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624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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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불안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불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인을 안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더욱 불안은 깊어졌고 잠잠하지 않고 요동쳤다.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에 이르려야 조금 괜찮아졌다고 여긴다. 정말로 괜찮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스스로 그런 의식이 필요하고 다짐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할까. 그리고 겨우 시집을 읽는다. 실은 작약의 계절에 이 시집을 읽고 싶었고 생생했던 작약의 꽃잎이 시들고 떨어지는 날들에 이 시집이 그리웠다.


빗나가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을 증언하고 싶었다. 시는 그랬다. 모든 시는 불온해야 하고 모든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불온한 시를 만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친해지는 일이다. 내 모든 시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바친다. (시인의 말)


그래서 얼마나 불온한 시냐고? 그건 모르겠다. 다만 시를 만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친해지는 일이라는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허연의 시는 뭐랄까, 외롭고 쓸쓸한 한 인간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독한 남자가 맞을지도 모른다. 홀로 있는 그가 건넨 시가 가만히 내게로 건너와 내 곁을 지킨다. 다시 시집을 펼치면서 여전히 같은 시에 시선이 길게 머문다. 그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그리고 내심 모른척했던 이런 시를 처음 만난 것처럼 읽는다.


사람들이 땅을 발견함으로써

자두나무를 발견하고

모든 결과는 자두가 되었다

염탐된 사상들이 담긴

서책에 대해서 생각한다

장서관 맨 위 칸 귀퉁이가 찢어진

그 서책은 놀라운 것이었다

엄마에 반발한 아이들이

줄지어

죽어갔던 날들의 기록이었다

익숙한 햇살이 땅을 비출 때마다

그림자는 이름을 가졌다

결국, 세상은 그림자였음을 안다

바라보면 눈멀게 되는 것들이 있다

성당 한쪽 담벼락에

섬망이 지나갔다

죽어갔지만

어떤 것들은 이름을 가졌다

(「어떤 것들은 이름을 가졌다』 - 전문)




사라진 기억, 사라졌다고 믿었던 날들, 이제는 부재한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 나의 이름을 덧붙인다. 나의 생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어느 날에는 소멸을 꿈꾸었지만 정작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는 멀리 달아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가장 큰 불안이기도 하니까. 나는 나를 모르고 내가 안다고 믿어도 그건 아는 게 아닐 터.

그러나 유한한 생은 오늘을 데려왔고 오늘을 살게 한다. 어떤 이는 치열하게 어떤 이는 무기력하게 어떤 이는 제법 아름답고 균형 있게 살아갈 것이다. 내게 주어진 5월의 하루하루는 우울감으로 가득했고 무기력으로 짓눌렸다. 심하게 구져졌고 위축했던 나의 마음이 도무지 펴질 것 같지 않았다. 나에게만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직 마침표를 찍은 게 아닌데 말이다. 그저 오늘이 전부라는 걸 잊었다. 오늘이 인생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니 이런 시는 완벽하다.

단명할 것이 분명한 화분에

여전히 물을 준다

마무리 짓지 못하는 일들

그런 게 뭐라고

속이 탄다

화분의 죽음은

화분의 시간은

직관만으로는 말할 수 없다

시소에 앉아

인조 잔디와 하늘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게 쓸 만한 선택인지 생각한다

시소에 앉아 느끼는

생의 무질서도(度)는 그나마 견딜 만한다

주기니까

딱 거기까지니까

노인에서 소년으로

시소는 움직인다

양쪽에서 하는 일과 양은 같은데

한쪽은 등신이고

한쪽은 전사다

딱 거기까지가 생이다

화분에 물을 준다

(「슬픈 주기 1』 - 전문)

나의 5월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은 6월이다. 5월이 될 수 없다. 나의 오월은 지나갈 것이다. 나의 5월은 기억이 될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6월이 되지만 나의 6월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나는 6월에도 5월을 살지도 모른다. 6월에도 5월의 감정에 허덕이며 허우적댈지도 모른다. 그래도 5월을 살아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의 작약이 그러했듯이. 『작약과 공터』가 그러하듯이.




