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년 전 현대문학에 실린 한 신인작가의 단편 제목이 생각난다. <쓸쓸함, 그 지랄같은>. 제목도 작품도 너무 좋아서 읽고 친구에게 복사를 해줬더니 행동파인 이 친구 그 작가에게 연락을 취해 떠억하니 약속을 잡아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밤,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났는데 그는 40대 초반의 우아한 여성이었다.
그 후 뭐가 별로 안 맞았는지 친구는 슬쩍 빠지고 우리는 가끔 전화통화도 하고 만나게 되었다. 내 결혼식날, 이분은 몸도 영혼도 피폐할 대로 피폐할 때였는데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오셔서는 식장과 로비를 들락날락 줄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나중에는 담배가 떨어져 내 후배 남자아이들에게 담배를 빌려달라고 하셔서 피우고......나는 멀찌감치서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사는 것도 유복하고, 인간성좋고 유능한 남편에, 재주있고 착한 오누이까지 두신 분이 왜 저러시나...하고 의아해했었다. 더구나 소설가로 등단까지 하셨으면서......그리고 저 나이에 방황이라니 조금 웃긴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저마다의 사연과 고뇌가 있다. 세상 다 산 듯 시니컬한 얼굴로 살던 그때 사실 나는 얼마나 젊었던가. 그때 내가 무지무지 젊었고 좋았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10년 뒤, 나는 오늘을 또 그렇게 기억하리라. 소고기국밥 사진을 찍어 올리고 아구아구 국밥을 먹고 일감을 밀쳐둔 채 알라딘 방에서 오전내내 노닥거리던 그때가 좋았다고......
'영화 '파니 핑크'를 혼자 보세요. 이 영화는 혼자 보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김광석의 테이프를 데크에 걸고 <사랑,고통, 그리고 빌어먹을 것들>을 읽으세요. 함박눈 펄펄 내리는 날 구매하시면 반값에 드립니다.' (이상한 가게 주인장 백)
가끔 가는 인터넷가게가 있는데 어제 이런 광고문안과 함께 상품을 내놓았다. <사랑, 고통, 그리고 빌어먹을 것들>은 영화 '파니 핑크'의 감독 도리스 되리의 장편소설. 함박눈 내릴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그냥 내놓은 가격에 사고 말았다. 이 소설 때문에 오늘 아침 <쓸쓸함, 그 지랄같은>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잘 살고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