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사촌 여동생의 결혼식이 63빌딩 2층 대회의장에서 있어 참석했다. 소회의장도 아니고 대회의장이라니 얼마나 으리으리한 결혼식일지 가슴이 설렜다. 서른한 살 동갑의 신랑신부는 너무 잘 어울렸다. 6,7백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대회의장은 멋지게 차려입고 온 신사숙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간혹 입술의 루즈가 지워질까 신경을 쓰며 조심스레 떡을 집어 입가로 가져가는 여인들도 보였다.

무대의 오른쪽에는 대형 전광판이 있어 아기 때부터 최근 야외촬영 모습까지 신랑신부의 사진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사촌동생의 중고등학교 때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무척 뚱뚱했기 때문이다. 귀여운 것!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무슨 한방병원 원장이고 교수라는 주례의 주례사는 너무나 길고 지루하고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이 자꾸 나왔다. 상대의 옷차림에도 신경을 써주고 출근할 때 아내는 남편의 넥타이를 직접 골라주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사촌이 강의를 나간다는 대학의 학생들이 열 명쯤 우르르 몰려와 축가(무슨 노래인지 모르겠음)를 불러주었는데 그 중 녹색 골덴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온 남학생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 아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손을 귓가로 자꾸 가져가는 것이 혼자 열창을 하는 가수 같았다. 튀어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어색한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나온 동작이란 걸 난 알 수 있었다. 악보를 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니까.

바닷가재 수프와 스테이크가 나왔다. 수프는 꼬숩고 맛있었으며 스테이크는 별로였다. 평소에도 나는 스테이크보다 동네 분식집의 돈가스를 더 좋아한다. 식이 끝나고 얼마짜리 스테이크냐고 물어봤더니 4만 원짜리라고 했다. 아아, 아무리 하객이 많았다고는 하나  남는 게 조금은 있어야 할 텐데......

우리 부모님은 물론이고 친척들이 모두 상경하여 자기 자식들, 즉 우리 사촌들의 화합을 종용하니 어쩔 수 없이 일산 신부의 집으로 몰려가야 했다. 올케와 나는 그 와중에도 살짝 빠져나와 근처 상가에서 아이들의 옷을 하나씩 골라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른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는지 부모님이 오늘도 그곳에서 주무시겠다고 하여 늦은 밤 동생네와 우리는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농수산센터에 들러 광어회와 대하, 굵은 소금을 사가지고 와서 구워먹으며 한잔했다. 우리 올케는 아이들 먹인답시고 스테이크를 두 접시나 시켜 자기가 해치웠음을 고백하고 사죄했다. 그렇게 비싼 건지 몰랐다나? 그러면서도 구운 새우를 아구아구 잘도 먹어 우리의 눈총을 받았다.

나는 오늘 그 아이의 방 책꽂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을 발견하고 슬쩍 가방에 집어넣어 왔다. 나중에 집들이 때 초대하면 가져가서 슬그머니 꽂아놓고 올 생각이다. 내가 그동안 선물한 책이 열 권도 넘으니 설령 들키더라도 용서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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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10-24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과 저는 어제 저녁 같은 걸 먹었네요. 대하....맛있던데^^ 위장이 놀래시진 않았는지, 점심과 저녁을 그렇게 잘 드셔서 말입니다.
요즘 결혼 비용이 평균 7800만원이라더니 결혼식의 모습이 꽤나 화려하군요. 그 십분지 일만 들여도 저처럼 잘 살 수 있는데...히힛^^

urblue 2004-10-24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하 맛있겠어요.
어제 먹은 아구찜도 무지 맛나긴했는데. 콩잎도 그렇구요. ^^

에레혼 2004-10-2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에 어우러지는 삽화를 골라넣는 솜씨가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 (웃음과 동심과 따뜻함이 어어러진, 일관된 분위기의 그림들..... 로드무비님의 이미지와 일치!)

옷장 정리를 하다가 잠시 들어와 봤는데, 너무 맛난 메뉴들이 줄을 이으니 갑자기 몹시 시장기가 느껴지네요.
결혼식장의 풍경, 그런 장소에서 마주치는 삽화는 다 엇비슷한 것 같아요, 적당히 겉돌고 적당히 정겹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가운데 혼자만의 상념을 따라가게 되는.....
그나저나 점심 때 뭘 먹어야 하나...... 머릿속엔 소금 친 대하 구이가 빙빙 돌아가지만, 만만한 짜파게티나 하나씩 끓여 먹을까 싶은 현실!

superfrog 2004-10-24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을 저는 93년도에 샀습니다. 우연찮게도 같은 과 선배언니의 애인이 그 책의 번역자라서 그 당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제2외국어 일어 작문을 그 언니를 통해 전문번역자가 일작을 해줬죠. 그 작문 덕으로 다행히 낙제를 면해 졸업했답니다..ㅎㅎ

로드무비 2004-10-24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역시 사다가 직접 구워먹으니 훨씬 경제적입디다.
동네 포장마차에서는 새끼손가락만한 것 열댓 마리에 15000원하잖우.
검지중지 합친 것보다 큰 걸 30마리쯤 주더라고요, 2만 원에.
맛도 몇 배.^^
블루님, 콩잎 맛있었다니 다행이구랴. 조금밖에 못 넣었는데......
라일락와인님, 옷장정리하세요? 재채기하면서? 헤헤.
맛있는 것 드세요. 짜파게티도 물론 맛있지만...그리고 전 자료랄 것이 없어서
갖고 있는 사진 대강 글과 끼워맞춘답니다. 님이 부러워요.^^
금붕어님, 낙제를 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헤헤.
아침에 앞부분 좀 읽었는데 아주 재미나네요.
오늘도 일감에 코를 박고 있으세요?^^

