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즐겨보는 맛집 프로그램에 '병어회 무침'이 나왔다.
기억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더니,
병어라는 생선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한 여성작가의 단편소설이 생각나면서
그 선량하고 맑은 눈망울과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떠올랐다.
'병어회'의 이순(李旬),  80년대 초에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한 이이다.

당시에는 미모가 뛰어난  작가가 흔하지 않았는데, 조분조분한 말솜씨와
탤런트 뺨치는 해사한 얼굴로  텔레비전의 한 문학 프로그램 진행자 자리도 꿰찼었다.
초대손님으로 나온 작가와 책 이야기를 나눌 때 보면 그이는 꽤나 논리적이고
빈틈이 없었다.

<소설문학>이라는 문예지의 표지모델이 되었을 때, 그는 말했다.
이 나이에 기미와 주근깨투성이의 확대한 얼굴 사진을 표지에 싣다니, 무모한 도전이라고......
이상하게 그 말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그 때 그이의 나이가 30대 중반, 혹은 후반?)

'백부의 달'이니 '네게 강 같은 평화'니 하는 그의 대표소설들을 발표된 지 몇 년 지나 
겨우 챙겨본 터이지만,  그의 작품들은 뭐랄까, 하나같이 조미료를 치지 않은
삼삼한 맛의 음식 같았다.
다소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나의 입맛에는 별로 맞지 않았다.
한 소시민 가족의 일상을 세세하게 묘사한 '병어회'는 꽤 재밌게 읽었다.
TV문학관인가 아무튼 어떤 방송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 방영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런데 소설을 발표하고 대학 강의도 맡고 한창 열심히 일하던 인생의 절정에서
어느 날 그이는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의 그로 돌아올 수 없었다.
나중에 의식이 돌아왔다고는 하나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렀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지.
처음 그 소식을 접하고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인생이란 놈에게 언제 어떻게 잡아먹힐지 모른다!

그의 남편이 바로 소설가 한남철(혹은 한남규, 두 가지 이름을 썼다.).
창작집 <바닷가 소년>이 1991년인가 창비에서 나왔는데, 그 무렵 가진 어른들의 술자리에
운좋게 나도 낄 수 있었다.
내가 무지 좋아하던 <사양>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풍의 얼굴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아내와 사는 세월이 어떠했는지
그의 얼굴이 그 눈빛이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소설가 이순 씨 부부의 자세한 이야기는 90년대 초반, 나이를 떠나 우정을 느낀
한 초로의 여인에게서 들었다.
그는 유명한 작고문인의 아내이며 딱 한 편의 소설을 써서 등단한 이후
이십여 년째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책만 열심히 읽고 있었다.
업무 때문에 만났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카를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가 막 나왔을 때
재미있게 읽고 그녀에게 한 권을 사서 부쳤다. 간단한 엽서와 함께......
그랬더니 어느 날 나를  점심에 초대한 것이다.

그가 사는 용산의 주택가,  분위기 좋은 스파게티집이었는데
그날 나는 난생 처음 스파게티란 걸 먹었다.
또 사람이 나이를 떠나서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점심을 다 먹고 차를 마실 때 그녀의 가까운 이웃인 소설가 부부 이야기가 나왔고,
젊은 아이가 이순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게 대견하다며
얼마 뒤 그들의 저녁식사에 나를 불러주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 그 소설가는 아내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병어회, 하면 그들 부부의 얼굴이  연이어 떠올라서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식당에서 먹어본 병어조림은 살이 아주 연하고 고소하고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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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3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만 발라 먹을 때는 즐겨 먹었던 생선이 전체적인 이미지를 봐버렸을 때...
가까히 안하는 음식이 되버린 생선이 병어...랍죠..

물만두 2006-08-30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수록 기억만 남아 작은 것 하나 예사롭게 보게 하지 않는군요.

니르바나 2006-08-3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작가님은 아기같은 아내를 두고 어떻게 눈 감았을까요.
소설가 이순의 '병어회'
저도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갸름했던 얼굴과 눈동자가 기억납니다.
최근 문학전집에 포함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전에 발간된 전집에는 한 몫 했지요.
결코 가볍지 않은 로드무비님 이야기입니다.

