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운동이랍시고 하루 한 번 동네 한 바퀴, 공원 한 바퀴 걷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어제는 낮에 일찌감치 과제를 마쳤건만, 부득부득 자전거를 타겠다는 아이와
일찍 퇴근한 남편과 함께 한 번 더 동네를 돌았다.
아파트 주위를 따라 두툼하게 깔아놓은 푹신푹신한 초록빛 길이 끝날 즈음에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불 위에 뭐 올려놓고 나왔어?"
전화를 받던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아, 먹다 남은 대구탕! 쉴까봐 끓여 놓는다는 것이 그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편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오는 딸아이는 본체만체 나도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다행히 우리 동 앞에는 치솟는 불길도, 검은 연기도, 구경하는 주민도,
소방차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던 관리실 직원 한 분과 경비 아저씨가
나를 보자마자 끌끌 혀를 찼다.
갈색 반투명 유리냄비는 내용물이 꺼멓게 눌러붙은 채 깨지지도 않고 멀쩡했다.
앞으로 제발 조심하라는 부탁을 남기고 아저씨들이 나가는데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냄새를 처음 맡고 관리실과 경비실에 신고했다는
3층의 여성과 바로 옆 106호 할머니가 현관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허리를 90도 각도로 접어 사죄하고 잠시 집 안으로 모셨다.
내 인상을 척 보아하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 같은지
3층 여인이 내게 전화번호를 알려줄 것을 요구한다.
전화번호 아니라 주민등록번호와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달래도 끽 소리 없이 술술
불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사실 어제 낮 나로서는 정신없는 일이 있었다.
멀리서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로 아침점심을 굶으며 엄마의 수술 소식을 기다렸다.
동네 공원의 돌탑에 돌멩이 하나를 더 얹기 위해 예쁜 돌을 찾아 눈에 불을 켰으며
모든 화분에 물을 듬뿍 주고 방범창 안쪽에 매달린 징그러운 벌레도
고이고이 떼내어 날려 보냈다.
자기 전 딸아이와 함께 간절한 기도를 올린 건 물론이고
베개 속에 워리돌(과테말라의 걱정인형)을 넣으며 한참을 중얼거렸다.
그 며칠 전부터 기도와 함께 자기암시격인 행위들로 하루를 채우는 형국이었는데,
어제 오후 다행히 경과가 아주 좋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긴장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데 머리가 나쁜 나는 그만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헤롱헤롱거렸던 것이다.
그러다 자칫 우리 아파트를 홀랑 태워먹을 뻔했다.
아들을 스물다섯에 낳았고 지금 아들이 스물몇 살이라는 3층의 여인에게 나는
늦게 결혼했고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넉살 좋게 대꾸하며
그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마음속으로 몰래 한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그만 열 손가락을 모두 동원하여
꼬부리고 있었으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었다.
냉장고에 있는 큼지막한 사과 두 알을 꺼내어 한 알씩 내밀며 "사과 드립니다!"하고
재치(?)까지 부리고 나니 내가 꽤나 유쾌한 사람인 것 같아서 잠시 의기양양했는데,
오늘 새벽 눈을 떴을 때 이부자리 속에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바로 그 민망한 장면이었다.
생각해 보니 사과는 빨간색 스티로폼 머리띠까지 두르고 때깔만 좋았지
추석 무렵에 들여온 것이라 속이 부석부석하지 않았을까?
문득 얼굴이 벌게졌다.
조만간 차라도 한잔 마시자며 그들에게 전화할 생각이다.
이유야 어쨌건 이웃의 전화번호를 두 개나 얻고 보니
생각잖은 보너스라도 들어온 것처럼 기분이 두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