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슈 장 1 - 서른이 된다는 것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필립 뒤피 외 지음, 황혜영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얼마전 필요에 의해 한 포털에 새 메일 주소를 만들었다.
그런데  '나에게 보내는 메일'이라는 단추가 눈에 띄었다.
지금은 메일로 살뜰하게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도 하나 없는 형편,
기념으로 짤막한 편지를 한 통 나에게 보내기로 했다.

로드무비야, 사는 거 힘들제?
애 많이 쓴다.

그런데 세상에, 딱 두 줄 쓰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거다.
애를 쓰기는커녕 게으르고 방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사는 주제에......
너무나 같잖아서 편지 쓰기를 중단하고 왼쪽 팔뚝을 세게 꼬집어주었다.

그 멍의 푸른빛이 아직 남아 있는데 여태까지 보지 못한 프랑스 만화를 한 권 읽게 되었다.
<무슈 장 1권, 서른이 된다는 것>.
서른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친구 앞에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다음주면 서른 살이 된다며 툴툴거리자,
"서른 개 이상은 케이크에 초를 꽂기가 싫다는 거냐?"
라며 핀잔을 주는 가난뱅이 친구 팰릭스.
장에게 빈대 붙어 살다시피 하면서도 도무지 은공을 모르는 놈이다.

집에 돌아왔더니, "생일에 전기오븐을 선물할까?"라고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엄마의 목소리.
외로워는 죽겠는데 아직 누군가 자신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걸 참을 수 없어
여자도 귀찮고, 아아, 어쩌란 말이냐, 이 가슴을.

생일날 오후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다 실패하고 결국 풀 죽은 모습으로
부모님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 장.
부모님은 생일선물이라며 '드릴'을 내민다.
콘크리트 벽에도 쉽게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서른 살이 되면 전기오븐이나 드릴 같은 것들을 생일선물로 받게 된다.
슬퍼해 봤자 소용없다.
나 또한 2년 전, 포천에서 농사 짓고 사는 고모의 생일에 맞춰 고등어를 한 상자 주문하면서
 '실용성'과 엿 바꿔먹은  '낭만'을 생각했다.

어느 날, 자신이 번역한 책이 리스본의 한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초청을 받는데,
며칠 집을 비운 사이 도둑이 훔쳐갈까봐 그가 상자에 챙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른 여인 빌리 홀리데이의 음반이며
할아버지에게 열다섯 살 생일에 선물받은 한 권의 시집이다.
서른 살이 되었다고 재산목록 1호가 바뀌겠는가!

그리고 그가 애타게 찾는 건, 서른 살의 자신을 수신인으로 하여
자신이  열다섯 살 때 쓴 편지.
잘 간직한다고 한 그 편지는 도대체 어디에 숨었을까?

책의 뒷부분, 냄새의 기억과 관련한 프로스트의 마들렌빵에 대한 언급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바로 2, 3일 전 바로 그 부분을 길게 인용한 책을 읽으며 밑줄을 쳤던  것이다.
(나의 가을은 마들렌빵 냄새와 함께 왔다.)

먼 옛날의 것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모두 죽고,
물건들이 모두 깨어져 흩어져버린 후에도, 그보다 더 연약하지만 더 활기차며,
더 끈질기고, 더 충실한 냄새와 맛만이 오랫동안 자세를 갖추고 있다.
마치 다른 모든 것들의 잔해 속에서 자기들의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 기억을 일깨워 주려고 준비를 갖춘 영화처럼.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중에서.



무슈 장이 막연하게 기대하는 인생의 그 순간은 과연 언제 도래할 것인가?
올컬러의 코믹한 그림과 말풍선 속의 빽빽한 대사들이 마치 박영규 선우용녀가
등장하는 장면의 옛 시트콤을 보는 것 같다.
2권, 3권을 함께 주문하지 않은 것이 아쉬운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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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9-01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은 낭만을 실용성과 엿 바꾸듯 교환하지 않으실 분이세요.
가만 보면, 어찌나 낭만적이신지.
부러 그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떠시는 것 같은데요. 감추기 위해서죠.^^
신랄한 생의 감각과 허무한 낭만을 늘 함께 품고 계시죠.
2, 3권은 제가 나중에 선물해드릴게요.

