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13 - 만두처럼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오래 전 내가 6년 동안  다니던 여학교 앞에는 미진사와 일신사가 있었다.
교복과 문구,  간식도 함께 팔던 백화점이 부럽잖은 전천후 가게였다.

일신사 메뉴 중에는 잔치국수가, 미진사에서는 라아드(돼지기름)에 구운 만두가 유명했다.
잔치국수에는 막 튀겨낸 고구마나 야채 튀김을 하나씩 집어넣어
국물이 걸쭉해질 정도로 으깨어 먹었는데, 환장할 정도로 맛있었다.
하교길, 배는 고파 죽을 지경인데 용돈이 없어 미진사 앞을 그냥 지나칠 때면
골목에 낭자한 만두 굽는 냄새 때문에 괴로웠다.

내가 누구인가.
초등학생일 때 삼촌이 누나 부부가 하는 충무동 양은그릇 가게 일을 도우며
도시락을 하나 가져와 선물했을 때, 그게 너무 작아 배곯게 생겼다며 울음을 터뜨려
두고두고 식구들로부터 놀림감이 된 인물이다.

지금도 도시락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어 얼마 전에는 곧 다가온 아이 소풍을 핑계대며
삼각김밥용 빨강 도시락과 틀을 새로 장만했다. 
막상 그날이 되면 삼각김밥은커녕 얼렁뚱땅 주먹밥을 뭉쳐 넣을지도 모른다.

요리나 맛집 프로그램은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인데, namu님이 최근 리뷰에 쓰신 것처럼
"어릴 때 바로 우리 엄마(혹은 할머니)가 해주시던 맛이에요!"라는, 손님들의 약속이나 한 것 같은
똑같은 찬사에 나 역시 희미한 짜증과 의문을 품었었다.

--저들의 엄마와 할머니가 전국의 유명 맛집 주인이나 주방장처럼
모두 음식솜씨가 뛰어났을 리는 없는데!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어릴 때의 그 맛'이라는 건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내 기억이 조작을 했건 과장을 했건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싶은데 어쩌란 말인가!
튀김 두 덩이를 빠트려 꿀꿀이죽처럼 먹었던 일신사의 잔치국수나
돼지 굳기름에 노릇하게 구운 미진사의 납작한 만두가 지금 먹어봐도 과연 그렇게 맛있을지!
그럼에도 그 둘은 엄연히  '내 인생의 음식'으로 기록된다.

13권에서 기러기 아빠와 관련한  '궁중떡볶이'라는 에피소드의 팁 제목처럼
그리움이라는 허기는 어떤 산해진미로도 채울 수 없다.

이 책은 소의 내장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릴 때 나는 엄마가 가끔 끓이는 곱창전골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곱창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몇 달 전 합정동의 유명한 곱창집에 가서
구이를 먹어보고 깜짝 놀랐다.
뭔지 모르겠지만 오묘한 인생의 자락과 구비를 모두 품고 있는 맛이었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기분좋게 콤콤한 그 향.
'곱'이 약간 흘러나온 그 매혹적인 자태라니!

절필선언을 하기 직전인 유명작가가 절망엔지 술엔지 취해 길거리에 자빠져 있다가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나고, 또 노점의 식혜 한 사발을 먹고 
다시 펜을 잡는  일화(64화 식혜)는 좀 안일하고 진부하지만
그 식혜 한 사발로 상징되는 것이랑, 단 한 사람이 그리운 나로서는
뭐라고 트집을 잡지는  못하겠다.

13권의 마지막 일화는 '만두'로 진수와 성찬의 애정전선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오는데.....
이 리뷰의 제목을 '사랑은 만두 같은 것'으로 할까 하다가 '그리움이라는 허기'로 잡는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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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10-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런 맞아요. 그리움이라는 허기.
그래서 그전의 그맛은 없다라는 진실.

waits 2006-10-20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일화들에, 로드무비님 글에서 봤던 주하의 모습이 겹쳐지는데요.
길거리 분식류는 저를 도발하는 거의 유일한 음식들인데... 반가워요. ㅎㅎ

oldhand 2006-10-2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지난주에 식객 12~14권 샀는데 아직 비닐도 못 뜯었어요.
미진사.. 일진사.. 분식집 이름이 로드무비 님의 연륜을 말해 줍니다. =3=3=3

Mephistopheles 2006-10-20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에서 만두님이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3=3=3=3
(합정동에 가서 꼭 곱창을 먹어봐야 겠다고 활활 타오르는 중)

로드무비 2006-10-2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지금도 가끔 생각날 정도로 맛나더라고요.
그리고 제목, '사랑은 만두 같은 것'으로 고칠까요?^^

올드핸드님, 호호, 연륜이라니, 저 아직 새파란 청춘인데.
전 13, 14권 샀습니다.
나중에 다 채워넣을 거예요.^^

평택, 나어릴때님, 땡기는 한 가지 음식에 대한 집착은
딸아이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길거리 분식류 정말 맛있어요.
'도발'이라는 표현이 딱입니다.^^

반딧불님, 솥째 밥을 들고 앉아 냄비째 국을 퍼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2006-10-20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6-10-20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리움으로 세월 보내고 있을 때 느낌은, 허기로 지쳐있을 때와 비슷해요.

아영엄마 2006-10-20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곱창 종류는 못 먹어 봤어요.(안 먹었다고 해야 하나..-.-) 언제고 저도 "오묘한 인생의 자락과 구비를 모두 품고 있는 맛"을 느껴보도록 하것습니다.

