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화개장터에서 사온 매실이 누르죽죽하길래
더이상 미룰 수 없어 큰 유리병을 사러 아이들을 데리고 집 근처의 대형마트에 갔다.
딸아이는 이번 나흘간의 연휴를 아주 즐겁게 보냈다.
예전 살던 동네의 남자친구가 우리 집에서 사흘 밤을 자고  간 것이다.
3학년이나 된 녀석들이 함께 목욕을 하지 않나, 잘 때도 한 침대에서 꼭 붙어 잤다.
모쪼록 내년에도 변하지 말아야 할 텐데......
옥수수 수염차를 1000원이 안 되는 가격으로 팔길래 계산대에 이르기 직전 카트에 집어넣었다.
옥수수 수염차라니 무슨 맛일까?

어제 아침 딸아이는 난생 처음 바둑대회에 참가하느라 아침부터 바둑학원으로 가고,
남자친구 부모는 딱 그 시간에 맞추어 녀석을 데리러 왔다.
성민이 녀석 처갓집에 갔다는 소문이 그 동네에 자자하대나?
전날 밤 치킨을 시켜먹었으니 씨암탉을 잡아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아이의 도시락을 싸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너스레를 떨었다.

그 전날  마트에서 나는 해바라기씨 봉지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예감이라고 해야 하나?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보름치는 되는데 우리 토리가 이 새 해바라기씨를 먹을 수 있을까?

한 달 전 갑자기 한쪽 눈이 돌출되어 우리 모녀를 기절 시킨 토리.
학교에서 돌아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딸아이는 30분 동안 울었다.
피아노 학원도 빼먹고 울면서 동물병원에 달려갔더니 안약을 처방해 주었다.
딸아이는 자기 지갑 속의 돈(칠만 원)을 다 써도 된다며 들고 갔는데
병원비는 13,000원이었다.
하루아침에 한쪽 눈을 실명, 애꾸눈이 된 토리는 순식간에 몸이 반쪽이 되었지만 잘 먹고 잘 놀았다.
그런데 지난 주 금요일 아침, 나머지 한쪽 눈마저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게 아닌가.
딸아이와 성민이는 토리의 눈에 안약을 넣어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오늘 아침  마루의 블라인드를 걷다가 보니 토리가 노란 플라스틱 물통 속에 몸을 반쯤 걸치고
죽어 있었다.
딸아이는 토리를 다시 데려다 달라며 울부짖었고,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책장수 님은 퇴근하고 돌아와 함께 토리를 묻어주자고 아이를 달래었다.

조금 전 토리를 화단에 묻었다.
딸아이의 제일 친한 여자친구가 그 의식을 함께 집행하러 집으로 왔다.
토리의 집을 물로 씻고 나면 그 집을 닦던 예쁜 손수건에 토리를 쌌다.
나는 나무젓가락을 잘라 스카치테이프로 꽁꽁 묶어 작은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나갔다.

토리를 묻고 돌아와 우리는 함께 수박을 먹었다.
수박으로 갈증이 해결이 안 되어 냉장고 속의 옥수수 수염차 마개를 땄다.
세상에나,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는지!
요구르트 병에 옥수수 수염차를 가득 담았다.
쇠약해진 몸으로 간신히 내려와 물을 마시다 새벽에 숨이 끊긴 토리.

영어공부를 하러 가기 전 아이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토리를 묻은 화단 위에
옥수수 수염차를 뿌려주었다.

토리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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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7-05-2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약하고 수명이 짧은 애들이라..너무 안타깝고 슬퍼요....
토리야, 우리 햄돌이랑 새앙쥐들 만나면 잘 놀아라.

하지만, 또 다른 토리들에게도 사랑을 계속 나눠주시겠죠?

비로그인 2007-05-2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리가 왜 갑자기 죽어서 주하를 슬프게 했을까요...
어린 마음엔 집에서 키우는 식구들 죽어서 나가면 상처가 제법인데.
주하가 씩씩하게 이겨내길 바랍니다.
로드무비님도 상심 마시고요.

사마천 2007-05-28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알게 되면서 인간은 성숙해가죠.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너무 이른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도 애완동물 키우는 것 반대였는데 갑자기 영화 하나가 생각납니다. <우리 개 이야기>라는 일본 영화입니다....

paviana 2007-05-2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테고리 이름이 너무 맘에 와 닿아요...
주하가 너무 슬퍼하지 않고, 토리가 좋은곳으로 갔으면 좋겠네요..

마노아 2007-05-2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토리와의 이별로 슬픔을 하나 더 배웠겠어요. 같이 마음이 아픕니다. 어여 씩씩해지기를 바랄게요. 토리야 안녕.

로드무비 2007-05-2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 님, 아이는 이미 씩씩합니다.
'토리야 안녕' 해주시니 새삼 눈물이 왈칵.

파비아나 님,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이 카테고리인가 봅니다.
토리는 분명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FTA반대 사마천 님, 사실 저조차 감당이 안 되던걸요.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는 유행가 가사가 가슴에 콕 와박히더라고요.
딸아이는 아기 햄스터들을 새로 데려와 키우겠다고 합니다.

