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사로 인생 공부 - 내 삶을 비추는 명문장 100 필사집
오수경 지음 / Birdbox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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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는 거리가 먼 친구에게 선물한 책. 주문하면서 살펴보니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 대사도 보여 반가웠다. 책과는 상관없이 요즘 꽂힌 드라마 <연애박사> 속 대사는 이렇다. “나는 한번 삼키면 절대 안 토해. 타 죽어도 절대로 안 토해. 절대로 못 돌아와. 끝까지 가는 거야. 그래도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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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약속은 가장 추운 날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말이다. 서로의 시간을 맞추고 얼굴을 마주하기로 한 날. 친구가 오기 전에 보일러를 틀었다. 바닥이 따뜻해지는 게 기분이 좋았다. 거의 5달 만에 마주한 우리. 그 사이 우리는 조금 더 늙었고 집착 비슷한 열망은 조금 옅어졌다. 9월엔 친구에게 큰일이 있었고, 나는 그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 약속을 잡으면서 친구가 무화과 시루를 사갈 수 있으면 사 가겠다고 했다. 당신이 예상하는 그곳의 무화과 시루가 맞다.


친구와 나는 그 지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그래서 종종 놀란다. 그 빵집이 이렇게 유명해질지 몰랐으니까. 당시에도 랜드마크였고 그 앞에서 약속을 잡기도 했지만. 아무튼 직접 본 무화과 시루는 너무 예뻤다. 어마 무시하게 컸다. 친구가 말하길, 이건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접시와 수저를 두고 무화과 시루를 먹었다. 물론 먹는 양이 적어서 다 먹을 수 없었고 남은 케이크는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었다. 그건 모두 친구가 했다. 친구는 나보다 그런 걸 잘한다.





이사 간 집과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책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가 책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정말 진기한(친구에게 미안하지만) 일이다. 필사를 할 거라고 했다. 켈리 그라프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의 손 글씨는 정갈하고 곱다. 덕분에 나는 이런 책이 있는 줄 알았다. 친구에게 선물을 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드라마 대사로 하는 필사, 그래서 나는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가장 기다리는 드라마 <연애박사>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도 올가을 내 키워드는 <연애박사>가 지배할 것 같다.

​

11월의 첫날 친구는 여동생 둘과 중국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3박 4일의 짧은 기간이 친구에게 쉼이자 휴식이면 좋겠다. 함께 할 시간은 끝이 났고 우리는 다음 계절을 약속했다. 겨울의 어느 시기에 만날지 모른다. 첫눈이 내리는 겨울일지도 모르고 봄에 속한 겨울이 될 수도 있고 여름에 떠올리는 겨울일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10월의 무화과 시루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달콤함으로 풍성하게 채워진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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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10-29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때 자주 가던 곳인데 이렇게 유명해질지 몰랐어요 저는 거기서 빵 보다는 돈까스 먹는걸 좋아했는데...ㅋㅋㅋ

잠자냥 2026-10-29 15:11   좋아요 0 | URL
헐 저기 돈까스도 팔았어요? 신기하네........

망고 2026-10-29 15:34   좋아요 0 | URL
2층에서 팔았는데 요즘은 안 팔까요?ㅋㅋㅋ그당시 90년대에도 돈까스 줄서서 먹었던 기억이 나요

자목련 2026-10-30 09:3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핫해도 정말 핫해요! 요즘에도 팔지 않을까 싶어요^^

hnine 2026-10-2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006년부터 그 동네에 살고 있는데 이사올 당시만해도 이 정도로 유명하진 않았고, 전 지금까지도 그곳의 시그니처 케잌들을 못먹어봤어요.

자목련 2026-10-30 09:38   좋아요 0 | URL
나인 님, 그곳에 사신다니, 괜히 좋습니다 ㅎㅎ
정작 그 동네 사시는 분들은 시그니처 빵 먹는 게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제 친구도 그렇고요.