로드무비 2006-08-30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오늘은 오랜만에 영화 리뷰나 하나 써야지, 하고 들어왔는데,
병어회가 머릿속에 먼저 들러붙는 바람에.......
기억하시는군요.
저도 생생하게 그 모습 기억합니다.
(와락=3 더더욱 반갑습니다.)
그리고 검색해 봤더니 창비에서 나온 20세기 한국소설 몇 권인가에
이순 씨의 두 작품도 포함되어 있네요.^^

FTA반대 물만두님, 지나간 기억만 끈질기게 껌처럼 들러붙는 듯.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 어쩌고 하는 책 어제 재밌게 읽었답니다.^^

메피스토님, 병어는 솔직히 맛없게 생겼어요.
그런데 그렇게 맛나다고 사람들이 짭짭거리더군요.
무 넣고 조림은 한 번 해볼 생각도 있습니다.^^

2006-08-30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6-08-30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제 사촌입니다. 입이 작아서 늘 병어라고 놀림을 당한지라 절대 그 생선은
안먹어야지 했었는데 요사이 울집 주식이 언니가 준 병어군요ㅠㅠ;
그이가 누구인지 저는 모릅니다. 단지 이렇게 추억을 풀어놓는 무비님은 어쩐지
이상하게도 친근감이 느껴지고 그리고 애잔한 물기가 비쳐서 왠지 마음이
안좋습니다. 물론 좋은 내용이 아니지만요.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이상하게도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은 쉬이 잊히질 않는다싶어요.....

urblue 2006-08-30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 시간에 본 책에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마들렌빵'이 나오더군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왔다나 어쨌다나. 근데 그보다는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은 기억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눈길을 잡아끕니다.

로드무비 2006-08-30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마들렌빵 인용한 부분도 재미있었어요.
'개'가 어쩌구 하는 표현에는 밀렸지만요.ㅎㅎ

반딧불님, 오늘아침처럼 강렬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건 짧은 글로나마 기록하려고요.
그래야 나중 늙어서 저의 소소한 기억의 서랍을 펼쳐보는 재미가 있겠지요.
반딧불님은 가만 보면 참 예민하세요.
제가 이 글 덤덤하게 쓰려고 꽤 노력했는데 '감상'의 기미를 포착하시다니.^^
(병어 보내주는 언니라니, 너무 정답습니다요.)

파견근무님, 저도 한 권만 더 읽으면 끝납니다.
가을이 깊어갈 때 한 번 더...어때요?^^

건우와 연우 2006-08-3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가 이순의 흑백사진이 가물가물 기억납니다. 그이가 그렇게 되었다는게 잘 믿기지 않네요...
로드무비님 글을 읽으니 좀 쓸쓸하네요, 가을도 오는데....

oldhand 2006-08-30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을 읽고도 병어 조림 맛만 떠오르는 저의 형이하학적 머리가 원망스럽습니다. 저희 집은 제사상에 병어찜도 올라가요. ^^

로드무비 2006-08-3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참 기막힌 일이지요.
그나저나 쓸쓸하게 해드렸다면 좀 죄송한데요?

올드핸드님, 저도 그런걸요, 뭐.
먹는 것이 최우선 가치인 인간입니다.ㅎㅎ
(아하, 병어찜을 올리는 제사상도 있군요.)


국경을넘어 2006-08-3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어회 무침이 뱅어회 무침하고 같은 건가요? 가느다랗고 하얀 물게기... 당진의 고모댁에 4-5월 경이면 진짜 맛있는데...

nada 2006-08-3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떠나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그거... 한 번 해보고 싶어요. 병어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앞으로 어디선가 병어를 만나면 로드무비님 생각이 나겠네요~

로드무비 2006-08-31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 우리 그것 한 번 해볼까요?^^*
병어말고 고등어를 보면 저를 떠올려 주세요.=3=3=3

폐인촌님, 뱅어는 멸치보다 가늘고 작은 그것 아닌가요?
전 밴댕이회 강화도에 꼭 먹으러 가던 몇 년 전이 생각나는군요.
봄이면 연례행사였는데.
병어는 좀 묘하게 생긴 물고기랍니다.^^

진/우맘 2006-08-3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선을 먹지 않는 바닷가 출신....진/우맘입니다. ^^;
병어회는 다른 회와는 좀 다르답니다. 갖 잡아 신선한 병어를 회 뜨는 게 아니라, 꼭 냉동을 시켰다가 살짝 녹혀 썰어 먹지요. 참치회처럼요. 그래야 제맛이라나요.
여수지역도 병어회를 즐겨먹지요, 먹는 사람들은 회중 최고라고 입을 모으더군요. ^^

로드무비 2006-08-3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그런 말 얼핏 들은 것 같아요.
그런데 병어회를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니.
부산 지역 횟집엔 병어가 잘 안 보이더라고요.
냉동시켰다 살짝 녹여 먹는다니 한 점 입에 넣으면
무지 시원하겠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진/우맘님.^^

진/우맘 2006-08-3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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