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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으로 아는 것들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노후에 대비해 개인연금을 따로 부을 용의가 없냐는, 어느 날 걸려온 모르는 이의 전화에
이 책의 주인공은 능청맞게 대꾸한다.
--노후에 대해 왜 걱정을 해야 하는데요? (220쪽, 에필로그)
상인이나 여호와의 신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바쁘다며 인터폰으로 따돌리는 데는 이력이 났지만
"왜 문을 열어보지도 않고 사람을 돌려보내느냐?"는 딸아이의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건 이미 내가 세상에 대한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서운 세상이니 함부로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고......
호어스트 에버스는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를 쓴 사람이라는데
난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모두가 좋다고 하면 왠지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도 내 병폐.
어제 오후, 불량한 자세로 드러누워 이 책을 읽다가 나는 프롤로그만 읽고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았다.
커피메이커와 거미와 자기자신을 엮은 대수롭지 않은 얘기만으로도 사람을 홀딱 빠지게 하다니......
동전을 넣어도 제멋대로인 커피 자판기를 보며 그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자판기를 이해한다. 늘 이건 무리다 싶고 어딘가 고장난 것 같은 그 상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바로 내가 그러니까.
지난해만 해도 나는 거의 항상 망가진 상태로 마냥 퍼져 지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그런 세월들도 있달밖에.
물론 가끔 상태가 좀 나은 날도 있었다. ('망가지는 거야 순간이지' 40쪽)
이를테면 그는 공원 같은 곳을 산책하다가 아이들이 차던 공이 자기 앞으로 굴러오면
제깍 돌려주는 법 없이 나름대로 온갖 현란한 묘기를 선보이다가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는 타입.
--이 황당하고 생뚱맞은 공연은 흔히 아주 길게 이어지곤 했다.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은 땅거미가 드리울 무렵 공을 돌려보낼 주소를 적어 내게 찔러주고
플레이스테이션을 하러 집으로 갔다.
('더이상 우리의 능력을 세상에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66쪽)
나는 이 책에 나오는 황당하고 생뚱맞은 이야기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개인연금 권유하는 전화를 걸어온 이를 잘 구슬러 휴대전화가 잘 터지게 하는 여행가방을
팔아넘기는 데 성공할 정도이니, 그 능청이라니!
전화나 인터폰으로 사람을 따돌릴 때 희미한 가책을 느끼는 내가
세상에서 단 한 가지 배우고 싶은 게 바로 그 능청. 독창적인 처세술!
<느낌으로 아는 것들>이란 이 책의 제목과 유니크한 그림의 표지를 보는 순간
나도, 느낌으로, 딱, 알았다.
호어스트 에버스는 역자(김혜은)를 정말 잘 만났다.
내용에 어울리는, 산뜻하고 도발적인 문장이라니......
혼자 보기 아까워서 옮긴이의 멋진 말도 몇 줄 소개한다.
--물론 순 '뻥', 십중팔구 지어낸 얘기겠죠. 하지만 호르스트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유치원생)아이의 공작 준비물 챙겨주는 일, 누가 대신해줬으면 싶은,
그러나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 어른애가 진짜 애를 거두는 일의 신산함을.
떠밀려 무늬나마 어른이 되어가는 일의 난감함을. 천근만근 무거워진 구두를.
역시 후생後生은 가외可畏입니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224쪽)
(독일 지명 중심의, 책 맨 뒤에 있는 '찾아보기'도 무지 웃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