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10만 원 때문에 친한 친구와 틀어진 적이 있다.

가설라무네, 그때 우리집 안방은 온 사방 벽이 검푸른 곰팡이 투성이였고
천장 벽지는 스카이라이프 접시처럼 오목하게 늘어져 빗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이도 어린데 이러다 날 추울 때 거리에 나앉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수소문,  제법 큰 일감을 하나 물어왔는데
마음이 복잡하고 정신이 산란하여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어느 날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 일감을 붙잡고 씨름하던 중,
늘어진 벽지가 찢어지면서 천장 위에 고여 있던 물이 정통으로 쏟아져
책상 대용으로 쓰고 있던 밥상과 침대 위를 덮쳤다.
쓰나미처럼.
내가 메모한 빨간색 플러스펜 교정지 뭉치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고,
그것은 겨우 한 권 분량의 일이었지만 나는 그 작업 전체를 깨끗이 포기했다.
붙들고 씨름을 하곤 있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마무리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네다섯 살 무렵이다.
살고 있던 연립의 주인이 도망 가고, 온 집안에 핀  곰팡이 때문인지
주하는  코감기와 기침을 달고 살았고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비염 증상도 그때가 원인이지 싶다.)

그런 집구석으로 직접 찾아와 한숨을 내쉬며 작은 일감을 던져준 친구가 고마웠으나 
속으로는 어떠했을망정  겉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거나 쩔쩔맬 내가  아니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통장에 들어온 교정료를 확인하던 날,
약속된 금액에서 10만 원이 모자라길래 어찌된 일이냐고 전화를 걸었다.
돈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보니 좀 머쓱해서 도리어 당당하고 큰 목소리가 나왔다.

친구는 깜짝 놀라며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긴가민가 하고 물러섰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몇월 며칠 그가 일을 맡긴 날 수첩의 메모를 전화로 확인시켜 줬더니
그런가? 마지못해 중얼거리며 차액을 당장 송금하겠다고 했다.

그날 밤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며,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며 전화가 왔다.
단돈 10만 원에 내가 자신을 심하게 다그쳤다고.
단돈 1만 원이 아쉬운 상황이다 보니 놀라서 바로 전화를 걸었던 건데
난 내심 그가 서운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명백한 자신의 착오에 의해 비롯된 일을 섭섭하다고......

겉으로는 웃으며 잘 정리가 되는 듯했지만
아무래도 그 일이 부담스러웠나 보다.
그가 내게 연락을 취해 가까스로 유지되던 관계인데 그 뒤 우리는 다시 서로를 찾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 친하게 지냈던 소설가 선생님이 
2년 전인가 3년 전, 신년 정초에 전화를 걸어와
복 많이 받으라고 덕담을 건넨 후 내게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깜짝 놀랄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가 그 무렵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으며 생리가 몇 달째 딱 끊어져 걱정이 많았다고.
너무 이른 폐경.
그 말을 듣자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또 내가 모르는 무슨 마음의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때로 우리는 각자의 사정과 근심  속에서 친구를 오해하고 속단한다.
"상대의 입장과 바꿔 생각해 보라"라는 근사한 경구도 아무 소용 없을 때가 있다.
어긋나 버린 인연에 대해 다시 돌아보지 않는 걸 스스로 쿨하다고 위무한다.
뒤돌아보지 않고 매정한 것을 성숙한 것이라고 자신을 속인다.

오늘 낮 모처럼 긴 편지를 한 장 쓰고 났더니 필을 받은 것일까,
극단적으로 구질한 글이 하나 쓰고 싶었다.
10만 원 때문에 친구와 멀어진 일보다 세상에 구질한 일이 또 있을까.
모처럼 단숨에 써내려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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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7-03-0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 뒤통수를 쎄게 한 대 때리는 글이었습니다...

2007-03-06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0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한 손가락과 입술 님, 저 혼자서 증식하는 근심과 오해라니,
맞아요. 괴물 같은 그것.
그 책을 읽으며 저를 떠올렸다니 그 오해가 기분 좋습니다.^^

에로이카 님, 뒤통수를 쎄게 한 대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라.
제가 친 건 제 뺨인데......