작약은

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작약과 공터』, 일부)



공터에선

당신의 아름다운 나라와

내 끔찍한 나라가

불온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상한 공터가 있어서

마음을 멍하게 하는 공터가 있어서

작약이 있어서 (「작약과 공터 2』,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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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5-31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가 갈수록 생의 유한함, 이런 저런 상황들이 맞물려 불안이 증폭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이유 없이 갑자기 막 심장이 두근대기도 하고요. 아무쪼록 우리 모두의 마음에 평화와 평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자목련 2026-06-09 15:58   좋아요 0 | URL
블랑카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덕분에 불안의 강도가 약해지고 쪼그라든 마음이 조금 더 펴지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서, 늙고 있어서 그렇다고 여기며 살려고 하는데 어려워요. 요즘은 그 모든 걸 받아들이는 태도를 생각해요.
 
소설 보다 : 가을 2025 소설 보다
서장원.이유리.정기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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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2025’ 시리즈 표지에 반해서 구매했다. 봄의 딸기, 여름의 포도, 가을의 무화과까지. 셋 가운데 무화과가 가장 탁월했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이유리의 「두정랜드」는 환상이나 상상을 찾을 수 없는 점이 나는 반가웠다. 이유리의 다른 이야기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구름 사람들』에서 다루었던 이야기와 비슷한 결이었다. 「두정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구름 사람들』 속 주인공과 겹쳐 보였다. 「두정랜드」 속 ‘나’가 조금 더 활달하다고 해야 할까. 그건 공간과 배경이 가상이 아닌 구체적인 현재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인터뷰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그러나 웬만한 독자라면 이미 알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게 아니라는걸. ‘나'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연두와 놀이 기구를 타러 두정랜드에 온 이들이 서울 사람인지 아닌지를 맞추는 게임을 한다. 매번 실패하는 연두에 비해 나는 항상 정답을 맞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두정이 싫고 서울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두정에서 대학을 다니고 선배 남자친구를 둔 연두와는 다르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학 입학, 휴학, 친구, 모두 거짓이다. 쉬는 날 홍대 주변을 둘러보는 게 전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에게 서울은 홍대이니까.

나에게 ‘두정’은 정착할 곳이 아니고 떠나야 할 곳, 버려야 할 곳이다. 그에 반해 연두는 결혼할 남자친구가 서울에 집을 가지고 있어 진짜 서울에서 살 것이다. 나가 꿈꾸는 미래를 손에 쥐었음에도 연두는 감흥이 없다. 나의 입장에서 연두는 현실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물로 보인다. 가짜를 쫓으며 살아가는 나와 나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연두로 이십 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극단적이지만 요즘 시대를 보면 양극 현상은 당연한 것인지도.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서울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모든 삶의 표준이 되는 서울, 자연스레 따라오는 차별, 고향을 버리고 새로운 출신지를 꿈꾸는 청춘. 「두정랜드」 속 연두와 화자의 모습을 통해 현재 이십 대의 마음을 본다. 세 번 오르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관악산 정상으로 모여드는 청춘의 모습까지.

「두정랜드」가 이십 대의 이야기라면 정기현의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의 주인공은 십 대다. 주인공 ‘승주’는 전교 1등으로 반 회장 장범규와 사귀는 사이지만 학교에서는 아는 척하지 않는 영악함을 보인다. 승주의 일상은 정확한 계획으로 이뤄진다. 완벽한 계획, 모든 것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장범규와의 데이트도 그랬다. 똑같은 행위, 똑같은 배달 음식, 그러다 남은 음식을 창문 밖으로 투하하는 장난. 쓰레기를 던지고 몸을 숨기면 완벽했다. 불량 청소년 ‘버들치’ 무리가 승주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예측을 벗어났으니 대책이 없다. 그러나 쓰레기가 날아온 장소가 장범규의 집이었다는 사실로 승주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장범규와 결별하고 ‘버들치’ 무리와 어울린다. 승주는 전교 1등 모범생과 일탈,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이뤄질 거라 확신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승주는 늘 결백했다. 무엇에서든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나를 속이지 않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요행은 금물. 바라지도 않는 편이 좋다. 오직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승부가 생각하는 진실이었다. 승주는 나를 속이는 길과 속이지 않는 길, 그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이 명제를 되새겼다. (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122~123쪽)





