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착한 나진 ㅣ 오늘의 젊은 작가 60
이서수 지음 / 민음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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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려고 나섰는데 낯선 여자가 앉아 있다면 어떨까? 순간 아찔할 것이다. 집을 잘못 찾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가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우리의 ‘나진’은 그러지 못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나진은 ‘착한’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고 싶으니까. 여기서 뭐 하냐고 묻는다. 불편은 감추고 친절하게.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내 집까지 찾아올 수 있다는 설정은 너무 무섭다. 오래전 알았던 사이라 해도 연락이 끊겼으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낯선 여자는 나진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15년 전 나진이 국어 과외를 했던 학생 중 하나인 다혜였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냐고. 세상에나 그 말을 믿고 찾아왔다고? 15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찾았을까? 나진은 다혜를 집에 들이고 출근한다. 나진과 다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진은 왜 다혜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을까. 다혜가 반가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걸 다혜가 의도했다면 나진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스물셋의 나진과 열다섯의 다혜를 생각하면 어른과 아이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서른여덟의 나진과 서른 살의 다혜의 현재를 보면 둘 다 성인 여자이다. 서른 살 여성이 도움을 청할 사람이 나진뿐이었을까. 정말 그래서 찾아온 것일까. 다혜에겐 어떤 사정이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착한 나진은 그렇게 다혜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보호와 돌봄이 필요했던 열다섯의 다혜를 떠올리며, 그때나 지금이나 나진은 그저 선의를 베푸는 것이다.


다혜는 청소를 하고 밥을 해놓고 나진을 기다리며 제 집처럼 지낸다. 제발 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나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이다. 나진은 다혜를 볼 때마다 15년 전 그날이 떠오른다. 나진은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며 과거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다혜 말고도 나진에게는 골칫거리가 있다. 회사를 그만둔 직원 이상우가 훔쳐 간 비품 때문인데, 나진과 연결시키려면 연결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 나진에게 고백했던 상대이기도 해서 찜찜한데 그 물건을 맡아달라며 나진에게 보낸 것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나진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편하지 않다.


설상가상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출도 없는 전 재산으로 얻은 전세였는데 사기라니. 부동산 중개인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진 대신 다혜는 아무렇지 않게 제 일처럼 모든 걸 해결한다. 집을 구하고 짐을 정리하고 이사를 주도한다. 집을 구하는 비용도 모두 다혜가 해결했다. 회사도 그만두었는데 이상우가 사장 부인과 외도를 했고 나진과 삼각관계였다는 괴소문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나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혜가 차려준 밥을 먹고 다혜가 이끄는 대로 생활한다. 다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외출을 하는데 무엇을 하러 다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다혜는 엉뚱하게도 나진에게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전세 사기를 친 사람을 찾아도 돈을 돌려받을 수 없는 걸 아는데. 나진에게 이제 일상은 욕이 되었다. 욕이라도 해야 살 수 있었으니까. 사는 동안 내내 착하게(착한 사람으로 보이게) 살아왔는데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세상을 원망하고 사기 친 사람을 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진을 다혜는 조금씩 움직이게 만들었고 부동산 중개인에게 사과를 받아낸다. 동네 산책을 하고 벚꽃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든다. 주인집 할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시고 할아버지가 키우는 개 찐빵과도 친해진다. 15년 전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엄마의 방치와 빚 때문에 혼자 집에 남겨진 다혜를 선의로 도왔던 나진이 지금은 다혜의 돌봄을 받는다. 춥고 혹독한 겨울과 봄과 여름까지.


나진은 이제 달라졌다. 그 달라짐이 나쁘지 않다. 착한 나진도 아니고 우리의 나진도 아니다. 그냥 나진일 뿐이다. 이사면서 가지고 온 이상우의 물건(횡령을 위한 낡고 바랜 A4용지)을 돌려주리고 한다. 이상우는 부산에 있다며 나진에게 부산으로 오라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나진은 부산에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상우의 친구가 운영하는 탁구장에서 둘은 만났다. 이상우에게 따지고 화를 낸다.


나진은 아무 대꾸 없이 찢어진 용지를 한 아름 모아 든 다음 이상우가 서 있는 네트 너머로 힘차게 내던졌다. 파괴되기 전에는 못 넘어가도 파괴된 뒤에는 어디든 넘어갈 수 있다. 이상우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진도 예전엔 몰랐다. (166쪽)


나는 '파괴된 뒤에는 어디든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 통쾌하고 기분이 좋아서, 몇 번을 읽었다. 우리 착한 나진이 파괴하지 못한 것. ‘우리’와 ‘착한’을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을 파괴하지 못했을까. 무엇에 갇혀 있고 끌려다니고 있을까. 그럼 다혜는 진즉에 파괴된 것일까, 아니면 파괴한 것일까?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과 사기를 당하는 사람, 선의와 호의를 악용하는 사람, 직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는 사람. 어쩌면 누군가의 진심을 아는 건 어렵고 진심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도 않는 세상에서 속내를 감추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스릴러 같기도 하고 사회고발 소설 같기도 하다. 어른의 역할이 부재한 사회, 해결하지 못하는 전세 사기까지.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확인시키면서 그럼에도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건 돌봄과 연대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넌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너의 일부분은 좋아. 싫은 점도 있지만 참아 줄 만해. 결국 그런 사람을 곁에 두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


“내가 어느 한 시기에 내 곁에 있었던 나진 씨를 못 잊는 것처럼 나진 씨도 어느 한 시기에 곁에 있었던 나를 못 잊었으면 좋겠어. 이 집에서 보낸 봄과 여름을.” (196쪽)


소설에서 나진를 부르는 다혜의 호칭은 세 번 변하는 데 그게 참 좋았다. 그건 관계의 변화이기도 하고 둘 사이의 거리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니까. 선생님으로 시작해, 언니, 그리고 나진 씨. 수직관계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 비로소 어른과 어른으로 마주한 두 사람의 모습은 독립적이면서 아름답다.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나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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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10-2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서수 작가 좋아하는데, 이책도 읽어야 하는데...

꼬마요정 2026-10-2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게 시작해서 나름 희망차게 끝나는군요.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