2004-10-24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ugool 2004-10-2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엊저녁에 먹었어요. 대하소금구이.. ^^:;;

마냐 2004-10-2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방금 너굴님 댁에서도 배 쪼르르 하는 소리 났는데...로드무비님이 확실하게 도장 쾅.
알라딘 곳곳에서 불어버린 대하 바람...으으.
그나저나....언제나 그렇지만 새삼 로드무비님 글이 얼마나 맛깔스러운지 전 속으로 즐거워하고 있었슴다.

balmas 2004-10-24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글도 재미있고 그림도 좋군요.
추천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chika 2004-10-24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즈케잌모양을 한 나의 가난... 제목이 맘에 드는군요.
- 7천만원도 없을뿐더러, 그 돈이 있다면 우리 집 옥상에 조립식 건물 하나 올려서 제 서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네요. ^^

stella.K 2004-10-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 재미있어요. 하루키의 단편들은 왠지 다 괜찮더라구요.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던데, 로드무비님 짖궃게 멋있습니다요.^^

미네르바 2004-10-24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려한 결혼식 풍경과 그것에 대비되는 로드무비님의 감상과 책 제목인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 책 왠지 읽어보고 싶게 만들어요.

플레져 2004-10-24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뚱뚱한 사진만 빼고 보여줬다는 신부가 맘에 드네요.
저는 아직도 남편에게 보여주지 않은 사진이 있어요. 고딩때 사진, 특히.
아가 셋 낳으면 보여주겠다 했는데... 흠, 제가 선녀가 아닌 것 같으니 평생 안보여 줄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로드무비님 글 너무 맛나요~! ㅊㅊ!!

잉크냄새 2004-10-25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결혼식 음식하면 칼국수랑 갈비탕밖에는 구경해보지 못했군요.^^

로드무비 2004-10-25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제목이 좋죠? 그런데 몇 개 읽어보니 아주 재미나네요.
시치미 딱 뗀 유머('')(..)라고 할까요.
너굴님은 아주 포도주랑 제대로 드셨더구만요.
우리도 소주와 맥주와 제대로 먹었어요.^^
마냐님은 새침한 인상과 다르게 먹는 것이라면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군요. 조옿습니다아.^^
발마스님, 항상 감사해요.^^
치카님, 좋은 사람 제대로 만나면 맨몸으로도 결혼할 수 있어요.
옥상 위 서재보다는 결혼 쪽을 권하고 싶은데요.^^
스텔라님도 이 책 읽으셨군요.
하루키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이 책은 좋은 쪽이에요.^^
미네르바님, 이 책 구하기 어려우시면 저에게 귓속말로 말씀하세요.^^
플레져님, 저는 초등학교 때 빼고 날씬했던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님은
어쩜 그리 귀엽고 사랑스러우신지......
잉크냄새님, 전 결혼식장에서 칼국수는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요.
잔치국수 말씀하시는 거 아니예요? 히히.
전 스테이크는 본래 안 좋아해요. 웬지 님도 그러실 것 같은데요?
아님 말고.^^


잉크냄새 2004-10-2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보니 왜 칼국수라고 쓴지 모르겠네요.^^ 그냥 국수면 국수지...ㅎㅎ

숨은아이 2004-10-25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고파졌어요... 철푸덕. __(__)__

2004-10-27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arsta 2004-10-2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 이야기지만.
아까 빨래통에 빨래를 넣다가 문득, <치즈 케잌을 한 너의 가난> 이란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가난, 이 아니고 너의 가난.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가난에 대한 이야기죠. 그런 사람이 있죠 왜, 나는 집도 없고 차도 없어, 통장에 있는 돈이라곤 200만원이 전부야, 아이들 식비만 한달에 엄청 깨지지, 세혁이 작아진 옷 있음 나 주라, 난 내복도 900원짜리 중고만 사서 입혀...
그래서 만날 때마다 밥값이며 차량제공이며 아이들 간식까지 다 책임져주고 손 필요할 때마다 가서 도와주고 그랬는데... 그런데 어느날 떡하니 3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중고지만 좋은 차를 한대 뽑고... 그러는 사람.
요즘도 저는 등에 아이업고 손에 아이 잡고 시장바구니 들고 힘겹게 걸어가는 아줌마를 보면 창문 내려 내 차에 타라고 하고 싶고 바구니 들어주고 싶고 그런 맘이 들기는 하지만... 그 친구정도가 마지막이 되면 좋겠어요. 물질도 마음도 다 퍼줬는데 돌아서니 너무 공허한 느낌은 오래도록 저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더군요. 요즘은 그런식으로 그 동생을 대한 내 태도에 문제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너의 가난> 이라는 말이 떠올랐죠. 달콤하고 맛있는, 입에서 살살 녹는, 부르조아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치즈케익을 한 너의 가난에 나는 홀딱 쏙았구나. 하는 그런 느낌으로 말입니다. 흐흐...

로드무비 2004-10-2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사람이 꼭 한 명씩은 있어요. 그죠?
파란여우님도 어제 그런 친구 얘길 올리셨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