겪어왔던 바와는 영 딴판인 세계가 자신을 덮쳐 올 때, 또 다른 무기를 갖추지 못했거나 무기를 제때 뽑아 들지 못한 사람은 원래 머물던 세계의 기반마저 한 순간에 위태로워지지 마련이었지만 승주는 달랐다. (136쪽)


맹랑하고 자신만만하며 잔망스러운 승주의 태도는 창의력 수학 시험 문제지 앞에서 정점에 이른다. 문제에 나온 유원지를 버들치 무리와의 거닐었던 공간을 대입하며 자신만만하게 풀어낸다. 요구했던 답은 최소였지만 승주는 최대를 구했다. 버들치 무리와 보내는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니까. 그러니 시험을 풀며 승주는 내내 행복했을 것이다. 외고 입시의 결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단 한 명의 어른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 어떤 결과로 승주 앞에 나타날지, 완벽하다고 여긴 계획의 실수와 오차를 승주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승주가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하다. 정기현 작가가 어른이 된 승주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


이유리, 정기현의 소설이 경험, 욕망, 방황으로 읽을 수 있었다면 서장원의 「히데오」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화자인 ‘수진’과 ‘히데오’는 대학교 연극원 강의실에서 처음 만난 선후배 사이다. 극작을 전공하며 학보사 기사인 수진은 히데오를 인터뷰한다. 조금씩 친해지자 히데오는 수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가 이혼하고 한국에 온 사실. 자신의 첫 번째 이름이 히데오라는 것. 수진은 그것이 히데오의 비밀이라 여겼고 둘 사이가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자주 만난 산책을 하고 시간을 보냈기도 했으니까. 그 뒤로 수진이 쓴 연극 「따위 게임」에 히데오가 발탁된다. 그 연극을 계기로 히데오는 자신의 출신, 성장과정, 정체성에서 자유로워지며 졸업 후 배우로 성공하고 수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가 알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둘은 재회하지만 수진이 만난 히데오는 과거의 히데오가 아니었다. 그들이 나눴던 비밀은 사라졌다. 어쩌면 수진만 비밀이라 여겼을지도 모를 비밀. 때문에 수진은 그런 히데오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겼고 그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비밀은 시간이 지나면 비밀이 아니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다양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연애 소설로도 읽을 수 있고 나처럼 관계에 주목할 수도 있고 히데오의 성장소설로도 가능하다.


『소설 보다 : 가을 2025』에서 만난 서장원, 이유리, 정기현의 소설은 나름 재밌었고 신선했다. 각자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뚜렷하게 보여준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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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4-29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데오>란 제목이 눈에 익어 읽은 단편인가? 싶기도 한데 자목련 님 리뷰를 읽으니 영 낯설어 안 읽은 것도 같구요.^^
서장원 작가가 그동안 이름만 듣고 남성작가인 줄 알았었는데 어떤 인터뷰에서 여성작가여서 좀 놀랐던 게 기억나네요.
이유리 작가는 <브로콜리 펀치> 소설 넘 재밌어서 다른 책도 읽어봐야지 싶은데 기회가 잘 안 닿네요. 근데 얼마 전에 알았는데 김홍 작가와 부부래서 또 놀람.
정기현 작가는 은근 웃기고 재미나던데 아직 소설은 읽어보질 못한 듯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책도 사다놓기만 했는데 이 책을 읽는다면 다소나마 세 작가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지름길이 되겠군요.^^

