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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ㅣ 내 인생의 영화
박찬욱, 류승완, 추상미, 신경숙, 노희경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평소 나는 <씨네21>의 '내 인생의 영화'라는 코너를 보고 있으면 <씨네21>로부터 원고청탁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그다드 카페>를 쓸까, <천국보다 낯선>을 쓸까, <정복자 펠레>를 쓸까. 아니면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을 쓸까.
한때 내 가슴을 설레게 하거나 강펀치를 날렸던 영화 제목들이 머리속을 끝도 없이 스쳐가지만
언제나 맨 마지막에 남는 영화는 <우리는 전사戰士가 아니다>라는 박기복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 필름.
--13년 전인가, 14년 전 한겨울 평일 대낮에 월차까지 내어가며 부지런을 떤 끝에 볼 수 있었던 영화!
대한극장 뒤 허름한 독립영화협회 사무실, 관객은 나와 어떤 청년 달랑 둘이었는데 그 한겨울에
불도 피우지 않고 있던 사무실의 청년들은 무료관객 둘을 위해 마지막 기름을 난로에 붓는데
그 표정이 사뭇 비장했었다.
남대문시장 주변의 노숙자들과 함께 1년여를 살다시피 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이 필름을
완성시킨 박기복 감독.
시키지도 않은 가게 앞 빗질로 한두 푼씩 얻어 연명하는 지능이 약간 모자란 30대의 청년이
하루에도 몇 번 길거리 불법 테이프 리어카 노점상에게 신청하여 듣는 건 '어메이징 그레이스!'.
그 음악을 들으며 웃다가 울다가 하는 그의 모습은 어떤 명배우의 열연보다 감동적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박기복 감독과 그 청년이 노래방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노래를
불러제끼는 모습이었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조금 수줍어 하는 듯한 기미까지 느껴지던 감독의
내레이션도 아직 내 귓가에 남아 있다.
그날 다문 얼마라도 관람료라고 내놓고 오고 싶었는데 그러한 행위가 도리어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머뭇거리다가 그냥 나오고 말았다.
그 추운 날, 중국요리와 술을 푸짐하게 시켜서 함께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미 끝난 일이라면 미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인데 이상하게 그날의 일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 인생의 영화' 원고를 썼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았을까!
이 책의 필진은 정말 화려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김기덕 감독이 꼽은 윤인호의 <바리케이드>와 박찬욱 감독이 꼽은 아벨 페라라의
<복수의 립스틱>, 박찬옥 감독이 꼽은 마틴 스코시즈의 <분노의 주먹>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내가 정말로 재미있게 본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바리케이드>는 세탁공장이 배경으로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과 우리 노동자들의 겨드랑이에서
풍기는시큼한 땀냄새 같은 영화였고, <복수의 립스틱>은 헐리우드의 악동 아벨 페라라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 등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끼친 영향들이 선연하게 떠올라 흥미로웠다.
로버트 드니로가 제이크로 분한 <분노의 주먹>(혹은 '성난 황소')만큼 보고나서 가슴 먹먹한 영화가
또 있었던가?
이충걸이 '내 인생의 영화'로 꼽은 임권택의<티켓>은 좀 의외였다. 다방 문 닫고 마담 김지미와 이혜영,
전세영 등 레지들이 술판을 벌이던 모습이 제일 좋고 인상 깊었다니 그가 평소 내갈기는 글이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일이 아니다 싶다.
<티켓> 하면 내 기억 속에 함께 따라다니는 영화가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인데......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며 잊고 있었던 좋은 영화의 장면들과 그 영화를 본 극장, 내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
등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엮어져 나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책값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