얼음장수 2007-03-06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한 달 월급인데요. ㅋㅋ. 저도 단숨에 느낌 팍팍 오늘 글 한 번 써보고 싶네요.
감기조심하세요^^

2007-03-06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피드림~ 2007-03-0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락이 끊어진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그중엔 다시 연락하고 싶은 친구들도 있고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진게 다행이다 싶은 친구도 있어요(-_-)
필 받아서 단숨에 쓰신 글은 읽기에도 편한데가 있는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7-03-06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살 때, 20만원으로 좋은 친구와 우정을 하나 보내고...
친한 사람한테는 '빌려주고, 못 받아서 우정이 깨지는 것'보다는 '그냥 주고 잊자' 하고
살게 되었습니다만, 고작 20만원때문에 친구의 자존심과 우정에 상처를 줬을 그 일이
기억나니 '로드무비'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너무나 와닿습니다.

국경을넘어 2007-03-06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유소 미터기의 숫자처럼 사람들의 얼굴이 드르륵 돌아가네요.

10만원...
대학 시절 군대가기 전 받는 신검을 받는데, 몸에 이상이 있는것 같다며 재검이 나왔습니다. 디스크일 것 같다고. 신검장에서는 씨티촬영해서 필름을 가져오라 하데요. 그때 15만원이었던 것 같은데 도저히 돈을 만들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한 교수로부터 10만원 별로 친하지 않은 교수(?)로부터 5만원 꿔서 씨티 촬영했죠. 그리고 면제 받았습니다. 바로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했는데 이제 시간이 너무 지나서 어찌해야 할지. 안 친한 교수는 서울의 유명하다는 K대학으로 전근을 가서 그럴려니 하는데 친한 교수는 제 석사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했는데...

Mephistopheles 2007-03-0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그럴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10만원 적은 돈 아니잖아요..^^

로드무비 2007-03-07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 님, 그러문요, 어떤 날은 1000원도 아쉬운데......^^
(상황이였다고 --상황이었다고)=3=3=3

폐인촌 님, 그러고 보니 그때 받은 교정료 중 50만 원을
친한 언니에게 빌려주었다가 못 받았네요.
다 이해한다고 음성을 남겼건만 여태까지 연락이 없고요.
본의 아니게 떼어먹기도 하고 떼이기도 하고 그런 게 인생인가 봅니다.
신검 받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든다는 게 부당하게 느껴지지만 우짜겠습니까.
받을 돈은 잊지 마시고, 못 갚은 돈은 깨끗이 잊으세요.^^
(지금은 건강하시죠?)

L-SHIN 님, 19세 때 친구 빌려줄 20만 원이 있었다니......ㅎㅎ
마음으로 다짐하는 거랑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건 다른 것 같아요.
저도 그때 잘한 것 없어요.
무지 잘난 척했거든요.
이 정도 어려움이야, 하면서. 오기로......

punk 님, 강금실 씨가 그렇게 저렇게 멀어진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쓴 글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럴 수도 있지 뭐, 깨끗이 잊어!"였거든요.^^

코드가 맞는 친구였다면 님, '코드'라는 게 또 모래성 같아요.
코드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감성의 코드라는 건
생각보다 별게 아닐 수도 있더라고요.
되려 그런 것 하나도 안 맞는 남자랑 만나서 그럭저럭 살고 있는 걸 보면
저의 인격이 너무 훈늉하달까.(삼천포)
말은 이렇게 하지만, 님의 말씀 듣고 크게 고개 끄덕였습니다.^^

얼음장수 님, 단숨에 느낌 팍팍 오는 건 좋은데
다른 종류의 글이길요.
(한달 월급이 10만 원이라고요? 지금 저랑 비슷하시네용.=3=3=3)








바람돌이 2007-03-0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라는 것의 무게감은 단순히 숫자상의 액수에만 있는건 아니잖아요. 어떨땐 100만원도 그냥 주는거야 잊자 할때도 있고 단돈 만원도 못받으면 정말 맘상할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전 그렇던데요. 님이 일하고 받기로 한 댓가는 10만원이 아니라 만원이 비었다 하더라도 받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다만 두분이 너무 힘들던 시절이라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줄 여유가 없었을 뿐이지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그럴때 있잖아요.

