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라는 MBC 최장수 드라마가 끝난 지도 한참 되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겨울, 전원일기를 보다가 마침 통화가 된 친구 때문에 신촌의 그녀 집으로 달려가 술을 퍼마신 일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새해 새날을 이틀인가 사흘 앞둔 날. 애인도 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게 되는 게 무지 심란하던 때.
그날 전원일기의 주인공은 노총각 응삼이었다. 지지리도 가난한 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농사 짓고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장가도 못 가고 속절없이 늙어버린 응삼이. 남동생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며 방을 얻어 자취하고 있었다. 학비며 책값이며 용돈이며 모두 형인 응삼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당연지사.
노처녀라는 것말고는, 남동생과 함께 자취를 할 때였으니 가끔 술자리에서 소녀가장임을 사칭하긴 했지만, 응삼이와 나의 공통점은 사실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해가 바뀌기 직전의 묘한 기분에다가 동병상련의 눈물을 철철 흘리며 그 드라마를 보았다. 나쁜 놈의 시키! 글쎄 그 동생놈이 못배우고 못생긴 형 응삼이를 그렇게 구박하고 무시하는 거다.
동생이 제대로 뭘 끓여먹고 사는지 걱정이 되어 자기가 가진 옷중 제일 좋은 것을 꺼내어 입고 서울 자취방에 올라온 응삼. 애인과 시시덕대던 동생놈은 형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는데 글쎄 응삼을 애인에게 형이라고 소개도 안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술을 퍼마시고 친구 어머니인 복길 할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응삼이.
눈물콧물을 짜고 있는데 가까운 동네에 사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전원일기를 보고 내 생각이 났닸다. 남편이 출장을 갔는데 집에 몇 년된 더덕주가 있으니 응삼이 동생 욕하며 한잔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택시를 잡아타고 그 집으로 갔다.
꽤 큰 유리병 속의 그 귀한 더덕주 한 병을 그날밤 우리 둘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버렸다. 얼마나 향기롭고 혀에 착착 감기는지......응삼이 동생놈을 향해 친구와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번갈아가면서 해주었다. 욕설의 카타르시스를 나는 그날 처음 경험했다. 평소에 얌전하고 우아하던 친구의 입에서 별 희한한 욕이 다 나오니 너무 우스워 나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내가 한 욕 중 제일 웃겼던 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이었다!)
신촌 아저씨 낙지찜 옆, 자신이 다니는 출판사 건물 2층에 세들어 살던 그 친구의 좁은 집이 생각난다. 집은 좁아터졌지만 소설가 김승옥 선생이 그려준 내 친구의 초상이랑 이제하 선생의 말 그림이 걸려 있던 세상 어느 저택이 부럽지 않던 안방.
새벽에 일어나 보니 더덕주 병이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쓰러진 병을 일으켜세우고 친구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그 집을 빠져나왔다. 그 새벽, 그 골목 풍경을 잊을 수 없다.
결국 부부가 된 응삼이와 가겟집 숙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