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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ㅣ 말들의 흐름 1
정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평점 :
중학교 3학년이었던 작은 언니는 시험기간에 커피를 마셨다. 잠들지 않고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언니가 밤을 새우며 공부를 했는지 그래서 시험을 잘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커피가 마시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커피 본연의 맛보다는 설탕과 프림의 맛이라 할 수 있는 달달한 그것. 커피의 영역은 나의 영역이 아니었고 나보다 겨우 세 살 많은 언니가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거의 어른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커피는 유일하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영역이고 내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다. 커피는 민주적이다. 커피는 쉽게 손을 내밀어 준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발을 반쯤 걸치고 삶의 여유를 꿈꿔 볼 수 있게 한다. 커피마저 없다면 내 삶은 무미건조하고 비참해질 것이다. 커피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거기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18쪽)
커피를 마시는 일, 술을 마시는 일도 아닌 커피를 마시는 일이 내게는 어른의 증표처럼 여겨졌다. 정확히 언제 커피를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교 시절 마셨던 캔커피와 대학에 들어와 이공관 앞의 자판기 커피가 생각날 뿐이다. 그 시절에 커피를 사 먹는다는 것, 그러니까 분위기가 좋은 가게에 들어가 근사한 의자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는 일은 미팅이나 데이트를 할 때 가능했다. 지금처럼 유명한 체인점도 없었고 커피를 골라 마시는 일이 아닌 누군가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커피를 마시는 일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허상의 이미지에 자신을 담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지만 때때로 커피는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완벽하게 느끼게 한다. 그 순간은 내가 만들어낸 ‘커피를 마시는 나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커피는 내 몸으로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58쪽)

정은의 에세이 『커피와 담배』는 그런 아련한 기억과 추억을 불러왔다. 가장 보편적인 기호식품인 커피와 담배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궁금했다기보다는 『산책을 듣는 시간』의 작가 정은의 글이라서 선택한 책이었다. 그 책이 좋아서, 그 안에 담긴 다정한 동그라미 같은 감각이 좋아서였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나쁘거나 별로였다는 건 안니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방향과는 조금 달랐다는 것.
작가가 들려주는 커피와 담배로 시작되는 기억, 느낌, 공간, 사람, 의미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커피믹스가 나오기 전 커피, 프림, 설탕을 담은 단단한 유리병 세 개의 이미지부터 할아버지의 은하수 담배는 내 기억 속 저편에 자리한 검은 물을 마시던 고모와 수정 담배를 피우던 젊은 할머니와 겹쳐졌으니까. 담배의 경우는 비흡연자인 독자에게는 교집합을 찾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면 그것들은 안정감 같은 특수한 감정의 형태로 몸에 잠시 내려앉는다. 그것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기억들, 감정을 잠시 소환하는 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67쪽)
아마도 이 책을 선택하는 이들 중에는 흡연자가 많겠지만 말이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반해 그와 함께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부분과 나중에 그와 연인이 되면서 그를 따라 금연을 했다는 부분에서 나는 그게 무엇이든 사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느꼈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삶에 미치는 의미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헤아려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욕심내지 않고 사들이지 않았을 나의 잔들. 멋진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고도 집에 돌아와 친구와 믹스커피를 마시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눈과 코로 마시고 온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커피. 요즘은 하루에 세 네 잔의 커피를 마시고도 숙면을 했던 과거의 내가 부럽다. 가능한 줄이려고 노력하면서도 커피향의 유혹을 참기란 어렵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커피 한 잔이 간절하다. 잠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잠시 내려두고 커피 한 잔 마셔야 한다. 분위기 좋은 공간이 아니더라도 멋진 음악이 흐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커피와 나,둘만의 시간이면 족하다.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