자목련 2026-05-04 10:48   좋아요 2 | URL
나무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말씀하신 <히데오>는 아마 <겨울 정원>에서 만나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유리 작가와 김홍 작가가 부부군요. 소설가 부부도 많고 시인, 소설가 부부도많은 것 같아요.
초록의 계절, 즐겁게 보내시고요!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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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는 친구와 지인이 늘고 있다. 취업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준비로 취득한 것이다. 한 친구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려고 편입을 하기도 했다. 노후대비의 하나가 된 치매보험이 낯설지 않다. 내가 사는 시골에는 혼자 사시는 어르신이 많다. 늙었지만 혼자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기에 혼자 사신다. 낮에는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집을 놔두고 그곳에서 잠을 자는 일도 허다하다고 들었다. 이유는 다양하다. 혼자가 적적해서, 생활비를 줄이려고, 오며 가며 운동이 되니까. 그러나 겨울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추위로 나서는 길은 미끄럽고 위험하며 낙상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해서 겨울엔 여력이 되는 자녀가 와 있거나 어르신들이 자녀의 집에서 지내다 오기를 반복한다.

내 부모는 두 분 모두 돌아가셨기에 요양원에 갈 일이 없어 요양원이라는 공간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신 친구에게 들은 비용은 생각보다 비쌌다. 노년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경비는 얼마나 될까, 아무런 대비 없이 살아가는 나는 심란해졌다. 어떤 질병은 예상 없이 찾아온다. 대책과 대안이 없다면 당황하게 된다. 삶의 마지막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진정 서글픈 일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식들의 눈치를 보거나 같은 이유로 고집을 피우지만 현실적인 상황에 굴복하고 된다. 디디에 에리봉의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속 어머니처럼 거긴 내 집이 아니라고 주장하다 멈춘다.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은 살아있는 삶일까.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많은 질문을 남기고 한편으로는 노년이라는 구체적인 삶에 대한 계획이 있는지 묻고 있다. 부모가 아닌 다가올 나의 노년에 대해서 말이다.

디디에 에리봉처럼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가 집을 떠나 요양원에서 지내는 게 안전하고 합리적이다. 위급상황이 생겼을 때에도 빠른 처치가 가능하고 그곳에는 이미 기존 사용자가 있느니 그들과 잘 지내면 괜찮다고 여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예상하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기대했던 방향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삶이 그렇다는 걸 알려주듯이.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그곳은 내 집이 아니다. 분명한 사실이다. 새로운 집이 될 수 없다. 잠시 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원이 아니라 퇴원이라는 조치가 없다. 혼자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게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의견이 수용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곳에는 그곳 나름의 규칙이 있고 사용자를 도와주고 돌봐주는 직원의 수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사립이 아닌 공공 요양원의 예산은 삭감된다. 필요한 재정은 항상 부족하니까.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마땅한가. 그런 삶을 강요해도 되는가. 어머니는 자신이 방식대로 받아들였다. 음식을 거부하고 마지막을 선택한 것이다.

디디에 에리봉은 그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자주 찾아뵐 거라 여겼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의 사후에 쓰인 이 책에서 그는 스스로를 나쁜 아들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는 나쁜 아들이 아니다. 한 번도 행복한 시절이 없었던 온통 불행했던 어머니의 삶을 재조명하며 사회적 구조와 현실적으로 필요한 제도에 대해 설명하는 훌륭한 책을 썼으니까.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하녀와 가정부로 생계를 유지하고 노동자와 결혼한 어머니. 남편이 죽은 후에야 뭔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주어졌다. 그러나 아프고 병들면서 그것은 온전히 사라졌다. 한때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 때문에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디디에 에리봉과 어머니와 보낸 시간을 통해 어머니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남다르고 특별하다. 자신의 정체성과 정치적인 활동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했던 디디에 에리봉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의 관계를 시작한다. 항상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지내는 어머니, 은근한 인종주의자 노인. 디디에 에리봉은 어머니의 잘못된 행동이나 발언을 언급하면서도 어머니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녀의 집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 없이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어머니의 부재는 그 모든(어머니와 보낸 순간, 짧은 대화, 사소한 언쟁) 게 애달프고 그립다.