다락방 2026-10-2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화가 시루 엄청나게 아름다운데, 어쩐지 먹을 순 없을 것 같아요. ㅎㅎ

잠자냥 2026-10-29 15:11   좋아요 0 | URL
전 사실 사진만 보고는 삼겹살인가 했는데... 저게 삼겹살이라면 다 먹을 수 있죠?? ㅋㅋㅋㅋ

자목련 2026-10-30 09:39   좋아요 0 | URL
그냥 숟가락을 푹 넣으면 됩니다 ㅎㅎ

자목련 2026-10-30 09:40   좋아요 1 | URL
잠자냥 님 댓글을 보니 삼겹살로 보이기도 합니다. 삼겹살이라면 저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ㅋㅋㅋ

잠자냥 2026-10-29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곳이 바로 그곳인가요! ㅎㅎ 전 아직 한 번도 그곳에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나 유명하다는데....
물론 그곳에 다녀온 가족이나 지인들이 그곳의 시그니처 빵이라면서 사 온 적이 있어서 먹어본 적은 있지만... (아 저 위에 다락방이 사 온 적도 있네요. 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유명해져서 그렇게 긴 줄을 서야 하는 곳이라니... 아마도 영원히 그곳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케이크는 사진만으로도 참 풍성해 보입니다.

자목련 2026-10-30 09: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지역을 떠나온 후로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 살아서 덕분에 맛을 보고요.
친구 말로는 케이크 줄이 따로 있어서 다른 빵은 사 올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케이크 맛은 괜찮았어요. 아주 달지도 않았고 무화과가 엄청 많았고요.

건수하 2026-10-30 10:38   좋아요 0 | URL
대전역 근처 지점은 줄이 엄청 길고, DCC 라는 곳에 있는 매장은 줄이 짧아요. 그리고 거긴 주차하기도 편해요. 가신다면 DCC점 추천합니다 ^^

blanca 2026-10-3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안판석 감독님 드라마 너무 좋아해요. 어제 우연히 티비에서 <연애박사>8회를 보고 그냥 심심하네 하고 말았는데 1화부터 다시 제대로 볼까요? 무화과 시루 넘 맛나겠어요.

자목련 2026-10-30 09:45   좋아요 0 | URL
안판석 감독님 드라마 좋아하신다면, 1회부터 보기 추천합니다. 나머지 4회가 찐일 것 같기는 해요 ㅎㅎ
무화과 시루는 맛났어요!

건수하 2026-10-3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화과 시루도 나오는군요 ^^ 전 말차시루 한 번 먹어봤는데, 케이크가 좀 물컹물컹해서 먹고 나머지 보존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전 사실 그렇게까지 줄 설 맛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 원래 줄 서는 거 싫어하기도 하고요 ^^;; - 사오니까 가족들이 좋아하긴 했습니다 :)

<연애박사>란 드라마 처음 들었는데, 자목련님이 관심있다 하시니 급 궁금해집니다.
 
우리 착한 나진 ㅣ 오늘의 젊은 작가 60
이서수 지음 / 민음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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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려고 나섰는데 낯선 여자가 앉아 있다면 어떨까? 순간 아찔할 것이다. 집을 잘못 찾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가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우리의 ‘나진’은 그러지 못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나진은 ‘착한’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고 싶으니까. 여기서 뭐 하냐고 묻는다. 불편은 감추고 친절하게.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내 집까지 찾아올 수 있다는 설정은 너무 무섭다. 오래전 알았던 사이라 해도 연락이 끊겼으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낯선 여자는 나진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15년 전 나진이 국어 과외를 했던 학생 중 하나인 다혜였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냐고. 세상에나 그 말을 믿고 찾아왔다고? 15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찾았을까? 나진은 다혜를 집에 들이고 출근한다. 나진과 다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진은 왜 다혜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을까. 다혜가 반가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걸 다혜가 의도했다면 나진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스물셋의 나진과 열다섯의 다혜를 생각하면 어른과 아이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서른여덟의 나진과 서른 살의 다혜의 현재를 보면 둘 다 성인 여자이다. 서른 살 여성이 도움을 청할 사람이 나진뿐이었을까. 정말 그래서 찾아온 것일까. 다혜에겐 어떤 사정이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착한 나진은 그렇게 다혜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보호와 돌봄이 필요했던 열다섯의 다혜를 떠올리며, 그때나 지금이나 나진은 그저 선의를 베푸는 것이다.


