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는 사용되어야 한다,
단순히 처먹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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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산품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용되어진 것들이다
찌그러지고 가장자리가 다 닳아빠진 구리그릇
여러 사람들이 사용해 나무 손잡이가
다 닳아버린 칼과 포크, 이러한 형태가
내겐 가장 고귀하게 여겨진다. 또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녀 반질반질해지고 사이사이 잡초들이 자라난
오래된 집가에 깔려 있는 포석(鋪石)들, 이러한 것들이
복받은 생산품들이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면서 또한 자주 겉모습을
바꾸면서 이 생산품들은 자신의 형상을 개선하고 또한 고귀해진다
이유는 이것들이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손이 떨어져 나간 조각들의
부서진 파편들조차도 나는 좋아한다, 이것들도 역시
살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지금은 무너져내렸더라도
전에는 이리저리 운반되며 사용되었다
비록 무너지고 그 위로 많은 것이 밟고 지나갔다 하더라도
그 전에도 이 조각들은 그렇게 높이 서 있지는 않았다
반쯤 부서진 건축물은
거대하게 계획된 것이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건축물들의 아름다운 크기는
벌써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한편으로
이들은 벌써 이용되었다. 정말 이들은 극복되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 詩  '인간에 의해 생산된 모든 것에 대해' 전문
                             브레히트 시론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이승진 편역, 한마당 刊, 1997년)






<두이노의 비가>를 읽다가 브레히트 시론을 읽다가, 책꽂이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 독서를 하고 있다.
두서없는 듯하지만 서정적이고 뭔가 심오한 릴케의 시구에 질질 끌려들어가는 중인데
브레히트가 눈을 흘긴다.
"시는 사용되어야 하며 단순히 처먹혀서는 안 된다"고.
통쾌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 그 "처먹히는 즐거움"이야말로 얼마나 큰 즐거움인데......

나는 앞으로도 계속 시에 처먹히기도 하면서, 또 구체적으로 사용도 할 생각이다.
브레히트는 이 책에서 시인 릴케를 이렇게 표현했다.
"릴케는 민중적이지 않다."
글쎄, 현실의 토대 위에서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소용이 되는 그런 시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이랄까 향수랄까 사랑이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읊으며 빠져들어
좀 흐느적거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예전엔 시고 산문이고 희곡이고 그가 한 말이라면 무조건 경도되었는데,
지금은 브레히트가 좀 빡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위 시의 시구처럼 찌그러지고 가장자리가 다 닳아빠진 구리그릇 같은 게 나도 좋다.
요즘 세상은 왜 그렇게 으리으리한지......
동네에 새로 생긴 미장원이나 식당엘 가면 인테리어라든가 그 규모에 깜짝 놀라게 된다.
짐작건대, 땡빚을 내서라도 이웃 가게 코를 납작하게 하고 시작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시작한 가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는 광경을 종종 본다.
좀 작게 시작해서 당장은 힘들더라도 느긋하게 이어가면 좀 좋아?
형편에 맞게 아담하게 시작하면 초기비용도 유지비도 적을 테니.

오래 전 내가 다니던 영등포의 한 교회는 예배를 마친 후 두세 명의 교인이 짝을 지어
돌아가면서 식사를 준비했는데 나는 교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면기 대신
어디서 굴러들어온 것인지도 모르는 때묻고 찌그러진 낡은 코펠 뚜껑이나
휴대용 양은 대접을 악착같이 찾아내어 밥과 국을 담아 먹었다.
그러다 결국은 어느 날 그 코펠 뚜껑과 대접을 몰래 집에 가져오기에 이르렀으니.