2007-03-07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oldhand 2007-03-07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문장을 단숨에 써내려가셨다니, 한마디로 '일필휘지'로구만요.
10만원, 참 어중간하면서도 무시못할 돈이지요. 제게도 10만원을 빌려갔다가 그 길로 영영 소식을 끊어버린 지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딱 그럴만한 인연이었던 게지요.

비로그인 2007-03-0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왜 이렇게 제 자신이 부끄러운지 모르겠어요... ㅜㅜ

건우와 연우 2007-03-0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숨겨놓은 과거를 들킨 기분이네요...

로드무비 2007-03-0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 님, 님도 저처럼 한번 주머니를 털어보세요.^^

체셔고양2 님, 솔직한 모습이 좋기만 하던데요.^^

올드핸드 님, 단숨에 쓴 건 맞는데 나중에 손은 쬐매 봤습니다.ㅎㅎ
"돈 잃고 사람 잃고" 그런 말은 나에게는 예외인 줄 알았는데. 그죠?
앙금은 안 남았는데 번거로워서 연락을 않는 게 더 문제인 것 같아요.

비슷한 소재 때문에 님, 이문세의 '옛사랑"을 들려드립니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저 노래 잘하죠?=3=3=3

FTA반대 바람돌이 님, "누구나 그럴 때 있잖아요"라는 말이
저를 위로해 주는군요.
1만 원 아니라 1천 원 때문에도 틀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관계.
그만큼 지키는 게 어렵다는 얘기겠죠,
쉬워 보이는데.





마냐 2007-03-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사소한 일에도 오래된 인연이 절딴나기도 합디다. 10만원이면....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았죠. 그리고, 사람들 일이란...내게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마치 라쇼몽 같은 대목이 있죠.

로드무비 2007-03-0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노우에 야스시의 '엽총'처럼 모두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죠.
한데 모아놓으니 가관.
그 섬뜩함이 재밌기도 해요. 마냐 님.^^

니르바나 2007-03-0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소통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러니 모두모두 이해됩니다.
생활고나 죽음연습같은 우울증 앞에선
더더욱 모두모두 이해됩니다.
인연의 끈이 끊어진 지 오래 되었어도
전화는 한 번 주시지 그러셨어요. 로드무비님^^

2007-03-07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03-08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름이 아니구요.. 그냥 쓰신 글 읽고, 저도 그렇게 내 아쉬움만 생각하고, 친구들 아쉬움은 눈감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드무비 2007-03-0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전 또 제 매정함에 놀랐다는 건 줄 알고.
찔리는 게 많은 인간이랍니다.^*^

선뜻 수화기를 님, 속상한 것도 속상하지 않다고 위장을 하고 넘어가서요.
그게 나중에 되려 상처가 되더라고요.
여차하면 머리채를 잡으며 구체적으로 지지고볶으며 살고 싶은데
대부분 저는 방관자의 자세입니다.
하도 따뜻한 말씀을 남겨주셔서 저도 솔직한 심정을
밝히는 거랍니다.
고맙습니다.^^

니르바나 님, 어느 해 연말, 전원일기에서 응삼이가 주인공일 때
통화가 되어 달려가 응삼이의 남동생을 욕하며 술을 마셨던 친구예요.
페이퍼가 기억나시는지?
아무런 감정은 없는데 연락하기가 어색해서요.
저도 어느 날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에 의하면 제가 생활고의 주인공 맞지요? 흐뭇.^^


뷰리풀말미잘 2007-03-0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친구에게 낙태비용으로 30만원을 빌려 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나 그 때나 열렬한 낙태 반대주의자이기 때문에 친구도 잃고, 돈도 잃고, 후회만 남기게 될 줄 알고 있었죠. 뭐.. 그렇게 됐어요. 간간히 그 아기가 꿈에 나와서 잠을 설치고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안 하던 얘긴데 술김에, 님의 글에 왠지 모르게 감동해서, 익명성을 담보삼아 찌끄리고 갑니다. 후후..

로드무비 2007-03-09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뷰리풀말미잘 님, 술김에 찌끄리는 댓글을 사랑합니다.
전 딱 두 번인가 그래봤네요.
낙태비용 30만 원, 빌려준 돈보다 비용의 내용이 좀 무겁네요.
안 빌려줬으면 또 다른 가책이 남았겠지요.
이제 모두 잊고 편안한 잠 주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