로드무비 2006-10-2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 님, 제가 너무 멋을 부렸나요?( '')
아무 곱창이나 드시지 말고 꼭 합정동(망원동) 그 가게에 가서
드셔보세요.^^

hnine 님, 너무 잘 아시는군요.^^

투덜거리면서 님, 지난번에 리뷰 쓴 한 권, 그리고 엊그제
13, 14 두 권 샀어요.
기억하시는군요.
홍콩에서 배가 들어오면 왕창 사고 싶었는데
배가 여즉 묶여 있답니다. 흐흐~~

에로이카 2006-10-2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방금 식객 6권을 봤어요. 이번주에 짬짬이 1권부터 봤거든요. 저 맛있는 거 먹는 거, 무지 좋아하는데요... 이 만화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는지, [식객]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그가 들인 발품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또 시각적 이미지 전달이 비교적 용이한 만화라는 매체 형식에도 불구하고, 음식의 맛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간결한 설명문 혹은 레써피를 읽은 듯한 느낌 그 이상을 받기가 힘들더라구요... 잘은 모르겠지만, 에피소드 스토리와 요리를 오버랩시키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런 듯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로드무비님의 페이퍼가 맛있는 것은 이런 맛과 이야기의 오버랩의 탁월함이 아닌가 싶네요.. 그 기억 저편 거리의 만두냄새와 도시락 선물, 합정동 곱창까지... 허영만의 <<식객>>보다 맛있어요.. ^^ 입맛 다시다 갑니다..

치니 2006-10-2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히 , 저도 엊그제 합정동 그 가게에서 곱창 먹었는데, 혹시 로드무비님이 어느 자리에선가 소주 한잔 하고 계셨을까나 하는 상상에, 재미있습니다.

oooiiilll 2006-10-2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정동 그 가게'란 어디인가요? 남자친구와 데이트 하며 일주일에 한 번은 곱창에 소주를 마시는데 점점 맛있는 곱창집이 사라져 안타까울 뿐입니다. ㅠ.ㅠ

2006-10-22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22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트님, 합정동 로터리의 황소곱창인데요.
망원동에도 새로 신축했다고 들었습니다.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 가기 전 우측 코너에 꺾어져 있답니다.^^

치니님, 맛있게 드셨어요?
먹고 싶어라.
이렇게 흐리고 쌀쌀한 가을 저녁 무렵 딱인 음식인데.^^

에로이카님, 음식의 맛을 구수하게 리얼하게 잘 전달하지 못한 부분은
읽으면서 저도 느꼈답니다.
자료 위주의 너무 상세한 설명은 만화 읽는 재미를 좀 반감시킨 부분이
없지않아 있고요.
제 페이퍼가 맛있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일 기분좋은 칭찬인데요?^^



치니 2006-10-2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트님, 합정동 로터리에 있는 그 집이 망원동으로 아예 이사를 했어요 (로드무비님은 이전하기 이전에 가셨던 모양이네요 ^-^). 망원역에서 가까우니 금세 찾으실겝니다.

해리포터7 2006-10-2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드무비님의 탁월한 리뷰...저두 9권인가까지 밖에 못봤는데..얼른 연결해서 봐야 진수와 성찬의 상황을 알터인데요..전 이책 좋은 느낌이었어요.소개된음식을 보면 마구마구 식욕을 느껴서 탈이지만요.히~

건우와 연우 2006-10-23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깔나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제 어릴때 먹던 맛이 끌리는 나이>라고 수다를 떨었던건 혹 로드무비님이 정하신 제목처럼 그리움이라는 허기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2006-10-23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2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아마 절반쯤은?
그런데 반대로 어릴 때 그토록 싫어하던 음식이
땡기는 건 또 무슨 조화속일까요?^^

해리포터7 님, 안 그래도 과한 식욕에 욕망을 더하는.......
진수와 성찬 커플 귀엽죠?^^

치니님, 고맙습니다. 몇 달 전 일이라.....ㅎㅎ

디트님 들으셨지요?^^

산사춘 2006-10-24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울 어무이가 떡볶이나 돈까스를 해주실 때마다 울 남매는 가출을 했드랬어요. 넘 맛없어서... 그나저나 황소곱창이 눈에 박혀부립니다. 세상에나... 생각해보니 10월 들어서 한 번도 안갔어요. 어쩐지 제 곱창이 허전하더라니... 분발하렵니다. 아자!

2006-10-24 0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24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24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월 3일 님, 이젠 잊지 않겠습니다.^^

산사춘님, 저런! 한달 동안이나 걸음을 안하시다니!
님의 예쁜 곱창 가득가득 채워주세요.
황소곱창으로다가.

(그런데 어릴 때 제 입엔 맛없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돈까스와 떡볶이를 마다하셨다니, 그럴 수가!)

2006-10-25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25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26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0-28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0-2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님, 좀전 님의 방에 갔다가 그냥 발길을 돌렸습니다.
긴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럴 마음이 안 나서요.
늦은 밤, 혹은 새벽, 절 기다려주는 글이 한 편 있으니 좋네요.
딸아이가 키우는 햄토리 한 마리가 불만 끄면 미친듯이 쳇바퀴를 돕니다.
그 시끄러운 기척이 또 마음을 덥혀줄 때가 있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의 고마움이 전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