진/우맘 2006-09-01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지하게 땡기게 만드는.....흠........역시, 로드무비님의 리뷰, 여전하십니다.^^

urblue 2006-09-0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께 점심에 혼자 밥 먹으면서 이 책을 봤더랍니다. 2,3권도 재미있을 듯. 저런 무슈 장이 아빠가 된다잖아요. ^^

BRINY 2006-09-0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날이라고 케익에 나이수대로 초 꽂아본 게 3년쯤 된 거 같아요. 그후로는 케익 사도 먹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케익도 안사고...내년에 다시 한번 해볼까요~

waits 2006-09-0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선물 받은 전기오븐에 머리를 처박나 했어요. 다행히, 아니군요.
바뀌지 않는 재산목록 1호에 왕공감...^^

로드무비 2006-09-0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 저는 케이크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이가 좋아해서 케이크는 사게 됩니다.
초 꽂고 생일축하 노래 안 부르면 생일잔치 아닌 줄 알잖아요.
요즘 작고 예쁜 케이크 많던데 내년에는 꼭 기분 내세요.
이왕이면 멋진 분과 함께......^^

블루님, 이 책 읽으며 엊그게 블루님이 단 댓글 뜻을
뒤늦게 이해했다우.
아빠가 된다니 기대되네요.^^

진/우맘님, 헤헤, 무지 재밌는 만화입니다.
꼭 읽어보시길.^^
(읽는 동안 유쾌해요.)

namu님, 아니 제가 뭘 감췄다고.
그렇게 보아주시니 너무 황홀합니다.
그리고 2, 3권을 선물해 주신다고요?
책값이 너무 비싸서.=3=3=3




mong 2006-09-0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책 리뷰도 어쩜 이렇게 짠하시게 쓰시는지~
로드무비님 가을이 성큼 다가왔어요 ^^

로드무비 2006-09-0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 나어릴때님,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님의 재산목록 1호는 음반들인가요?^^

mong님, 아침에 난간에 매달려서, 학교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가을이더군요. 정말.
낮에는 아직 좀 덥죠?^^

2006-09-01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9-01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6-09-0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제가 선물해드리고 싶었는데 나무님에게 선수를 빼앗겼네요.
책값이 비싸다는 로드무비님 댓글을 보니, 나무님하고 저하고 2권, 3권 나눠서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보고. ^-^

sandcat 2006-09-0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집어넣으면서 왜, 메세지 넣을 수 있잖아요. 상품 주문할 때. 저도 스스로에게 뭐라고 써볼까, 하다가 그만뒀어요. 쓴다 해도 "책 좀 읽어라", "밥은 먹었냐?" 정도겠지만..

로드무비 2006-09-0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전 그런 생각 한 번도 못해봤는데.....
책 주문할 때마다 한 마디씩 써넣으면 재밌을 것 같아요.^^

치니님, 무슨 말씀을요. 헤헤~~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다음 주 양식 벌어놓은 님, 야곰야곰 읽기 좋은 책입니다.
앞의 책에 대해선 두어 번 페이퍼에 썼는데.
그 작가의 책 리뷰도 썼고요.^^

귀엽기도 하고 님, 주하와 함께 읽을게요.^^*

건우와 연우 2006-09-0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들렌빵 냄새가 궁금해지네요...^^
로드무비님덕에 읽고 싶은 리스트가 자꾸 길어집니다.

로드무비 2006-09-01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유님, 버터와 우유가 섞인 스몰 쎄미 카스테라.ㅎㅎ
사실 그 향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전 옥수수빵(술빵) 넙적한 것이 더 좋아요.

에로이카 2006-09-04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왜 이 페이퍼를 이제야 봤을까요? 별로 할 일없고 찾아주는 사람도 없다면, 생일날, 10년 후 생일을 맞이하는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아주 좋겠네요... 만약 그렇다면 올해 생일에는 서른다섯의 에로이카에게... ㅎㅎㅎ...

로드무비 2006-09-04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그럼 님의 나이가 지금 25세?
아구구구, 청춘의 초입에 서 계시는군요. 부럽사옵니다.
생일 언젠지 알려주시면 카드 한 장 보낼게요.

전 10년 후의 자신에게 편지를, 그런 거 낯간지러워서 몬하겠어요.
멋과는 담을 쌓은 인간.=3=3=3

2006-09-05 0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9-06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9-06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썽......
고맙습니다, 귀한 글 보여주셔서.

산사춘 2006-09-0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 많이 쓰시며 사셨군요. 왼쪽 팔뚝 호호~ 좋은 글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