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룡의 이동 경로
김화진 지음 / 스위밍꿀 / 2023년 8월
평점 :
가까이 지내는 이들과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직감 같은 건 아니고 연락과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 때 선뜻 연락하지 않고 주저하고 있다면 거리가 생긴 것이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그냥 문자를 보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사이인데도 뭔가 이상하게 지금이 아닌 나중으로 미루게 되는 순간 말이다. 아주 얇으면서도 단단한 막이 형성된다고 할까. 단숨에 걷어낼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선뜻 막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혼자 아파하거나 마음을 조이고 앓게 되는 일,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그렇다. 좋아하는 마음이 분명한데 어째서 그 마음은 이유도 모른 채 허물어지는 것일까.
김화진의 연작소설 『공룡의 이동 경로』는 그런 마음에 대해 말한다.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마음을 어떻게 숨기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한 마음은 무엇인지 말이다. 간절하게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점차 다른 마음이 되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을 붙잡고 싶지만 그저 기다리기로 하는 마음. 누군가 그 마음을 사랑이나 우정이라 말해도 상관없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서툴렀던 마음 혹은 다가가지 못한 마음 덕분에 헤어진 친구나 지인이 생각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룡의 이동 경로』는 우연한 만남으로 모임을 갖게 된 주희, 솔아, 지원, 현우와 특별한 친구가 자신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작소설이다. 주희가 화자인 「사랑의 신」은 사랑에 대한 솔직한 마음이라고 할까. 주희가 바라본 솔아와 지원의 모습, 현우와의 비밀연애를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 사람을 만나면서 감추었던 마음이 무장 해제되는 평범하면서도 뻔한 일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일인지 알려준다. 소설이지만 일기 같고 편지 같은 방식을 택한 김화진의 영리함이 돋보인다고 할까. 거기다 김화진의 문장은 독자의 마음도 열리게 만든다. 아주 편하고 쉽게 읽히지만 무척 공들여 고른 문장이라는 게 느껴진다.
사람을 상상하는 일.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전부라고 애써 믿으면서도 그 안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일. 나는 그런 걸 그만둘 수 없는 것 같아. 사람은 주머니 같다. 나는 그 안이 궁금해. 이렇게 매번 실패하고 실패하면서도 계속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엿보거나, 내 주머니를 슬쩍 열어 그 속을 보여주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있었다. (「사랑의 신」, 43쪽)
소설에서 주희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이 시작되는 마음, 그 마음이 단단해지거나 옅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연인인 현우보다는 지원과 솔아, 두 언니에게 더 크게 작동한다. 그래서 지원과 솔아가 서로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주희는 그들보다 빨리 알아차린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을 섣불리 관여할 수 없으니 둘 사이를 그저 지켜볼 뿐이다. 솔아의 마음은 「나의 작은 친구에게」로 이어진다. 타투이스트 지원은 솔아의 팔에 작은 공룡 ‘피망이’을 그려준다. 자신과 다르게 말이 적고 조용한 지원과 솔아는 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솔아의 바람과 다르게 지원은 점점 멀어진다. 어느 날 사라진 피망이에 대해서도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이 선택하는 차선은 사랑하기이다.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을 한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여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를 밀어내기란 쉽지 않다. (「나의 작은 친구에게」, 62쪽)
솔아는 피망이가 사라진 게 마치 자신의 잘못같이 느껴지고 지원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지원이 모임을 떠나고 이사를 가면서 지원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묻지 못한 게 속상하고 복잡하다. 주희를 통해 지원의 사정과 상처를 알게 되고 솔아는 서운함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고민한다. 고민과 걱정을 반복하는 솔아를 향한 지원의 마음을 들려주는 「나 여기 있어」는 가장 아프고 아린 마음이었다.
우울증을 앓는 고향 친구 효진과 다시 연락이 닿으면서 지원의 마음은 중심이 사라졌고 길을 잃었다. 효진이 사고로 죽은 후 지원은 연인과 헤어지고 서울을 떠나 광주로 내려간다. 시간이 지나서야 지원은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었고 그제야 솔아의 마음도 볼 수 있었다. 마음이라는 게 다 다르니 그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도 다르다는 걸 지원을 통해 확인한다. 간신히 모서리에 있는 지원의 마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거기 있다고 말해주는 지원이 고마운 건 독자인 나뿐은 아닐 것이다.
그래 나 여기 있어. 아직 모서리에. (「나 여기 있어」, 127쪽)
현우가 바라본 주희의 모습과 그런 주희를 사랑하는 현우의 마음을 들려주는 「이무기 애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사랑과 비례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 특별한 친구 피망이의 시선인 「공룡의 이동 경로」는 다정하면서도 따뜻하다. 솔아의 팔에서 눈꺼풀로 이동해 솔아가 보는 것들을 바라보며 솔아의 마음을 헤아리며 선캣처로 이동해 솔아의 공간과 솔아를 지켜본다. 마지막으로 솔아에게 연락을 해온 지원이 보낸 부채로 이동하여 솔아 곁에 머문다. 누군가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가까웠던 마음이 조금씩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 모든 마음이 그럴 수 없겠지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김화진의 마음을 보는 탁월한 감각이 나쁘지 않다. 예쁘고 잘 생긴 단정한 마음만 골라 보여주지 않고 날이 선 마음, 흐트러진 마음, 못생긴 마음이 모두 우리의 마음이라고 알려준다. 하나의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걸. 그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속상하고 힘들지만 언젠가 돌아오기도 하니 그 자리를 비워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