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총 10개의 단편이 들어 있다. 개인적으로 좀 모호했던 2~3개 정도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잘 그려낸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 속에서는 내가 멍청해서, 못나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울분을 참아야 하거나 허벅지 꼬집으며 넘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는 감히 해보지 못하는 것들을 소설 속에서 어떤 결말로(!) 대리만족시켜준다는 느낌을 받아서 좋았다.


기억에 남는 단편들을 짧게 정리해본다.


<저주토끼>에서는 좋게 이야기하면 정직하고 성실히 사는 사람이지만 반대로 이야기만 어리숙하고 순진한 사람이 나온다. 현실에서는 이들이 바보 취급을 받는다. 약삭 빠르게 이 기회를 노려 잘 뺏어가는 이들이 승자가 된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이런 경우는 너무 많아서 열거할 수가 없다.


할아버지의 친구는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해서 더 맛있고 몸에 좋은 술을 만드는 데만 신경을 썼다. 정부 인사와의 친분, 인맥, 접대, 필요에 따라서는 뇌물이나 뒷거래가 제품과 기술보다 중요한 시대라는 사실을 할아버지의 친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해버린 술 시장을 넘보는 더 큰 회사가 있었다. 인맥과 연줄에 강하고 접대에 능한 회사였다. 이 회사에서는 자신들이 만들어 파는,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섞은 액체가 ‘서민들이 선호하는‘, ‘정통의 그 맛‘이라 광고했다. 앞에서는 정당하게 언론매체에 광고했지만, - P13


<머리>를 보면서 내가 사용하는 것들에 과한 것는 없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만들어낸 산물이 결국 나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이르게 한다. 결코 내 몸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 말이다.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후에도 나를 혐오하고 역겨워하여 줄곧 없애고자 하지 않았느냐? 내게 베풀어준 것이라고는 있어 봤자 네게는 백해무익할 따름인 배설물과 오물뿐이 아니었느냐? 그나마 받아먹으며 사람다운 외양을 이루기 위해 나는 네게서 갖은 수모와 박해를 받아야 했단 말이다. 하지만 드디어 나는 몸을 이루었다. 어두운 구멍 속에서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이제 나는 네가 되었으니 너의 자리를 차지하여 살아가리라." - P57


<안녕, 내 사랑>를 보고는 인조 반려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기술의 발달로 더 오래 살게 되었으나 주변의 이들과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는 없다. 언젠가 그들은 자신의 곁을 떠나기 때문에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는 인구가 급증하는 거라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살아 있는 반려동물도 결국 언젠가는 주인 곁을 떠난다는 것. 나는 반려동물을 키워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죽고 난 이후 주변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낀다고 들었다. 최소 10년 이상을 내 곁을 지키는 것이니 가족처럼 끈끈한 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런 인조 반려동물이 실망감과 서운함을 드러낼 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다. 정교한 3D 프린터 등의 기술로 얼마든지 피부와 비슷한 조직을 만들어내고 학습으로 인간의 사고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인조 반려견은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시기에 구현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첫사랑이 각별하듯 주인공의 '1호'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인간이 나이들듯 기계도 노후가 되고 금방 교체된다. 사랑의 감정이 시간에 따라 변하듯 기계도 한 인간에게 머무는 시간이 3~5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묘하게 연결되었다. 


1호는 달랐다. 내 첫사랑. 그는 내게 ‘인공‘이 아닌 진짜반려자였다. 평균적인 사용 연한이 지난 뒤에도 나는 1호를버릴 수 없었다. 기종이 오래되어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중단했고 나중에는 오류가 계속 나서 네트워크 접속 자체도 포기하고 차단해버렸다. 결국 1호는 ‘반려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스마트 책상이나 냉장고보다도 기능이 떨어지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내게 1호는 언제나 1호였다. - P128


<즐거운 나의 집>은 읽고 너무 화가 났다. 내가 견딜 수 없는 조합들로만 가득한 구성이어서 그랬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에 구속되지 않는 대안적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남편의 저 허울 좋은 말은 핑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결말이 그렇게 되었지만 과연 현실에서는 어떨까. 다른 형태의 비관적인 결말만 떠오를 뿐이었다. 집을 구할 때 최대한 알아보고 해도 사기를 당하는 마당에 저리 허술하게 들어간다고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돈으로 시달림을 많이 받아봐서인지 돈은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말자 주의로 바뀌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돈 관계는 하지 않는다. 사람 자체도 믿을 수가 없는데 돈과 얽히면 사람은 더욱 믿을 수가 없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 단편을 읽는 내내 한숨만 나왔다.