그 그릇이야말로 오랜 세월 그곳을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이 밥과 국을 떠 먹던 것이었다.
하나님도 나의 그 절도행각은 모른척 눈감아 주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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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5-1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쌩뚱맞긴 하지만 "이퀄리브리엄"이라는 영화에서 예이츠의 시가
멋지게 사용되었어요..인간적인 소양이 말살된 미래에서 감성적인
문학이나 자료는 모두 금지가 되어 있는데..주인공 동료가 예이츠의
시를 읽으면서 감성에 눈을 떠요..그걸 주인공 앞에서 읽어주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사살되는 장면이 있는데..^^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I assume you dream, Preston.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영화는 썩 좋진 않았지만...이 장면만큼은 정말 멋졌습니다.^^

2007-05-16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과 댓글 쓰기 사이 님,
아무 뜻 없습니다. 죄민수 표정. ( '')
여백이 많은 건 순전히 실수예요.
다른 시인들에 대한 브레히트의 독설이 예전엔 통쾌했는데
오늘 다시 읽다보니 좀 아닌 부분도 있더군요.
이렇게 저는 점점 성숙하고 무르익어 가는가 봅니다.=3=3=3
(구리주전자 좋은 놈 보면 우리 정보 나누기로 해요. 헤헤~)

메피스토 님, 이퀄리브리엄이요?
제목은 들어봤는디유.
예이츠의 시 좋지요.
그리고 보면 '사랑'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된
가상도시의 영화 <알파빌>도 있었잖아요.
책이든 영화든 아무튼 흥미로워요.^^

mong 2007-05-1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당췌 시라고는 알라딘에서 주워 읽는 것 뿐입니다
비도 오는데 또 한편 잘 읽고 갑니다
로드무비님, 거기도 아카시아 내음 나요? ^^

로드무비 2007-05-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킁킁, 안 나요.
mong 님, 창을 열어 볼까요?
저도 알라딘에서 주워 읽는 것 많아요.
너무 유식해질까봐 걱정.^^
(이런 날 황해집 이야기나 한 편 풀어놓으시면 좋겄는디.)

비로그인 2007-05-1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된 것을 좋아합니다.
수년에서 수백년의 시간과 역사와 희로애락을 가지고 있는 사물이나 건축물일수록 더욱-
그래서 30년 이상의 나이을 먹었을 것 같은 물려받은 목걸이나 옷, 물건 등을 아끼고
최첨단 휴대폰보다 아날로그 (번호판을 돌려 전화를 거는) 전화를 더 좋아하죠.
좋은 글 담아가겠습니다.

영화 [이퀼리브리엄] 한번 보십시오. 괜찮은 영화입니다.
인간에게 진정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느끼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푸하 2007-05-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 얘기지만, 마지막의 자기고백에 아주 조금 망설이셨겠어요? ㅎㅎ

2007-05-16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17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17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은 척도 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과 쓸모, 내용과 형식 등 이 시론집에서 브레히트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두부모 자르듯 잘라지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대부분 저는 그의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브레히트의 균형감각을 믿거든요.^^

두 가지 명언 님, 우하하~~
이왕이면 우리말로 옮겨주시잖고.( '')
초라한 몰골로 시립도서관을 드나들던 때가 가장 좋은 때였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지요.
지금은 독서라고 할 것도 없고, 껄렁껄렁한 자세로 책을 대한달까.
보르헤스와 올콧이 눈을 흘길 것 같아서 이만.=3=3=3

다른 옷이랑 매치하면 확 살아나는 빛깔 님,
식당 이름조차 으리으리하군요.
표현이 참 멋집니다.
그나저나 그 편지 빨리 받아보고 싶네요.
생전에 안 읽던 릴케가 문득 눈에 들어와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교감(너무 과장했나요?)이 즐겁습니다.^^

푸하 님, 하하, 고백이라 할 것도 없는 가벼운 것인데.
저의 모랄은 좀 자기중심적이거든요.^^

L- SHIN 님, '이퀄리브리엄' 메모합니다.
인간의 손때 묻은 것에는 어떤 것도 못 당합니다.
남대문 시장 유명한 갈치조림 식당에서 제일 소중하게 다루는 게
그을리고 찌그러진 양은냄비라고 하더군요.
새 냄비에 갈치조림을 내가면 단골들은 난리가 난답니다.
또 하나의 유행이 돼버린, 거들먹거리는 앤티크 말고요.
소박하고 순한 그 무엇.
님의 말씀을 그대로 알아듣습니다.^^