아들이었으나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는 것. 내게도 일어난 일이다.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문화적·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정말로 내가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의식하게 되는 것. (155쪽)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야기. 역할이 사라진다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울컥했다. 부모가 없는 나에게는 사라진 역할, 친구들이 여전히 수행하는 그 역할. 누군가의 부재로 인해 관계는 지워지고 역할은 사라진다. 나는 더 이상 딸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의 딸이었던 나는 존재하지 않고 큰언니의 동생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누군가 그게 무슨 말이냐 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디디에 에리봉이 어머니의 입에서 자주 쓰던 억양, 말투, 어조, 사투리를 들을 기회가 없다고 여겼던 차에 발견한 방언사전은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 태어난 디디에 에리봉의 어머니의 이야기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을 읽으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농담처럼 사촌에게 사고뭉치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고모, 택시 운전을 하시는 작은아버지, 고된 농사일을 하는 오빠 내외, 얼마의 국민연금을 받게 될까 계산하는 나까지. 이곳이 아닌 그곳의 삶이 다르지 않다. 다가올 노년의 내 목소리는 누구에게 닿을 것인가. 아니,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늙음과 죽음을 마주할 공간, 내가 원하는 집은 존재할까.


남들에게 들리도록 소리를 낼 수 있는 고령자들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의 가능한 ‘우리’가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현실에서나 심지어 상상의 영역에서도 가능한 공적 발언이 없기 때문이다.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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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4-14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며 저도 저의 노년을 떠올리며 자주 울컥 했어요. 부모님도 생각하게 되고요. 프랑스의 현실도 우리나라와 너무 닮아 있어 놀라고요. 요양원에서 늙은 어머니를 받아주는 병원을 찾아 떠도는 디디에 에리봉의 한 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눈물을 흘렸어요. 자목련님의 글에 깊이 공감하고 갑니다. 별 다섯 개도 모자랄 정도로 저도 참 많은 걸 느낀 독서였습니다.

자목련 2026-04-14 11:43   좋아요 0 | URL
블랑카 님이 리뷰 덕분입니다. 정말 좋은 책이에요. 별을 마구마구 주어도 아깝지 않아요. 어렵지도 않았고 현실적으로 돌아보고 사유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어요. 공공의료가 부족한 시골에 살아서 더욱 와 닿고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요. 개인적으로 기대수명이 늘고 있는 게 마냥 좋지는 않아서,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늙음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삶을 생각해봅니다.

구단씨 2026-04-14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리뷰 문장 하나하나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물론 책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이미 겪어온 시간의 일들이 그대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네요.
그러다가 리뷰 마지막 부분에서는, 어떤 역할이 사라진다는 말에 ‘헉‘ 했어요.
들려주신 이야기 모두 제가 겪었고, 또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이어서 지친다는 생각만 하던 요즘이었는데,
저의 어떤 역할이 사라진다는 것에 이렇게 무거운 마음이 될 줄 몰랐어서요.
지치다가도 다시 기운 내야 할 것 같은 님 리뷰에 힘 얻고 가요.
이 책 가지고 있는데, 빨리 펼쳐봐야 할 것 같아요.

자목련 2026-04-15 10:31   좋아요 0 | URL
그대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이지 싶어요. 피할 수 없는 겪음인데 피하고 싶은, 아니 제대로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단씨 님, 지치지 마시고 많이 웃고 재미난 날이면 좋겠습니다. 좋은 독서 하시고요!