남편은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 그녀 또한 대학 시절에 학점과 스펙에 매달리고대기업이나 공무원 취업으로 대표되는 안정적인 직장을 최고로 치는 주위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압박을 지겹게 여기고경멸했기 때문에 남편이 원하는 삶의 지향점이 자신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 P250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경우에는더욱 그렇다. 집 밖의 문제를 피해 가정으로 돌아와도 가족이집 안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 P259


자본주의,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과 다른 물질과의 상호 관계, 환경 문제에 대해서 곱씹을 점이 많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과제들에 대하여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을 읽기 전 겁이 나서 읽기 주저스러웠다. 공포 장르와는 친하지 않아서다. 하지만 읽기 잘했다 싶다.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상의 공포들을 잘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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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14 21: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때문에 손해보는듯요. 우리처럼 무서운거 못 읽는 사람들이 주저하잖아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08-14 21:34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ㅎ 차라리 다른 단편을 제목으로 끌고 왔으면 더 나았을까요? 진입 장벽이 높은 제목이에요ㅠ 다음에 작가님 소설 내실 때는 저희 같은 독자들을 위해서 제목 좀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ㅋㅋ

그레이스 2022-08-14 22: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담겨있는 주제들이 생각할 지점이 많네요. 제가 무서움을 이겨내고 읽기로 결정한다면 이 리뷰때문일 듯요. 그래도 공포물은 제게 장벽이 높네요.^^

거리의화가 2022-08-15 09:37   좋아요 3 | URL
오~ 그레이스님 영광입니다^^ 읽고 있으면 정말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는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있습니다. 주제가 우리 현실을 담아낸 것들이라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어서 좋은데 그걸 풀어내는 방식도 흥미로웠습니다. 공포라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읽으신다면 여름이 지나기 전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얄라알라 2022-08-15 01: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주토끼]는 꼭 읽어볼 마음이기에 일부러 거리의 화가님 리뷰 처음과 마지막 단락만 읽었는데, ˝읽기 잘했다˝하시니, 더는 미루지 말아야겠네요. 소설 읽은지 꽤 오래 지난 마당에 동기 부여받고 갑니다^^

거리의화가 2022-08-15 09:38   좋아요 4 | URL
소설 읽기 전 저도 가능한 스포를 보지 않고 읽는지라~ 얄라알라님의 생각과 같아요ㅎㅎ 읽으신다면 여름이 지나기 전에 읽으시길...^^ 동기부여받으셨다고 하니 뭔가 뿌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8-15 09: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재밌죠??^^
울집 딸 중 한 명은 근 한 달을 잡고 읽더니 어제 다 읽었대요. 어떠냐고 물으니까 본인은 스릴러물 무서워서 못읽을 것 같다네요ㅋㅋㅋ
그래도 모래나라 이야기는 좋았다고 그러구요^^
저는 손가락에서 반지 빼 가는 이야기도 다 읽고 뒤늦게 소름 돋기도 했어요.
처음 한 두 편만 읽었을 때는 왜 부커상 후보일까?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좀 알 듯도 하더라구요^^

거리의화가 2022-08-15 09:41   좋아요 3 | URL
10편의 단편이 서로 다 달라서 시간을 들여서 읽어도 괜찮은 책인듯 싶어요. 저도 대출한 책이 아니었다면 띄엄띄엄 읽었을수도ㅋㅋㅋ
어떤 단편이든 건져낸 것이 있었다면 작가님의 의도가 독자에게 가 닿은 것이겠죠. 저는 <저주토끼>랑 <안녕, 내사랑>이 짠하면서도 슬프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들었습니다^^

