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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친구
윤광준 글.사진 / 시공사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이렇게 기분이 왔다갔다 부러워서 입맛을 다시며 또 눈을 흘기며 읽는 책은 처음이다.
아니 가만 보자, 두 번째인가? 그러고 보니 이충걸의 <해를 등지며 놀다>를 읽을 때도 이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소리의 황홀>과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라는 책을 내며 아주 유명해진 클래식 애호가, 그리고
사진작가 윤광준의 <내 인생의 친구>를 오늘 낮 단숨에 읽어치웠다.
2005년 제야의 종소리를 듣다가 그는 "12년만 지나면 아빠도 환갑이네!"하는 아들의 말에
화들짝 놀랐단다. 하긴, 그런 소리를 갑자기 들으면 누군들 그렇게 놀라지 않겠는가!
--어차피 살아가는 일은 각자의 선택이다. '창조적 삶'을 위한 발버둥은 이후의 시간이 쓸쓸하고
허무하지 않기 위해 드는 보험이라 여기고 싶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일은
연관성을 갖는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현실 돌파의 방법을 찾았고 커피의 맛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의 향기가 분별되었다. 여행을 통해 본 더 큰 세상의 모습은 사그라지는 꿈의 불씨를
되살려 주었다. 이는 열정적 삶의 태도가 준 선물이었다.(책머리에)
이처럼 책머리에는 그의 삶과 마인드가 간단하게 잘 요약되어 있다.
그는 '비원'이라는 문패를 단(마음의 문패든 뭐든) 일산 45평여 멋진 인테리어의 지하작업실에
아침이면 출근하는데, 오디오 평론가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에 걸맞게 최고의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고
둘도 없는 친구 시인 김갑수가 준 고가의 에스프레소 커피머신까지 들여놓고 커피 향이 낭자한 가운데
글을 쓰고 사진작업을 한다.
그것도 제대로 차려입고서!
혼자여도 절대 눕는다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니 존경스럽다고 할까, 어리둥절하다고 할까.
가장 부러운 건 그에게는 아직 전화만 한 통 해도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와 주는 친구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가 직접 볶고 갈아 만든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 사진을 보니 얼마나 먹음직스럽고 때깔이 좋은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꼴깍 삼키게 된다. 이 정도는 약과이다.
산악자전거로 몽골고원을 달리는 그의 멋진 모습, 또 시속 300킬로미터의 외제 스포츠카 코르벳을 타고
전속력으로 도로를 질주하는 취미,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와인 애호가 모임, 39세에 결행한 에베레스트 산
해발 5천 미터까지의 등반......
사실 이 정도면 부럽다 못해 화가 버럭버럭 나야 하는데 다음과 같은 빛나는 사유의 결정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게 된다.
--드러나는 성과는 보이지 않는 모든 노력의 길잡이였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을 때 상대는 비로소 인정을 해주었다.세상의 평가는 엄정하고 분명했다.(...)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힘들었다. 한계의 상황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부풀려진 현실의 모습이다.(...)
결핍은 무엇인가 선택하게 하고 선택은 열정을 더해 희망을 이야기한다.(140쪽)
이런 말뿐 아니라 자신이 어디엔가 항상 미친듯이 몰입하는 이유, 인생과 예술에 대한 성찰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 아주 많았다.
특히 루게릭병으로 얼마 전 고인이 된 제주의 사진작가 김영갑을 만나고 와서 털어놓는 자기고백은
너무나 겸허하여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게 바로 인생이었다.(...) 미쳐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그의 지향의 힘과
행복의 근원은 바로 결핍과 열정이었다. 나의 결핍과 열정은 표피적이었고 애매한 포장이라 할 만했다.
(...) 초조와 불안을 감추기 위해 미쳐 있음을 과장하고 다녔다. 나는 순수하지 못했고 열정도 부족했다.
또 한 번 패배를 인정한다. 작업실로 돌아온 후 나의 제주도 사진 파일을 조용히 불태워버렸다.(225쪽)
그런가 하면 이 책을 읽으며 가볍게 코웃음을 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진술이다.
어린 시절 손재주 많은 손자 윤광준을 보고 그의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가지고.
-- 재주 많은 놈이 가난하다'는 할아버지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24쪽)
이런 제길, 핫셀블라드인가 뭐라나 한눈에 봐도 보통이 아닌 스웨덴제 명품 카메라를
한 대도 아니고 세 대를 직접 사서 품에 지녀본 사람이!
'여름이면 짙은 향기 넘치는 옥잠화를, 겨울엔 살이 꽉 찬 영덕대게를 보내오는' 와인동호회의
부자 친구에 빗대어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지 어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을
가난한 예술가라고 계속 진술하는 부분은 솔직히 조금 언짢기까지 했다.
또 모르지, 그 속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참, 아내의 남자친구와 자신의 오랜 여자친구가 서로 인사하고 가족처럼 지낸다니 참 잘나고 별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주 재밌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