잉크냄새 2026-04-14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히 주거지나 환경의 변화가 아닌 과거와 현재의 나로부터 완전히 뿌리뽑힘을 당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인상깊더군요. 그곳이 마지막 주거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는 말과 함께요.....

자목련 2026-04-15 10:32   좋아요 0 | URL
나를 지켜보고 함께 보낸 공간과의 분리는 참 아픈 것 같습니다. 집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요원한 일이 되었지요.참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지극히 나라는 통증 - 비로소 나아가는 읽기, 쓰기
하재영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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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쓰기는 결핍 속에서, 통증에 의해 형성되었다. 통증은 단순한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존재가 세계와 마찰하는 순간에 생겨나는 미세한 감각이다. 또한 말이 채우지 못한 자리에 발생한 공백이자, 말이 넘쳐 흐른 자리에 생겨난 잉여다. 이 낯선 감각은 기억과 몸, 타자와 언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내가 지극히 나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10쪽)


간헐적으로 통증에 시달린다. 미련하게도 참는다. 오랜 시간 약을 먹었기에 약을 줄이고 싶은 마음인지 모른다. 그러다 약을 먹는다. 통증이 사라진 이유가 약 때문인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인지 알 수 없다. 이 통증은 나밖에 모르기에,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하다 한들 나의 고통을 상대는 모른다. 그걸 알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통증은 언제든 나를 습격한다. 나를 지배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정이 하재영의 『지극히 나라는 통증』이 궁금했다. 이 책은 단순하게 제목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통증을 다루거나 통증의 경험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다른 지면에 발표한 글과 다양한 주제를 풀어낸 에세이다. 그건 저자에게만 닿은 고유한 감각과 생각일 수도 있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관심 있게 짚어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지극히 나라는, 개인적인 서사는 타인에게 공감을 얻기 어렵다. 상처와 고통, 과거의 트라우마를 꺼내기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했다면 다르다. 아니, 그 이야기를 꺼낼 창구가 있다면 괜찮다. 창구가 있다면 들어줄 이가 있다는 것이니까. 저자가 12년 전의 상처를 꺼내고 정신의학과를 다니고 변호사를 만나는 일련의 과정은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의미가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한 트라우마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잔인한 상흔으로 남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대단한다. 쓴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쓴다는 건 복잡했던 무언가가 풀리는 순간이며 말하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태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는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내며 잘못된 사회적 시선에 대해 말한다. 더불어 타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던진다. 발레를 위한 몸을 위해 감수해야 했던 시간, 그러나 끝내 발레에 적합한 몸이 아니라서 선생님에게 비난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날씬하고 마른 몸 뒤에 숨겨진 폭력의 언어와 폭식. 성년이 되면서 이어진 굶기와 하이힐의 높이로 채워진 몸. 예쁘고 날씬해야 한다고 여성은 주입받는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정녕 그건 당연한가.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 독자라면 자신의 몸을 보게 될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해 지불한 시간과 돈, 그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일한 나, 그러니 획일된 몸은 사라져야 한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은 술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알코올사용장애’라고 설명한다. 적당한 취기는 효과적인 사회적 가면이라고. 술을 마시지만 원고 마감을 어긴 적도 없고, 취재나 강연에 늦지 않았고, 집안은 깨끗하고 정리되어 있고 공과금을 연체하지 않았다고. 중독에 관해서는 ‘술’대신 다른 것들로 채워질 수 있다. 스마트폰, 연애, 커피, 쇼핑, 게임. 과연 중독에서 자유로운 이가 얼마나 될까. 아니 가능이나 할까.




