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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전2권 세트 ㅣ 강풀 순정만화 5
강도영 지음 / 문학세계사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강풀의 두 권짜리 장편 <순정만화>를 읽었다.
'순정만화'라는 곧이곧대로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책값이 너무 비싸서 등등의 이유로
계속 미루다가 보는 사람마다 울었다는 리뷰와 페이퍼를 올리는 통에
어느 외롭고 허전한 밤, 주문하고 말았다.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침마다 마주치는 18세 소녀와 30세 순진한 띠동갑 청년이
처음에는 데면데면 쳐다보다가 서로의 눈에 들고 마음에 스며드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좋았다.
헤어지자는 말에 한마디도 묻지 않고 연인을 떠나보낸 처자가 찾아와 담배를 피우는
그 공원 벤치도 좋았다.
어느 해인가 심야의 합정동 놀이터에서 내 몫의 남자와 함께 그네를 타며 캔맥주를 우그러뜨리고
남부럽지 않게 나무 밑을 빙빙 돌며 술래잡기를 하던 날도 있었지.
내 생에도 이런 날이 있을 줄이야, 하면서......
사랑에 빠지면, 연인을 생각하면 콩나물값을 깎을 수가 없다고 썼던 소설가 김채원의 글이 생각난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지고 최고로 순결하고 예쁜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던가?
그 글을 읽을 당시 나는 콧방귀를 뀌었는데, 다행히 딱 한 번 그런 마음상태를 경험하긴 했다.
(나는 아무리 사랑에 빠지더라도 콩나물은 한 줌 더 얻어오고 싶더라.)
남편이 자하문 밖 셋방에 자취할 때 카나페라는 생뚱맞은 이름의 안주를 직접 준비하여
우르르 함께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몰려다니던 친구들을 부른 적이 있었다.
나도 그 중 1인이었다.
축구경기를 보며 카나페와 치킨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고 버스가 끊기기 전 우르르 일어섰다.
나는 일어서고 싶지 않았지만 눈치가 보여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골목에 들어서던 나는 갑자기 뭐에 홀린 듯 택시를 불러 타고 다시 그에게로 갔다.
그가 뛸 듯이 기뻐하며 나를 맞았다.
그 장면이 우리가 찍은 순정영화의 클라이막스로 기억된다.
거절 같은 건 절대 못할 것 같은 어리숙한 청년이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의 확신 가운데
문득 단호해지고 용기가 충천한다.
야근을 부탁하는 상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야근이요? 안되겠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내일까지는 책임지고 완수하겠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소중한 것이, 꼭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강풀의 <순정만화>를 읽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가 소중해지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놈의 사랑 때문에 흐느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문득 눈빛이 맑아지고 깊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