다혜는 청소를 하고 밥을 해놓고 나진을 기다리며 제 집처럼 지낸다. 제발 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나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이다. 나진은 다혜를 볼 때마다 15년 전 그날이 떠오른다. 나진은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며 과거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다혜 말고도 나진에게는 골칫거리가 있다. 회사를 그만둔 직원 이상우가 훔쳐 간 비품 때문인데, 나진과 연결시키려면 연결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 나진에게 고백했던 상대이기도 해서 찜찜한데 그 물건을 맡아달라며 나진에게 보낸 것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나진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편하지 않다.


설상가상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출도 없는 전 재산으로 얻은 전세였는데 사기라니. 부동산 중개인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진 대신 다혜는 아무렇지 않게 제 일처럼 모든 걸 해결한다. 집을 구하고 짐을 정리하고 이사를 주도한다. 집을 구하는 비용도 모두 다혜가 해결했다. 회사도 그만두었는데 이상우가 사장 부인과 외도를 했고 나진과 삼각관계였다는 괴소문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나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혜가 차려준 밥을 먹고 다혜가 이끄는 대로 생활한다. 다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외출을 하는데 무엇을 하러 다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다혜는 엉뚱하게도 나진에게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전세 사기를 친 사람을 찾아도 돈을 돌려받을 수 없는 걸 아는데. 나진에게 이제 일상은 욕이 되었다. 욕이라도 해야 살 수 있었으니까. 사는 동안 내내 착하게(착한 사람으로 보이게) 살아왔는데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세상을 원망하고 사기 친 사람을 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진을 다혜는 조금씩 움직이게 만들었고 부동산 중개인에게 사과를 받아낸다. 동네 산책을 하고 벚꽃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든다. 주인집 할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시고 할아버지가 키우는 개 찐빵과도 친해진다. 15년 전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엄마의 방치와 빚 때문에 혼자 집에 남겨진 다혜를 선의로 도왔던 나진이 지금은 다혜의 돌봄을 받는다. 춥고 혹독한 겨울과 봄과 여름까지.


나진은 이제 달라졌다. 그 달라짐이 나쁘지 않다. 착한 나진도 아니고 우리의 나진도 아니다. 그냥 나진일 뿐이다. 이사면서 가지고 온 이상우의 물건(횡령을 위한 낡고 바랜 A4용지)을 돌려주리고 한다. 이상우는 부산에 있다며 나진에게 부산으로 오라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나진은 부산에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상우의 친구가 운영하는 탁구장에서 둘은 만났다. 이상우에게 따지고 화를 낸다.


나진은 아무 대꾸 없이 찢어진 용지를 한 아름 모아 든 다음 이상우가 서 있는 네트 너머로 힘차게 내던졌다. 파괴되기 전에는 못 넘어가도 파괴된 뒤에는 어디든 넘어갈 수 있다. 이상우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진도 예전엔 몰랐다. (166쪽)


나는 '파괴된 뒤에는 어디든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 통쾌하고 기분이 좋아서, 몇 번을 읽었다. 우리 착한 나진이 파괴하지 못한 것. ‘우리’와 ‘착한’을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을 파괴하지 못했을까. 무엇에 갇혀 있고 끌려다니고 있을까. 그럼 다혜는 진즉에 파괴된 것일까, 아니면 파괴한 것일까?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과 사기를 당하는 사람, 선의와 호의를 악용하는 사람, 직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는 사람. 어쩌면 누군가의 진심을 아는 건 어렵고 진심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도 않는 세상에서 속내를 감추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스릴러 같기도 하고 사회고발 소설 같기도 하다. 어른의 역할이 부재한 사회, 해결하지 못하는 전세 사기까지.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확인시키면서 그럼에도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건 돌봄과 연대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넌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너의 일부분은 좋아. 싫은 점도 있지만 참아 줄 만해. 결국 그런 사람을 곁에 두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


“내가 어느 한 시기에 내 곁에 있었던 나진 씨를 못 잊는 것처럼 나진 씨도 어느 한 시기에 곁에 있었던 나를 못 잊었으면 좋겠어. 이 집에서 보낸 봄과 여름을.” (196쪽)


소설에서 나진를 부르는 다혜의 호칭은 세 번 변하는 데 그게 참 좋았다. 그건 관계의 변화이기도 하고 둘 사이의 거리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니까. 선생님으로 시작해, 언니, 그리고 나진 씨. 수직관계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 비로소 어른과 어른으로 마주한 두 사람의 모습은 독립적이면서 아름답다.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나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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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10-2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서수 작가 좋아하는데, 이책도 읽어야 하는데...

