교통으로는 특별히 중국의 위(魏)에서 히미코 여왕에게 금인자수를 보낸 일, 남송 정벌을 위해 쿠빌라이가 흑산도 일대를 조사하고, 탐라를 장악하며 일본으로 국서를 보낸 일 등을 제시하였다. 또 임진왜란의 결과 만주에 대한 명의 견제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막대한 제정 지출로 청이 흥기할 수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일본은 대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대상으로까지 만선사의 범위에 포함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만선사를 구성하는 핵심 축으로 작용하였다. 


일제 시기 일본 연구자들의 이름을 공부하며 알게 되는데도 이렇게 매번 양파처럼 새롭게 알게 되는 점이 놀랍다. 

일본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다. 계속 반복해서 정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일단 세 명의 학자들을 정리해둔다. 


일단 이나바 이와키치는 만선사 연구학자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으니 기억해야 한다. 그는 대륙과 만주와 조선의 불가분성을 주장하였고 북방의 역사를 위해 단군 신앙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식민 사학자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흘러갔음을 극도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마니시 류를 기억하자. 그는 일본에서 조선사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학자다. 조선사 연구 논문을 최다 발표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한반도 남부의 인종과 일본인을 동종으로 보는 등 식민사학자의 논점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도리야마 기이치를 더한다. 그는 발해사를 연구하였으며 이나바 이와키치의 만선사 연구학 중 발해 관련하여 기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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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1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식민사학에 기울인 노력을 보면 정말 눈물겹습니다. 아 진짜 주어진 목적을 위해 자료를 재배치하면서 저들은 한치도 그 사실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겠지요. 신념이 사실을 가릴 수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 시리즈가 나온건 몰랐는데 화가님 진짜 부지런하게 찾아서 읽으시고 리뷰 올려주셔서 저도 공부가 되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2 09:31   좋아요 2 | URL
논리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된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모습이 징그럽다고나 할까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 주변의 역사를 연구하고 일본까지 귀결시킨 것을 보니 우습더군요. 이 책 읽으면서도 갖다붙이기는 참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 여러 번 했습니다^^;
네. 2월부터 나왔는데 시리즈 책은 이미 다 나왔고요. 부지런히 읽으면 올해 안에는 다 읽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부가 되신다고 하니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8-22 0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인이 우리의 역사를 저렇게 파고 들어 연구하다니....아주 주관적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구요. 학자라고 표현해도 되나? 싶기도 하네요???ㅋㅋㅋ
그래도 만선사가 뭐지? 싶었는데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범위가 이렇게 광범위하다는 걸, 화가님 덕분에 많이 알게 되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2 09:33   좋아요 2 | URL
찾아내는 논리겠지요. 꿰맞추기도 힘들텐데 애써 찾아내려고 했고 이걸 또 평생에 걸쳐 연구한 학자들이니 놀랍습니다ㅋㅋㅋ
사실 저도 만선사 두루뭉술하게 알았던 것 같은데 이 책을 통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님께도 도움이 되어서 좋네요^^
 
동주 - 신연식 각본집
신연식 지음 / 시공아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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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먹먹함에 한참을 머물렀던 기억이 났다. 진하게 남은 윤동주와 송몽규의 인생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인다. 밤하늘의 별, 그리고 용정, 연희전문대, 교토대의 풍경들이 스친다. 2016년 혼란스러웠던 정국과 두 사람의 인생이 교차된 것은 아닌지.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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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8-20 10: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이 친구가 우지강변 윤동주 시비 제막식에서 시낭송을 했었어요. 일본인들 중에도 윤동주시인 좋아하시는 분들 많다고 그러더라고요. 영화 참 좋았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11:51   좋아요 3 | URL
와~ 시낭송 장면 생각하니 여러 감정이 듭니다. 설레기도 했겠지만 슬픔도 있었을 것 같아요. 네. 일본인들에게도 윤동주 시인은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5년 이후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몇 편 없는데도 이 영화는 무척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새파랑 2022-08-20 10: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각본집에 손이 안가긴 하지만 이 책의 각본집은 가지고 싶네요 ^^ 오늘 중고검색 들어가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11:52   좋아요 3 | URL
ㅎㅎ 새파랑님. 각본집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신간이라 중고검색이 금방 뜰지는 모르겠네요^^; 새파랑님 get하시면 알려주세요~ㅎㅎㅎ

새파랑 2022-08-20 12:11   좋아요 3 | URL
요게 최신출간이어서 중고는 없어서 화가님께 땡투하고 새책으로 방금 구매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8-20 16:30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미미 2022-08-20 12: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각본집이 나왔군요! 이 영화 보고싶었어요. 두 배우 다 연기도 매력있어서 기대됩니다.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 가장 좋아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16:31   좋아요 3 | URL
미미님 이 영화를 보지 못하셨군요^^ 종종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 나왔던 것 같은데 기회 되면 보시면 좋겠네요. 두 배우 연기 모두 잘하죠^^ 각자의 매력들도 있고요. 저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랑 <병원>을 좋아해요.

scott 2022-08-22 0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윤동주의 사촌이 정말 싫었어요(중딩때 윤동주 평전 읽고 난후)


이제 미국(뉴욕)에서도 윤동주가 남긴 시들 낭송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 땅 떠날 때 오로지 윤동주 시집(한쿡말로 된 책)만 챙겨 갔어요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08-22 09:35   좋아요 2 | URL
그의 시는 아름다워서 어디에서도 통할 것 같아요^^ 이제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네요.
오!!! 외국에서 읽는 윤동주 시집 남다를 것 같습니다. 향수를 채워줄 것 같기도 하고요. 평전은 담아놓았어요. 조만간 주문해야겠습니다^^*

그레이스 2022-08-22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https://youtu.be/JmA0HRUCrrs
베이스 김대영의 별헤는밤 너무 좋아요
눈물나요.

거리의화가 2022-08-22 16:49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덕분에 좋은 곡 듣게 되었습니다. 시가 그야말로 음악으로 승화된 경우군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