얄라알라 2022-08-15 09: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실은 [저주토끼]를 작은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했었는데, 사서 선생님께서 정말 무섭다고 겁을 주셔서 망설망설 다음으로 미룬게 한 달은 지난 것 같은데, 낮에 읽으면 되겠죠?^^ 거리의 화가님,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전 지금 NOPE개봉만 기다리고 있는데 spoiler 안 보려고 검색도 자제중입니다. ㅎ

거리의화가 2022-08-15 21:00   좋아요 0 | URL
낮에 읽으면 괜찮을겁니다^^ 저도 스포 진짜 싫어해서 영화, 책 등 이야기류는 스포를 안보려고 합니다. 보면 역시 재미가 반 이상 날아가서요^^

얄라알라 2022-08-20 13:22   좋아요 1 | URL
드뎌!!!!
[저주토끼] 읽고나서 거리의화가님 리뷰 제대로 보니
확실히 들어오는 게 많습니다.

저는 <머리>가 가장 오싹했는데 모녀 관계, 혹은 부모-자식 관계로 생각하며 봤거든요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확장해서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가 남기는 글이라든지...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0 16:34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 이 책 다 보셨군요^^ 머리는 어떤 면에서는 충격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볼 수도 있기도 하겠네요ㅎㅎ 저는 아무래도 자식이 없어서인지 그렇게는 못봤는데^^; 같은 책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게 있어서 다른 리뷰 속에서 배우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알라님의 리뷰도 읽어볼게요^^

mini74 2022-08-15 10: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공포물 아주 좋아하고 고어도 잘 봅니다. 그런데 이 단편들이 더 무섭던걸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소재들이 공포스럽게 다가와서인지 특히 전 머리가 무서웠어요.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08-15 21:03   좋아요 1 | URL
와 미니님 강자!!!ㅎㅎ 전 공포 잔혹물 이런거 너무 싫어해요. 옆지기는 그런 거 잘보는데 저는 그런거 볼 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갑니다ㅋㅋㅋ 하지만 말씀처럼 일상에서 부딪치는 공포가 실제하는 거라 더 무섭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ㅠㅠ 점점 사회가 각박해지니 공포의 종류도 다양화되는듯해요ㅡㅡ

새파랑 2022-08-15 11: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돈은 빌리지도 않고 빌려주지도 않는다가 가장 인상적이네요 ^^ 책 제목과 표지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거리의화가 2022-08-15 21:05   좋아요 2 | URL
ㅋㅋㅋ 돈에 얽히면 사람이 돌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늘 대출과는 거리를 둡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책 표지와 제목이 이 책의 진입장벽을 높이는데 한몫을 하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2-08-15 14: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공포물을 아주 싫어하는데 저주토끼는 생각보다 무섭지 얺고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읽었어요 그만큼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탄탄하게 느껴졌어요~~

거리의화가 2022-08-15 21:07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페넬로페님 정보라 작가 글 잘 풀어나가는 힘이 있더라구요 이야기의 설득력이 없으면 읽기 어려웠을텐데 그렇지 않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좀 불쾌하거나 싫은 느낌들도 잘 그려내서 그런 감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희선 2022-08-17 0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만들어낸 것, 버리는 것이 많겠습니다 그런 게 자기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무척 무섭겠네요 <안녕, 내 사랑>은 《클라라와 태양》 <쵸비츠> 만화도 생각나는군요 기계도 끝이 있고 시간이 가면 바뀌죠


희선

거리의화가 2022-08-17 11:06   좋아요 1 | URL
네. 내가 버린 것들이 뒤에 떡하니 서서 나를 바라본다고 생각한다면? 쓰레기도 줄여야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클라라와 태양>이 비슷한 내용이군요? 오... 관심이 갑니다. 핸드폰만 해도 2~3년을 넘기지 않고 자주 바꾸는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