자목련 2026-10-27 09:28   좋아요 0 | URL
이서수 작가 좋아하시면, 이 소설도 만족하실 것 같아요!

꼬마요정 2026-10-2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게 시작해서 나름 희망차게 끝나는군요.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6-10-27 09:29   좋아요 1 | URL
이 책, 좋았어요. 꼬마요정 님도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Jeanne_Hebuterne 2026-10-29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서수 작가의 이야기는 늘 좀 살벌한 밥벌이를 배경으로 조용히 쉴 곳을 찾는 것 같은 목소리여서, 이 책도 궁금했는데 자목련님 리뷰 보니 읽어야겠구나! 싶은 마음!

자목련 2026-10-30 09:30   좋아요 0 | URL
정말 정확한 표현이네요! 궁금하셨다면 충분히 만족하실 거라 생각해요. 좋았던 소설이거든요!
 


서울에 다녀왔다. 일요일에 출발해서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하필 폭우가 쏟아지던 시간에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내가 운전을 한 건 아니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병원 일정으로 간단한 검사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입원을 하니 위중한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몸무게와 키를 확인하고 배정된 병실로 향했다. 침대에 담요와 환자복이 개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보호자도 나도 심심했다. 코로나 이후로 병원 분위기는 달라졌다. 조용했고 커튼을 걷어두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나쁘지 않았다. 혈압, 맥박을 측정하고 간단한 채혈을 했다. 미열이 있어 살짝 걱정했지만 간호사는 검사에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일찍 잠들었지만 간호사의 방문으로 깊은 잠은 오지 않았다. 평소처럼 새벽에 깨고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월요일의 검사는 지난번 외래에서 하지 못한 것으로 이번에는 꼭 해야만 했다. 혹시나 이번에도 힘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늦은 아침과 약간의 낮잠과 점심을 먹었다. 걱정할 정도의 결과는 아니었고 의사는 1년 후로 검사를 잡았다. 이번 검사는 돌발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의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살피는 일이었다.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내가 감지하는 것, 내가 스스로 나를 책임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폭우와 바람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편안하면서도 지루했다. 월요일의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차가 많았다.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했는지 꽤 많은 잠을 잤다. 그리고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내 일정을 아는 친구의 통화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일정이었는데 병원이라서 걱정이 많았다. 직접 통화를 해야 마음이 놓이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나의 안부를 묻는 일, 그 모양은 다양하다. 자신의 관심거리에 맞춘 안부라고 할까. 어떤 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안부를 시작하고 어떤 이는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 마지막에 내 안부를 묻고 어떤 이와는 안부를 묻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주고받는다. 누군가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고 얼굴을 보는 이도 정해져 있다. 그래도 얼굴을 보고 밥을 먹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약속을 정했다.





책의 안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작가의 신간 소식을 듣고 읽거나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구매하고 읽는 일이 아닐까 싶다. 김경후의 시집이 그러하다. 김경후의 시집 『열두 겹의 자정』을 좋아하는데 그 이후로는 시집을 읽는 게 없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도 장편은 처음인 것 같다. 두 권의 책은 모두 Falstaff 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땡스 투로 부족하지만 고마움을 표한다. 이윤 리의 에세이는 너무 아프고 슬플 것 같은데 그래도 읽어보고 싶어서 구매했고 하루키의 소설은 좋아한다고 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나오는 소설이라서.


가을이니, 가을에 어울리는 이런 제목의 시를 우선 찾았는데 뭔가 핏빛 낭자한 풍경을 목도한 것만 같다.