2007-05-17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5-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총칼부림 영화요? 그렇군요.
제 취향까지 짐작해 주시고.
감읍하는 중입니다.( _ _ )

진달래 2007-05-1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용한다는 것과 처먹힌다는 것의 정의가 제겐 뭘까... 생각해봐야겠어요. ^^
이름만 들은 브레이트를 저도 읽고 싶습니다. ^^;;

건우와 연우 2007-05-17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읽으면 도통 관심이 없던 브레히트조차 사고싶어진다니까요...

oldhand 2007-05-17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시인들과 그들의 시가 그저 경외스럽게만 느껴집니다. 시인들의 감수성은 제겐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인것 같아요. 엊그제 열 여덟 소녀가 썼다는 5월 광주에 대한 아주 대단한 시 하나를 봤는데요. 김지하의 <오적>이나 김남주의 <나의칼 나의 피>를 읽었을때 만큼 큰 임팩트를 주던걸요. 저의 시적 감수성은 아마도 이 동네가 그나마 공감이 좀 가나 봐요. :)

비로그인 2007-05-1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물에는 그만의 정령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함께 -
물건을 버리면, 그와 함께 했던 시간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늘빵 2007-05-1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엘신님 / 이퀼리브리엄 저도 최고의 영화라 생각해요. 로드무비님 글보고 저도 이퀼리브리엄 생각났습니다. 예이츠의 시. 아... 이 영화의 예이츠 시 때문에 예이츠 시만 따로 나와있는 책이 없나 찾아봤던 적이 있습니다. 없더군요. 게다가 시는 원어로 읽어야할거같은. 원어는 또 약하고 해서 포기. 이럴 때 취약한 영어가 원망스럽더군요.

마늘빵 2007-05-1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마지막 댓글... 간직합니다.

로드무비 2007-05-2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 저에게도 뭐라 한 마디 걸어주시잖고.=3=3=3

L-SHIN 님, 멋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옷도 그렇고 안 버릴 수 없는 게 딜레마.^^

올드핸드 님, 브레히트 시랑 콩주 아빠랑 잘 어울려요.
그 시는 저도 읽었는데 어리둥절하더군요.
천재시인의 탄생도 좋지만 시가 너무 구성져서
그의 나이를 도저히 믿을 수가......
그만큼 시가 좋았다는 말이 되겠지요.^^

건우와 연우 님, 에잇, 책을 못 올리는 것이 유감.
툴바가 안 보여 사진이든 책이든 못 올립니다.
땡스투 몇십 원이 아쉽군요. 히히.=3=3=3

진달래 님, 브레히트와 노신이 좋아요.
브레히트 선집이 열 권 정도 나와 있어요.
시부터 읽어보시길.^^

아키타이프 2007-05-2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로드무비 2007-05-23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그런데 상한 살 헤집고 입 맞추는 건 무서워요.=3=3=3

밥헬퍼 2007-05-2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 서재는 써놓은 글보다도 덧달린 글들이 더 많을까요? 모름지기 깔끔과 투박함 속에서 저는 가끔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투박한 듯한 것을 그려보다가, 이내 깔끔한 것으로 움직여지니 말입니다. 오랫만에 들렀는데 여전하시군요.

로드무비 2007-05-2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헬퍼 님, 깔끔과 투박함이라든가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논다는 느낌을
제 방에서 받으셨나요?
냉정과 다정, 세심과 무심, 그 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혼재합니다.
하지만 마음과 행동은 함께 가는 편인데......
그렇게 보셨대도 할 말이 없지요.
서재 다시 여신다는 소식 접하고 무척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