현대인은 자율적으로 살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비자율적인 쾌락에 기대 특정한 행위를 반복한다. 더는 중독을 비참하게 훼손된 인간의 징표로만 여길 수 없다. 대상과 정도는 다르지만 무엇인가에 얼마만큼은 중독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동의 운명에 처해 있다. (92쪽)


이처럼 자신의 통증(경험)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그 경험을 터놓을 수 있는 시작,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저자가 키우던 반려견의 죽음을 통해 느꼈던 슬픔과 상실, 나아가 반려종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나는 반려인이 아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반려동물의 죽음을 통한 상실은 가족을 잃는 것과 같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려 한다고 해도 온전히 알 수 없다. 또한 유기견 센터에 모인 버려진 개에게 좋은 입양자를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말 잘 듣는 개라는 소개는 결국 키우기 쉬운 개라는 말이며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 말한다. 생명체로 대우하기는 어려운 일인지,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환경보호 정책으로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운행이 금지된 곳에서 그것들을 대신한 말의 노동력은 괜찮은가 묻는다. 그런 풍경을 마주한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관광지에서 말을 타고, 말이 끄는 마차를 타보았지만 동물노동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기에. 인간의 필요와 이익이 최우선 순위인 시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와의 관계는 새롭게 사유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믿음을 고민하게 된다.

저자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만났던 공간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애틋하고 울컥한다. 그것은 여성의 공간, 여성의 글쓰기로 연결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가부장제에 편입되면서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 아내이자 며느리, 엄마인 여자는 어디에나 있어야 했지만 그렇기에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고 자신만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어도 없는 사람이라 말했던 엄마의 말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침묵해야만 했다.


한때 우리는 침묵으로써 우리를 보호하려 했으나, 지금은 존재한다는 것이 곧 말한다는 의미임을 안다.나 자신으로서 말하기, 위반된 언어로 말하기, 단상 위에서 말하기. 또다시 내면의 유혈사태를 겪더라도 나는 잃어버린 것을 회고함으로써 계속 말하고 싶다. (248쪽)


무엇이든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 말하고 쓰는 것. 이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이 왜 두려운 것이 되었을까. 잘 쓰고 싶어서 그랬을지 모른다. 잘 쓴 글이 아닌 나를 쓰는 일을 중요하다. 솔직하고 정직한 나를 쓰는 일, 나의 통증을 마주보고 나를 쓰고 싶다. 그 가능성을 믿는 일, 그게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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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6-04-13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께서 소개하시는 책은 다 읽고 싶어요. 그렇지만 자목련님의 해석과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을 적은 글보다는 책의 내용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글이 너무 좋아서요.
이번 봄에 많이 만났던
자목련만 보면 자목련님이 생각났어요.
자목련을 보며
자목련님의 안부를 물었던 것 같아요.

자목련 2026-04-14 11:25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 님의 댓글이 제일 좋습니다!!
다양한 경험으로 시작한 사유와 그것을 풀어내는 글쓰기와 읽기에 대한 것으로 공통분모가 많으면 가깝게 다가올 책이라 생각해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훑어보시고 읽으시면 좋을 것 같고요.
자목련이라 행복합니다^^*

곰돌이 2026-04-13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탄의 마음을 누를 길 없게 만드는 글을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읽었어요.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을 안고서도 말하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는 태도가 쓰기의 시작이라는 말씀에 개인적인 공감을 꾸욱 눌러드리고 싶습니다.

솔직하고 정직한 나를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자목련님의 고백이, 저처럼 아직 쓴다는 것이 쑥스러운 이들에게는 ‘솔직하게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다‘는 응원처럼 들려 더욱 깊이 와닿네요. 내 감정을 드러낸다는 게 처음에 너무 어렵더라고요. 이제는 쓰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어서 그저 좋을 뿐이고, 오늘 자목련님의 글이 그 마음을 더 단단하게 해주네요.