​

눈먼 새들

열린다

날개 묶어

열린다

핏빛으로 떨어진다 열린 채

얼어붙은 채

엄마, 떨어지면 날아가?

가을 하늘은 넓고 높지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열리고

닫힌다

내가 스마트폰을 찾는 사이

열차

날아갈 듯 핏빛 눈빛들

(「단풍」, 전문)

​

어제는 너무 추워서 겨울이 왔나 싶었는데 오늘은 다시 날씨가 가을이라고 확인시켜준다. 아직 노란 은행잎이 수북히 쌓인 걸 못 봤으니 겨울 생각은 조금 미뤄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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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10-22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글을 읽을 때면요, 낙엽이 사뿐히 내리는 것도 같고요.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것도 같고요. 그렇게 소곤소곤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해요. (ASMR)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이 두렵긴 한데요, 겨울만 되면 유독 맛있는 간식거리가 있어서 그건 또 좀 좋아요. 막 게을러지고만 싶은 겨울 생각은 저도 조금은 미뤄 두고, 지금의 가을을 좀 더 담아 볼까 봐요.

자목련 2026-10-23 11:18   좋아요 0 | URL
곰돌이 님이 그리 읽어주셔서 그렇겠지요.(입꼬리 올라가고 기분은 날아갑니다~~)
겨울엔 호빵, 군고구마, 붕어빵. 맛난 먹거리가 많죠!
찰나의 가을을 한 아름 담아두시길 바라요!

yamoo 2026-10-2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글을 보면...
오랜동안 문학책과 함께 문학적 환경에서 문학적 글을 써 오신 듯합니다..^^;;

서울에 다녀오셨군요. 이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참 호젓한 곳에서 사시는 것 같아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서울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너무 많아요.ㅎㅎ

자목련 2026-10-23 11:20   좋아요 0 | URL
문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문학적 환경까지는...

시골에 사는 게 나쁘지 않은데 한 번씩 서울에 갈 때면 힘든 게 있지요. 말씀처럼 서울은 복잡하고 답답한 느낌도 들고요. 문화적 혜택을 생각하면 서울살이가 부럽기도 하고요^^

구단씨 2026-10-2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하세요.
저도 점점 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마음까지 아파지는 기분입니다.

자목련 2026-10-27 09:3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병원에 가는 건 건강해지려고 하는 건데.
구단씨 님도 감기 조심하고 건강 잘 챙기세요!

책읽는나무 2026-10-2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행이 멋진 가을여행길이었음 좋았을 텐데…어차피 폭우 속이었어서 가을여행 만끽하기엔 힘들었을까요? 이곳도 며칠째 가을비가 계속 내리는 중입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감기도 조심하시길 기원합니다.^^

자목련 2026-10-27 09:31   좋아요 1 | URL
말씀처럼 폭우라서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어요.
오늘부터 추워진다고 하니 나무 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우리 세희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8
조해진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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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아간다. 나의 안위와 행복이 우선이다. 나의 상처에만 매몰되어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다. 그러다 움찔한다. 나를 둘러싼 우리를 만난 때, 내가 여기 존재할 수 있는 근원과 마주했을 때 말이다. 누군가 역사의 한 조각이라 말하고 누군가 나로 이어져, 나와 연결된 단단한 뿌리라 말한다. 나의 조부모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의 젊음을 모르고 부모의 시간을 모르는데 말이다.


조해진의 『우리 세희』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끊임없이 타인을 향한 연민과 이해를 놓지 않으려는 작가임을 알았지만 이번에는 그 무게가 달랐다. 어쩌면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소설로만 읽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맞닿는다. 한 사람의 생이 이처럼 참담할 수 있을까. 역사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 한 개인의 삶은 무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끝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자 기쁨이었다.


소설은 업무를 위해 런던에 도착한 연주가 선생님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생님은 연주의 죽은 엄마 오세희와 연결된 분으로 연주 자신과도 이어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엄마와 같은 세계와 속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엄마가 한국에 오기 전 살았던 그곳, '자이니치'로서 재일한인들이 살았던 대학시절 선생님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선배이자 친구로 지낸 선생님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나오 자랐고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자이니치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냉대를 받았다. 선생님과 센세를 만날 때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로 연주는 이제껏 생각하지 않았고 몰랐던 시절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떠나면 일본의 양로원에 계시는 치매를 앓는 외할머니를 제외하면 엄마 세희를 기억할 사람은 선생님의 아내 센세뿐이다.


