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남편과 영화('귀여워')를 본 곳은 동대문의 한 쇼핑몰 10층의 복합상영관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철거 직전의 청계천 서민아파트. 철거깡패인 정재영이 웃통을 벗고 빤쓰 바람으로 병째 소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되었다. 모두 거처를 마련해 떠나고 금방이라도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런 그 아파트 빈방에는 노숙자들이 집단혼숙을 하고 있었고 크면 양아치가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 소년들이 불장난을 하며 막 돌아다니고 있었다.

장충동에서 족발을 사가지고 다시 동대문으로 와 청계천을 빠져나오는데 조금 전 영화 속에서 본 그 을씨년스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청계천 고가는 기둥만 몇 개 남기고 자취가 없었다. 그 휑한 풍경 속에 생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초라한 일터가 보였다. 폐업비디오 가게들, 헌책방들, 아무도 거들떠볼 것 같지 않은 우중충한 옷가지들을 걸어놓은 옷가게, 하루에 커피 열 잔이나 팔릴까 싶은 다방, 그릇가게, 국수집, 곱창집......

서울시의 호언장담대로 몇 년후 이곳이 복개되어 예전처럼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귈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생계의 방편을 잃어버린,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한 저 수많은 사람들은 어찌할 것인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1천 원짜리 국수를 파는 동네 황학동. 나는 그 국수를 사먹어 본 적은 없지만 대한민국에 천 원짜리 국수를 파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그리고 황학동엔 실제 그 천원짜리 국수 한 그릇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수첩장수가 살고 있었다.

그는 삼일아파트의 어엿한 주민으로 아파트 부근 골목에 수첩 몇 권을 펼쳐놓고 하루에 두 권도 좋고 세 권도 좋고 되는 대로 팔아 점심때 국수 한 그릇을 사먹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텔레비전 한 시사프로에 그가 소개된 적이 있다. 특이한 것은 그가 말을 한마디도 않는다는 것. 나는 그에게 매료되어 직접 그를 찾아가 수첩을 몇 권 산 적이 있다. 실제로 그는 말을 한마디도 안했다. 수첩 몇 권이 한번에 팔려 조금 기뻐하는 기색은 보였지만......

어제 아침 한겨레신문에는 보증금 1천만 원이 없어 삼일아파트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집만 해도 30가구가 된다니 그 수첩장수 아저씨의 행방이 문득 궁금해졌다. 1천 원짜리 국수가게가 아직 남아 있어 하루 단 한 끼 그의 식사가 해결되고 있는지......

몇 년 전 나는 한 인터넷신문에 '나는 맨얼굴의 청계천이 좋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청계천을 보고 오니 이렇게 되도 않은 글이라도 끄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몇 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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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2-0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먹는 한 끼니의 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때 이러한 명제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합니다. 세상의 로또를 제가 다 휩쓸고 싶어집니다...

물만두 2004-12-0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선인장 2004-12-0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서울에 와 처음으로 살게 된 곳이 바로 삼일 아파트였어요. 그리고 3년 동안 황학동에서 서너 군데를 전전했지요. 그래서 저는 곱창도, 순대도, 닭발도 잘 먹는 신기한 여자아이로 자라났고, 중고품을 파는 친구들 집들을 뛰어다니며 노는 극성 맞은 아니가 되었어요. 삼일 아파트 창문으로 바라보는 청계고가가 얼마나 무섭던지,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해요.

청계고가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오랫만에 황학동에 간 적이 있어요. 살던 집들 대부분은 없어졌지만, 골목 안 제일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이 어엿한 3층 건물이 되어 있더군요. 괜히 주인집을 찾아들어가, 혹시 그 때 그 주인 아줌마가 아닌가 묻고 싶었더랬어요. 그 아줌마 아들이 가수 인순이씨의 운전기사였는데 말이지요...

비루하고 가난한 청계천 8가, 그리고 황학동, 청계고가의 날선 차들. 그 곳이 저에겐 늘 서울이에요.

날개 2004-12-0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계천을 안 가본지가 한참되었습니다.. 갈 기회는 있었지만 그 휑할 풍경이 보고 싶지 않아 피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추천 날립니다~

깍두기 2004-12-09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첩장수를 테레비에서 보고 직접 찾아가는 행동이야말로 로드무비님다운 행동....^^

로드무비 2004-12-09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꼭 로또 1등으로 당첨되시길......^^

선인장님, 님의 댓글 한 개의 페이퍼로 저는 읽었습니다.

추천은 어디다 하죠?^^

그 골목을 뛰어다니는 꼬마선인장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봤습니다.

예쁘네요.^^

날개님, 전 청계천이 좋아요. 그래서 지금의 모습 보니 마음이 아픕디다.

깍두기님, 그렇게 생각하세요?^^


2004-12-09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얀마녀 2004-12-09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적이지 않고는 견딜수 없다는 그 마음, 어째 제 마음도 짠해지네요...

kleinsusun 2004-12-10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삶을 참 적극적으로 사는 것 같아요.

TV에서 본 수첩장사를 직접 찾아가는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정말 삶에 대한 사랑, 열정, 호기심으로 가득 찬 것 같아요. 아름다운 로드무비님!

비발~* 2004-12-1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대체 어디가신걸까... ;;

조선인 2004-12-1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황학동에 나갈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2004-12-10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水巖 2004-12-1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 끝내신뒤 뵐 수 가 없군요. 이벤트가 힘이들어 몸살이라도 나신걸가요?

담이 오셨다더니 아직도 몸 쓰기가 불편한 걸가요? 어디서 무슨 기사를 본것 같은데.

로드무비 2004-12-1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이벤트 재밌게 했는데 몸살은요.

담은 깨끗이 지나갔어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선님, 하얀마녀님, 조선인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속삭여주신 님, 접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