체셔고양2 님, 물통 속에 코를 빠트리고 죽든, 술독에 빠져 죽든
고독(혹은 죽음)은 개별적인 거예요.
좀더 의연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브리니 님, 한 달 전, 님 방에 달려가 하소연하고 싶었어요.
우리 토리 사는 동안 행복했겠죠?



네꼬 2007-05-28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훌쩍 자랐겠네요. 그 과정을 성심껏 지켜주신 엄마의 도움으로요.

비로그인 2007-05-2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쇠약해진 몸으로 간신히 내려와 물을 마시다 새벽에 숨이 끊긴 토리.'

아욱...이 부분에서 눈물이 핑- 돌고 말았습니다.
아끼던 개를 보는 눈 앞에서 멀리 떠나보내야 했던 마음도 아팠는데.
혼자서 물 한 모금 마시려 애를 쓰다가 간 그 작은 생물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아.
이런이런. 목이 메여요. 저는 동물에 관해서라면 무조건적으로 약해져서...

홍수맘 2007-05-28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게 두려워 햄토리와 토끼를 키우자는 홍/수의 고집을 매일 꺾고 있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런일이 아이들에게 큰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구...
에구구,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네요.
토리는 분명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Mephistopheles 2007-05-28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것 때문에 10년전부터 애완동물 안키워요...

2007-05-28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7-05-2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도 키워요. 애완동물가게에 있느니, 나쁜 사람 만나느니, 나랑 살자~라고 하면서요.

2007-05-29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eylontea 2007-05-29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궁... --;

밥헬퍼 2007-05-29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는 것도 중요하고, 잘 떠나보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가 많이 슬픈 모양입니다.

로드무비 2007-05-2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헬퍼 님, 토리가 갑자기 그렇게 되면서 계속 마음이 묵직했어요.
차라리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쉽더군요.
사는 건 정말 보통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는 괜찮아졌습니다.

실론티 님, 흑흑.

방울이 꼬박 일주일 님, 저도 어제 하루종일 울었어요.
정든 것과의 이별이 이런 거군요.
아이를 위로해준 말이 바로 그거였답니다.
토리만큼 행복한 햄스터는 없었을 거라는.
나중에 나중에 하늘에서 만나자.
방울이랑 같이 우리 모두......

브리니 님, 전 이제 그만 키우고 싶은데 딸아이는
새끼 햄스터 두 마리 데려올 거라고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또다시 그런 일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토리들 사랑하는 일 멈추면 안되겠지요?

마이걸의 주인공 님, 정이 많은 아이는 아닌데
햄스터를 돌보는 모습을 보니 저보다 낫더군요.
전 그 튀어나와 굳은 눈을 보는 게 안쓰러워서
안을 때도 멈칫멈칫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무서워하던 아이가 그 모습까지 귀엽다고
쓰다듬어 주고......
아이들의 영혼이 맑은 것 맞아요.
옥수수수염차는 그러고 보니 그런 효능에 대해 들어본 것도 같아요.
사는 게 소태처럼 씁니다.

메피스토 님, 그 심정 이해하겠습니다.

홍수맘 님, 그러게 말입니다.
어차피 살다보면 겪을 일 다 겪게 돼 있는데
너무 어릴 때 경험하는 게 어떨지 염려도 되지만
사랑하여 함께 안고 뒹구는 그 순간은 또 좋더라고요.
홍/수가 간절히 원하면 그 소원 들어주세요.^^

L-SHIN 님, 엉엉.
사랑하는 대상이 아픈 것, 쇠약해지는 모습 정말 못 보겠더군요.
식구나 자식이 많이 아픈 사람은 그 심정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이다.
아무튼 어제는 마음이 약하고 순해져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리라
생각했답니다. 하루만의 결심.^^

네꼬 님, 정말 그랬으면 좋았겠는데.
침착하지 못하고 아이보다 더 호들갑을 떨어서요.
사는 일이 자신이 없습니다.


2007-05-29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5-30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나무젓가락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주신 님의 손길이 사랑스러워요.
아이는 생각보다 의연하지요. 옥수수 수염차, 저도 좋아하는데요, 구수하지요.
아, 그걸 화단에 뿌려주셨군요. 의식을 치르는 과정이 하나하나 눈에 보이는 듯
해요. 옥수수 수염차...

2007-05-31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3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 님, 아이가 틀어줘서 토리 동영상을 몇 번 봤는데요.
세상에 있을 수 없는 방정맞고 간드러진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들더군요.
제 목소리였습니다.
토리는 제게도 그런 목소리가 있다는 걸 가르쳐주고 갔습니다.
저런 의식 또한 생각도 못할 일인데, 태연한 얼굴로 하게 되던데요?^^

아키타이프 2007-06-0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가 강하네요. 다시 키우겠다고 하는것 보면......
주하보고 배워야겠어요.

로드무비 2007-06-1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지지난주 말, 아기 햄스터 두 마리 데리고 왔는데
사흘 만에 하늘나라로 갔네요.
너무 어린 걸 데리고 온 걸까요?
다음주엔 조금 더 큰 놈으로 다시 데리고 올 예정입니다.
햄스터를 꼭 건강하게 키우고 말겠다고 하니, 제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