연주가 런던에 온 이유는 일본계 영국인 예술가 ‘제이비 류’를 취재하기 위해서다. 그가 제주 4·3의 비극을 다룬 자품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연주가 런던에 머무는 3일 동안 선생님의 죽음과 동시에 연주 엄마 세희의 삶을 들여다본다. 현재 런던에서 연주가 느끼는 이방인을 향한 차별과 세희가 서울에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타인의 시선, 선생님과 엄마의 부모가 살아온 오사카의 삶을 교차하며 들려준다.


'자이니치'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일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서글프고 고단한 삶에 대해서. 단 3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연주는 모멸감을 느끼고 치욕스러웠는데 엄마 세희와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땠을까. 1942년 원산에서 오사카 항만공사 인부로 강제 징용된 세희의 부모,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살아야 했던 시간. 그럼에도 세희는 단 한 번도 일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왔다는 이유로 조롱거리가 되었다. 세희는 평생 한국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내력이 죄가 되고 죄는 죄책감으로 수렴되는 삶이었다. (47쪽)





한국 어디에도 기댈 수 없던 세희가 자신을 아는 선생님과 재회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어린 연주는 그런 엄마를 지켜보며 세희가 선생님과 센세를 만났을 때 보였던 모습을 지울 수 없다. 연주가 런던에서 단 3일 동안 머무는 동안에 받았던 이방인으로의 시간을 세희와 선생님,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건 그들이 원한 것도 아니었고 잘못도 아니었다. 역사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견디며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그랬기에 세희의 오빠는 세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기 위해 북으로 떠난 것이다. 동생은 자신과 달라야 하니까. 그러나 그렇게 북으로 떠난 오빠의 죽음은 세희를 가장 힘들게 했다. 그러나 세희도 알고 있었다. 오빠의 죽음은 개인이 아니라 역사와 국가의 문제라는걸. 개인을 지켜줘야 할 국가가 부재했다는 것을. 그것은 ‘제이비 류’의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그의 할아버지가 고향 제주에서 겪었던 무자비한 폭행도 역사와 국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 살아남기 위해 그곳을 떠나야 했던 심경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거대한 슬픔을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세희와 선생님이 서로에게 회복의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할 뿐이다. 거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은 연주가 다시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간직하려 한다는 것을. 세희라는 이름 속에 담긴 그들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소망을 말이다. 기억이 흐려져 손녀인 연주를 세희라 부르는 외할머니의 목소리마저도 소중하다.


‘세’ 뒤에 ‘희喜’를 넣어 ‘세희世喜’를 완성한 사람은 외할아버지였다. 세이지 sage의 꽃말은 ‘구원’. 그러니까 ‘세희’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스스로를 구원하면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엄마는 말했다.

세희야,라고 불리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고도. (95~56쪽)


우리는 때로 아프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역사를 지나간 과거로 여긴다. 현재가 아닌 과거니까. 돌이킬 수 없고 바꿀 수 없다고 쉽고 안일하게 생각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책을 통해, 수업을 통해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만 알았다. 나는 모어를 잃은 적이 없고, 전쟁을 경험한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이방인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여기 나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역사의 고통은 온전히 회복될 수 없고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몰랐다. 그 불가능한 상처를 잊어버린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몸 안에 새겨져 있다. 숨이 멎는 날까지 내 피와 뼈에 저장된 그들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116쪽)


그러니 나는 이제 기억하려 한다. 보호막 같은 옷을 입은 세희의 마음을, 감히 우리 세희라 불러본다. 조해진의 소설을 통해 연주처럼 내 몸에 새겨둔다. 언제 어디서든 모어를 말하고,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삶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내가 여기 존재할 수 있는 근원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간직하고 기억하여 잊지 않겠다고, 나와 우리는 그들과 이어져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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