자목련 2026-04-14 11:36   좋아요 1 | URL
나를 쓰는 일은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그게 참 어렵고요. 저는 가득한 미움에서 벗어나려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돌아보니 정말 그랬어요.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게임에서 독서로 이어졌어요 ㅎㅎ
곰돌이 님의 성실하고 아름다운 읽기와 쓰기는 부럽습니다. 온맘으로 응원하고요. 쓰는 것만으로 좋다, 동의합니다. 우리 즐겁게 써보아요!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 - 어떻게 정신적 빈곤에서 벗어날 것인가
호세 카를로스 루이스 지음, 김유경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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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카를로스 루이스의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는 ‘우아한 사고’란 말에 끌린 책이다. 우아한 사고란 무엇일까 싶은 거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현대인의 민낯과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sns와 인터넷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우리네 일상에서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들려준다. 더불어 이대로 간다면 삶이 얼마나 피폐해질지 예측한다. 시대에 뒤떨어질까 봐 트렌드를 모르는 바보가 될까 두려운 마음에 좋아요를 누르고 일상이 상품이 되고 세상.


저자는 디지털 화면이 지배하는 세상, 현재를 ‘스크린 시대’라 말한다. 과연 정확하다. 스마트폰에 빠져 대화는 단절되고 오프라인은 사라지고 온라인만 유효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이 책을 읽기 전 시청한 다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있지만 과거와 다르게 TV 채널에 두고 싸우지고 않고 오가는 대화, 아니 소리가 아예 없다. 각자의 스마트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말하며 그게 무슨 문제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비단 다큐 속 가족만 그럴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런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더 빠르게 더 강렬하게 변하는 세상에 공감하기 위해 내 속도와는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 모두 그러니까 나도 그래야 한다는 어떤 강박과 욕망의 끝에서 마주하는 감정은 허무가 아닐까.


시대와 환경이 변했고 저자의 말대로 집단보다는 개인의 가치가 더 중요해진 세상이기에 과거와 다르게 가족, 학교, 친구, 지역사회를 통한 영향력은 크지 않다. 장소와 시간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개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의 역할은 중요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스트린 시대에는 더 중요한 것들, 더 급진적인 것들이 중심이 되어 과거 새대의 경험이나 역사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겪을 기후변화, 가상현실, 메타버스, AI가 중요하니까. 그렇다고 해도 같은 시간 선상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대성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해시태그, 유행, 뉴스 등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원자화되면서, 동시대성을 인식할 여유조차 없다.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에게 동시대성은 단지 동시성을 뜻하고, 이들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느낀다. (59쪽)




스크린 시대 이전에는 TV, 라디오, 신문 등 제안된 미디어에 의존했기에 직접 경험한 것들에 대한 신뢰가 컸지만 현재는 스크린 속의 콘텐츠에 동화되어 세계화된 성공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된다. 본격화된 세계화는 사막화, 기후변화, 인구 과잉, 자원 부족, 전염병 같은 피할 수 없는 위협으로 가득한 미래를 전망한다. 이는 창의성을 저해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인식도 제안한다. 챗지피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부한 시각 정보를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오히려 점차 퇴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각 언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역량의 부족으로 이어지며, 시각 정보에 대한 비판적 사고 발달을 가로막는 결정적 걸림돌이 된다. (292쪽)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우아함은 무엇일까.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우아한 사람은 자신만의 미적 취향을 키우면서 스스로 보기에 아름답지 않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과감히 버린다. 이 말은 기준이 정해졌기에 어떠한 제안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선택의 기준이 없기에 휘둘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산다. 누가 좋다고 하면 좋은 거니까,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한 가짜 뉴스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대신 그렇구나 믿게 된다. 그러니까 우아한 사람이란 자신만의 안목이 있고 분별력과 사고력을 갖춘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은 안목을 키우는 일이라고 여긴다. 의심하고 비판하며 정보에 대해 맹신하지 말고 경험하며 자신이 느낌 감정을 이모지가 아닌 다양한 어휘로 주고받으며 상대와 소통하는 일.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생활 태도가 아닐는지. 자연스럽고 평온함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회복시키는 힘,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아함이라 생각한다.

철학서라서 어려운 용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스크린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신의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책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스마트폰와 거리두기, 더불어 나와 타자의 관계를 점검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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